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9호
내 얘길 들어봐
전춘화
주말의 김포공항은 오고 가는 승객들로 북적였다. 보름 전, 해미는 인천공항 티켓을 끊겠다고 우겼고 난 한사코 말렸다. “너무 복잡해. 사람 찾는 데 반나절은 걸려.” “티브이에서 보면 이름 적힌 팻말이랑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다가 잘도 만나던데.” “우리가 무슨 티브이 속에 사니? 현실은 안 그렇다는 소리야. 아무튼 너 한국은 처음 오는 거니까 언니 말 잘 들어.” 김포공항으로 마중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강압적인 말투로 알리고 며칠 뒤 해미는 마지못한 듯 티켓 정보를 위챗으로 보내왔다. 대형 캐리어 세 개가 있으니 형부가 차를 끌고 와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당당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난 남편에게 해미가 서울에 온다는 말을 망설이다 끝내 꺼내지 못했다. 대신 해미가 오기 며칠 전에 우리 집 근처 원룸을 내 명의로 계약했다. 여름이랍시고 배꼽티에 핫팬츠를 입은 해미는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나와서는 반가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취조하듯 물었다. “형부는?” “바빠.” “주말인데 뭐가 바빠! 언니 나 진짜 캐리어 세 개란 말이야. 둘이 어떻게 들고 가.” “캐리어에 바퀴는 달렸을 거 아니니. 공항버스 타면 기사 아저씨가 실어줘.” 해미는 별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위탁 수하물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원룸 평수가 몹시 작으니 짐을 최대한 줄이라고 몇 번이나 일렀건만 캐리어가 무려 세 개라니. 보나 마나 사진 앨범이며 털이 수북한 나무늘보 인형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겠지. 캐리어 세 개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딱딱하다고 느꼈던지 해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 같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큰이모가 언니 주라고 보낸 물건만 캐리어 하나의 반은 차지할 거야. 북어도 있고 직접 담근 된장도 한가득 보냈어. 익모초도 꼭 먹으라던데? 생리통에 좋대. 큰이모는 언니가 임신이 안 되는 줄 알고 걱정하셔. 근데 진짜 임신이 안 되는 거야?” “내년엔 임신할 거야.” “무슨 임신이 계획한다고 되나? 그냥 지르는 거지.” 눈치 없이 해미는 놀리듯 깔깔 웃었다. “언니가 미리 말해 두는데, 한국 생활은 매사에 신중해야 해. 그냥 지른다는 건 없어.” 해미는 마지못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애써 내 눈을 피해 캐리어를 끌고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옆모습에 서운함이 느껴졌다. 7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몰래 몇 번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해미 기억 속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형태는 없었지만 확실했던 건 7년 전 연길공항에 배웅하러 나온 해미와 끌어안고 엉엉 울 때의 난 지금처럼 신경질적이거나 예민하지 않았고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는 점일 테다. 양손에 캐리어 하나씩 손잡이를 잡고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가자 뒤따라오던 해미가 왼쪽 손에 든 캐리어 하나를 뺏었다. 해미와 함께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잠시 눈을 감고 다음 일정을 떠올려보았다. 해미는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랬듯이 우선 출입국사무소에 들러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할 것이고,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은 뒤 한국에서 사용할 핸드폰도 개통할 것이다. 골치 아픈 건 해미의 취직이었다. 해미는 남편이 중소기업 과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오, 중국 기업으로 따지면 경리 정도 직급 아닌가? 형부 인맥으로 나 취직 좀 시켜 주면 안 돼?”라고 신난 말투로 물었다. 난 그때 할 말을 찾지 못해 잠깐 숨을 골랐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해미가 남편에게 도움받을 수 없다는 걸 마음 상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배달 앱으로 짜장면을 주문하는 동안 해미는 신나서 짐을 풀었다. 고향에 계신 엄마가 부탁했다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검정 비닐을 내게 건네자 해미 말처럼 커다란 캐리어 속 절반의 공간이 휑하니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자레인지이며 전기포트며 책장이며, 해미는 필요할 것 같은 물품들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었다. 나도 옆에서 스윽 훑어보며 줄 수 있는 물건은 없는지 속구구를 했다. “전기포트는 집에 여분이 있으니 줄게. 급하게 필요할 생필품 같은 건 며칠 전에 다 갖다 놨어. 전자레인지랑 책장은 중고 앱에서 알아보면 쌀 거야.” 해미는 대답 없이 꾸역꾸역 리스트를 계속 써 내려갔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사는 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옆에서 잔소리하려다가 참았다. 당장 모두 사들일 건 아닐 테니 필요한 물건을 모조리 적은 뒤 우선순위를 정하고 하나씩 중고로 구입하는 것 정도는 해미 스스로도 판단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왜 칭다오를 떠나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연애를 했던 상대가 유부남이었어.” 해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기 때문에 난 당황함에 쿨럭, 헛기침을 했다. “몰랐어?” “몰랐지 그럼. 마침 칭다오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참에 와이프가 회사까지 찾아와서 머리채를 잡는 바람에 강제 퇴사했지 뭐.” 나도 몰래 정수리에서부터 빳빳하게 묶어 늘어뜨린 해미의 말총머리에 눈이 꽂혔다. “아팠겠다…….” “아팠지. 너무 아프니까 나도 몰래 손을 뻗어 그 여자 머리채를 잡게 되더라. 그렇게 몇 바퀴를 서로 먼저 놓으라고 소리 지르며 빙글빙글 돌았어.” 해미는 한동안 긴 생머리를 풀 일 없이 말총머리를 하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캐리어 속 짐을 능숙하게 정리한 뒤, 해미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쩐지…… 여자가 싫어할 것 같은 행동들은 정확하게 알고 하지 않더라.” 한국에 오면 엄마가 떠올라 기분 나쁘다며 비행기로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한국에 여행으로라도 온 적 없던 해미는 입술을 두어 번 감빨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캐리어의 짐들을 풀고 정리를 마쳤다.
