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9호
갈고리
심윤경
날씨가 쌀쌀했는데도 이마와 목덜미에 진득한 땀이 배었다. 올라오는 언덕길이 생각보다 꽤나 가팔랐다. 약속한 시간에서 30분 가까이 늦어, 김 기자가 10분쯤 시간을 끌고도 모자라 부목사가 임시변통으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전화도 안 받으면 어떡합니까? 이러면 곤란합니다.” 부목사가 일단 무슨 소리라도 시작했으니 한숨 돌릴 겨를이 생겼다. 김 기자가 내민 종이컵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삼켰지만, 컵에 담긴 물이 미지근해서 거슬렸다. “지금도 전화 오는 거 아니에요?” “별일 아니야.” “다른 사람들 신경 쓰이잖아요. 받든지 전화기를 꺼놓든지 하세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살 필요는 없다. 승용은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모르는 체하고 점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 했으나 그의 손에 따라 나온 것은 절반쯤 구겨진 노란 티켓이었다. 티켓에 쓰여 있는 글씨로, 그곳의 이름이 온음 갤러리였던 것을 이제 알았다. “갤러리에 다녀오셨습니까?” “화장실에 가느라.” “화장실은 여기 와서 가도 되잖아요. 지난번에도 길을 잃지 않으셨어요?” 김 기자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게 듣기에 따라서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항상 그런 식이지 않았나, 승용은 의심했다. 구겨진 티켓에는 경로 우대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왜 경로 우대야, 아직 2년이 남았는데. 오만데로 모멸감이 몰려들어, 목덜미를 문질러 닦은 휴지를 구깃구깃 뭉치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지난번에는 오십이댔지 않아? 이런 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아.” “늘 그럴 수는 없잖아요?” “자꾸 낮아지는 거 같으니?” “안 하시려거든 말든가요.” 싸가지없는 새끼다. 승용은 강연료가 점점 헐해지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강연료가 적다고 거절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얼마가 되었든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통장이 비어 갈 무렵 휴대폰에 떠오르는 김 기자의 전화 통화는 언제나 가뭄의 단비같이 반색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강연 한 번에 몇백만 원이나 받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기껏해야 회당 몇십이 고작이었다. 지난번에 십만 원이 든 봉투를 받고 기가 막힌 걸 꾹 참았는데 그 분함이 오늘 튀어나오고 말았다. 김 기자와 이런 식으로 툭탁대면서 벌써 16년째였다. 인생이 다, 지긋지긋했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누구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대한의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저 북쪽에 김씨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이상, 한국에서 안전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들을 잃은 후 저도 백번 천번이나 함께 이 세상을 떠날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살기로 했습니다.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북한 김정은 왕조와 그에 동조하는 남한 빨갱이들에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인민의 피를 빠는 북한 정권의 폭압을 멈추고 저 돼지 같은 김정은이 북한 땅과 인민을 중국 아가리에 넣어 바치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통일이 오는 그날까지, 더 강력하고 단단하게, 저놈들의 숨통을 조여야 합니다. 우리 낙성이는 북한의 해커와 싸우며 김정은이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그러느라 그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들이 하던 일을 세상에 알릴 책임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청중들은 대부분 노년층이었다. 랜섬웨어나 크래커 같은 용어가 나오면 그들의 시선은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강연 자체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어서, 욕설이나 주먹질로 장단을 맞추곤 했다. 그 열기에 승용의 가슴도 불끈했다. 드물게 섞여 있는 젊은 얼굴들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향할 때면 반대로 가슴이 답답하게 가라앉았다. 냉담한 얼굴로 강연을 듣다가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들은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럴 것을 왜 와서 앉아 있누.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겠지. 