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9호
장률, 우연히 전개되는 삶과 디아스포라의 경계
조동범
▲ 장률 ⓒ씨네21
경계는 하나의 선이자 두 세계가 맞선 곳이다. 그러나 경계는 두 세계가 중첩되며 섞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계를 떠올릴 때마다 조선족의 삶과 운명이 생각난다. 국적만으로 조선족의 존재를 규정짓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들의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조선족의 삶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다층적인 지위와 입장에 놓인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이 중국을 조국으로, 한국을 모국으로 삼는 양가적 태도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혼재된 경계의 문제가 한국인과 상관없는 조선족만의 것일까?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우리와 한 핏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보거나 외국인 노동자로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으로써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타자화된 존재로 남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디아스포라의 비극성을 잘 알고 있지만 경계인으로서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윤동주 시인의 경우처럼 조선족 문제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족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애써 외면했던 역사적 진실이자 실체이다. 장률 감독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의 대사를 통해 “윤동주 시인이 연변에 계속 살았다면 조선족이 됐을 거”라고 말하며 한국인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장률에게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은 중요한 문제다. 단순히 한국인이냐 중국인이냐의 문제로 그를 파악한다면 그의 삶에 담긴 내력과 연대기를 이해할 수 없다.
장률 영화의 연대기는 우리가 겪어온 근대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영화는 현재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지만, 근대 초기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디아스포라를 근간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영화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부터 오늘날 조선족의 삶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공간을 바탕에 깔고 전개된다. 장률 감독이 연변에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의 모든 출발점”1)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장률 감독은 우리가 애써 외면한 세계와 진실을 복원하려고 한다. 그는 경계인의 아픔을 직접 호소하기보다 담담하게 드러내려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조선족이라는 실존은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장률의 영화가 시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시적인 감각으로 충만하다. 서사에 치중하거나 주제를 강조하기보다 상징화된 정황과 그것의 연결고리를 통해 예술적 의지를 피력한다. 장률의 언어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비애를 소환한다. 시를 비롯한 예술의 언어는 비극과 고통을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법이다. 장률의 영화 언어 역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쓸쓸함과 비애, 고통과 상처이며 부유하는 삶의 아득함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장률 영화의 디아스포라는 떠도는 자의 비애를 단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복원될 수 없는 과거를 근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인 층위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 점에서 장률 영화 속 경계의 문제는 끊임없이 어긋나는, 해소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장률 감독에게 디아스포라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디아스포라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에게 한국인이냐 중국인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은 우연이다. 물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사건과 배경 모두를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스스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은 우연에 기댄 것일 수밖에 없다.
우연히 전개되는 삶은 우리를 규정지으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마련이다. 우연은 숙명처럼 운명을 만든다. 그리고 운명은 거스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삶이라는 실체를 실재화한다. 장률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경계와 디아스포라는 이와 같은 우연 위에 구축된 세계이다. 그의 영화가 우리의 삶과 세계를 애써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장률 영화의 아름다움이 놓인다.
1) 정성일, 『필사의 탐독』, 바다출판사, 2010, 528쪽.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이 있으며, 산문집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보통의 식탁』,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냈다.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