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9호
존재의 문법
보메이
사람들에게는 ‘조국’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나에게는 참 신기한 일인 것 같다. ‘조국’이란 것이 무엇인가? 짠맛이 나는 것인가? 단맛이 나는 것인가? 아니면 닭가슴살처럼 거의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은은하고 담백한 맛만 나는 것인가? 나는 어느 날 커피숍 앞에 쏟아진 햇빛 아래를 지나가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두 사람을 봤다. 그녀들의 대화가 우연히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귀화하고 싶어.” 눈 큰 젊은 여자가 말했다.
“그래? 자기의 조국을 포기하고 철저히 떠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조국과 이별하더라도 조국을 완전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눈가 주름이 깊은 단발머리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조국이라는 것을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궁금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조국이라는 것이 없다. 종은 있어도. 사람들은 외모로 구분해서 나를 ‘샴 고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러시안 블루’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 ‘노르웨이의 숲’ 같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마음에 든다. 왠지 모르겠지만 시처럼 아름답다는 냄새를 느껴서. 아 맞다, 무슨 소설과 무슨 노래의 이름과 같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것.
사람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인간들이 말하는 ‘나’와 ‘타자’랄까? ‘나’는 ‘나’를 모르면서 ‘나’는 ‘타자’도 결코 알 수 없다. 인간들이 다른 개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한 몸이 한곳에만 존재할 수 있고 다른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도 나에게 신기한 일이다. 나는 지구의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다른 수많은 내가 보인다. 그 수많은 나는 다 서로 다르게 생겼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각을 늘 안다. 그 수많은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과 다르게.
나는 고양이다. 어떤 일본 소설가가 쓴 소설의 제목이 비슷하다고 들었지만 나는 고양이인 것을 절대 그곳에서 가져온 개념이 아니며 영감을 훔친 것도 아니다. 나는 조국도 없고 하나도 아닌 고양이다. 쉽게 말하면 당신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고양이라는 생물체는 모두 다 나로 생각하면 되겠네. 나는 이러한 존재란 말이다.
사실 지구에서 존재하는 나는 다 환상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은 환각적 상상이 아니라 환각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래, 당신이 보이는 나는 환각적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현상이지만 실체적 존재도 있지, 인간들이 나를 만질 수 있고, 또한 나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교배하고 출산하고 사망하는 것처럼 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지구에서 보이는 수많은 태어나고 죽었거나 죽어가는 고양이는 다 나다. 그럼 왜 환상이라고 했을까? 왜냐하면 나의 실체, 혹은 나 자체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나는 ‘비엠’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 ‘비엠’은 모르지? 알려줘도 모를 거야. 아무튼 간단히 말하면 ‘비엠’은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 어떠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곳이다. 우주에서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겐 우주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지구인들의 인식에서 나온 개념뿐이지 사실 우주 이외에도 무한한 존재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들에 대해 우리는 우주인지 우주 아닌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 굳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 그냥 ‘비엠’으로 부를게. 나는 ‘비엠’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되겠다. 지구에서 나를 고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다 나의 환상일 뿐인 것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난달의 한 오후에 나보다 스무 살이 더 많은 여성과 만났다. 우리는 서울시청 앞 한 커피숍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입추 후의 날씨가 선선하지만, 햇살이 좋아서 우리는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싶었다. 나처럼,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이 여성도 조국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무국적의 난민이나, 타국에서의 불법체류자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국적이 있다. 단지 조국이 없을 뿐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몇 년 전의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인생에 있어 언젠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고향이란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나에게 고향은 낯선 것이다. 타인이 말하는 고향은 나에겐 ‘태어난 곳’일 뿐이다. 나는 우연히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마침 그 곳이 어느 나라에 속해서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국가, 혹은 조국이라는 것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늘 ‘가다’와 ‘오다’라는 표현만 썼다.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이 여성도 나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알지만 그중에서 어느 언어도 모국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나라의 음식에 익숙하다. ‘한국 요리’, ‘중국 요리’,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등 다양한 ‘나라+요리’의 형식으로 부르는 요리들을 다 사랑한다. 사랑하면서도 그중에서 어느 것도 나의 미각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친구는 나와 다른 점도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조국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조국’이란 곳에서 그녀는 고작 인생의 5분의 1의 시간마저 채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국이란 것을 믿고 고집스럽게 스스로 지키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래 조국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조국을 지키려고 한다.