이삼십 명이나 되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등에 업고 승용은 강연을 마쳤다. 흰머리 한 올 없이 진하게 염색한 여자 노인 하나가 다가와 그를 덥썩 끌어안았다. “모진 세상이지만 독하게 살아내시우. 아들 몫까지. 저 돼지 같은 김정일이가 뒈지는 걸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게 이기는 일이야.” 김정일은 진즉에 뒈졌다. 요새는 김정일이 누군지도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승용이 고개를 젖히고 어깨를 뒤로 뺐지만, 노인의 팔은 완강하게 승용을 죄어들었다. 검고 얇은 머리칼이 승용의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김 기자가 다가와서 노인을 떼어 주었다. 부목사와 교회 식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은 천천히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김 기자는 점심을 못 먹어서 국수 한 그릇 먹고 가겠다고 했다. 함께하자는 소리 같지 않았지만 그냥 마주 앉아 국수 두 개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넓지 않은 이차선 도로 건너편에 온음 갤러리가 있었다. 문간 입간판에 서 있는 노란색 포스터를 보자 희미하게 멀어졌던 기억이 되살아 돌아왔다. 아까,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교회로 가는 길을 찾던 때에도 저 노란색 포스터가 돌연히 사람을 홀렸다. 돌아온 기억은 승용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언덕바지를 올라 교회로 향했으면 되었을 텐데, 멍해져서 낯선 갤러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저 노란색 포스터, 그게 망할 일이었다. “병원에서 다른 소리를 하지는 않아요?” “무슨?” “기억력. 점점 더 깜빡깜빡하시는 거 같아요.” “중요한 일을 까먹지는 않아.” “강연이 중요한 일 아닙니까?” “누가 까먹었대? 화장실에 잠시 들른다는 게 그리되었다지 않아.” “지금도 전화 오잖아요? 안 받으세요?” 김 기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짜증스러워졌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전화기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버튼을 눌러 통화를 거절했다. 누구에게 더 짜증스러운 날일지, 알 수 없었다. “딸인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급한 일도 아냐.” “손자가 아프다고 했잖아요, 급한 일 아닙니까?” 이 새끼는 도무지 싸가지가 없다. 물컵에 따른 소주가 영 맹물 같았다. 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 보니 그의 사정을 빤하게 꿰고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첫 손자를 보았을 때 딸이 낳은 아이는 첫눈에도 부실해 보였고 정이 착 붙지 않았다. 외손보다는 친손이 진짜 혈육이라는 관념이 그의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이제 그는 친손자를 볼 수 없는 운명이 되었고 외손자는 자라는 내내 이상하더니 별별 기상천외한 병명들을 줄줄이 물고 왔다. “올바른 거 하날 더 낳으라고 해도 듣지두 않아. 에잇.” “아이가 심장병이 있다고 했지요?” “심장병은 뭐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 그건 병이 맞다구. 하지만 자폐라는 건, 이봐, 그건 병이 아니야. 난 북에 있을 때 자폐라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가 평양에서 혜산까지 방방곡곡 안 다닌 데가 없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북한 사람들은 자폐가 뭐인지 아예 알지도 못해. 그런 게 있지가 않으니까. 북한이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야. 중국에도 없어. 근데 여기서는 그걸 병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위해. 위하고 모시고 벌벌 떨어. 자폐라고만 하면 왕도 세상에 그런 왕이 없어. 그게 말이 되나 대체? 그런 건 북한이 좋아. 거기선 사람이 아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니까.” 김 기자는 대답 없이 국수만 후루룩 들이켰다. 짜증스러운 눈길이 자꾸만 승용의 휴대폰 화면을 향했다. 승용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국수 가게 바깥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걸 봐, 저걸 좀 보라구, 김 기자의 시선이 승용의 손가락 끝을 따라, 마지못해 돌아갔다. “저거 봤어?” 김 기자는 길 바깥쪽을 한 번, 승용을 한 번 보고 다시 국수로 시선을 돌렸다. 김 기자에게는 갤러리의 포스터가 그리 별다르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 기자는 국수만 훌훌 털어 마시고 겨우 한 잔 받아 놓은 소주잔도 깨끗이 비우지 않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고 일어섰다.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승용은 마음이 허전했다. 그깟 소주 한 병 비우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일어서다니, 승용은 서울깍쟁이 같다는 표현의 느낌을 아마도 김 기자 앞에서 가장 자주 느꼈다. 