해미가 도착한 다음 날 곧바로 회사에 반차를 내고 관할 출입국사무소에 들렀다. 해미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내심 나의 동행을 반겼다. 외국인등록증을 수령하기 전까지 해미는 한동안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기로 했다. 중국에서 들고 온 핸드폰에 지하철 앱이며 내비게이션 앱같이 꼭 필요한 생활 앱들을 깔아 주며 밤늦게는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곳엔 나 외에 세 명의 사촌 형제가 더 있었지만 어쩐지 내가 해미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해미는 알겠노라 머리를 끄덕이곤 첫 며칠은 한국은 곳곳에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좋다며 자주 연락을 해왔다. 수원의 큰 이모네를 만나 양꼬치를 먹은 사진, 인천에서 무역 회사에 다니는 둘째 사촌오빠를 만나 초밥 뷔페에 간 인증샷…… 난 아직 못 만난 친척이 몇 명이나 남았는지 해미가 인증 사진을 보낼 때마다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 보았다. 엄마에겐 여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아홉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설 명절 때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간 할머니에 대한 외로움을 잠시 잊은 듯 벽돌집 앞마당에 우리를 나이 순서대로 가지런히 세워 놓은 뒤 흐뭇한 표정으로 손자 손녀들의 뒤편에 점잖게 뒷짐을 지고 서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던 사촌오빠 현철이가 할아버지 옆에 엉거주춤 똥 누는 자세로 앉아 찍은 사진을 시작으로 1, 2년에 한 번씩 아이들은 하나둘 늘어났고 할아버지는 사진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빠르게 늙어 갔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중 막내인 해미가 빨간 담요에 쌓인 채 할아버지 품에 안겨 첫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해미가 여섯 살 나던 해 할아버지의 기념사진 촬영은 마지막이 되었다. 간도 땅에 오면 배고픈 걱정 없이 감자를 실컷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건너왔지만 어쩐지 처음부터 끝까지 서글픈 서사밖에 없는 다사다난했던 할아버지의 인생에 완벽한 마침표는 아홉 명의 아이와 찍은 사진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형제들은 딱히 일곱 중 누군가가 특출하게 뛰어났거나 우애가 각별히 좋았거나 했던 것도 없었다. 형제 중 어느 둘은 불화가 깊어져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는다거나, 또 누군가는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곤 몇 년째 가타부타 갚는다는 말도 없거나, 또 다른 이는 존재감 없이 형제들 사이에서 앉고 서 있음을 자주 잊히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를 전후로 러시아로, 칭다오로, 한국으로, 뉴욕의 코리아타운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떠날 때마다 아이들을 다른 형제에게 맡겼다. 잘 정착하면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러시아로 떠난 큰 삼촌의 두 아들은 둘째 이모에게 맡겨졌다가, 둘째 이모가 노무 비자로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큰 삼촌네 두 아들은 막내 삼촌 가정에 위탁되고, 둘째 삼촌네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에 얹혀사는 식이었다. 형제들은 그때마다 부지런히 서로 전화를 돌렸다. 최대한 조카를 떠맡지 않으려고 떠밀기를 시도했지만, 그 집에도 이미 다른 조카가 있는 걸 서로 확인하는 과정에 엄마는 두 가지 결심을 했더랬다. 나만은 절대 다른 형제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과 엄마에게 맡긴 조카들에 한해서는 매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받겠다는 냉철한 판단이었다. 결국 엄마는 하숙집 이모처럼 사촌들이 대학에 입학해 각자 알아서 떠나거나 형제들에 의해 타국에 초대받을 때까지 앞마당과 거실이 넓은 집에서 여섯 명의 조카를 키웠다. 그들 중 한 명이 막내 이모네 딸 해미였다. 다들 엄마를 따랐던 까닭에는 드디어 마지막 정착지라는 안도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는 목이 자주 쉰다며 검은 호루라기를 목걸이처럼 가슴께까지 길게 늘어뜨려 착용하고 있었다. “길게 , 호루라기를 한 번 불면 밥 먹는 시간, 두 번 불면 숙제하는 시간, 그리고 세 번 불면 얼른 취침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알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면 엄마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다. 우리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대답들 좀 하라고!” 우리가 하나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멀리 떠나는 동안 끝까지 엄마 곁에 남았던 사람은 해미였다. 엄마가 후두암으로 진단받았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내게 알려준 것도 해미였다. “조카들을 키우며 소리를 너무 질러서 무리해서 그런 걸까?”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를 한국에 초대하려던 계획이 허무하게 뭉개지던 순간이라 난 해미의 말이 귀에 잘 닿지 않았다. 엄마는 해미까지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한국에 오겠노라며 끝까지 고향 연길에 남았다. 그 사이 암에 걸린 엄마는, 중국어로 간단한 일상 용어만 가능했던 탓에 성급 도시의 대형 병원에 진료를 예약하고 한족 암 전문 의사를 독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대신 예약을 도왔던 해미가 “큰이모를 한국에 모셔다가 암 치료를 받게 하면 안 돼?”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에 의료 보험 하나 없는 엄마가 암 치료를 시작하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어서 난감해할 때 해미는 10년 이상 연락을 끊었던 막내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돈 몇천만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형제들은 자식을 맡기면서 매달 생활비를 곯지 않게 엄마에게 줬지만, 막내 이모는 일찍이 한국 남자에게 시집와 먹고 살기 힘들다며 해미를 떠밀듯 엄마에게 맡긴 것에 대해 일시불로 보상하라는 통보였다. 