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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사진 한 장, 서쪽을 향해 눈감고 서서

김화숙

사진 한 장

목욕하러 다녀오는 길
덜 마른 긴 머리를
미풍에 맡기며
전철역을 스쳐 지나
걸어 돌아오다 문득 눈물겹다
이 땅을 떠나
어디론가 또 흘러가게 된다면
그리워질 이 풍경
가로수 나뭇잎들 반짝임이며
길섶 수줍게 피어 있는 풀꽃들
맨발로 걸어도 될 것 같은
깨끗한 바닥이며
정원이 없어
창문에 매달려 있는 화분들이며
가끔 차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왠지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 걸어 다녔지만
갑자기 낯이 설고
언젠가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생각하니
하나하나가 벌써 과거 같다
동생이 사준 목욕가방을 들고
먼 훗날 타국의 어느 거리에서
뒤돌아보는
초여름의 사진 한 장

서쪽을 향해 눈감고 서서

떠오르는 해가 줄기차게
서쪽을 향하는 것처럼
저의 마음 좌표도 늘
서쪽을 향해 있습니다
새벽길을 걷다
서쪽으로 서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드러우면서 세찬 서풍이었습니다
나의 그리운 이들은 모두
서쪽에 있어
혹시나 무슨 소식이라도
가져올 것 같아 숨죽였습니다
마음을 살피려는 듯
나를 스쳐 지나다 잠시
멈췄다 가는 발걸음도 있었습니다
맨살을 감싸며 다독이는 바람이
초여름을 알립니다
올여름 휴가는 서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시작되기를.

필자 약력
프로필_김화숙.jpg

중국 심양 출생. 사평사범학원(현 길림사범대학) 철학 학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출간 시집으로 『아름다운 착각』, 『빛이 오는 방식』, 『날개는 꿈이 아니다』, 『날개의 례의』(중국)과 일본어 번역 시집 『날개는 꿈이 아니다(翼は夢じゃない)』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