김 기자가 떠나자 왠지 술맛도 가셔, 승용은 절반쯤 마신 소주병을 닫아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은 반병 남은 소주병을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강연도 마치고 소주도 넣으니 왠지 마음이 두둑해져, 승용은 길 건너 온음 갤러리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면 아까도 별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화장실을 쓰려고 들어갔을 뿐인데 사내 둘이 그를 에워싸고 힘으로 끌어내겠다는 식이었으니 그 역시 좋지 않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두둑해진 마음으로, 피차간에 오해였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말주변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런 뜻을 담아 이야기했다. 매표원은 작고 어려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승용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긴장한 얼굴이 왠지 승용의 기분을 거슬렸다. 아까도 그랬지. 사람을 무슨 폭탄을 대하듯이 하지 않아. 아까 그는 노란 포스터를 보고 홀린 듯 갤러리에 들어섰다가, 티켓을 사야 한다는 소리에 화장실만 좀 쓰고 나오겠다고 대답했었다. 남한에서는 이런 수단이 잘 통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장실이 전시 구역 안쪽에 있고, 공공 화장실이 아니니 지하철역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답을 듣고 역정이 났다. 방금 지하철역에서 올라왔는데 돌아가라는 말이냐, 그냥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언성을 높이자 경비원이 나타났다. 경비원 역시 육십은 넘어 보여,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남한 사회와 사람에 대해 항시 느끼는 위압감이나 주눅 든 느낌과는 별개로, 제 놈들과 개별로 한판 붙으면 지지 않는다는 속마음이 승용에게는 항상 깔려 있었다. 그게 항상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남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공사장에서 수레에 마대자루 하나 똑바로 쌓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잘 먹어서 덩치는 커다란데 몸을 쓰는 일에는 한심하고 어리숙한 게 한국 사람들이었다. 밀치고 눈을 부라리기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무르게 물러선다는 걸 승용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절차를 밟아 승용의 주머니에 경로 우대 무료 관람 티켓이 들어가게 된 것인 듯했다. 그렇게 생떼를 쓰고 악착같이 들어선 전시실에서, 승용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별 생각 없이 둘러댄 화장실은 다시 쉽게 잊었다. 거리에서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노란 포스터는 알고 보니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작품이었다. 약간 소란을 피우며 들어온 자신에게 쏠린 관람객들의 눈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다 잊고 그 앞에 섰다. 당신은 어떻게 이걸 보았지. 이런 건 세상에 다시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당신도 거기에 가본 거야? 그게 언제였더라. 원산에 고속도로가 나기 이전이었던 듯싶으니 내가 열일고여덟쯤 되던 무렵이었겠구먼. 왜 거기 갔는지는 생각나지 않아. 해당화가 지천이었으니까 봄이었겠구. 집에서 이삼십 분이면 닿으니 일없이 노상 가던 명사십리 바닷가였는데, 그런 풍광은 처음이었어. 그전에도 그 뒤에도. 말갛게 뻗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송홧가루가 뒤덮여, 온통 노랑 세상이 된 거야. 아주 샛노랗게 뒤덮였지. 벌써 높이 올라간 아침 햇살의 음영이 노란 모래사장의 표면에 호랑이 가죽처럼 길고 어른어른한 무늬를 남겼어. 동무들이 함께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보통은 무리 지어 몰려다녔으니까 누군가 있었을 텐데, 그날은 혼자였던 것 같아. 굉장한 풍경 앞에 주변을 잊었는지도 모르지. 그날따라 바람의 방향이 달랐던 걸까? 명사십리에 안마당처럼 몇십 년을 드나들었지만 그렇게 송홧가루가 백사장을 온통 뒤덮은 모습은 그때 말고 본 적이 없어. 이상한 것은, 그날의 모습이 기억 속에 하늘과 바다까지 노란색으로 남았다는 거야. 하늘이 노란색일 리가 없잖아? 진짜로 하늘이 노랬으면 정말로 이상했겠지. 세상에 종말이 오나 했겠지. 근데 이상하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늘은 분명히 파랬을 거야. 새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날 갑자기 노랗게 변한 백사장. 그거였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 기억에는, 그날 온 세상이 다 함께 노란색으로 변한 걸로 남아 버렸어. 처음에는 무턱대고 황홀경에 빠졌어. 황금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단 말이야. 그때 느낌이 정확하게 그랬어. 내가 세상의 황금을 모두 차지할 거라는 계시와도 같이 느껴졌지. 