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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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물방울

이수정

  한 방울.   부러 겨냥이라도 한 듯 정확히 인중에 떨어졌다. 영상 속 강사를 따라, 고양이 자세 후 몸을 뒤집어 천장 쪽으로 허리를 바짝 들어 올렸을 때였다. 떨어진 물방울이 인중을 따라 콧구멍으로 흘러들 판이라 하진은 얼른 허리를 내렸다.   주변 공기를 전부 들이마실 듯 깊게 호흡합니다.   숨이 한 올도 빠져나가지 않게 입을 꼭 다물고, 쓰으으읍.   매트에 누운 자세 그대로 하진은 영상을 멈추려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간당간당하니 닿지 않았다. 물 떨어진 지점을 기억해야 해서 자세를 바꿀 수도,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잘하셨어요, 엑설런트.   이쪽 형편을 알 길 없는 강사는 저 혼자 흥에 겨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하진은 물 떨어진 지점을 행여 놓칠까, 목을 젖힌 상태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노안에 초기 백내장 증세까지 겹친 하진의 눈에 누수의 흔적은 쉬 띄지 않았다. 하진은 헤어 밴드를 벗어 앉았던 자리에 표식으로 놓고 방으로 갔다. 안경을 쓰고 나오는 김에 부엌에서 의자를 하나 끌어왔다. 한 발을 올릴 땐 탈 없던 의자가 두 발을 다 딛고 선 순간 기우뚱했다. 하진은 반사적으로 무릎과 허리를 낮추며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오른발로 무게중심을 조금 옮기니 버틸 만했다.   천장에는 흐릿하지만, 습기 먹어 주변보다 색이 짙어진 데가 있었다. 불안한 의자 때문에 허리를 제대로 못 펴 만져 볼 수는 없었다. 허리를 편들 손이 닿을 거리도 아니었다. 듀플렉스 두 채를 헐어 삼 층으로 여덟 가구를 집어넣은 아파트치곤 천장이 높은 편이었다. 하진의 시선에 응수하듯, 색이 짙어진 부위가 동전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 하진은 얼핏, 유산한 뒤에도 쉽게 꺼지지 않던 젖가슴을 떠올렸다. 젖 돌 때의 이물감이 유두 끝에서 새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그맣게 천장에 밴 물기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밑으로 처졌다. 물방울은 하진이 내민 손바닥을 비켜 바닥으로 떨어졌다.   - It doesn’t make sense.   전화기 너머에서 제시가 하품 끝에 늘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직역으론 안 되고, 두 단계의 번역을 거쳐야만 이해될 표현이라 하진은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것은 감각을 만들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하진은 방금 물방울이 인중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인중’이 영어로 뭔지 몰라 다시 머뭇거려야 했다. 대신, 할 수 있는 다른 말을 했다. 아이 원트 투 토크 투 더 랜드로드. 명색이 건물 매니저라면서 제시는 변기 물이 안 내려갈 때도 전화를 안 받는 건 물론, 메시지를 남겨도 도통 답이 없었다. 하긴, ‘랜드로드’ 하고 직접 이야기한대도 별 소득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사하던 날 대면한 주인 여자는 사각 유리병 한 면에 ‘WELCOME’이라고 쓰인 아로마 디퓨저를 내밀며 하진과 눈을 맞추는 대신 소파 옆의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 튼튼하게 지었지만, 층간 소음은 있을 텐데…….   불편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넬 때도 주인 여자의 시선은 피아노를 벗어나지 않았다. 명함에 적힌 ‘Jessie’가 주인 여자가 아닌 아파트 관리 매니저 이름이란 걸 하진은 그 며칠 뒤, 와이파이가 끊겨 연락해 보고 알았다. 문을 나서는 주인 여자에게 하진은 낮에만 피아노를 치겠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까지 조아리며 말했다.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냐는 말끝에 주인 여자도 그랬다. It doesn’t make sense. 드디어 전화기 너머에서 말소리가 새 나왔다.   - What is good time?   더럭 내뱉는 것 같은 말투에 하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성재는 하진이 영어를 못하니 제시가 쉽고 짧은 영어로 맞춰주느라 좀 뻣뻣하게 느껴지는 거라 했다. 자기한테는 친절하다며……. 시계를 보니 도서관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번엔 북클럽을 건너뛰기로 했다. 책이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영어 원서라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책은 글자로 되어 나은 축이었다. 