엄마 형제들의 십시일반 입금과 내 결혼식의 양가 축의금을 모두 모아 엄마는 간신히 서울의 암 전문병원에서 두 달가량 암 치료를 받고 서둘러 고향에 돌아가셨다. 다행히 발견이 빨랐고 치료 결과도 꽤 좋은 편이었다. 엄마는 투룸 빌라인 신혼집에 머무는 동안 한국인 사위에게 미안하다며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처음부터 장모라는 사람이 이렇게 신세를 지면 내 딸이 어찌 어깨 펴고 결혼 생활을 할까?” 현우 씨는 그때마다 괜찮다며 웃어 남겼지만 한국에 조선족 친척이 많다는 점을 내심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고향에 돌아가기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결혼식 때만 빼고 못 본 사위에게도 소개해 주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난 친척들과의 식사는 밖에서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먹고 바쁜 현우 씨가 그 자리에 참석할지는 물어보고 알려 주겠다고 답했다. “아……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과 밥도 같이 안 먹는다니? 한국 사위 자랑 좀 하고 싶은데.” 엄마는 대뜸 속상한 듯 말했다. “남편이 엄마랑 마주 앉아 밥도 잘 먹고 한 공간에서 잘 지내고 있잖아요. 오해는 마셔요. 그냥 입장 바꿔 저도 남편 쪽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나오라면 굳이, 라는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그런가?” 엄마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이내 표정을 폈다.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랑 다르더라.” 정작 현우 씨는 결혼식에 와준 친척들에게 고맙다며 한번 얼굴을 뵙고 밥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가는 장모님 입장에서도 딸 부부가 동반하는 게 훨씬 어깨가 펴질 일이라는 것을 현우 씨는 염두에 둘 만큼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열 명의 친척과 마주한 당일, 결혼식 이후 두 번째 만남이라며 반가워하던 두 삼촌은 처음부터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 남자인데 왜 우리 순화랑 결혼하나? 직장이 변변찮은가?” 둘째 삼촌은 궁금한 건 못 참고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뱉어 내는 사람이었기에 난 그러려니 천연덕스럽게 앉아 후루룩 옥수수수프를 삼켰고, 현우 씨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 내 눈치만 살폈다. 엄마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곤 이렇게 응수했다. “한국 사위를 눈앞에 앉혀 두고 이 무슨 막말이니? 이십 년 전에야 조선족 여자들이 혼인 비자로 넘어와서 조건 결혼을 했지만 말이야, 요즘은 자유연애도 하고 그러지. 우리 사위 직장도 번듯하고 우리 순화랑 같은 직장에서 만났다잖냐. 격 맞는 사람끼리 자유연애라고 응? 자유연애!” “아, 누나도 참! 그냥 몰라서 묻는 건데 언성은 왜 높여요!” “언성 안 높이게 생겼어요? 당신은 한국 생활 몇 년 차인데 아직도 앞에서 할 말 뒤에서 할 말 못 가리냐.” 둘째 외숙모까지 언성을 높이며 엄마 편을 들었다. 현우 씨는 어쩔 줄을 몰라 머리를 숙이고 국을 들이켜는 척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테이블 밑 발가락을 반복적으로 꼼지락거리는 걸 봐서는 이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을. 나와 현우 씨를 제외한 친척들의 말투는 싸우듯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한 번씩 주위 시선을 눈치채곤 조용해졌다가 이내 볼륨이 자연스레 높아졌다. 둘째 삼촌은 외숙모가 쉬, 쉬 하며 언성을 낮추라고 주의를 줄 때마다 그게 오히려 불만인 듯 얼굴까지 벌게졌다. “사람끼리 만나면 반가워서 흥이 나고 그러다 보면 언성도 높아지기 마련이지. 중국에선 말이야, 식당에 가면 다들 목소리가 높아요.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는 거라고!” “여긴 한국이잖슴까!” 외숙모가 기어코 둘째 삼촌의 다리를 발로 툭 차고 옆구리를 아프게 꼬집어서야 삼촌은 “아야!” 하며 죽을 소리를 내곤 조용해졌다. “한국인들에 비해 거칠고 말도 조금…… 배려가 없긴 하지?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야. 현우 씨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 하는 말은 아닐 거야.” 나는 현우 씨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밀착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했다. 내가 둘째 삼촌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이유는, 아직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며, 성격은 불같아 말은 거칠어도 옆에서 핀잔을 줄 때는 더 반박하지 않고 기분과 감정을 뒤늦게라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현우 씨는 알겠노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따라 현우 씨의 귓바퀴가 유난히 빨갰다. 두 삼촌은 현우 씨의 잔에 연거푸 소주를 부어 주곤 대리운전을 불러 주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세 남자 사이엔 어떤 다할 대화가 없이 술만 부지런히 오고 갔다. 현우 씨는 얼굴이 울긋불긋한 와중에도 흐트러짐 없이 두 삼촌의 잔에 깍듯이 술을 따라 주고 마실 때마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슬며시 돌리고 마셨다. 현우 씨는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삼촌과 삼촌 가족들에게 연신 인사를 했다. 친척들은 순화 신랑 예절도 밝네, 하면서 저들끼리 “한국 사람들은 앞에선 교양 있는데 겉과 속이 다를 때가 많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난 당황한 현우 씨에게 “현우 씨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한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인들을 그렇게 느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거야”라고 설명을 했다. 