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9호
노래의 책
최진석
하인리히 하이네와 미-래의 디아스포라
최진석(문학평론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고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파종(播種) 혹은 산종(散種)이라는 뜻을 갖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던 사건을 통해 ‘고향 없이 떠도는 삶’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곤 한다. 애초에는 특정 민족이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겪었던 경험을 뜻하지만, 이 단어는 어느새 이향과 탈향 일반을 지시하는 명사로 통용되는 형편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만주와 연해주, 남북 아메리카, 일본 등으로 흩어져 살아왔던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떠올리면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고유명사로든 보통명사로든 디아스포라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대상으로서 고향을 객관적 상관물로 삼는다. 사전적으로 ‘옛 마을’이라는 뜻의 ‘고향’은 시간 및 공간의 구체성과 물질성을 통해 표상된다. 선조들이 살던 땅이기에 오래되었고, 친숙한 역사와 전통을 지녔기에 그리워하고 애타게 돌아갈 마음으로 충만한 장소가 고향일 것이다. 하지만 고(故)라는 글자는 ‘옛날’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라져 없어짐’이라는 뜻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이란 어쩌면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장소일 수도 있다. 또한, 고향은 정서적 아우라를 통해 연상되는 시공간이기에 반드시 특정한 장소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정신적 지향과 심정적 정향으로서의 고향은 객관적 장소성을 넘어선 이념적 특징을 갖는다. 디아스포라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이산하고 흩어져 버린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회귀해야 할 특정한 장소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든 안 하든, 디아스포라는 특정한 지향과 정향을 통해 추구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그를 디아스포라와 연관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독일어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고, 독일어로 시를 썼으며, 독일의 문학과 철학적 전통을 커다란 배경으로 삼았기에 하이네는 ‘독일의 시인’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이네의 이름은 근대 독일의 시인 명부에 올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유대인 출신이고, 따라서 당대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에 따라 지식 사회에서 배격당했던 사연을 생각한다면, 유대주의의 맥락에서 그를 디아스포라로 규정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문학가로서 하이네는 당대 독일의 반동적인 정치와 사상에 저항했고, 유대 민족주의에 그다지 동조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시민주의라는 보편적 인간주의에 깊이 공감하는 편이었고, 따라서 유대적 혈통을 그의 디아스포라적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다른 한편, 19세기 중엽부터 하이네는 독일을 떠나 두 차례에 걸쳐 파리로 이주했다. 1831년부터 1843년까지, 그리고 1844년부터 1856년 사망할 시점까지의 시기가 그러하다. 독일 내의 반동과 반유대주의로 인한 정치적 망명에 가까운 이주였지만, 유럽 내에 거주했고 상황이 허락할 때는 독일로 잠시 돌아온 적도 있었기에 디아스포라의 일반적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하이네를 디아스포라 시인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조명해 보려 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던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그의 시적 지향이 빚어내는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디아스포라는 떠나온 땅, 잃어버린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는 개념이지만, 하이네의 문학은 디아스포라가 그 현실적 상관물을 넘어설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다시 말해, 고향과 조국을 새롭게 의미짓고 전망하는 이념적 지향으로서 디아스포라는 하이네에게 의미를 가졌다.
우선 하이네의 ‘지향’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지향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소망이나 의지, 열띤 추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때로 야망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이네의 문학적 지향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열아홉 살 무렵, 하이네는 함부르크에서 큰 은행을 경영하던 백부 잘로몬 하이네에게 보내졌다. 금융업을 몸에 익혀 사회적으로 출세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이었다. 하지만 문학에 눈을 뜬 이 조숙한 청년은 은행 일에 별 흥미가 없었고, 곧이어 시작했던 사업에서도 실패를 맛보았다. 엉뚱하게도, 백부의 딸 아말리에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은 것은 문제의 발단이었다. 대부호의 딸이 가난한 사촌 오빠에게 연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맛본 실연의 아픔은 그대로 시심으로 이어져 『노래의 책』(1827)에 형상화된다. 그중 눈에 띄는 한 편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래된 동화에서 하얀 손이
내게 손짓하는구나.
거기서 마법의 나라를
노래하고 얘기하는 소리 들리네.
황금빛 석양 속에서
큰 꽃들이 그리움에 애태우고
신부 같은 얼굴로
서로를 다정히 바라보는 곳—
나무들이 모두 말을 하고
합창단처럼 노래하며,
요란한 샘둘들이
무곡(舞曲)처럼 솟구치는 곳—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랑의 노래 울려 퍼지니
너무나 달콤한 그리움이
너무나 달콤하게 유혹하는 곳!
아,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거기서 기쁨으로 마음 채우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아, 나는 그 환희의 나라를
자주 꿈속에서 만나는구나.