강사나 다른 참가자들이 떠드는 말은 하진에겐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터지만,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다 웃는데 혼자만 웃지 못할 때……. 뒤늦게 웃는 척할 때 몰려드는 비애감을 하진은 웃음을 유발한 사람을 몰래 흘겨보는 것으로 달랬다.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북클럽을 건너뛰기로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우 이즈 굿? 뒤를 올릴지 내릴지, 순간 헛갈려서 어중간하게 마무리돼 버렸다. 상대의 형편을 묻긴 하되, 이쪽은 지금이 좋으니 될수록 빨리 오란 뜻이어서…….   - Your number?   - 투, 제로, 원, 세븐, 투, 제로…….   - Not your phone. Apartment number!   성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물이 새서 아파트 관리인을 불렀다고 알린 문자도 내내 읽지 못했다. 일단 집에서 나가면 성재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필시, 또 회의 중일 터였다. 보낸 문자를 다시 읽으니 ‘집에 물이 새서’는 사태가 좀 위중해 보였다. 아직은 고작 두 방울……. ‘그깟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핀잔이나 들을 게 뻔했다. 성재는 회사 일 외의 모든 ‘그깟 일’은 하진이 도맡아 주길 원했다. 회사 다닐 적에 하진이 워낙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 잘한다는 소릴 듣긴 했다.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둘 때 성재가 집에 들어앉고 하진이 출근해야 한다고 황 부장이 농을 할 정도였다. 그걸 농으로 이해한 직원이 없어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하진은 혼자 웃으며 그 자리에 성재가 없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국 와서 넉 달이 지나는 동안, 하진은 성재에게 기대지 않고 될수록 집안일을 혼자 처리하려 애썼다. 우석의 학교 학부모 첫 상담 때 ‘땡큐’만 스무 번쯤 한 거 외엔 영어를 잘 못해도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미국에서 한식 해 먹기’ 같은 유튜브를 챙겨 보면서 굳이 멀리 있는 한인 마트까지 안 가도 될 방도를 찾았다. 하진은 물 샌다고 성재에게 보낸 카카오톡을 삭제했다.   문을 열어 줄 때 제시는 또 하품하던 중이었다. 무릎에 흰색 페인트가 묻은 오버롤 청바지 차림의 제시는 손에 큰 플래시를 들고 있었다. 제시는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제시가 발을 디딜 때마다 멀쩡한 마루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하진이 얼른 앞서가 물 샌 곳을 가리켰다. 대낮인데도 제시가 플래시를 켜서 천장을 비추었다. 하진이 안경을 끼고 같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플래시가 천장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새 말랐는지 물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부풀어 올랐던 자국도 없었다. 색이 조금 짙어진 부분만 그대로였다. 하진이 뒤꿈치를 들고 키를 늘려 그 지점을 가리켰다. 히어, 히어. 그러자 제시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플래시로 하진의 손끝을 비추었다.   - Where? I can’t see anything.   기브 미. 하진이 플래시를 건네받아 천장을 비추었다. 히어, 히어 하진은 습기 먹은 부위에 플래시 빛이 동그랗게 맺히도록 했다. 캔 유 씨, 나우? 제시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청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시가 사진을 찍는 동안 하진은 플래시를 비추었다.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제시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하진의 눈앞에 두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상으론 천장 색이 다른 게 잘 구분되지 않았다. 하진은 사진을 키워 보란 뜻으로 휴대폰 액정 위에서 손가락 두 개를 벌려 보였다. 제시가 사진을 확대해 번갈아 비교하며 보여 주었다. 어쩐 일인지, 사진 속 천장은 역시 멀쩡했다. 현관을 나선 제시가 문밖에서 뱉는 외마디는 하진도 아는 단어였다. *   오전 수업만 있어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우석은 여느 때처럼 바로 제 방으로 들어가 문부터 잠갔다. 자동차가 한 대뿐이라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려니 짜증 날 만도 했다. 우석은 학교 다닌 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친구와 통화하거나 원격 게임을 하는 기색이 아직 없었다. 