난 원래부터 돈을 밝혔는가 봐. 황금을 쥐듯이 모래를 한 움큼 떠보기도 하고, 그렇게 행복해져서 한참을 떠돌았어. 그날을 어떻게 마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한참 떠돌다가 흥이 내렸을 때, 그냥 돌아갈 때가 되었다 싶을 때 돌아갔겠지. 그게 다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런 걸 다 안 게 누구야? 누가 이런 걸 만들었냐고. 오래전에 나 혼자 원산에서 보았던 풍광을, 누가 이렇게 여기다, 이렇게 크게. 그 작품 앞에 다시 돌아와, 승용은 옆에 있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가 들을 거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관람객들은 그에게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두고자 했다. 승용 또한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것들이 그의 안에 있는 줄도 모르다가 불식간에 쏟아져 나왔을 뿐이었다. 아까는 실랑이가 벌어져 자세히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 승용은 여유를 가지고 꼼꼼히 보고자 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작품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물결, 꿈의 그림자〉. 그것이 꿈이었다는 말이야? 승용은 작가가 곁에 있는 것처럼 물었다. 당신은 그걸 꿈에서 보았다는 말인가? 나는 진짜로 보았어. 그건 꿈이 아니었어. 이제는 꿈이었던 것처럼 어른어른하기는 해. 시간이 오래 흐르면 다 그렇게 되지 않아? 그건 꿈같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꿈은 분명 아니었어. 꿈의 그림자라니 더 웃기구먼 그래. 꿈도 어른어른한데 그것의 그림자라면 더 말갛게 투명하게 기억에서 사라지는 거겠지. 진짜 내가 보았던 것은 더 텁텁하고 그랬던 것 같아. 송홧가루란 것이 맑은 색깔이 아니잖아. 그 밑에 모래가 있고 하니까 더 텁텁한 색깔이 맞았어. 그런데 기억에는 아주 말간 빛깔이거든. 명사십리 모래가 누렇지 않고 아주 말갛기는 해. 다른데 모래랑 댈 수가 없이 하얀색이야. 그 위에 노란 가루가 얹혔으니까 아주……. 이게 뭐야? 승용은 질겁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아까도 그렇게 놀랐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놀랐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보인 그것이 무엇인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승용은 한눈에 알아차렸다. 나무배에 그물을 고정할 때 쓰는 갈고리였다. 그가 명사십리 바닷가의 모래사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노랗게 칠한 수천수만 개의 갈고리가 모여 이룬 거친 음영이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아니더라도 뭔가 모래처럼 부드러운 질감일 것이라 짐작했던 승용은 불시에 갈고리에 찔린 짐승처럼 몸을 움츠렸다. 이런 갈고리는 남한에서 볼 수 없다. 남한의 바닷가에서는 무언가를 고정할 때 개의 목줄을 채울 때처럼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둥근 고리 두 개를 엮어 사용했다. 시커멓고 뾰족하고 사람의 내장을 뚫을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에서 반세기나 뒤떨어진 어떤 야만적이고 가난한 사회에서나 소리 없이 사용하는 갈고리였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드세요?” 그의 곁에 서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살짝 닭벼슬처럼 세운 머리, 두꺼운 뿔테안경, 남색 재킷, 굵은 체크무늬 바지는 제각각 전혀 다른 풍류들의 조합인데 이 남자에게 모여서 꽤나 괜찮게 어울렸다. 그래도 승용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걸맞은 차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승용은 남한의 이런 유행들을 영원히 좋아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이걸 만들었어?” “아니요. 이건 쿠바 작가의 작품입니다. 저는 갤러리 관장이고요. 아까 명함을 드렸는데.” 아까. 아까 일어난 일들이 오십 년 전 명사십리의 일들처럼 생각났다. 불꽃이 팍 켜졌다 꺼지고, 한참 어둡다가 다시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드문드문하게. 그는 교회로 올라가는 언덕바지에 접어들다가 갑자기 노란 백사장을 닮은 포스터에 눈길이 닿았고, 무턱대고 들어왔다. 티켓을 사라는 소리에 화장실 핑계를 댔고, 사람들과 좀 다투었다. 그때 이 사내도 멀찍이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짐작이지 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노란 바닷가의 풍광에 홀린 듯 다가가려다 바지 속에서 발광하는 휴대폰 진동을 느꼈고 그제야 교회에서 약속된 강연이 기억에 되돌아와서 허겁지겁 갤러리를 떠났다. 요즘 승용의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드문드문 붙었다 이어졌다 하는 식이었다. 듬성듬성 구멍 나 사라진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구렁이가 심장을 죄는 것 같은 두려움이 휘몰아쳤고, 그는 두려움을 쫓기 위해 화를 냈다. 