어느 순간 난 삼촌과 외숙모, 이모들에게 겉과 속이 똑같게 행동하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연단해 낸 초인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며, 인간 모두에겐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걸 반박하려는 충동을 잘 참아 내게 되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건 상황에 따라 타인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최선의 사회성일 수도 있었다. 난 이 사실을 저들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 속 나에겐 의리 있는 친척 어른이거나 나름의 선함을 간직한 소중한 가족이지만, 한국인들의 눈에는 교양 없고 예의 없는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만 비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끔 느낄 때마다 한국인들이 속이 좁다거나 겉과 속이 다르다며 빈정거렸다. 무려 55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중국은 대국답게 소수 민족에 대해 포용 정책을 펼치는 데 반해 한국인은 쉬이 타인을 얕보고 인격 모독의 말을 거리낌 없이 인터넷에 써댄다고 말이다. 어차피 그들은 1년 열두 달 중 한국인과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일 테니 나로서는 현우 씨에게 오해가 없도록 설명함으로써 당황한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최선으로 느껴졌다. 다행히 그날은 삼촌들이 술이 어느 정도 익은 이후에도 정치적인 얘기나 중국의 우월성에 대해 떠벌리지 않도록 옆에서 외숙모들이 단도리를 잘해 준 덕에 그나마 무난하게 끝났다고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친척들을 만나 용돈을 두툼하게 받고 신난다던 해미가 며칠간 연락이 닿지 않자 걱정되는 마음에 퇴근하자마자 찾아갔다. 띠리릭, 비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3단 호신봉을 들고 서 있는 해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 깜짝이야!” 둘은 동시에 소리 질렀다. “누가 맘대로 비번을 누르고 들어오래?!”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이 돼서 그렇지.” “고작 3일만 연락 안 된 건데 무슨.” “기분 나쁘면 얼른 비번을 바꾸든가. 호신봉은 어디서 났어?” “한국은 배송 속도가 진짜 빠르더라.” 그제야 작은 원룸에 한가득한 택배 상자들과 거실에 비까번쩍 새로 세팅된 티브이며 전기포트, 우드 톤 테이블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다 산 거야?” “응. 친척들 많으니까 참 좋아. 언니도 처음 한국 왔을 때 정착 지원금이라고 큰아버지랑 이모에게 큰돈 받았어?” 잔뜩 신난 해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신상 핸드폰도 자랑하고 싶었던지 내게 보여 줬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외국인등록증은 언제 수령한 거야?” “이틀 전에 받았지. 받자마자 폰부터 계약했지.” “폰을 계약했는데 언니에게 전화번호는 알려주지 않고 신나서 쇼핑부터 한 거니?” “은행 카드도 만들어야 하고 바빴지. 살 만한 집답게 살림 다 장만하고 언니를 정식으로 초대하려고 한 거야.” 코딱지만 한 작은 공간에 스탠드형 에어컨이 설치되고 앙증맞은 미니 소파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언니, 이건 침대 겸 소파야. 낮엔 접어서 소파로 사용 가능하고, 밤에 펴면 침대가 되는 거래.” “요즘엔 가성비 좋은 미니 냉풍기도 괜찮던데. 이 원룸에 얼마나 머물지 모르는데 에어컨 저거…… 철거하고 재설치할 때도 기술공을 불러야 해. 언니한테 좀 상의를 하지 그랬냐.” “언니는 한국 남자랑 결혼까지 했으면서 왜 자꾸 싸고 금세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만 찾아? 난 정착 마인드로 각오하고 왔다고.” 나는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무겁고 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무렇지 않은 듯 고향을 떠났다가 또 어디론가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때마다 나도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아 부유하던 불안함이 종내는 무겁고 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난 해미에 구구절절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무엇을 체크해 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핸드폰 계약서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 덕분이었던지 해미는 순순히 핸드폰 계약서를 내주었다. “무슨 한 달 요금이 20만 원씩 빠져?” 난 계약서를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꽥 소리 질렀다. “티브이랑 와이파이랑 다 계약하니까 그렇지. 첫 3개월은 무조건 무제한 요금제를 써야 한대. 그래도 두 번이나 할인을 받은 거야, 더블 할인! 사은품으로 전기포트도 받았어.” “아직 취직도 못한 애가 무슨 돈이 있다고 매달 20만 원씩 부담을 해? 3개월 지나면 요금제부터 바꿔. 어차피 핸드폰으로 쇼츠만 볼 거면서 티브이는 왜 계약한 거야?” “티브이도 하면 할인 더 들어가고 전기포트도 준대서.” 해미는 당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그게 다 영업이지. 칭다오 같은 대도시에서 몇 년씩이나 굴러먹은 애가 영업을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알지. 아, 근데 뭐랄까, 고객님~ 친절하게 부르는 것도 감동이었고 계산기로 숫자 딱딱 두드리면서 더블 할인해 준다 그러고 전기포트랑 두루마리 휴지까지 사은품으로 주니까 돈을 써도 기분 좋더라고.” 잔소리할 예정이었지만 해미의 신난 말투에 하마터면 “그건 그렇지” 하며 공감할 뻔했다. 나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무조건 새 핸드폰을 계약해야 하는 줄 알았고, 더블 할인과 사은품에 기분이 좋았으며, 취직도 안 된 상태였지만 초년생은 저축해야 한다는 은행 창구 직원의 상냥한 말투에 1년짜리 저축 상품까지 가입을 했었다. 보습 크림과 선 크림 하나만 얼굴에 바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스킨과 에센스, 로션 세트 같은 기본 케어 제품과 기능성 제품들이 화장실 세면대와 별도의 수납 바구니에 꽉 차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뭐 하나라도 덜 바르면 피부 노화가 빨리 진행된다고 믿게 되거나, 푸석한 피부가 행여 누군가에 자기 관리를 잘못한 걸로 보일까 봐 신경 쓰였던 것은 아무 때든 형광판에, 티브이에, 드라마 상영 1분 전에 튀어나오는 고퀼리티의 설득력 있는 광고들 때문이었다. 