밥 먹으라고 해도 대꾸가 없다가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먹게 된 성재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부르자 겨우 식탁 앞에 와 앉았다. 밥그릇에 고개를 박듯 하고 밥을 뜨는 우석을 성재가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무거운 공기를 바꿔 볼 양으로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갔다.   - 매니저가 기껏 와 놓고는 저게 안 보인다잖아.   성재가 밥을 한술 더 뜬 뒤 일어나 다가왔다. 하진이 거실 탁자에서 티브이 리모컨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고개를 빼고 올려 보며 성재가 어딜 말하냐고 연거푸 물었다.   - 저기, 살짝 젖은 데가 있잖아.   - 어딜 말하는 거야? 우석아, 네가 이리 와서 좀 봐봐.   우석이 마지못해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왔다. 중학생치고 키가 커서 우석은 한국에 있을 때 학교 농구부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심심찮게 받았다. ‘그 일’이 있고 등 떠밀리는 식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진이 가리키는 곳을 우석이 올려다보았다.   - 넌 보여?   성재와 하진이 동시에 물었다. 우석은 눈도 안 맞추고 고개만 흔들어 보이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한 번 보라 했으나 성재는 하진의 손에서 리모컨을 가져가더니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티브이를 가리고 선 하진에게 비키라는 듯이 리모컨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하진은 부엌으로 가서 한쪽 구석에 열어놓은 노트북을 들고 다시 성재에게 갔다. 낮에 ‘미국 아파트에서 물 샐 때’를 검색어로 넣고 찾아본 자료가 그대로 떠 있었다. 계속 채널을 바꾸던 성재는 야구 경기가 나오자 멈추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 서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하진이 한국 같으면 주인한테 내용 증명을 보내면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소파에 아예 모로 드러누우려던 성재가 하진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 증명할 내용이 없는데 무슨 내용 증명을 어떻게 보내? *   하진이 아랫집 사는 사람인데 천장에서 물이 새서 확인을 부탁한다고 설명하는 동안, 3B 여자는 문틈으로 왕방울만 한 눈만 빼꼼히 내보였다. 치와와 한 마리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튀어나오자 여자가 반사적으로 문을 열고 강아지를 붙잡아 가슴에 안았다. 몸에 들러붙는 티셔츠 밖으로 부른 배와 튀어나온 배꼽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진은 그제야 여자를 알아보았다. 도서관 북클럽에서 본 일본 여자……. 역시 영어가 어려운지, 그 여자도 북클럽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백인 할머니와 일본어로 인사하는 건 보았다. 백인 할머니가 아는 일본어가 그뿐인지 두 사람 대화는 인사말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진은 그 여자가 윗집에 사는 줄 몰랐다. 아니, 3B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고 하는 게 더 적절했다. 3층은 면적이 아랫집들에 비해 두 배는 크다고 들었다. 아래 여섯 집은 아파트 뒤 공용 주차장을 쓰는데 3층의 세 집은 앞쪽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세웠다. 여섯 대의 차를 넣을 수 있는 지상 및 지하 차고도 3층 전용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아예 2층에 서지도 않았다. 유, 라이브러리, 북클럽.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이어 줄 적당한 관사며 전치사를 찾는 사이 낱낱의 단어가 성급히 튀어나왔다. 다행히, 그 정도로 여자도 하진을 알아보고 안심했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띠었다. 하진을 집 안으로 들이면서 여자는 문밖을 좌우로 살피는 기색이었다. 여자가 강아지를 방에 들여놓고 다시 와 문간 바구니에서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 내려놓았다.   - 올라오세요.   유, 코리안? 그래 놓고 하진은 굳이 영어로 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고 금방 후회했다. 일본어를 하길래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 어쩌고 하며 하진이 반가운 마음을 전하는 사이, 여자는 계속 손톱 거스러미를 입으로 잘근거렸다. 