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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그림자로 그려내는 삶과 죽음 이야기, 카페 바타비아

사공경

그림자로 그려내는 삶과 죽음 이야기

―그림자극 와양1)


사공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빛과 그림자여
슬픔은 슬픔대로 떨며 흘러내리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림자여 그렇게 춤추어라

변사(辯士) 달랑2)의 손에서
생명을 얻은 가죽 인형들은
하얀 스크린 위에서
신이 머무는 그림자로 춤춘다

카르마에 충실하고 다르마를 실천하라는
신의 가르침을 노래하며
고대 전설은 오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림자는 낡지 않는다
다시, 모든 형상들엔 그림자가 있다
가믈란3)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와양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길을 찾는다

카페 바타비아4)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우기의 시작과 끄트머리
음악은 흐르는 시간처럼 몽롱하게
카페 바타비아5)를 맴돈다

내려다보이는 파타힐라 광장6)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묘기를 부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다른 음계에서 흔들리는 사람
  세상에 절규하는 사람
  지상에 빠뜨리고 온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어둠 속에 춤추는 무수한 영혼들
  낯설어 돌아오고 싶었지만
  영원히 경계 밖 사람들
17세기에서 21세기를 넘나드는 생명의 아우성

예술과 미학, 식민시대의 흔적이 뒤섞인
카페 바타비아에는 부활의 씨앗과 함께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흐른다

꿈꾸지 못할 것을 꿈꾸게 하는
카페 바타비아에는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가
오늘도 액자 속의 그들과 함께 흐른다

각주

1) 와양 꿀릿(Wayang Kulit). 와양은 인형을 뜻하며 꿀릿은 가죽을 의미한다. 자바에서는 ‘와양 꿀릿’으로 공연되는 그림자극이 유명해 ‘와양’이라 하면 그림자극을 통칭하기도 한다.

2) 달랑(Dalang). 신과 인간의 중개자이면서 변사처럼 라이브 쇼를 만들며 공연을 진행한다. 달랑의 기운찬 목소리는 관객들을 매혹시키며 무생명의 와양에 아름답고 빠른 손놀림으로 타오르는 생명력과 따뜻한 체온을 불어넣는다.

3)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타악기들의 앙상블이며, 2014년에 인도네시아 국가무형문화유산, 2021년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카페 바타비아(Café Batavia):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인 1825년에 총독 거주지로 건설되었다. 이후 창고와 사무실, 예술 갤러리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1993년 카페 바타비아로 오픈하게 된다. 1,000장이 넘는 전 세계 유명 인물들의 사진들이 카페 벽에 정연하게 걸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바타비아(Batavia):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카르타의 명칭이다.

6) 파타힐라(Fatahillah) 광장: 350년 동안 식민 통치자로 군림했던 네덜란드 총독부 앞의 광장으로. 고문과 공개 처형이 행해졌던 곳이기도 하다.

필자 약력
사공경_프로필.jpg

한·인니 문화연구원장 사공경은 1999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인도네시아 문화 전문가 및 바틱 연구가로 활동하며 ‘인도네시아 이야기’ 문학상을 2010년부터 주최하고 있다. 1999년 문화탐방으로 시작된 한·인니문화연구원을 25년째 이끌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제17회 세계 한인의 날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200회 이상의 칼럼을 한국과 인도네시아 매체에 기고했으며 저서 『자카르타 박물관노트』(2005), 『서부 자바의 오래된 정원』(2009) 외 공동 저서 아홉 권을 출간했다. 그 외 10여 권의 도서 출간 총괄 및 출판권 약정, 번역 협력 및 출판 기념회를 기획했으며, 2020년에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수석집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2021년에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하는 인도네시아 인문학 축제 ‘누산따라에서 상상의 공동체로’를 공동 기획하기도 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