해미는 그저 내가 밟았던 코스를 충실하게 밟는 중이었던 셈이다. “그래, 해미야. 지금 계약한 건 뭐 어쩌겠어. 근데 너 앞으로 분명히 민영 보험 추천받거나 은행 상품을 추천받을 거고…… 다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말할 거야. 필요한 건 맞는데 말이야, 실정과 상황에 맞게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니 꼭 언니와 상의하길 바라.” “알겠어.” 해미는 귀찮은 듯한 말투로 택배 상자들을 정리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해미야, 언니 말 한마디만 더 들어 봐. 다 널 위해 하는 말이니까.” “응~ 말해. 듣고 있어.” “무조건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3만 원대 제품은 3만 9천 원대일 확률이 높아. ‘사장님이 미쳤어요’라고 써 붙이고 할인하는 제품들은 사장님이 미친 게 아니라 네가 쇼핑에 미치길 바란다는 의미야. ‘오늘만 할인’이거나 ‘재고 1개’는 진짜일 수도 있지만 거짓말일 확률이 훨씬 높아. 그러니까 지갑에서 돈 나갈 때는 열 번 스무 번 정신을 차리고 재고를 해봐야 한다는 소리야. 알겠니? 서울 사람들이 괜히 무서운 게 아니라니까.” 해미는 깔깔 웃으면서 “중국도 똑같아!”라고 응수했다. 난 해미에게 그래서 이제 남은 돈은 얼마인지 물을까 하다가 참았다. 해미가 한국에 온 뒤 엄마는 부쩍 내게 전화와 해미를 잘 챙기라고 부탁했다. 사촌 형제 중에 해미와 가장 긴 시간을 같이 지냈던 탓인지 엄마가 해미 얘기를 할 때마다 난 해미가 친동생인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해미는 간밤에 이력서 세 건을 넣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난 조금은 시름이 놓였다. 해미에겐 국제 바리스타 자격증과 뉴욕주 간호사 자격증이 있었다. 난 미국은 주마다 간호사 면허증이 달라서 하와이에서 간호사로 일하려면 하와이의 간호사 면허증을 취득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해미가 가오카오를 치를 때 간호학과를 선택한다고 해서 가족들은 의외라는 듯 머리를 갸우뚱했었다. 전공을 선택할 때 언니 오빠들에게 전화를 돌려 조언을 구하던 해미에게 인문학 대학원생이었던 난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하고 싶은 전공을 고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더랬다. 해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 이후부터 줄곧 미술학원을 다녔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SNS에 올라온 해미의 그림들이 그럴듯하다고 느껴 감탄했을 때도 해미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세상엔 잘 그리는 사람들이 차고도 넘쳐. 내 실력은 그냥 애매한 수준이야.” 이제 와서 유추하건대 해미가 간호학과를 선택한 배후에는 우리 중 가장 맏이인 영화 언니의 현실적인 조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소설 전공을 선택하고 한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선언했을 때 영화 언니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투자에 비해 아웃풋이 썩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가차없이 말했다. 정히 뜻을 굽히지 못하겠다면 나중에 투잡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전공이나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라는, 쓰디쓴 보약 같은 그 말을 난 인문학도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뭉개 버렸다. 그에 비해 해미는 영화 언니의 말을 충실히 따랐는지 국제 자격증 두 개의 소지자라니. 물론 해미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용케도 중국의 대도시에서 종합병원 응급실에 취직해 우린 모두 물개박수를 쳤지만 해미는 2년을 버티지 못했다. 청년층의 취직이 쉽지 않은 대도시에서 그것도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간호 경험이 전무한 병아리 신입을 잽싸게 데려갈 땐 이유를 짐작해야 했는데. 암컷 호랑이 같은 수간호사가 매일 으르렁한다거나, 중국어인 듯 중국어 아닌 도저히 못 알아듣겠는 오만가지 방언이 오고 가는 병실에서 간혹 말 한마디를 잘못 알아들으면 바로 담당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3년을 버텨 경력을 만들겠다던 해미는 그렇게 간호사 일에 학을 떼고는 큰오빠 현철이가 살고 있는 칭다오로 도망갔다. 현철이 오빠는 분명히 해미가 인생살이 힘들다고 홀짝일 때 이렇게 말했겠지. “야야, 다 때려치우고 오빠 밑으로 와. 간호사 월급만큼은 줄 수 있어. 이사가 꽂은 사람이라면 다들 입 다물고 함부로 못 할 거야.” 해미는 현철 오빠 덕에 에어컨 바람이 빵빵 터지는 사무실에 앉아 종일 강아지 물품 재고를 담당한 직원과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을 관리했다. “그게 무슨 관리야?”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을 때 해미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없어. 경력도 없는 낙하산 어린애가 경력직들 관리한다고 하면 직원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 그냥 내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직원들 오빠 흉도 못 보고 일도 대충 못하더라. 점심 메뉴를 주문할 때도 내가 회사 카드를 들고 있으니 비싼 걸 못 시켜 먹고. 그냥 내 존재 자체가 관리라고 할까. “어처구니없는 그따위 말을 들을 때부터 어쩐지 오래 못 갈 것 같더라니, 얼마 뒤 해미는 “언니, 마음 편한데 불안해”라며 대체 왜 이런 모순적인 감정을 겪는지에 대해 내게 물었다. 네 속을 내가 어찌 아니,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도 난 넌지시 되물었다. “몸은 편한데 네 또래 애들 지금쯤 직업 현장에서 열심히 배우고 경력 쌓을 거 생각하니 불안한 거 아니니? 솔직히 거기서 알짜배기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경력이나 기술이나 어떤 역량이든 배우는 건 아니잖아.” “아하, 그거네!”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해미는 무릎이라도 ‘탁’ 칠 것 같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내 말을 받곤, 인간관계 공부는 많이 됐지만 확실히 실질적으로 배울 건 없었다며 공감했다. 그럼에도 꿀단지에 파묻힌 것 같다고, 질식해서 죽기 전 위급 상황이 아닌 이상은 나올 생각 없다더니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전화를 받은 건 좀 급작스럽긴 했었다.