하지만 아침이 밝아 오면
허망한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네.1)
”
어느 청년이 실연의 아픔에서 헤쳐나오기 위해 아픈 감정을 추스르며 읊은 시라고 읽어도 좋겠다. 하지만 개인적 상처만이 이 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랑을 잃은 사건을 되돌아보며 그로부터 자신이 정녕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시의 언어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 이 작품이다. 어느 쪽이든, 하이네의 시에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는 “오래된 동화”처럼 지향해야 할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곳을 향한 욕망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그곳에 갈 수 있다면”), 마지막은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 것(“허망한 거품”)이라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사라지고 말 것,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지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삶은 논리 너머에 있다. 욕망으로서의 삶은 우리를 논리 너머로, 부재라는 현사실성 저편으로 밀어붙인다. 실연이라는 개인적 경험은, 아마도 청년 하이네에게 더없는 고통이 되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서 획득 불가능함에도 우리를 사로잡고 또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게 시는 바로 그 역설을 드러내는 표현의 형식 아니었을까? 아침결에 사라져 버린다 해도, 밤을 새워 애써 추구하고 형상화해야 할 대상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 허망한 거품이 일으키는 생생한 무곡처럼.
1825년 6월, 개신교로 개종한 하이네는 이름마저 크리스티안 요한 하인리히 하이네로 바꾸었다. 가급적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8월에는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자 그는 완전히 의기양양해졌다.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든지, 혹은 주변의 바람대로 변호사로 개업해서 무난히 돈벌이가 가능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쉽지 않음이 곧 밝혀졌다. 이름과 종교를 바꾸었어도 그는 여전히 유대인이었고, 일개 법학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냉대와 질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문화 속에 살고, 독일어로 글을 썼음에도 독일인들은 자기를 동족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생 조합도 민족적 차이를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국이자 고향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독일, 그 생래적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친숙하던 세계로부터 내몰리고, 배척된 마음. 모두가 등돌린 채 절연한 이 상황은 절대 고독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청년 시절에는 애타게 찾던 사랑마저 이런 그를 구원할 수 없었으니, 가히 ‘실존의 디아스포라’라 부를 만한 상황이다. 후일 파리로 이주한 후 쓴 시 한 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내가 아름다움 입맞춤에 도취되어,
네 품안에 행복하게 안겨 있을 때는,
넌 내게 독일에 대해서 말하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은 견딜 수가 없다 — 거기에는 까닭이 있단다.
제발, 독일과 내 사이를 헤집지 말아다오.
고향이 어디고 가족이 누구고 생활이 어떠냐는 등의
끝없는 질문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다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단다 —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단다.
참나무는 초록색이고 독일 여인들의 눈은
푸른색이다. 그들의 욕구는 조심스럽고
사랑과 희망과 믿음에 대해 한숨짓고 있단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다 — 거기에는 까닭이 있단다.2)
”
자신을 밀어내고 배척해 버린 공동체에 대한 슬픔과 원망, 억울함과 미련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을 때조차 잊기 힘들다. ‘다르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것도 괴롭지만, 더욱 처참한 것은 그들이 자기 내부에 있는 모순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참나무의 초록색이 독일을 상징한다고들 믿지만, 정작 사랑스러운 “독일 여인들”의 눈빛은 푸른색이지 않은가? 결국 추방이란, 배척이란 어떠한 합리적 근거도 없는 편견이요 적대일 따름이다. 독일인들은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 하이네를 밀어냈지만, 자기 자신이 실은 이질성으로 가득 찬 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그들에게 미련을 두어야 할까? 그들의 땅을 언제고 돌아가야 할 ‘고향’이자 ‘조국’이라 부르며 가슴에 새긴 채 애태워야 옳을까?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하이네가 왜 진보를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으로 삼았는지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출생과 성장의 토양으로서 고향 독일은 돌아가고 싶은 나라이지만 온갖 편견과 반동에 물들어 있기에 그 현실은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하이네가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자신이 알던 문화와 전통, 관습 과거의 나라에 속한 것이며, 그 나라는 결코 가치론적으로 지향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미래의 땅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 속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직 실존하지 않지만 만들어야 할 곳, 민족과 인종을 이유로 누군가를 몰아내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땅이야말로 ‘낯선 고향’이자 ‘새로운 조국’의 이름에 값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끝은 그렇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공간에 존재할 것이다. 그 시공간에 어떻게 가닿을 것인가? 하이네가 답하려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1844년에 출간된 『독일, 어느 겨울동화』는 발표 당시부터 거센 논란을 일으킨 화제작이었다. 독일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을 담는 수작이라는 평가로부터, 독일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만 가득한 저질스러운 책이라는 비난이 이 책을 둘러싼 비평을 양분했다. 운문 형식의 여행기인 이 책의 주제는 ‘겨울’에 집약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건설되었음에도 독일에는 여전히 낡은 체제가 고집스레 남아 있고, 심지어 그전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팽배하는 현실을 하이네는 춥고 메마른 이미지로 환기하고자 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지향을 밑에 깔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정확히 해석될 수 없다. 만일 정치적 편향을 거론하며 하이네를 비난한다면, 처음부터 이 작품은 읽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이네는 분명히 말한다. 낡은 세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 한다고.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
자그만 소녀가 하프를 타며 노래했다.