“나는 귀화하고 싶어.” 내가 말했다.
“그래? 자신의 조국을 포기하고 철저히 떠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조국과 이별하더라도 조국을 완전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녀의 깊은 눈가 주름이 나의 눈동자에서 반사된다. 바람이 부드럽게 그녀의 단발머리를 만지고 지나갔다. 나는 그녀가 말한 ‘포기하다’, ‘떠나다’와 ‘이별하다’ 간의 차이성을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당신에게 조국이란 것이 없잖아.’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지나간 한 샴 고양이가 나의 관심을 훔쳐 갔다. 나는 그 샴 고양이와 약 7초 동안 눈을 맞췄다. 물고기의 기억이 7초만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던데, 고양이의 기억은 7초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 수 있을까?
이 세상 도처에 고양이가 존재한다. 적어도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고양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없는 지역에, 예를 들면 심해, 혹은 깊은 산속이나 숲속이나, 아니면 큰 초원이나 사막 속에는 고양이가 존재하고 있을까? 생각이 샴 고양이를 따라서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린 것 같다. 친구와 하고 있던 대화를 순간에 다 잊고 말았다.
그 샴 고양이를 보며 나는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라는 난제에 빠졌다. 이 난제에 대해 늘 고민하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원래 스스로는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고, 애증이 분명하고 항상 뜻대로 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원히 자아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늘 타자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는 늘 타자에게 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타자가 지어 준 이름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기 시작한 첫 단계이다. 타인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고 우리가 응답하며, 이 과정을 통해야만 우리의 존재가 확인되고 증명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으로서 진정한 자아를 영원히 스스로 가질 수 없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하면, 나는 어떠한 존재일까라는 답이 없는 난제의 고민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나의 이름은 지연이다. 여기로 오기 전에, 예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여기서는 모두가 나를 지연이라 부른다. 나는 지연이라는 글자를 항상 동사의 형태로 보고 있다. 즉, ‘지연하다’, ‘늦추다’, ‘연장하다’ 등등 이러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존재론이다. 나의 존재는 지연하는 존재이다. 아마도 나는 죽음의 지연으로 존재하고, 사라짐의 지연으로 있음을 품고, 이별의 지연으로 현존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릴 적 거울을 보고 멍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거울 속에 비치는 나의 이미지와 ‘지연’이라는 글자를 잘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들이 나를 지연이라 부르다 보니 나는 그 부름에 점점 익숙해졌다. 이렇게 나는 지연이라는 사람이 되며 지연으로서 존재한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어느 날에 이 땅에서 죽게 된다면, 무덤은 필요 없을 것 같고, 누군가 내가 생각날 때 장미 한 송이를 꽃병에 꽂고 햇빛이 가득 차 있는 곳에 두어 줬으면 좋겠어. 그 한 송이의 장미가 죽고 시들 때까지 그곳에 두어 줬으면 좋겠어.”
샴 고양이를 보며 생각에 잠긴 동안 앞에 앉아 있던 나의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이다. 장미의 미(薇)인지, 아름다움의 미(美)인지, 미혹할 미(迷)인지, 아니면 다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미(未)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도 않는다. 우리의 대화는 늘 아무 호칭도 필요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와 미의 만남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스물두 살은 내가 한국어 언어교육원에 다니면서 한국어라는 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같은 반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먼 대륙에서 온 라뱁이라는 친구였다. 같은 반에서 초급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지만 라뱁은 K-드라마를 워낙 자주 보는 편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나보다 훨씬 더 잘했다. 같이 어디 갈 때는 라뱁이 한국어로 주문하거나 소통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구경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라뱁은 나에게 그 상황을 다시 영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나는 현지인과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며 라뱁은 순수한 서양 얼굴이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늘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는 척을 했다.