민낯에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는 도서관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만삭의 배만 아니면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하진은 집안을 둘러보며 물 새는 위치를 눈짐작해 보았다. 아래층 거실에 해당하는 위치가 3B에서는 분명치 않았다. 거실인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옆의 다이닝룸 같기도 했다. 거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다이닝룸에는 흰색 4인용 식탁이 놓여 있고 의자는 두 개뿐이었다. 누수 지점은 거실과 다이닝룸을 가르는 벽 아래인 것도 같았다.   - 여기라면 물이 샐 이유가 없잖아요. 주방이나 욕실이라면 몰라도…….   여자가 손톱을 물어뜯느라 뭉개지는 소리로 말했다. 그렇네요, 하고 중얼거리며 하진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집 안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그 넓은 거실에 빨간색 소파 베드만 덜렁 있고 티브이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저만치로 보이는 부엌 싱크대 위는 한국 사람이 사는 집이면 으레 있는 전기밥솥 하나 없이 휑했다. 벽에 걸린 그림은 그래서 더 도드라졌다. 하진도 알 만한 그림이었다. 미국에 온 직후, 차 타고 삼십 분만 가면 되는 모마(MoMA)에서 그 그림의 원화를 본 적 있었다. 몇 개의 시계가 녹은 치즈처럼 흐물흐물 늘어진……. 유난히 사람이 몰려 정면에서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3B에 걸린 그림에는 한 귀퉁이에 영어로 서명 같은 게 있었다. Sumi. 하진의 시선을 좇아간 여자가 드디어 손톱에서 입술을 떼고는 그림으로 다가들었다. 소파 베드에 발이 걸리자 한쪽 무릎을 접고 한 다리로 서서 여자가 말했다.   - 설마, 여기서 떨어진 건 아니겠죠?   농담하려던 듯 진즉부터 웃던 여자의 얼굴이 어느 순간, 진지해졌다. 그림에 시선을 박은 여자가 남의 집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듯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 이렇게 녹아서 흘러내리는데 물이 안 생길 리 없잖아요. 저 밑으론 물이 흥건할 거야……. *   아침에만 확인하면 되는 이메일을 괜히 낮에 한 번 더 본 게 화근이었다. 우석의 담임 교사인 미시즈 프로스트(Mrs. Frost)에게서 온 이메일이 있었다. 하진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중요한 한 가지가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거나 별일 아닌 일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건 하진이 어디서든 일 잘한다고 칭송 듣는 비결이기도 했다. 지금은 누수에 집중할 때였다. 물 새는 근원지가 윗집이 아니라면 아파트 외벽이라고 봐야 했다. 누수의 증거가 필요했다. 어찌 됐건 외견상 천장이 멀쩡하니 주인 여자가 나서서 손 써주길 기대할 수도 없었다. 아파트 외벽을 살피러 가기 전, 교사에게 답장을 보내놓는 편이 집중에 도움 될 터였다. 하진은 교사의 이메일을 그대로 복사해 AI 번역 사이트에 붙여넣었다. 우석의 선생님에게서 온 편지란 걸 알아보기라도 하는지 AI가 ‘습니다’체로 옮겨 한결 읽기가 좋았다. ‘Koh’라는 라스트 네임을 ‘고’가 아니라 ‘코’라고 한 건 마땅찮았지만…….   코 부인에게   안녕하세요. 이 편지가 당신을 잘 찾아가길 바랍니다. 우석의 학교생활에 관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석이 같은 반 아이에게 한국어로 욕을 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 한국어 욕을 알아챈 다른 한국인 학생이 알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욕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적절한 절차를 거치기 위해 당신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위해 가장 편리한 시간을 알려 주면 고맙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당신을 빨리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최고의 안부,   서리 부인   하진은 내일 오전 열 시가 가장 좋겠다고, 역시 AI 번역기를 이용해 영어로 답장을 썼다. 성재는 요즘 거의 매일 야근이라 학교에는 혼자 가는 걸 각오해야 했다. 우석은 방과 후, 학교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오겠다는 문자를 짧게 보내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 없었다. 학교 측에서 부모에게 통보했을 거란 사실을 우석도 알 터였다. 하진은 다른 말 없이 한 줄의 문자만 보냈다.   - 아빠에게 말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우석이 읽었다는 표시로 말풍선 옆 숫자가 사라졌다. 아직 적응이 안 돼 그런 것뿐이야. 한국이라면 별것도 아닌 일을……. 하진은 길거리나 편의점에서 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우석 또래 아이들을 떠올렸다. 