화를 내는 일이라면 언제나 익숙하고 능숙했다. 그의 인생에 화날 일 말고 다른 게 없었다. “쿠바라면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그러면 그는 조국을 떠났는가?” “아니요. 그냥 아바나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국제 활동이 많아 마드리드에도 거처를 두고 있다고 해요.” 다시 울컥 화가 치밀었다. 기근과 전쟁에도, 온갖 어려움에도 사람들은 고향에 머물러 산다.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승용의 생전에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거의 버렸다. 통일이 멀고 불가능하기보다는, 그게 언제가 되었든 승용이 그때까지 성하게 기다리지 못할 것이라는 비통한 직감이다. “작가를 만나러 다시 오신 거예요?” 관장이 다시 물었다. 유난히 말투가 나긋나긋한 남자였다. 잘 배우고 잘 사는, 문화 소양이 머리털 한올 한올까지 꽉꽉 들어찬 일부 서울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승용은 움츠러들었다. 승용에게도 돈이라면 원 없이 벌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돈의 문제가 아닌 것을 잘 알았다. 싫으면서도 심장 밑바닥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은 어떤 느낌이, 이런 목소리에 항상 묻어 있었다. 요즘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한 심정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중요한 구멍을 내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하게나마 강연 같은 중요한 약속들은 빠지지 않고 얼굴을 비추는 데 성공했다. 주머니 속의 경로 우대 티켓이 기억에 없듯이, 오후에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있다고 안내받은 기억도 없다. 하지만 그의 몸은 갤러리로 돌아와 있고 작가가 곧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별다르게 중요한 일도 없고 하니까. 이런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갈고리를 모아 백사장을 만드는 기막힌 생각을 어떻게 해냈는지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송홧가루로 노랗게 뒤덮인 백사장을 본 적이 있는지, 새의 부리처럼 삐죽하게 바깥쪽으로 튀어나왔다가 굽어져 돌아서는 명사십리 바닷가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북한이 폐쇄적인 나라이기는 해도 쿠바와 북한은 혁명의 기치를 함께 떠쳐든 형제국이니까, 이 작가가 가보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승용은 중앙 전시실에 연결된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서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간이의자를 여럿 차려 놓았고 그곳에도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에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여러 번, 눈물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라난 시골 마을의 풍광들이 단색조의 기묘한 어둠과 밝음 속에 불쑥불쑥 튀어 올라 그를 끌어당겼다. 작품의 이곳저곳을 손으로 지적하며 혼자 설명하고 질문하는 그에게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용히 모였다가 흩어지곤 하는 것을,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다가오려 했을 때 닭벼슬머리의 관장이 가만한 손짓으로 제지한 것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중키에 몸이 단단한 사내가 도착함으로써 작가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삼사십 대 정도? 생각보다 젊어 보였고 거무스레한 얼굴의 절반가량을 검은 턱수염이 뒤덮은, 전형적인 라틴계 얼굴이었다. 승용은 많은 것들을 잊었지만 그래도 발표회의 절차와 방식들은 그의 내면에 흔들리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북에서 매일이다시피 교양강화, 행동총화로 단련되었고 남으로 내려온 뒤에는 강연자가 되어 단상에 서게 된 인생이었다. 조용히 그에게 모이던 불안한 시선들을 안심시키며, 그는 적당히 뒤편에 놓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누군가가 쥐어 준 프로그램 종이를 의미 없이 뒤적이며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임했다. 열정적으로 정신을 집중했으나 작가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스페인어 통역자의 말투는 지나치게 나긋나긋하고 교양적인 용어들을 많이 동원했다. 적어도 승용은 작가 자신이 그렇게 어렵고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학식 있는 단어들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저렇게 투박하고 강인한 얼굴에, 단순하게 몸에 달라붙는 검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을 뿐인 사내가―들을 것도 없이 그와 마찬가지로 어촌에서 자란 것이 분명했다―알아듣기 어렵고 잘난 체하는 말들을 쏟아 낼 리 없었다. 