해미는 뒤늦게 우리 집에 초대되어 현우 씨와 안면을 트고 귀가하던 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결국은 결혼이 답인가?” “뭔 소리야 그게.” “그렇잖아. 영화 언니는 미국 영주권을 소지한 남자를 만나 뉴욕 코리아타운에 정착했고 언니도 한국인 남편을 만나 귀화를 준비 중인 거잖아.” 난 어쩐지 해미의 그 발언이 탐탁지 않았다. 이건 구구절절 해석이 필요하겠다는 예민함이 애써 짓은 미소 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난 꿈을 좇아 한국에 온 거고 취직도 했어. 네 형부가 나 좋다고 먼저 대시해서 결혼까지 한 거야. 그리고 내 비자는 결혼 이민 비자가 아니고 교포 비자라고.” 해미는 일찍이 가짜 결혼 수속으로 한국에 건너와 한국 남자와 몇 년을 살다 국적을 따자마자 이혼한 엄마를 마음 깊이 혐오하고 있었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생존 스킬을 아무렇게나 장착하면 안 된다는 게 해미의 지론이었다. 그때 난 젊은 피 해미의 양심적인 발언에 깊이 공감한다며 손뼉을 쳤다. 한국 남편의 무시와 폭력으로 이혼을 한 조선족 아내가 있는가 하면, 해미의 엄마처럼 처음부터 국적을 노리고 도망갈 요량으로 거짓 결혼을 한 케이스도 있는 건 사실이라 지금도 인터넷에서 조선족 포비아들이 과거의 이런 부류의 일들을 들먹일 때면 프라이드 반 양념 반 치킨처럼 반반이라는 설명은 무용해 보였다. “근데 언니, 한국 남자랑은 어떻게 연애를 해?” 질문이 생뚱맞아서 난 잠시 할 말을 잃고 멀뚱멀뚱 해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애를 어떻게 하다니?” “형부가 사람이 너무 괜찮아 보여서. 요즘도 한국 사람들은 한국 남자랑 조선족 여자가 만나면 예전처럼 혼인소개소를 통한 조건만남이라고 보지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해미야, 넌 한국에서 오래오래 살려면 사람들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 안 돼. 그게 다 스스로 만든 감옥이라고.” 해미는 알겠노라고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끈질기게 나와 현우 씨의 연애사를 캐물었다. 현우 씨는 2년 전 내가 잠시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애니메이션 회사의 매니저였다. 난 그때 중국 고전인 『수호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게 영상 제작하는 프로젝트 팀에서 뿌린 구인 공고를 보고 중국 고전문학 전공자임을 어필하며 이력서를 제출했다. 운 좋게 면접 약속까지 잡았지만 사무실이 아닌 스타벅스 카페에 앉아 사실은 직원이 아닌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것이었다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라는 내 또래 젊은 남자는 문예창작학과 석사에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 중인 박사생이시니 졸업논문도 쓸 겸 재택근무를 하면서 용돈 벌이를 하시는 건 어떠냐고 진중하고 예의 있게 건의했고 나는 넙죽 일감을 받았다. 15분짜리 영상의 인물 대사와 전반적 서사가 『수호전』 원작과 잘 맞아떨어지는지, 왜곡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 수정 방향을 제시하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수호전』이 워낙 거대한 서사였기 때문에 파일로 받아본 영상은 50편짜리 대용량이었다. 미팅 첫 날 중간 관리자로 소개 받은 현우 씨는 젊은 대표가 다음 일정때문에 먼저 자리를 비우자마자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약서를 꼭 작성해 달라고 대표님께 요청하시고요, 적은 금액이지만 10편 완성 뒤 한 번씩 결제하는 조건으로 5번 결제받겠다고 건의해 봐요.” 그동안 번역이나 통역 일을 맡아 하면서 입금 지연이나 미지급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터라 난 현우 씨의 제안이 고맙게 느껴졌다. “근데…… 제가 까다롭다고 구두계약을 엎으면 어떡하죠?” “그러지는 않으실 거예요. 중국 출신에 고전문학 전공자는 흔치 않아요. 귀찮더라도 적은 금액을 꺾어서 여러 번 받는 게 현화 씨에겐 더 안정적일 거예요.” 그렇게 매번 나의 작업물을 전달받고 입금 확인까지 세세히 신경 써줬던 현우 씨는 일이 3개월 만에 마무리된 다음날 우리 동네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추가 프로젝트라도 있을까 싶어 대뜸 만남을 수락하고 나간 자리에서 현우 씨는 내게 카푸치노 한 잔을 사주곤 한참 창 밖을 내다보더니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한국 남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카오톡으로 받은 내용이었다면 나 어떠냐고 은근히 떠보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텐데 현우 씨의 말투가 건조해서 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현우 씨를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한 건가요, 아니면 다음 프로젝트는 한국 남자에 대한 영상을 제작하는데 또 알바로 쓰실 생각이라 그런 건가요?” “제 질문이 그렇게 이상했나요?” “그럼요. 티모시 샬라메 같은 남자를 여자들이 국적 따지겠어요?” 현우 씨는 아아, 하고 뜻 모를 신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곤 그제야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슬며시 웃었다. “현화 씨는 참 직설적이시네요.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요.” “사실 순화 씨 외모가 제 이상형이라서, 알아보고 싶은데…… 혹시 사회주의자고 중화사상 심하고 그러실까 봐 또 걱정되고…… 며칠 동안을 고민하다가 일단 한번 만나 보자 싶어서 연락드린 거예요. 한국에 거주한 지는 얼마나 되신 거예요?” 분위기는 어쩐지 묘하게 면접 느낌으로 흘러갔다. 이토록 애매하고 살짝 불쾌한 느낌의 어중간한 호감 표시는 처음인지라 나 또한 카푸치노 한 모금을 마시면서 지금껏 한국 생활을 해오며 쌓아 온 모든 경험치를 동원해서 이 상황에 대처할 만한 지능을 끌어모았다. 나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는 걸 다소 억울해하던 초기와는 달리, 세상 어디에서나 을에 처한 사람은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는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는 기량을 갖춘 그때의 난 서른이었다. 중요한 건 기분 나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게도 현우 씨가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에 난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3개월의 연애 수습 기간을 가져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현우 씨는 당황하고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그런 게 어딨어요. 어떻게 감정으로 수습 기간을 둬요. 다른 말로 썸…… 정도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라고 내 말을 받았다. ”현우 씨, 전 한국식 썸은 세련되지 못해서 못하겠어요. 그리고 우린 서로 쌍방 시그널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썸은 글러먹은 것 같은데요.”
