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itle_text

9호

자전거 박사

이병군

요즘 주변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적지 않은 젊은 직장인들이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하다못해 전기자전거를 이용한다. 현재 내가 사는 도시에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반면에 전기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자전거가 기름 한 방울 안 쓰고 신체 건강에도 도움이 되긴 하나 추운 날 같은 경우 페달을 밟는 자전거보다는 전기자전거가 편리하긴 하다. 그런데 나는 일반 자전거를 좋아한다. 길이 자주 막히는 도시에서 여간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는 게 운전하는 것보다 편리하다. 그뿐만 아니라 도로 정체나 주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지금도 종종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자전거를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다. 시간은 바야흐로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인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반년 동안 조교 생활을 하다가 2011년 초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유학생들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부모님과 학교 밖의 월세 집에서 살았다. 많은 조선족 가장들처럼 부모님도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에서 일했다. 기숙사 생활이 훨씬 자유롭고 편했지만 돈을 절약하기 위해 두 번째 학기부터는 기숙사를 빼고 학교 근처 월세 집을 잡아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500에 30 하는 작은 반지하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그래도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부모님을 돌볼 수 있는 터라 일석이조라 생각했다. 그때 어머니는 보모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지병으로 작은 수술을 마친 후라 택시 회사에서 세차하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이면 세차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전철 타기에는 애매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적당했다. 그런데 새 자전거를 사기에 부담스러워 고물상에서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사서 수리해서 타고 다녔다. 고물상에는 버려진 자전거가 많았는데 오래 방치한 관계로 녹이 슬어 작동이 잘 안된다. 많은 사람들은 고장 난 자전거를 고물로 팔거나 버렸다. 그중에 일부 자전거는 부품을 한두 개 교체하면 새 자전거 못지않게 오래 탈 수 있었다. 그러던 며칠 후 원래 타던 것보다 상태가 좋은 중고 자전거가 생겨서 아버지는 자전거를 바꿨다. 나는 아버지가 처음에 타던 중고 자전거를 저렴한 가격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그런데 의외로 구매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바로 팔릴 줄이야. 이게 우리 집 중고 자전거 사업의 첫 발디딤이었다. 그런 이후 아버지는 매일 퇴근하고 시간만 생기면 고물상에 가서 고장 났거나 버린 자전거를 구매해서 수리하고 나는 사진을 찍어서 중고 사이트에 올렸다. 아버지는 중국에 계실 적에 평생을 불도저 운전한 경험이 있어 기계 수리에 능숙해 자전거 수리하는 것쯤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조금씩 번 돈은 우리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무리 저렴하게 판매되는 자전거라 할지라도 세밀하게 정비해서 새 자전거에 버금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교환학생이나 한국에 온 유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것을 생각하여 되도록이면 저렴하게 팔려고 했다. 그렇게 입소문이 돌면서 점점 구매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세차하던 일을 그만두시고 자전거 수리를 전업으로 했다. 어머니도 보모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중고 자전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우리 집 자전거 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고물상에서 고장 난 중고 자전거를 구입해서 부품을 교체해서 수리하고 어머니는 자전거를 닦고 녹 제거를 했다. 나는 정비된 자전거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사진을 찍어서 여러 중고 사이트나 카페에 올려 판매를 담당했다. 공부를 하는 한편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장사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국분들은 다들 늦게 자는지 새벽에도 문의 전화가 자주 와서 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매일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지만 수익도 괜찮은 편이고 부모님이 밖에서 하는 일보다 쉬운 편이어서 나는 나름 흡족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자전거 특성상 중고이고 택배로 많이 발송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가끔은 배송 과정에서 파손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부터 문제는 복잡해진다. 어떤 때는 색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연락 오고 또 사이즈가 마음에 안 든다고 연락 오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한동안 타다가 고장 나서 수리비를 부담하라고 연락 오는 사람들도 있다. 작은 문제는 서로 협상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다투는 일들도 가끔 생긴다. 