잘 배우고 잘 차려입은 젊은 여자 통역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지껄인다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어쨌거나 승용은 간절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가 외국어에 능통해서 직접 작가의 말들을 귀로 해석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온몸이 귀가 된 것처럼 모든 정기를 귀에 모았다. 연단 위의 강사가 하는 말을 이렇게 정성스레 들어 본 일은 처음이었을 것 같다. 자신이 강연자가 되어 수백 번 똑같이 되풀이해 온 말들을 반복할 때도, 승용은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말들을 어느 정도는 기계적으로 대하는 편이었다. 작가의 말은 길지 않았다. 겨우 15분이나 20분 그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승용에게는 아득하도록 길게 느껴졌고 희미해진 기억 속에 남은 거의 모든 자제력을 다 끌어모아서 간신히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원산이나 명사십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정 그곳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바닷가, 백사장, 물속, 자맥질, 낚시라는 말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기다린 것들이 아닌 단어들은 화를 내며 흘려보냈다. 그렇게 흘러간 단어들 중에는 인간, 전체주의, 맥락, 부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인간과 전체주의라니 지긋지긋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의 작품 속에 사람 따위는 없었다. 날카롭게 구부러진 녹슨 갈고리들이 수천수만 개 모여서 샛노랗게 송홧가루를 뒤집어쓴 원산 앞바다의 모래사장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그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승용은 제가 해야 할 강연조차 거의 잊을 뻔했고 이곳에 돌아와서 작가의 말을 챙겨 듣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왜 그는 자기 작품을 부인하는가. 결국 그럴 의사가 없었음에도, 작가의 말이 끝나고 마침내 질문하게 된 그의 말투는 숨기려는 일을 추궁하는 사람처럼 들렸다. 원래부터 투박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북한식 말투라서 더욱 사납게 들렸을 것이다. 실은 다급하다 보니 더 그리되었다. 그가 질문하려 손을 들자 사회자가 망설이는 모습에 왜 빨리 마이크를 주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고, 뒤편에 앉아 있던 관장이 역시 가만한 고갯짓으로 그가 질문하는 것을 허락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산에 가보았소?” 작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왔소. 원산이 내 고향이오. 그곳 바닷가의 모습이 딱 저래. 완전히 똑같아서 내가 놀랐어. 봄철에 노랗게 소나무 가루를 뒤집어쓴 바닷가를 작가 양반이 보았는가 해서 묻는 거요.” 그의 질문을 전달받은 작가가 고개를 저었으므로 승용은 그가 북한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가능성이 적은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적은 가능성에 간절히 매달렸다. 요즘은 강연할 때 북한 해킹범과 싸우다 죽은 아들 이야기를 했지만 아들이 죽기 전에는 원산 이야기를 했다. 통일이 된다면 부산을 넘어설 국제항으로서 뛰어난 입지와 마이애미처럼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개발 가능성이 풍부한 것을 알렸다. 그곳을 김씨 3대가 독점하고 흉물들로 채워 넣는 만행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늘 그렇듯 그는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언설들에 거리를 두었다.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라도 그랬다. 배통에 힘을 주고 열정적인 울림이 담기도록 했지만 마음은 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몸이 가지 못하는데 마음이 제 혼자 거기 가서 무릎이 꺾인 듯 주저앉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무시로 죽은 아들 생각에 빠져들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그의 고향 역시 마이크를 통해서나 발성할 뿐 마음을 정녕 보내어선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갈고리로 만든 노란 해변으로 애써 누른 승용의 감정을 난데없이 헤집어놓았다. 그래 놓곤 거기 가본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승용은 작가가 잔인하게 웃으며 휘두른 갈고리에 찍힌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어진 작가의 답변은 거의 그의 귓바퀴를 관통하지 않았다. “당신이 북한에서 왔다면, 내가 쿠바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것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못한다. 