해미는 결국 카페 아르바이트를 결심했다. 토익 스피킹 고득점 스펙에 어쨌든 3개 국어 가능자인데 파트타임 아르바이트가 아쉽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테다. 해미는 친척들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게 심히 부담스럽다며 내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워라밸을 꿈꾸던 해미는 이번엔 신중하게 선택한다며 알바생 카페에서 이것저것 질문하고 염탐하더니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뜰 만큼 유명한 카페에만 이력서를 넣었다. 동네 카페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할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 고용한다고 한들 풀타임 근무를 시킬 리가 없고, 프랜차이즈 카페들마저 분주하게 바쁠 정도가 아니면 여백의 시간에 청소같이 추가 업무를 시킬 확률이 높다는 게 해미가 얻은 결론이었다. 정작 한 달째 열다섯 곳에 뿌린 이력서에 면접으로 이어진 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아…… 이것이 조선족 청년의 비애인가. 한국 청년들 일자리 넘보니 바로 커트네. 명동 같은 곳에 예전처럼 중국인 관광객이라도 많았으면 경쟁력 있었을 텐데.” 해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고, 난 해미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족 청년이라서가 아니라, 경력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유명한 맛집들은 경력자들 우선 아니겠니? 몇 년 전에 딴 자격증에 실제 카페에서 일해 본 경력은 연변에서 겨우 6개월 아니었나?” 해미는 팩트 폭격기 같은 내 발언에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따지듯 물었다. “언니는……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보아하니 한국인 다 된 것 같네? 조선족 청년한테 감정 이입이 잘 안 돼?” 안 될 리가. 잘 안 풀리면 사사건건 내가 조선족이라서 취직이 안 되는 걸까, 마음이 복잡했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다. “미국에 가볼까? 영화 언니 사는 곳은 뉴욕의 코리아타운이라 치안도 괜찮고 동양인 차별은 있어도 딱히 조선족이라 차별하는 게 없다는데?” “칭다오에서 한국으로 온 지 겨우 3개월인데 벌써 뉴욕 코리아타운으로 갈 생각을 해? 정착 마인드를 장착하고 왔다며. 너 이거 현실 회피고 도피야. 한국은 그나마 동포라고 비자라도 잘 내주지, 미국 가면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불법체류자 되기 딱 맞다. 영화 언니야 운 좋게 미국 영주권 있는 조선족 형부 잘 만나서 그런대로 버티고 사는 거지.” “나 간호사 자격증 있잖아. 미국에서 취직 잘 된다던데.” “그 직업이 너랑 영 안 맞다며. 퍽이나 오래 잘 하겠다야.” 해미는 아아, 하며 짜증 나는 말투로 신경질을 내더니 “언니도 많이 변했어! 영화 언니랑 다를 게 뭐야. 완전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네”라고 받아쳤다. “나도 한국에 올 땐 간호사로 다시 살아 볼 생각도 해봤어. 근데 일단 귀화해야 한국 간호사 자격시험을 칠 수 있더라. 귀화하려면 우선 영주권부터 따야 하는데 한 달에 350만 원 이상은 벌어야 한대.” 해미와 대화를 하다 보면 곧잘 이성적으로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싶은 나와 이 모든 상황에 그저 막막할 해미에게 공감하며 토닥이고 싶은 나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곤 했다. 한국 젊은이들조차 힘들어할 만큼 구인 시장은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 발 디딜 틈이 더 협소해졌다. 그럼에도 난 해미에게 마음과 달리 딱딱한 태도로 또 핀잔을 늘어놓게 된다. 20대의 나도 해미만큼 인터넷에 올라오는 혐오 글 하나에도 두렵고, 일도 연애도 어려운 일로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금세 아린 기억들을 망각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먹고 살기 참 팍팍하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틈에서 또 꾸역꾸역 자신을 갈아 내며 노력하고 적응하는 게, 해미 눈에는 퍽 어른스러워 보이고 그만큼 자신이 더 작고 초라해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미야, 나도 진퇴양난의 막막함을 무방비로 견뎌 내기만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어.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고, 한국 청년들처럼 숨 가쁘다는 이곳에서 감히 신음을 낼 수도 없었어. 그렇다고 삼촌, 이모처럼 공장에서 노동으로, 식당에서 설거지로 삶을 영위하고 싶지는 않더라고.” 해미에게 이 순간 뼈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생존 필살기는 뭐가 있을까 싶어 난 오래전 기억을 톺아보았다. 다음 달 식대가 걱정될 때는 인력사무소에 전화해 간간이 공장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끈적한 마스크팩을 포장한 날도 있었고 요란한 기계음 소리에 종일 노출되며 견과류를 포장하기도 했었다. 남은 시간엔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중국의 유명한 인문학 도서들을 골라 작가에게 직접 메일로 승낙을 구한 뒤 번역해서 한국 출판사들에 출판을 의뢰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번역했던 크고 작은 공공 문서와 남편의 예전 회사에서 작업했던 영상물까지 그럴듯해 보이게 경력으로 꾸몄다. 첫 번역 책이 출간된 날, SNS에 올렸더니 세계 각지의 친척들은 설날 분위기처럼 모여들어 하트를 누르고 맞춤법이 뒤죽박죽인 채로 댓글 축제를 벌였다. 둘째 외숙모가 프랜차이즈 한식집 주방에서 10년 넘도록 셀 수 없이 많은 그릇을 닦아 고향집에 아파트를 샀을 때보다 더 과한 액션으로 내게 출세니, 성공이라는 오버스러운 표현을 안겨준 친척들에 난 얼떠름해졌다. 어쩌면 적자를 기록하고 조용히 묻힐지도 모르는 책의 표지에 내 이름 석자가 박혀 있다는 것만으로 출세니, 성공이라고 정의하다니. 밤늦게 칭다오에서 국제 전화를 걸어온 해미가 ”언니, 너무 멋져요! 드디어 해냈군요!” 하며 청승맞게 흑흑 울던 일도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친척들 사이에서 이름은 그럴싸하게 프리랜서 번역가로 불렸지만, 매번 번역할 책을 골라 편집자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중화권 인문 도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도서들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고 난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번역할 책을 찾아 헤맸다. 번역한 책 소식이 뜸해질 즈음에 친척들은 하나둘씩 좋아요를 눌렀던 게시물 밑에 대놓고 걱정스러움을 티냈다. 현화야, 입에 풀칠은 하고 지내니, 라고.