손님과 다투다 억울할 때는 부모님 몰래 여러 번 울기도 했다. 택배 거래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직거래도 적지 않았다. 한국 사이트에도 광고 올리고 중국 유학생 카페에도 올리다 보면 가끔 중국 사람과 한국분이 동시에 오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중국 유학생과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은 어떤 한국 분은 “아, 중국 사람이었어요?” 하면서 굉장히 의아해한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럼 이 자전거들은 장물 아닌가요? 혹시 문제 있는 자전거 아니에요?” 하고 매우 미심쩍어하면서 구매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편견을 가져서 처음에는 서러웠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았다. 중고 자전거를 팔면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자칭 목사라는 분이 사이트를 보고 자전거를 구매하러 왔었다. 내가 사이트에 올린 자전거가 저렴하니 자신들의 교회 수련회에서 사용한다면서 열다섯 대를 주문했다. 그래도 한번 타보고 결정하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분은 괜찮다면서 사양했다. 대금은 자전거를 교회까지 가져다주면 준다는 것이었다. 한 번에 열다섯 대를 팔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부푼 나는 작은 용달차를 불러 열다섯 대를 차에 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지정한 자리에까지 내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대금은 내가 돌아가면 바로 입금해 준다고 했다. 대체로 종교 신앙이 있는 사람이 심성이 착한 편이라 그렇게 하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입금이 되지 않아 전화를 걸어 여쭤봤더니 자전거 상태가 별로여서 입금을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었는데 그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입금하겠다는 것이었다. 옥신각신 다투다가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용달차를 불러 땀을 뻘뻘 흘리며 열몇 대를 다시 실어서 돌아왔던 적이 있다. 거래하지도 못하고 용달 비용만 10만 원 내외 손해 봤다. 물론 그동안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착하고 고마운 분들이 훨씬 많았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분이 와서 중고 자전거 두 대를 구매했는데 그분이 돌아간 후 확인해 보니 만 원이 더 많았다.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 돈 만 원을 더 주셨네요.” 했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이 “아버님이랑 아드님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비록 얼마 안 되지만 커피 한 잔이라도 사드세요. 일부러 만 원 더 드렸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으나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훈훈하고 따듯해서 잊히지 않는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우연찮게 시작한 중고 자전거 사업은 5년 넘게 지속되었다. 비록 많은 시련과 어려움의 시간이 있었지만 나름 보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우리가 정비한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한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려서 보내주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름 가슴이 뿌듯했다. 또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유학생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자전거를 판매했다가 그 학생들이 졸업하거나 귀국하게 되면 다시 회수해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첫 번째 거래부터 기록했는데 5년간 6천 대에 육박한 자전거를 수리해서 판매했다. 얼핏 보기에 6천 대가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녹슬고 고장 난 자전거에 하나하나 새 부품을 교체하고 정비해서 탈 수 있는 자전거로 만드는 데 적게는 반 시간, 많게는 한 시간 넘게 소요된다. 한국에 인구가 5천만 명 조금 넘는다고 했으니 만 명당 한 명 넘게 내가 판매한 중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셈이다. 고물상에 버려진 중고 자전거에 새 생명을 입혀 준 것인데 어쩌면 환경 보호에 자그마치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중고 자전거 판매한 수입으로 나는 순조롭게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몸이 편찮은 관계로 내가 졸업할 무렵 자전거 수리하는 일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비록 그동안 많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 그때의 일들은 나한테는 소중한 경력이 되었다. 아마 그런 계기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자전거에 애착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지금도 주위 사람들한테 “아들은 박사지만 나도 한때는 한국에서 자전거 박사였어.”라는 농담을 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웹진 《너머》에 투고되어 선정된 작품입니다.
필자 약력
이병균_프로필.jpg

1987년 중국 길림성 통화시에서 태어났다. 중국 연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연변 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2년에 중국 조선족 청년 작가상을 받았다. 중국에서 우리말 문학 잡지인 《장백산》, 《연변문학》, 《도라지》, 《송화강》 등에 다수의 소설, 수필, 시를 발표했다. 현재 중국 산동사범대학교 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