인간은 그가 타고난 본성과 관계없이 그가 속한 사회가 원하는 용도대로 소모되는 부품의 운명이 된다. 그것은 내 갈고리가 처한 운명과 같다. 작품의 재료로 사용된 갈고리는 쿠바의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구(漁具)다. 나는 어린 시절 부두의 바닷물에 뛰어들어 그것을 주워 모아 어부들에게 되팔곤 했다. 훗날 나의 작품 속에서 그 갈고리들은 어획이 아닌 다른 용도로 전용(轉用)되었다. 그것에서 나는 전체주의 사회의 인간의 운명을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다르게 사용된 그 갈고리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풍경을 이룬다. 나의 다른 작품들은 보통 흑백조의 정서를 전달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내가 자란 어촌 마을의 작열하는 태양을 보여 주고자 했다. 땅과 바다를 그렸으나 태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내가 드러내고자 했던 또 하나의 숨은 의도였다. 당신의 고향 마을에서 그 광채가 소나무의 꽃가루였다면 나의 그것은…….” 승용은 작가의 답변을 듣고 혼자 중얼거렸다. 가보지도 않고서 똑같은 것을 만들다니, 그건 무슨 요변일까. 세상에 그렇게 닮은 곳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래도 가보고서 그러는 거 같은데. 북한에 가봤다고 하면 미국 비자도 안 나올 테고 하니까 그러는 모양이지. 아무래도 장사를 해야 할 테니까. 통역사가 그의 혼잣말을 전달했고 작가는 환하게 웃었다. “내 고향에 와보면 그곳에 당신의 고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환영한다.” 여전히 부루퉁한 채로 승용은 그의 웃음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 기분이 되었다. 작가의 웃는 얼굴에는 아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할 때 어느 정도 기계적이고 차갑게 보였던 것과 대비되는 어떤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손짓발짓을 보태며 어린 시절에 그가 자랐던 어촌 마을과 백사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고향 바닷가에는 야자수가 많지만 작품의 분위기상 생략했는데 그것이 승용의 고향과 비슷해 보인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 같다고 했다. 열대 바다일 테니 그럴 것이다. 승용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없었다. 공작이든 미술이든 뭘 잘해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저 작가와 같은 재주가 있어서 고향의 풍경을 그리기로 결심했다면, 소나무나 해당화는 뺐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런 사물들이 그리기 좋았고 그것 또한 애수를 자아내는 풍경들이었지만 이제는 작품 속에 오로지 모래와 하늘과 바다뿐인 것이 좋다. 모래와 바다와 하늘은 태고부터 있었고 그가 고향을 떠난 지금도 여전할 것이다. 나무와 풀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태고부터 있었던 것들로부터 스쳐 가는 인간의 눈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기기도 하는 덧없는 형체와 색채들을 분리해 내는 것이, 그 사이의 무한한 간극에 구분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변하는 풍경들. 달라지는 기억들. 수십억 년 지구의 역사에, 아니 아예 헤아릴 수도 없는 우주의 역사에 대자면 덧없다는 말조차 무한히 덧없어지고 마는 그런 것들이 인간에게 왜 중요할까? 왜 승용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아들의 기억에 매달릴까?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질문들이 갑자기 승용의 머릿속을 강력하게 지배했다. 그 물에 손을 담글 수 있을 것 같은데, 다가가 손을 내밀면 섬뜩하게 가시를 드러내는 갈고리였다. “내 아들은 김정은과 싸우다 죽었소!”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 놀란 것처럼, 승용은 고개를 들며 외쳤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 아들은 북한 최고 두뇌 집단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2016년 탈북한 뒤 북한의 해커 집단 북금성의 꼬리를 잡아 그들의 자금줄을 추적하던 화이트해커 정낙성이오. 2021년 10월 17일 새벽 3시 27분, 인천 미추홀구 독정이로 이면도로, CU 편의점 앞에서 백색 스타리아가 내 아들을 덮쳤소. 60러 2393. 운전자 박윤석은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평범한 택배기사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사실 김정은이 파견한 특무대원에게 포섭된 조직세포원이오. 내 아들의 추적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러, 김정은이 빼돌린 6조 원 규모 코인을 거의 확보하기 일보 직전이었소.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 박윤석은 반석빌라 앞에서 시간을 끌며 기다리다가 내 아들이 편의점에서 요기하고 들어가는 시간을 노려 급가속하여 아들을 치고 뺑소니하려 했으나 아들이 즉사하지 않고 살아 일어서려 하자 후진하여 다시 짓뭉갰소. 