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9호
소파를 바꾸면서
이병군
얼마 전에 나는 인터넷에서 갓 구매한 천 소파를 가죽 소파로 바꾸었다. 새집으로 이사한 후 사실 거의 모든 가구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시간이 없는 것도 핑계이지만 대체로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가격이 저렴한 것이 주된 이유다. 대신 실제로 현장에서 볼 수 없어서 택배를 받은 후 실물을 확인할 적에 실망할 때가 가끔 있다. 물론 그것은 인터넷 구매를 하는 사람이면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거니와 집을 사들일 적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기에 되도록 저렴한 것으로 구매했다. 조금 나은 것으로 살 수도 있기는 한데, 왠지 내 주제에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다. 집에 장만된 모든 것들은 거의 제일 저렴한데 겉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구매한 천 소파는 아무리 봐도 집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볼 때는 굉장히 색상도 밝고 깔끔했는데 정작 집에 들여놓으니 뭔가 이상했다. 내가 원래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데 결국 큰마음을 먹고 환불하기로 했다. 구매자 문제로 환불하는 것이기에 운송비를 내가 담당해야 했다. 소파는 구조상 부피가 워낙 크다 보니 운송비가 만만치 않았다. 급여를 많이 받지 못하는 나에게 400여 원이 넘는 운송비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왕 돈을 쓴 김에 집 근처 가구 매장에 가서 제대로 된 가죽 소파를 하나 사들이기로 했다. 매장에서 소파를 선택해서 돈을 지급한 후 며칠이 지나 매장 인부들이 트럭에 소파를 싣고 아파트 아래에 도착했다. 세 명의 인부가 소파를 차에서 내려 승강기에 넣으려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도저히 들어가질 않았다. 가죽 소파의 길이가 2.5미터가 넘고 매우 무거웠다. 승강기에 허용될 수 있는 최대 길이가 2.3미터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아 2.5미터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결국은 포기하고 계단을 이용해서 옮기기로 했다. 한 인부가 몇 층이냐고 물어서 나는 좀 미안하다는 어조로 18층이라고 답했다. 인부들이 18층을 듣고 원성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세 명 중 두 명은 소파를 들고 한 명은 앞에서 방향을 지휘하면서 바로 옮기기 시작했다. 가죽 소파의 부피가 큰 데다가 무겁다 보니 세 사람은 금방 땀범벅이 되었다. 이제 겨우 4층, 5층에서 이렇게 땀범벅이 되고 있으니 18층까지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걱정됐다. 인부들은 거의 오십 대 전후였고 나는 삼십 대라 보다 못해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돕겠다고 나섰다. 물론 소파를 산 가격에는 운반비까지 다 포함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고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평소에 매일 컴퓨터 앞에 있던 처라 땀을 조금 흘리는 것 정도야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인부들이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예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 있다고 하는데도 극구 말렸다. 가구 매장에 그런 규정이라도 있는지 내가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결국은 내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을 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 층 한층 해서 18층까지 올라왔을 적에는 거의 한 시간 남짓 걸렸고 인부들의 옷은 완전히 땀에 푹 젖어 있었고 숨도 가쁘게 헐떡헐떡했다. 그렇게 힘들게 소파를 거실에 들여다 놓고는 또 다음 집에 가구를 옮겨야 한다면서 내가 건네주는 생수를 한 병씩 받고는 일 분도 쉬지 않고 부랴부랴 내려갔다. 인부들이 안쓰러웠던 것은 내가 산 소파를 운반하면서 땀범벅이 된 것에 대한 것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도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해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십여 년 전에 내가 한국에 유학 갔을 적이다. 그때 나는 이십 대 초반이었는데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체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많은 일을 한 적 있다. 공사판, 호프집, 과외, 번역, 식당, 편의점 등등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는 듯했다. 중국에 돌아와서 대충 세어보아도 열몇 가지는 되는 듯했다. 그때 나는 한동안 인력사무소에 나가 막노동을 한 적이 있었다. 새벽 다섯 시쯤에 인력사무소에 나가면 소장이 그날 일을 분배한다.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날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공사판에 갈 수도 있고, 깊은 산속에 갈 수도 있고, 공장이나 부두에 차출된 적도 있다. 어느 한 번은 지하 1층 게임방에 있는 게임 기기를 들어서 트럭에 싣는 일을 맡은 적 있었다. 영업 허가가 없는 불법 게임장인 듯했는데 단속이 오면 그전에 기기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그 기기들이 굉장히 부피가 크고 하나에 이삼백 킬로씩 되어 매우 무거웠다. 그때도 나와 한 한국인 인부가 같이 들어서 트럭으로 옮겼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몸이 많이 휘청거렸다. 게임기 수십 대를 운반한 후 며칠간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때 게임방 사장인 듯한 사람이 황소 같은 덩치에 게임기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은 것이, 나는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막노동 외에 전단지를 돌리던 일도 자주 생각난다. 나는 한때 방학에 서울의 명동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전단지를 돌린 적이 있다. 한 번은 같은 연구실을 쓰던 어떤 후배가 길에서 우연히 전단지를 돌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굉장히 의아한 눈빛으로 “선배님, 여기서 뭐 하세요?” 했다. 도둑질한 것도 아닌데 솔직히 조금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 연구실에서는 뭔가 위엄 있던 선배가 길 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느낌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한국의 전 대통령인 이명박의 자서전에서도 비슷한 사연을 본 적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가정이 어려워 어머니가 어떤 여자 학교 앞에서 뻥튀기와 과일을 팔라고 시켰는데 그것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리어카에 과일을 싣고 가다가 리어카가 차에 부딪혀 과일이 쏟아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쳐다보면서 수군거리자 너무나도 창피해서 쓰고 있던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과일을 주워 담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뭐가 창피하냐면서 크게 나무랐다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나이 때에는 그런 것에 충분히 예민할 수 있다. 나도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 길을 걷다가 누가 전단지를 주면 다 받는다. 그것은 내가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해봤기 때문이다. 추운 날 길에서 전단지를 돌릴 때 서슴없이 받아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그 느낌을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받으면 조금이라도 일찍 일을 마칠 수 있다. 전단지를 받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말해도 그 진정한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그 말이 자꾸 생각난다. 누군가 젊은 사람들한테 인생 도리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경력자라고 여러 가지 많이 체험해 봤다는 것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자꾸 훈육하려고 나선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는 체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사실 적지 않다. 물론 책이나 지나온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어느 정도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가끔은 좋든 나쁘든 간에 많은 것들은 우리가 체험해 봐야 안다. 어쩌면 우리 일생의 많은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우리가 너무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재고 사느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체험하고 쓰라린 맛도 보면서 겪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새로 바꾼 가죽 소파에 앉아서 해본다.
1987년 중국 길림성 통화시에서 태어났다. 중국 연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연변 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2년에 중국 조선족 청년 작가상을 받았다. 중국에서 우리말 문학 잡지인 《장백산》, 《연변문학》, 《도라지》, 《송화강》 등에 다수의 소설, 수필, 시를 발표했다. 현재 중국 산동사범대학교 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