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9호
다카다노바바 하숙집: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김응교
왜 일본 유학을 결심했는지 윤동주의 글에서 그 명확한 동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본 유학을 왜 하려 했을까, 질문할 수밖에 없는 표현들이 그의 시에 나온다. 「사랑스런 추억」에 등장하는 기차는 희망이나 사랑을 전해 주지 않는다. 그 반대다.
“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
현실에서 기차는 새로운 소식도 전해 주지 않고, 의미 없이 지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라는 말은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 혹은 보다 근본적인 마음 상태를 쓴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스런 추억」에 쓰여 있는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는 “진정한 내 고향”과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차장”을 향한 화자의 잔잔한 바람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희망과 사랑의 정차장에 도착하기는 요원하다. 식민지 시대에 오지 않는 희망을 걸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잔혹하게 기다리는 상황을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1) 라고 명명한다. 이 참혹한 기다림, 이 참혹한 절규야말로 잔혹한 낙관주의이다.
또한 윤동주가 기차처럼 올 희망과 사랑이 아니라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라고 쓴 독특한 직유법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라고 처음 구두점을 찍은 여기까지가 1단락이다. 간신(艱辛)은 힘들고 고생(苦生)스럽다는 뜻이다.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자신의 그림자가 힘들고 고생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화자인 윤동주 자신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처럼 지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플랫폼을 빼고 읽으면 ‘나는 간신한 그림자(지친 나)를 떨ᅌᅥ뜨’리는 분리 상태가 일어난다. 이런 분리는 윤동주가 자신을 대자(對自)로 하여, 자신을 마주하며 자아성찰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물물 앞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우물 속의 사나이(「자화상」)으로 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희망과 사랑으로 기차를 기다리지만, 일본으로 가려는 그는 지친 그림자를 보며 초조하다.
“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일부
”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라는 그의 내면은 그림자다. 비둘기 한 떼는 나래(날개) 속에 부끄럼 없이 햇빛을 품고 날았다.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는 표현은 희망과 사랑이 있는 세계를 상징한다. 아쉽게도 하늘의 존재인 비둘기에 비해, 반면 화자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여기 3연까지 ‘옛거리에 있는 나’를 회상하는 한 묶음이다.
5연부터 도쿄에 있는 나의 독백이다. “봄이 오던 아침”을 회상했지만, 이제는 “봄은 다 가고” 있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라는 말은 디아스포라의 쓸쓸함을 보여 준다. 나그네가 한풀이 하듯 5연은 행갈이 없이 한 행으로 길게 풀어 썼다. 지금 도쿄 하숙방에 있는 화자는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봄은 다 가고―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은 현재 일본 점자 도서관(Japan Braille Library) 이 있는 곳으로 도쿄도 신주쿠구 다카다노바바 1초메 23-4 지역이다. 릿쿄대학보다는 와세다대학에서 가까운 곳이다. 지금 도쿄 도청이 있는 신주쿠구에 있는 하숙집을 ‘동경 교외’라고 표현한 것이 지금 시각에서는 이상하지만, 1950년대까지도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는 3대 부도심이었다. 천황이 사는 황거(皇居)가 있는 치요다구를 중심에 두고 볼 때 당시 다카다노바바 지역은 원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부도심이었다.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가까운 윤동주 하숙집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일본점자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출처: 이치카와 마키 제공)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도쿄에는 1925년 야마노테선이라는 도쿄 순환선이 건설되었다. 릿쿄대학이 있는 이케부쿠로역은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는 다카다노바바역에서 메지로역 다음에 있는 두 번째 역이다. 거리는 시속 2.6킬로미터로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린다. 윤동주 당시에도 있었던 전철이나 자전거를 타면 학교까지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숙집에서 가까운 다카다노바바역 플랫폼에 갔다가 지나가는 전철을 보면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떠났던 신촌역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도쿄의 하숙방에 있는 ‘나’는 희망과 사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화자는 여기 일본에 왔으나, 이내 저기 서울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이 토포필리아라면, 도쿄는 그 반대편이나 애매모호한 공간이다.
윤동주가 기다리던 희망과 사랑은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오지 않는 희미한 희망’을 기다린다. 윤동주는 그 기다림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일부
”
다카다노바바 윤동주 하숙집 터로 추정되는 일본 점자 도서관 옆 골목
(출처: 김응교 제공)
7연에서 기다림과 서성거림은 다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는 ‘언덕에서’ 서성거린다. 언덕이란 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야마노테선 다카다노바바역은 언덕처럼 도로 위에 솟아 있다. 역 플랫폼에 올라가면 주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같은 공간이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는 말은 영화의 마지막 자막 같은 분위기를 준다. 그나마 그가 누렸던 낭만과 자유는 조선땅, 그 작은 정거장에 서 있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 행에서 「사랑스런 추억」의 이항 대립의 내면이 확연히 보인다.
서울에 있을 때는 “봄이 오던 아침”(1연)이었는데, 도쿄에 와보니 “봄은 다 가고”(5연)라는 표현은 암시적이다. ‘봄이 오던 아침’을 즐기던 나를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4연) 멀리 실어다 주었다. 그나마 시내 산보를 하며 즐기는 등 산책자의 기쁨이 있었지만, 도쿄에서는 생활은 화사한 봄이 다 지나가 버린 의미 없는 일상으로 느껴진 것이다.
윤동주는 5월 13일에 이 시를 쓰고, 10월에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편입한다. 도시샤대학에서 송몽규와 자주 만나면서 그는 점점 역사의 늪에 빠져든다. 어쩌면 윤동주는 이 시를 쓸 때 이미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여기’에는 젊음이 없었고, ‘거기’에 젊음이 있었던 것이다.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터에 세워진 일본 점자 도서관 옆 골목
(출처: 이치카와 마키 제공)
윤동주가 다녔을 다카다노바바역 앞 광장 풍경 (출처: 김응교 제공)
1) 김응교, 『나무가 있다』, 아르테, 2019, 132쪽.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씨앗/통조림』을 냈고, 세 권의 윤동주 이야기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를 냈다. 평론집 『좋은 언어로: 신동엽 평전』, 『그늘: 문학과 숨은 신』, 『곁으로: 문학의 공간』,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일본적 마음』, 『백년 동안의 증언: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韓國現代詩の魅惑)』(新幹社, 2007), 영화평론집 『시네마 에피파니』 등을 냈다. 번역서는 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양석일 장편소설 『어둠의 아이들』, 『다시 오는 봄』, 오스기 사카에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일본어로 번역한 고은 시선집 『いま、君に詩が來たのか: 高銀詩選集』(공역, 藤原書店, 2007) 등이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동주의 길’, 《서울신문》에 ‘작가의 탄생’, 《중앙일보》에 ‘김응교의 가장자리’를 연재했다. 중국, 일본, 프랑스 파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윤동주를 강연했고, CBS TV 〈크리스천 NOW〉 MC, 국민TV 인문학 방송 〈김응교의 일시적 순간〉을 진행, KBS 〈TV 책을 보다〉 자문위원, MBC TV 〈무한도전〉, CBS TV 아카데미숲에서 강연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순헌칼리지 교수이고, 신동엽학회 학회장이다. 샤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대산문화재단 외국문학 번역기금 등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