편의점 앞 CCTV에 모두 똑똑히 녹화된 내용이오. 그러나 남한의 썩은 경찰은 감쪽같이 녹화 화면을 조작해 이것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고 깨끗이 덮었소. 최초 화면에는 박윤석이 운전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방을 확인한 뒤 뛰어내려 아들을 살피고, 움직이자 다시 후진하여 확인 살해하는 장면이 또렷이 녹화되어 있었소. 나는 그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러나 단 며칠 사이에 CCTV 녹화 자료는 조작되어 뒷부분이 사라졌소. 운전자는 단순 과실치사에 피해자 구호 활동도 충실히 했다는 온갖 감경을 다 받아 단 8개월을 복역한 후 이미 석방되어 훤한 대로를 활보하고 있소! 좌파 정권이 김정은 돼지 왕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협조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요. 나는 그날부터 남한의 빨갱이 괴뢰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소. 이 시대에는 북도 남도 한패요. 공산 정권과 투쟁하여 고통받는 북한 인민을 해방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필요하오!” 승용이 이 모든 말을 토해 내기까지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찰나에 가까울 만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 재생하는 녹음기처럼 언제든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사실 시간의 감각을 잊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녹음기가 부드럽게 작동하는 그때 승용은 살아 있다고 느꼈다. 태어나서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거였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의 자궁으로 돌아간 듯한 안온한 감정이기도 했다. 아까 국수를 들이켜고 떠난 김 기자가 왜 돌이켜 다시 나타났는지 승용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함께 다시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리막길이라 숨이 가쁘지 않다. 무언가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갤러리에서 김 기자로 다시 전환되어 버린 두 장면 사이에 일어났을 일들에 대한 그새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연설이 끝나 버린 것은 아쉬웠지만 김 기자를 다시 만난 것은 좋았다. “전화 좀 받지 그러셨어요. 따님이 울던데요.” “아 그걸…… 그걸 나보구 어쩌라고.” “같이 있어 주길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가보시죠.” 그는 말한 기억이 없는데 다 알고 있는 걸 보면 딸이 김 기자에게 울며불며 다 불은 모양이다. 딸은 어릴 때부터 심약한 애였다. 아들이 떠나고 그에게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딸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는 일은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후엔 일이 있어. 저녁때나 가보든지 하구.” “지금 다른 일이 중요합니까? 당장 가보셔야죠.” “벌써 갔을 텐데, 뭘.” “그러지 말고 얼른 가보세요.” “차라리 잘 된 거지 뭘 울어.” 김 기자의 목소리에 잠시 드문 높낮이가 생겼다가, 침묵이 이어졌다. 김 기자는 전화를 한 통 하고 시계를 보더니 가보겠다고 하고 택시를 잡아서 다시 떠났다. 김 기자가 그를 놔두고 택시에 오를 때 세상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혼자 남은 승용은 빈 구멍 같은 감정을 느꼈다. 막막하게 혼자가 된 것 같은, 가슴 속에 온통 허공이 자리 잡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구멍이 그를 집어삼킬 것 같아 평생 몸부림치며 도망 다녔다. 아들이 떠났을 때 온통 세상이 캄캄해진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떠나간 이후로 어쩐지 더 온전히 그의 곁에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연회에서 아들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함께 울어 주고 분노해 줄 때, 검은 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게 오므라든다. 그에게는 그거면 충분하다. 아직 세상을 이겨낼 힘이 있고 그 힘은 가끔씩 그의 내면을 충만하게 채운다. 그의 기억 속과, 이름이 그 뭐라더라, 쿠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넘실거리는 어린 시절의 금빛 모래와 같이, 그것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영원한 기운으로 그를 감싼다.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장편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무영문학상, 이호철통일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설이』, 『영원한 유산』, 『위대한 그의 빛』,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