그녀는 진실된 감정으로,
그러나 맞지 않는 음정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난 그녀의 연주에 매우 감동했다.
그녀는 사랑과 사랑의 고통에 대해,
희생과 또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저 위,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의
다시 만남에 대해 노래를 했다.
(……)
새로운 노래, 더 좋은 노래를 나는
오, 친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지어주겠다.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
천국을 이루고자 한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행복하고자 하며,
더 이상 궁핍하게 살고 싶지 않다.
부지런한 손이 벌어놓은 것을
게으른 배가 흥청망청 먹어치워서는 안 된다.
이 지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빵이 충분히 자라고 있다.
장미와 은매화도,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그리고 완두콩 또한 그에 못지않게.3)
”
1831년, 서른네 살 무렵 이주했던 파리 생활은 이후 하이네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하이네는 파리에서 정치적 망명지이자 정신적 고향을 발견했으나, 또한 디아스포라적인 지향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독일보다 진보적이고 현대적이었던 파리는 지속적인 혁명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피로감과 혼돈의 아수라장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반동에 지긋지긋해하며 찾아온 곳이었지만, 진보가 갖는 모순과 문제도 여지없이 목격해야 했다. 그러니 파리에서조차 하이네는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고, 저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욕망에 휘둘려 펜을 들어야 했다.
그가 바라본 새로운 장소는 실존하는 어떤 곳, 그러니까 혁명과 반동이 요동치는 유럽 이외의 또 다른 장소가 아니었다. 하이네는 한때 미국으로의 이주를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자유의 땅 미국에서조차 인종차별이 횡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거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관건은 이러한 통찰이 그로 하여금 ‘저 멀리’를 향한 지향과 정향 즉 디아스포라적 의식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지금-여기’,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를 또 다른 고향이자 조국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헛된 공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실천을 통해 그 발명적 실천의 첫 발자국을 떼야 한다는 의미이다. 『독일. 어느 겨울동화』는 그런 맥락 위에서 펼쳐진 시적 행보였던 셈이다.
조그만 소녀가 타는 하프 소리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같이 들릴 리는 없다. 심지어 “맞지 않는 음정”으로 그녀는 노래한다. 하지만 “진실된 감정”을 담았기에 그것은 “감동”을 주고 있다. 노래는 “사랑과 사랑의 고통”에 대한 것이며, “희생”을 통해 “더 좋은 세상에서의/다시 만남”을 기약한다. “더 좋은 세상”은 종교가 약속하는 내세의 삶, 죽어서야 도달하는 천국의 생활은 아닐 것이다. 현생을 내버려둔 채 ‘저세상’의 안락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것은 기성의 종교 체계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일 게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어딘가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뜻있는 선각자에 의해 일으켜져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된다. 그러니 하이네는 시인이 되어 부르짖을 수밖에. 그렇게 “더 좋은 노래”를 “지어” 불러줄 수밖에.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천국을 이루고자 한다.”
디아스포라 의식이란 ‘지금 여기 있지 않은 것’을 막연하고도 애처롭게 갈구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부재하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는 것, 지금-여기로 끌어당기려는 시도를 통해 고향과 조국을 ‘낯선 무엇’으로 창안하는 행위이다. 과거의 어딘가로 돌아가는 행보가 아니라 새로운 욕망의 장소, 이름 모를 유토피아를 향해 떠나는 여정인 것이다.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후, 하이네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신체적 고통이었다. 청년기부터 달고 살던 두통은 파리에서 생활하며 더욱 심해졌고, 손가락 마비 현상은 글쓰기에도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게다가 눈병은 시력을 극도로 악화시켜 스스로 읽거나 쓰기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 타격은 184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56년 사망하기 전까지 거의 8년간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매트리스 무덤’에 묶여 지내야 했으니, 그가 느꼈을 불행의 감정은 감히 설명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런 사정 때문에 만년에는 거의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거나 이미 사망했다는 헛소문도 자주 돌곤 했다. 실로 절망만이 온전히 지배하던 시기라 해야 할 것이다.