집에서 우석이 친구와 통화하며 대화의 절반 이상을 그런 말로 채우는 걸 듣고 하진이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한 적은 있었다. 그때 우석은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털며 이렇게 말했다.   - 혼자 착한 척하면 따나 당해요. 알지도 못하면서…….   우석이 학폭 가해자로 지목당했을 때도 하진은 우석을 달리 나무라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그 섬세한 손가락으로 누굴 멍들 정도로 때렸다는 것인지……. 맞은 아이가 우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현장을 본 사람도 없었다. 맞은 아이는 우석보다 덩치도 더 컸다. 문제는 맞은 아이의 주장을 우석이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인정도 안 했지만……. 지지부진한 조사가 이어지다 학교 측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학이나 퇴학이 아닌 전학으로 마무리했다. 성재가 따로 챙겨 준 용돈으로 우석이 석 달 동안 복싱 도장에 다녔다는 사실을 하진은 나중에야 알았다. 교습비는 성재가 원장에게 폰뱅킹으로 송금해서 하진은 원장 얼굴을 볼 일도 없었다. 게다가 피아노 원장이 우석과 보낸 시간과 세월의 총량은 하진 쪽과 비교도 안 되게 길었다. 피아노 학원에 있다 늦는 줄로만 알았던 하진은 성재에게 진상을 털어놓지도 못했다. 그즈음, 성재는 신제품 개발 건으로 독일에 장기 출장 가 있어 하진으로서는 차라리 그 일에 집중하기가 수월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성재에게 하진은 새로 옮겨 간 학교의 음악 교사진이 월등히 좋다고 설명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다만, 우석이 그 이유로 전학한 게 아닐 뿐…….   우석이 새 학교에서도 같은 문제에 휘말리자 하진은 미국행을 결심했다. 우석을 미국 명문 음대에 보낼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다. 우석을 위해 하진은 기러기 부부도 불사할 작정이었다. 그런 차에 성재가 전사 직원이 염원하는 뉴욕 지사로 발령 났다. 지방 공채 출신인 성재의 표현에 따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하진은 생각이 달랐다. 뉴욕 발령은 임신 9주 만에 유산한 뒤, 더는 아기를 안 갖고 우석에게 전념하기로 한 대가라 여겨졌다. 낳지 않은 아이를 위해, 낳을 수 있는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보상치고 크다고 할 수만도 없는…….   미국행은 하진과 성재를 위해서도 나쁠 게 없었다. 대구 지사에서 일하던 성재가 하진이 있는 본사 기획실로 옮겨 왔을 때, 성재는 이미 이혼 절차 중이었다. 막판에 우석의 친모 쪽에서 화해의 제스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성재의 뜻은 확고했다. 성재와 하진이 결혼한 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둘 사이를 ‘불륜’으로 왜곡하려 드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하진은 해명 같은 걸 하기보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멀리했다. 멀리하고 싶은 사람을 멀리하기에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은 없었다. 브라질에서 성재가 하진의 후임으로 온 여사원과 종종 둘이서만 숙소를 나가더라는 귀띔도 미국 온 뒤로는 소원해졌다. *   프로스트 선생이 방을 안내하고 잠깐 나간 사이, 하진은 이번엔 ‘땡큐’를 너무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환영회 겸 지사장 집에서 직원들이 모였을 때 미국서는 ‘아임 쏘리’를 섣불리 하면 안 된다고 들었던 말도 생각났다. 문이 열리고 프로스트 선생이 상담 교사와 우석과 함께 들어왔다. 우석이 구긴 종잇장 같은 얼굴로 한쪽 의자에 앉았다. 상담 교사가 우석에게 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우석이 탁자 위에서 두 주먹을 쥐며 “No”라고 하자 두 선생이 시선을 교환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석은 눈이 습해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프로스트 선생이 하진을 향해, 우석이 같은 반의 백인 아이에게 ‘I’ll kill you’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선생이 단어를 하나씩 끊어 가며 천천히 말해 주어 하진은 하마터면 ‘땡큐’라고 할 뻔했다. 하진이 우석을 보면서 상대 아이에게 한국어로 뭐라 말한 거냐고 물었다.   - 죽을래! 그냥, 죽을래, 라 그랬다고! 그게 어떻게 아이 윌 킬 유냐고!   우석이 주먹 쥔 손 그대로 탁자를 내려치니 두 교사가 동시에 움찔하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하진은 우석의 팔을 잡고 방금 말한 대로 두 선생에게 설명하라고 했다. 한국어로 ‘죽을래’는 누굴 진짜로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라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나타내는 ‘조금 과격한’ 일상적 표현일 뿐이라고……. 