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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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불사조 같은 운명을 타고난 고려인 시인 강태수

김필영


▲ [ⓒ 필자 제공]



   강태수는 1908년 8월 26일 함경남도 이원에서 출생했다. 소학교 졸업 후 집안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그를 받아줄 만한 곳은 없었다. 일본 점령하의 한반도 상황을 개탄하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지원하려고 만주로 갔으나 부대가 이미 떠난 뒤라 그는 삯일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선진 사회주의 사상이 도래한 소련으로 가보라는 만주의 한 조선인 선각자의 권유로 그는 192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함께 자취하던 친구의 소개로 그는 1928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문인 조명희(1894~1938)를 만나 시 창작에 대해 지도를 받고 1933년 시 「나의 가르노」를 고려인 신문 《선봉》(1923~1937)에 발표하며 문학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소속된 직장의 파견으로 강태수는 1930년 노동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졸업을 얼마 앞두고 공산당 당원인 한 학생의 건방진 행동을 참지 못하고 충고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다행히 그는 『고려문전』(1930)의 저자인 오창환의 추천으로 1936년 원동고려사범대학(1931~1937)에 입학했지만, 소련 총서기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초가을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 되었다. 옮겨온 원동고려사범대학의 교원이던 시인 조기천(1913~1951)의 발의로 마련된 《벽보신문》에 발표한 시 「밭 갈던 아씨에게」로 인해 강태수는 1938년 1월 30일 국가안전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체포 이유는 “일본 중등교육을 받은 강태수가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 노동학원에 잠입하여 공부했고, 1933년 고려사범대학 학생으로서 외국 간첩과 결탁했으며, 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반혁명적인 간첩 활동을 주도하고 반혁명적인 시와 말을 퍼뜨리면서 간첩 활동에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강태수는 일본 중등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1933년에 고려사범대학 학생도 아니었다. 시 「밭 갈던 아씨에게」는 강태수가 이주 열차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원동의 한 아가씨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체포 후 강태수는 구치소에 감금되어 떠나온 원동을 그리워하는 시를 쓴 이유와 조명희의 연관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1938년 이른 봄 감옥으로 이송되는 과정에 재판도 없이 ‘소련 인민의 원수’란 죄목으로 1938년 7월 23일 5년 형을 선고받아 소련 북서부 북극해 연안 아르한겔스크 교화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단에서 시 한 편 때문에 시인이 정치범으로 수용소에 갇힌 최초의 사건이었다. 교화노동수용소가 명칭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쯘(1918~2008)이 『수용도 군도』을 통해 세상에 폭로한 참혹한 만행이 저질러진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불과하다. 수용소 수감 당시 소련의 일부 정책이 바뀌어 죄수들이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상부 기관에 탄원할 수 있게 되었다. 수차례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태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스탈린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스탈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소련의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내 당국으로부터 스탈린의 지시로 재심을 하겠다는 회답을 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탓인지 재심사 결과에 대한 통보는 없었다. 수감 후 5년이 막 지난 1943년에 강태수는 일단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전쟁 통에 제때 석방되는 경우가 흔치 않던 당시 수용소 사정을 고려하면 큰 행운이었다.

   강태수가 석방은 되었으나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고 수용소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드무르트 임산사업소로 이송되어 귀양살이 강제노역을 이어갔다. 그는 매달 국가안전위원회에 출두하여 신상 신고를 하고 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열심히 노동한 덕분에 강태수가 노동 집단의 십장이 되기도 했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관리자들이 떠맡기는 책임 때문에 삶이 도리어 더 버거워졌다. 그럼에도 나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강태수는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1938~1990)에 1957년부터 「당-어머니」라는 시를 필두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평양에서 발간되는 《문학신문》 1959년 5월 7일자 지면에 「기억의 한 토막―조명희 선생을 회상하면서」라는 글까지 기고했다. 21여 년의 강제노역 후 1959년 9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스탈린에게 보낸 탄원서에 관한 검찰 자료에 따르면 “1957년 7월 3일 크즐오르다 지역 검찰국 최고간부회의 결의에 따라 1938년 7월 23일자 강태수에 관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특별회의 결의를 취소하고 사건의 범죄 구성이 부재함으로 기각한다”는 결정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강태수가 실제로 강제노역에서 풀려난 것은 1959년이었다.
   크즐오르다로 돌아온 강태수는 배전소 등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러시아인 안나 베프레바(1918~1982)를 만나 2녀 1남을 두었으나, 현재 크즐오르다에 거주하는 장녀 나데즈다를 제외한 자식들은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에도 불구하고 강태수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 꿋꿋하게 문학 창작에 전념했다. 다행히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레닌기치》 문학부 기자로 일하게 되었고 퇴직 후 연금 생활자가 되었다. 소련 해체 후 한국 선교 단체가 설립한 크즐오르다제일장로교회에서 그는 1993년 11월 14일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90년 8월 13일 소련 대통령령인 「1920-1930년대 모든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들의 권리 회복에 대하여」란 법령 제1조에 따라 크즐오르다 지역 검찰국은 1938년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58조에 따라 강태수에게 선고된 5년 징역형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1997년 5월 13일 강태수의 복권을 판결했다. 만년에 시력을 잃고 홀로 지내던 그는 2001년 1월 5일 크즐오르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태수 시인의 문학 유산으로 카자흐스탄 작가동맹출판사에서 발간한 고려인 작가 공동 작품집, 《레닌기치》, 《고려일보》(1991년 창간) 등에 수록된 시, 서사시, 단편소설, 수필 등을 포함한 작품 200여 편이 있다. 강태수 시인의 시 작품 가운데 71편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길을 가면서』(알렉산드르 좁티스 번역)가 1981년 알마아타 자주쉬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강태수 시인의 강제수용소 경험담인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김필영 해제)가 2022년 서울 민속원에서 출판되었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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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 출생으로 프랑스 국적의 재외동포이다. 파리대학교에서 원동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국립동방언어문명대학교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자흐국립대학교와 국립동방언어문명대학교에서 한국학 교수를 역임한 후 강남대학교에서 중앙아시아학 교수로 정년퇴직했다. 카자흐국립대학교 명예교수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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