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호
유언, 일기
윤석정
유언
몸이 폐에 남은 숨을 다 빼내지 못했다
잠깐 빛났다 꺼진 눈빛 끔벅이다가 눈 뜬 채
아홉 살 어느 날의 마음을 깨웠다
마음은 허공이어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말
아이는 막 태어나 울음으로 말을 배웠다
숨이 멎기 전에는
입을 열고도 울음을 뱉을 수 없었다
아이의 꿈에 등장해도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엄마 얼굴이
입에서 태어났다 몸은 허공의 입이어서,
곁에 있지 않아도 들려오는 말
오늘을 넘기지 못할 목숨이
소파에 앉은 사람이 됐다
병실 침대에 누운 사람이 됐다
사람은 허공을 쏟아낸 듯
평생 죽기 살기로 숨을 쉬었는데
한 줌 남은 숨으로
겨우 일으키는 고향의 뼈대
아홉 살에 지게 지고 오갔던 산들
길고 느리게 들리던 소 울음
울음이 서러워 저녁노을 언저리로 잠수하던 철새들
예고 없이 목덜미로 감기던 바람의 살들
살아 일어나는 엄마였다
그러니까 고향은
어디에서나 있는 마음 같았다
그러니까
고향의 뼈대가 마음이 되어서,
마음에 있는 무덤을 엄마라고 했다
꿈속 등장인물이 엄마뿐이던 세 살
마음의 발등에 무덤이 부풀었다
아홉 살 어느 날
땔나무 가득 채운 지게 둘러메고
멀찍이 떨어져서 무덤을 보다가
무덤의 등뼈를 어루만졌다
울음에도 뼈가 있었다
마음 밖 어딘가에서 엄마가 꺽꺽거렸다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깍깍거렸다
혼자서도 무섭지 않았고 슬프지 않았다
아홉 살이 막을 수 없는
그러니까 전쟁은
바람의 살들과 고향의 뼈들을 불태웠다
그러니까 시절을 통째로 잡아먹었다
그 사이
아홉 살의 울음을 두고 왔다
그 울음만 데려오면
꿈속에 등장한 엄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향의 뼈들이 마음의 굴뚝으로 빠져나갔다
아홉 살의 잠에서 깨어나니 여든 살이 됐다
폐에 남은 숨 전부 빼낸 몸이
마지막까지 마음에서
울음의 뼈만 빼내지 못했다
일기
스위치가 내려지지 않는다 빛으로 소멸하는 촛불처럼 물로 녹아내릴 눈사람처럼 거품으로 닳아갈 비누처럼 형태를 잃고 있는 오늘의 스위치 종말 이야긴 어떤가 폐점 할인 행사 끝난 날 유행 따라가다 망한 옷 가게 진열된 옷 낱낱이 넘기다가 옷 무늬에 갇힌 다국적 동식물들 오갈 데 없는 부랑을 매만지니 떼 지어 슬픔이 도망간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나는 웃다가 운다 울다가 웃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 태우고 바닥이 된 촛불처럼 다 녹이고 바닥이 된 눈사람처럼 다 버리고 바닥이 된 비누처럼 무늬 없는 바닥이 된 오늘의 스위치 장례식장에서 부활한 사람이 없지만 스위치로 부활한 사람들 이름이 있지만 누군지 모르는 이름들 아무도 모르게 형태를 잃어가도 지구는 우주의 먼지 먼지보다 더 먼지인 나는 비유의 스위치 오늘을 내린다, 내려지지 않는 스위치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페라 미용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가 있다. 2016년 내일의 한국작가상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