우석은 이미 그리 말했는데 선생들이 도통 이해 못한다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진은 아무래도 아빠가 와서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 그리 통역해 달라고 우석에게 말했다. 그러자 우석이 두 선생을 번갈아 쳐다보며 뭐라고 큰 소리로 말했는데 하진이 하란 말이 아닌 듯했다. 프로스트 선생이 우석의 말을 자르며 뭐라 말하려는데 우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애먼 하진을 향해 목에 핏대가 불거지도록 소리쳤다.   - 그 새끼가 먼저 내 이름 갖고 놀렸다고! 유 썩, 유 썩, 이라고. 성까지 붙여서, 유 썩 고! 그게 무슨 뜻인지 당신은 모르잖아!   그 길로 우석은 거칠게 문을 밀고 나갔다. ‘당신’이란 단어에 하진은 흠칫했으나 설령 두 교사가 알아듣는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당신’은 영어로 치면, 며느리가 시아버지한테도 쓴다는‘you’일 뿐이니까……. 일어나 급히 우석을 쫓아 나가려다 말고 하진은 몸을 돌려 두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I am sorry. *   - 저기죠? 물 떨어진 데가…….   수미 씨가 두 손으로 배를 받친 채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수미 씨는 물 떨어진 자리에 정확히 서 있었다. 천장의 어느 지점이라고 하진이 아직 짚기도 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하진은 하마터면 수미 씨의 손을 덥석 잡을 뻔했다.   - 저렇게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달라요. 천장은 에그쉘이고, 물이 번진 데는 샴페인 색이네요. 보통 사람은 구분 못하죠. 시각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나 분간할 거예요. 미술을 한다든가…….   하진은 수미 씨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하고 제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신호음 뒤에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면서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가 나왔다. 하진은 잠깐 고민했다. 자동 응답기가 나오면 하진은 무조건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서툰 영어가 어떤 기계에 영원히 남을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기계를 틀어 보고 낄낄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없어 불쾌함에 기괴함까지 더했다. 하지만 이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하진은 머릿속으로 영어 문장을 만들어 본 뒤 기계에다 대고 단어를 끊어가며 천천히 말했다. 하이, 아이 리브 인 2C. 마이 프렌드 씽크 워터 드롭, 투. 컴 투 마이 하우스 어게인. 전화를 끊고 하진은 분주히 부엌으로 움직였다. 멋대로 수미 씨를 ‘프렌드’라고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엊저녁, 쓰레기 버리러 나가다 맞닥뜨린 것까지 합치면 겨우 세 번째 만남이라……. 찬장에서 커피 잔을 꺼내는 하진의 눈에 티브이 위에 걸린 그림 앞으로 다가드는 수미 씨가 보였다. 등을 보인 채 수미 씨가 말했다.   - 방금, 제시한테 전화하신 건가요?   - 네, 아파트 매니저요.   - 그럼, 한국말로 하셔도 되는데…….   하진은 식탁에 커피잔을 놓다 흠칫 놀라 수미 씨를 쳐다보았다. 수미 씨가 허리를 옆으로 꺾어 몸을 기역 자로 만들어 그림을 다른 각도에서 보며 말했다.   - 제시도 한국에서 온 지 일 년밖에 안 돼요. 한국말 못하는 척하죠? 나한테도 그랬어요. 지금 잔뜩 부어 있거든요. 제시는 살찐 게 아니라 열 받아서 부은 거래요. 영주권 해준다고 불러놓고 이모가 일만 부려 먹는다죠. 조심하세요. 누구든 건드리면 빵, 터져 버릴 거래요.   수미 씨가 고개 돌려,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씽긋 웃어 보였다. 하진은 제시가 중국인일 거라 했고, 성재는 필리핀계라고 자신했다. 어째서 한국인이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하진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 이거,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그 말은 하진이 “오셔서 차 드세요” 하는 말과 겹쳤다. 수미 씨는 다가들면서 계속 그림을 돌아봤다. 뉴욕 벼룩시장에서 샀다고 하자 수미 씨는 전문가한테 그림 감정을 받아보라 했다. ‘크랙’인지 뭔지가 있는데 그건 진짜 오래된 그림에서나 보이는 거라며, 진짜 모네 그림일지도 모른다 했다. 그러고 하진이 묻지도 않았는데 집에 있던 달리의 그림은 그대로 따라서 자기가 그린 거라 고백했다. 하진이 원화와 똑같다고 감탄하며 언제 다른 그림도 보여 달라 하자 수미 씨가 배시시 웃으며 애교 떨 듯 몸을 꼬았다.   -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아저씨가 안 좋아해요. 몸을 많이 쓰면 아기한테 해롭다고요. 우습죠? 그림을 몸으로 그리는 줄로 아나 봐요.   수미 씨가 말하는 ‘아저씨’가 누군지 하진은 알 것 같았다. 일주일에 세 번, 저녁 일곱 시에 지하 차고로 들어가는 회색 벤틀리……. 그 차가 들어오면 늘 조용하던 위층에서 물 틀고 변기 내리는 소리며 흐릿하지만, 티브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하진은 커튼 밖을 힐끔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벤틀리가 또 정확히 열한 시 반에 나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윗집 남자는 밤에만 일하는 직장에 다니나 봐, 하고 말했을 때 성재는 픽 웃으며 벤틀리 타고 다니는 사람이 밤일을 왜 하겠느냐며 혀를 찼다. 하진이 ‘아저씨’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수미 씨 얼굴이 찻잔 속 물색처럼 붉어졌다. 하진이 찻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 루이보스 차예요.   - 카페인 든 건 안 마시는데…….   수미 씨가 식탁 위에서 휴대폰을 집어 글자를 찍어 넣었다. 무언가를 찾는지 손가락으로 폰 액정을 계속 밀어 올리다 수미 씨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 이것 좀 들어 보세요. 물 대신 루이보스 차를 마시면 양수의 양이 늘어나 태아 운동이 원활해질 뿐 아니라 양수를 맑게 하는 효과도 있다!   수미 씨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안에서 향을 음미하는 듯 눈을 끔벅였다.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루이보스 티백 통을 아예 가져왔다. 가는 편에 보내려 작은 봉지에 티백을 몇 개 덜어 담는 하진의 손을 물끄러미 보면서 수미 씨가 또, 묻지 않은 말에 대답했다.   -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게 정리될 거예요.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 갈지도 모르고요.   하진의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튀어 올랐다. 졸고 있다 깬 사람처럼 수미 씨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고쳐 앉았다. 마침 뭐라고 대꾸할 말이 궁색했던 하진은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한국에서 온 문자……. 한국은 새벽일 터였다.   언니, 걔, 회사 그만두고 미국 간 게 확실한가 봐요. 윤 과장님이 이번엔 자유의 여신상에서 봤대요, 글쎄. 확인해 보셨어요? 윤 과장님. 번호 다시 드려요?   휴대폰을 그냥 내려놓으려는데 또 다른 문자가 들어왔다. 성재의 것이었다. 하진은 수미 씨 쪽을 힐긋 보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얼른 바꾸었다.   학교에서 이메일 왔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하나씩……. 하진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수미 씨에게 잠깐 전화 한 통 하겠다고 다시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갔다. 성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누가 있는지 큰 소리를 안 내려 이를 앙다문 듯했다. 수미 씨 쪽을 보니, 눈을 감다시피 하고 두 손으로 찻잔을 받친 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하진은 그래도 소리가 새 나갈까 몇 발 더 자리를 옮겨 벽에 가 붙어 섰다. 성재는 그깟 일 하나 해결 못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한테까지 연락이 오게 하냐는 요지의 말을 반복해서 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할 테니 제대로 이야기 좀 하자고 성재가 말할 때 배경음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이쪽에서 무슨 말을 했다고 착각했는지 성재가 “뭐라고?” 하며 재차 물었다. 하진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는 대신, 하지 않은 다른 말을 했다.   - 그럼, 평소에도 마음만 먹으면 일찍 들어올 수 있는 건데 이제껏…….   초인종 소리에 하진은 말을 끊고 휴대폰에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미 씨가 제시일지도 모른다며 대신 문을 열어 주겠다고 일어서서 현관 쪽으로 갔다. 하진이 휴대폰에 다시 귀를 댔을 때는 전화가 끊겼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진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놓고 잰걸음으로 수미 씨를 따랐다. 문을 여는 수미 씨 등 너머로 제시의 둥그레진 눈이 보였다. 제시가 아파트 번호를 확인하려는 듯 문밖으로 물러나더니 이내 다시 들어왔다.   - What are you doing here? *   하진은 천장을 가리키려다 그만두고 부엌 쪽으로 가 의자를 들고 왔다. 티브이 장식장 서랍에서 플라스틱 자도 꺼내 들었다. 하진은 ‘샴페인’으로 천장 색이 변한 지점 바로 아래에 의자를 놓았다. 의자를 붙잡아 달라고 할 때는 제시와 수미 씨를 같이 쳐다보았다. 수미 씨가 의자 등받이를 몸으로 지지하려다 배가 걸리자 몸을 돌려 등을 기댔다. 제시가 그 반대편에서 허리를 굽혀 양손으로 의자 시트를 붙잡았다. 하진은 고갯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제시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올라섰다. 하진이 팔을 최대한 뻗어 플라스틱 자로 물 샌 지점을 가리켰다. 히어.   세 사람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여전히 안 보인다는 제시 쪽으로 수미 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자세히 보라며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 응수라도 하듯, 천장의 샴페인 색 부위가 조금, 아니, 노골적으로 짙어지면서 물기가 배어났다. 물기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밑으로 처졌다. 하진의 심장이 급히 뛰었다. 히어, 히어! 캔 유 씨? 길게 늘어진 물기는 방울로 맺히는가 싶더니 천장에서 떨어져 나왔다.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듯, 물방울은 곧장 수직으로 낙하해 하진이 내민 손바닥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디드 유 씨 잇? 물방울이 떨어진 곳을 하진 씨가 얼른 가리키며 말했다. 수미 씨 발끝이었다. 제시의 시선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수미 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진도 그랬다. 이번에 세 사람의 시선은 바닥에 흥건한 물에서 모였다.   - Oh, my…….   신음 같은 단어가 제시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제시는 피가 위로 솟구친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면, 의자 등받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선 수미 씨 얼굴은 피가 아래로 쏠린 듯 창백했다. 수미 씨가 입은 크림색 쉬폰 원피스 자락 아래로 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이었다.   제시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는 수미 씨를 번쩍 안아다 소파 베드로 데려가 눕혔다. 제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911에 전화를 걸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Her water broke. 하진에게는 몇 단계를 거쳐야 겨우 이해될 말이었다. 그녀의 물이 깨어졌어. 물이……깨어졌어. 수미 씨의 비명 섞인 울음소리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해석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제시가 “어떡해요!” 하고 다급히 부르는데도 하진은 얼어붙은 듯 의자에서 내려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우석이 들어섰다. 한눈에 바로 이해되지 않는 거실 광경에 당황스럽다 못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가들던 우석이 “아기가 잘못되면 안 돼요!” 하고 악쓰는 수미 씨를 잠시 쳐다보았다. 우석의 시선은 이어, 의자 위에 어정쩡하게 선 하진에게로 갔다가 의자 아래 흥건한 물에 가 멈췄다. 우석은 물이 떨어진 근원지를 찾아 천장으로 눈을 옮겼다. 하진은 의자 등받이를 꽉 붙잡은 채, 자기도 모르게 우석을 따라 같이 천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천장은 멀쩡했다. 물기도, 부풀었던 흔적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아파트답게 말끔했다. 언제 물방울 같은 게 떨어졌냐는 듯…….   모두의 귀에 아득히,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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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2000년 도미해 영미서 번역을 시작했다. 단편소설로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대상(「타이거 마스크」), 2023년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제1회 신인문학상(「흐르는, 제로」)을 수상했고 「코타키나발루의 봄」으로 202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같은 해 장편소설 『고인, 돌』로 제4회 고창 신재효문학상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