난 해미의 집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렀다. 어느 순간 해미는 낮에는 침대를 다시 소파로 세팅하는 짧은 노력도 귀찮았던지 침대를 그대로 두었다. 내가 놀러 가도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말대꾸만 했을 뿐 잘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때마다 이제 갓 한국에서 적응을 시작했던 때의 서툰 내 모습이라도 상기해 해미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는 의지 하나 없이 자꾸 냉랭한 소리만 하고 싶어지는 걸 애써 참았다. 어디론가 자꾸 떠나야 한다는 건 나나 해미에겐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해미는 긴 시간 연길을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자리, 그 집에 꿈쩍 않는 우리 엄마를 좋아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었을 텐데도, 가족 중 아무도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근거리에 모여 살던 시절을 종종 기억해 냈다.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 때마다 생선 장수였던 큰삼촌은 오징어며 고등어를 들고 오셨고 농사짓는 둘째 삼촌은 그해 농산물들을 아침 일찍 따왔다. 둘째 이모는 양계장을 했었으니 계란들을 짚에 조심히 싸서 들고 왔다. 우리 집 앞마당에는 커다란 넝쿨을 자랑하는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고 집을 알아보던 중에 엄마는 이 집 앞마당에 여자 주인이 오래전부터 키워 왔다던 포도나무를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셨다. 수확의 계절이 지나 겨울이 올 때쯤엔 넝쿨을 땅에 묻고 따듯한 봄이 오면 지지대 그늘막을 설치하고 넝쿨을 꺼내 세웠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기적처럼 새싹이 돋고 나뭇잎이 자라고, 파랗던 포도 열매가 짙어가는 가을과 함께 보라색으로 익어 가는 과정은 이제 엄마뿐 아닌 가족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과 위안이 되었다. 엄마에겐 주위의 아끼는 친척과 이웃 모두에게 포도 한 송이씩을 선물하는 게 낙 중의 낙이었다. 엄마는 사람의 머릿수대로 포도송이를 잘라내 아기에게 포대기를 씌우듯 한 송이씩 소중하게 은박지에 쌌다. 해미와 내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깔깔 웃으며 기분 좋은 담소를 나눌 수 있을 때는 대부분 과거의 추억에 관해 얘기할 때였다. 그젯날 어느 가족의 생일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 집 마당 앞 커다랗던 포도나무에 대해, 모두가 고향을 떠나기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큼은 뭐가 됐든 행복 필터가 씌워진 듯 아무리 떠들어도 지치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농사짓고 닭과 돼지를 키우고 포도나무를 쳐다봤던 건 반은 생존이었고 반은 서로에게 베푸는 낙 때문이었다는 걸 우린 부인할 수가 없었다. “언니, 사는 건 반은 생존이고 반은 낙이어야 하나 봐. 근데 칭다오나 여기나 너무 빡세. 난 아직 연마한 생존 스킬도 없는데.” 그건 그렇다고 나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해미가 고등학생이었던 그 시절 한국에 홀로 나와 내가 얼마나 분투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해 줄 기회가 그동안 없었다고 믿었지만, 이젠 말해 줄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그냥 동네 카페 알바 자리라도 생기면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삶의 낙을 좀 찾아볼까? 그림을 그린다거나 팬 할 아이돌을 찾아본다거나.” 난 힘없이 입술을 움씰거렸다.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네, 근데 말이야”라며 뒤에 아무 고민 없이도 이어질 말이 싫어졌다. 스퀘어 부수듯 스펙을 계속 쌓고, 사기를 당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세를 목표로 적금을 꾸준히 해야 하고, 한국식 재테크도 배워 둬야 하고…… 무엇보다 차이나타운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에 잘 섞여 살려면 한국의 근현대 역사나, 이 국가 기준의 민주주의 의식, 시민 의식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는 고루한 상식을 해미는 한참을 말없이 듣다가 반문했다. “근데 그렇게 하면 그냥 한국인이 되는 거 아니야? 중국에서 한족화되는 것처럼 여기서도 동화되는 거잖아. 난 말이야,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아니면 미국에 가서든 어디서든 동화되지 않고 잘 생존하는 조선족이 되고 싶어.” “그래. 응원해.” 나는 조금은 무기력하고 새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킨 날개 여섯 조각을 다 먹은 해미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쪽쪽 빨더니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고는 먼지 한잠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가볍게 일어섰다. “언니, 우리 날씨가 서늘해지면 한강에 가자.” “한강에는 왜?” “놀라긴. 돗자리 깔고 치킨이나 먹자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한강이 그런 용도라던데.” “그래. 난 가끔 한국인들도 이곳에선 살기 막막하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아와의 싸움이라잖아. 이주민이라 겪는 어려움과 그냥 인간이라 다 겪을 법한 어려움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사실 나도 갈 길이 멀어.” “알겠다고. 알겠으니, 치킨 값이나 벌게 번역 좀 많이 해 둬.” 그러곤 내가 독서 좀 하라며 들고 온 다섯 권의 책 중 『세계인권선언』을 쑥 뽑았다. “이거 먼저 볼게!” “오~! 멋진데. 왜 그 책을 골랐어?” “제일 얇잖아.” “제일 어렵고 내용이 지루할 건데. 쌤통이다.” 해미는 소파에 누워 책을 펼쳤다. 저건 5분 뒤에 책을 수면제 삼아 또 잠들겠다는 신호다. 나는 소파 밑에 스카이다이빙하듯 엎드린 채 부동산 앱을 클릭했다. 그동안 모은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니 신생아 특공을 노려 서울 인접 경기도권의 아파트 청약을 노려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우린 그제야 임신 계획을 실행했고 며칠 전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을 확인했다. 해미가 알게 되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겠지만 난 이런 부류의 삶에 어쩌다 보니 적응하게 되었다.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서 태어났다. 2023년 소설집 『야버즈』로 국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24년 봄호에 단편소설 「여기는 서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