병든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간신히 기력을 끌어모은 하이네는 직접 펜대를 잡거나, 때로 아내의 받아쓰기에 의존하면서 남은 창작열을 불태우곤 했다. 그렇게 남긴 미완성 서사시 「비미니 섬」은 워싱턴 어빙의 『콜럼버스의 삶과 항해』(1828)를 읽고 쓴 작품이다. 이야기 속의 비미니는 병을 치료하고 노쇠를 젊음으로 되돌이키는 강이 있다고 알려진 섬이다. 이야기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하이네 역시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병도 치유하고 젊음도 되찾는 기적 같은 행운을 누리리라 기대했을 법하다. 그 신비로운 기대를 푸른 꽃에 비유하여 하이네는 써내려 갔다.
“
경이로운 믿음, 푸른 꽃이여,
이제는 사라진 꽃, 그득한 화려함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피어 있었고
그러한 시대에 우리들이 그 꽃에 관해 노래한 꽃이라지요.
(……)
어느 날 아침인가, 꽃은 신부처럼 피어올라,
푸른 조류의 대양에
바다의 경이처럼 나타나니,
그것이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세계였대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인종들과,
새로운 짐승들,
새로운 나무들과, 꽃들, 새들
그리고 새로운 세계 병들이 함께 하고 있다네요!4)
”
「비미니 섬」은 유토피아적 열망 그 하나로도 만년의 하이네가 추구했던 지향을 알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낭만주의적 동경의 상징인 “푸른 꽃”은 허황되거나 순진한 몽환적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현세에도 지향할 만한 ‘저기 저쪽’의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가리키는 징표이다. 그 같은 꽃에 대한 노래 즉 시는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불려야 한다. 현재를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동경 없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실천할 수 없는 탓이다. 그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 “어느 날 아침인가 꽃은 신부처럼 피어올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서 우리 앞에 당도할 것이다. 바로 그때, 오래전 떠나왔던 고향이자 애타게 바라마지 않던 조국의 형상 역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디아스포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욕망은 도래할 유토피아를 발명하는 힘이다.
미래는 결코 행복했던 과거의 복원일 수 없다. 되돌아온 땅에는 “새로운 인종들”과 “새로운 짐승들”, “새로운 나무들과 꽃들, 새들”이 있을 것이니, 아름다웠던 옛 추억만으로는 그 땅을 다 채울 수 없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존재들에게 맡겨질 것이며, 과거를 향한 욕망은 내려놓아야 한다.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길 꿈꾸며 디아스포라의 종말을 고대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게 도래한 세계는 모든 낡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새로운 것들로 채워질 테니까. 더불어, 그곳에는 “새로운 병들”마저 있을 것이니, 신화나 종교가 설파하는 완전한 행복을 곧이곧대로 꿈꾸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문제가 있고, 그것은 새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과제로서 우리의 행위를 요청한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채 그저 편히 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 이상향 같은 곳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듯이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는 끊임없는 세계 형성의 노동을 통해, 부지런한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할 시공간에 가깝다. 저절로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를 위한 실천 속에 조금씩 접근함으로써 우리 앞에 열리는 미-래라는 지평이 그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이네도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까?
*
1856년 2월 17일, 59세의 하인리히 하이네는 파리 마티뇽 가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독일에 대한 그의 애증 어린 감정은 끝내 행복한 화해에 이르지 못했고 바라 마지않던 귀향 역시 실현되지 못한 채 몽마르트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표면적으로 하이네의 디아스포라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하지만 그의 시에 표명된 강렬한 디아스포라 의식은 구체적인 어떤 장소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하이네의 문학적 편력은 자신이 떠나온 장소로의 회귀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역으로, 그것은 새롭고 낯선 곳에서 자신의 고향을 ‘발견’하고 조국을 ‘발명’하려는 실천으로 극복될 것이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 사랑과 기쁨으로 채우는 삶의 현장이라는 의미에서 고향과 조국은 미지의 대상이자 미-래의 시공간으로 표상되었던 까닭이다. 만일 언젠가 하이네에게 디아스포라의 여정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면, 바로 그 같은 창안의 시적 노동이라 답하지 않을까?
1) 하인리히 하이네, 『노래의 책』, 이재영 옮김, 열린책들, 2016, 147-148쪽.
2) 하인리히 하이네, 『신시집』, 김수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9, 54-55쪽.
3)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어느 겨울동화』, 김수용 옮김, 시공사, 2011, 10-11쪽.
4) 오한진, 『아픔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지학사, 2014, 483-484쪽에서 재인용.
문학평론가이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15년 《문학동네》로 등단했으며 러시아인문학대학교 문화학 박사. 저서로 『사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등이 있으며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러시아 문화사 강의』(공역, 그린비 2011) 등을 옮겼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