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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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박남수, 감각적 이미지와 성찰적 디아스포라

이형권

▲ 박남수 ⓒ필자 제공



박남수(朴南秀) 시인은 1918년 5월 3일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의 숭실상업학교를 거쳐 일본에 있는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처음에 희곡 창작에 관심을 두었으나 시 창작으로 전향하고 나서 한평생 시인으로 살았다. 1939년 10월에 문예지 《문장》에 「심야」, 「마을」 등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수록되고, 이후 1940년 1월까지 「마을」, 「주막」, 「초롱불」, 「밤길」, 「거리」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장한다. 그는 등단 이전에도 1932년 《조선중앙일보》에 「삶의 오료(悟了)」, 1935년 《시건설》에 「여수」, 1936년 《조선 문학》에 「제비」, 1938년 《맥》에 「행복」 등을 발표한 경력이 있었다. 그의 시 창작 활동은 등단 시기보다 여러 해 앞서 있었다.
1940년에 박남수는 첫 시집 『초롱불』을 발간한다. 이 시집에는 모더니즘적 기법에 기반을 두고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 주는 시가 많은 편이다. 1945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진남포지점에 입사해 평양지점장을 맡는 등 직장 생활에 충실했지만,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한 이후로 직장 생활보다는 집필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1952년에는 현수(玄秀)라는 이름으로 『적치 6년의 북한문단』을 간행하고, 1954년에는 《문학예술》을 주재하면서 왕성한 문단 활동을 이어간다. 또한, 1957년에는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과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에 제5회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
박남수는 첫 시집 간행 후 18년이 지난 1958년에 이르러서야 제2 시집 『갈매기 소묘(素描)』를 간행한다. 이 시집은 이전에 추구했던 이미지즘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후 1964년에는 제3 시집 『신(神)의 쓰레기』를 간행하는 한편,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교편을 잡기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불안정한 시간강사 신분으로 불규칙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형편에서도 그는 1970년에는 제4 시집 『새의 암장(暗葬)』을 발간하고, 1975년에는 장편 서사시 『단 한 번 세웠던 무지개―살수대첩』을 발표하는 등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1975년, 미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찾아 고국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박남수 시인은 플로리다, 뉴욕, 뉴저지 등지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등 생활인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전해진다. 자연히 시 창작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정착한 후 6년이 지난 1981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제5 시집 『사슴의 관(冠)』을 발간한다. 이후 다시 10여 년간의 침묵 생활을 거친 뒤 1992년에 제6 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을 발간한다. 이즈음에 박남수 시인은 다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1993년에는 제7 시집 『그리고 그 이후』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다시 제8 시집 『소로(小路)』를 발간하여 공초문학상을 수상한다.
박남수 시인은 제8 시집을 간행한 그해에 세상과 작별을 한다. 그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국내외를 떠도는 굴곡진 생애를 살았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으나, 1·4 후퇴 때 월남하여 서울, 부산 등에서 살다가, 1975년에는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남한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이주민의 삶을 살았는데, 이러한 삶의 여정은 그가 살았던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기질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남북 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의 정치적 파시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폭력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순수한 세계를 향한 남다른 열망이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살게 했다.
박남수의 월남(越南)과 도미(渡美)는 그의 시에 큰 영향을 끼친 두 사건이다. 그의 시는 월남 이전과 이후, 도미 이전과 이후가 명료하게 구분된다. 이와 관련하여 박남수의 시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30년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창작한 시편들로서 순수 서정에 기초한 감각적, 감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제2기는 광복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시편들로서 여전히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순수를 향한 존재론적 갈망과 사회의식을 빈도 높게 드러낸다. 제3기는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한 1994년부터 작고하기까지 창작한 시편들로서 모국을 향한 향수나 이국 문화와의 동화 과정, 노년의 성찰 등이 중심을 이룬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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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며 문예지 『시작』, 『시와시학』 편집위원, 국제한인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미주 한인 시문학사』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1998년 『현대시』 문학평론 부문 우수작품상, 2010년 편운문학상 문학평론 부문 본상,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가상, 2021년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