언어교육원을 다닌 지 한 달이 된 10월의 어느 날, 라뱁은 갑자기 등산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해야 한다고.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바로 다음 날 새벽 한 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면 곧 더워질 것이라 생각해서 얇은 외투를 입고 나왔지만, 라뱁은 새벽에 추울 것이라 생각하고 평소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등산한 경험이 없었던 우리는 관악산 입구 앞의 광장에서 만났다. 등산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살짝 고민하는 동안 옆에 있는 커피 자동판매기를 보게 되었다. 커피를 한 잔이라도 마시고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또한 마침 주머니 속에서 천 원의 지폐를 만지게 되어서, 나와 라뱁은 그 먼지가 수북이 쌓인 기계로 접근했다. 어떤 예술영화에서 나온 커피자판기가 떠올랐다. 한강 주변에서 노숙하는 한 노인은 고장 나 버려진 한 커피자판기를 주워 온몸을 그 속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동전을 넣을 때마다 기계 속에 숨어 있던 노인은 기계인 척하면서 커피를 만들고 또 기계인 척하면서 컵을 원래 나오는 곳에 올려 주는 화면이 그려진다. 영화에서 봤던 그 화면이 너무 생생해서 마치 우리 앞의 이 기계 속에도 어떤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같이, “실례하겠습니다” 말하며 천 원의 지폐를 넣었다. 그러나 기계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버튼을 다시 눌러도 기계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사기꾼이군.” 라뱁은 큰 불만을 내면서 말했다.
“아니야. 우리의 잘못이야. 지금 새벽 한 시잖아. 다 자고 있어서 그래.”
나는 사실 커피가 나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새벽 한 시였으니까. 기계 속에서 일하는 그 누군가가 이미 퇴근했고, 아직 출근 전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누군가가 아직 기계 속의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라뱁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는데 그래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관악산 입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길이 한 세 개 정도 있는데 우리는 그중에서 조명이 별로 없고 가장 어두워 보이는 한 작은 길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날은 달빛이 밝지 않았고 가는 길에 큰 나무들도 많으니 세상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낮 동안 초록색이던 산과 나무는 밤에 껌껌한 하늘과 같이 모두 다 검은색이 된다. 낮에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것들은 밤만 되면 모두 다 가혹해진다. 나와 라뱁은 이 가혹한 길로 들어섰고 마치 가혹한 미지의 세상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의 1초에 어떤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우리를 삼킬지도 모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았다. 진짜 어떤 괴물에게 삼켜지게 되더라도,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며칠 후에 뉴스에서 그냥 아무 감정도 없이 ‘두 명의 외국인 여성이 실종됨’이라는 눈에 들지도 않을 차가운 글자가 잠시 뜨기만 하겠지. 사람들은 읽는 둥 마는 둥 하듯이 ‘그렇군’이라는 아무 온도도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만 내보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참 편했다. 지금 당장 괴물에게 삼켜져 버려도 상관없다는 도도한 용기가 생긴 것이랄까?
우리는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밤인데도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그리고 상상했던 침묵의 밤과 달리 그렇게 조용하지도 않았다. 먼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도 마음속의 외로움이 덜어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버려진 고아들만 가지고 있는 암호를 통해서 서로의 고독을 확인하는 것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라뱁도 나와 같은 느낌이 들은 것일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개가 짖는 소리를 찾아갔다. 개는 더 높고 깊은 산속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해 같은 산속으로 조용히 행진했다.
“이곳에 더 익숙해지면 어떡해?” 심해 같은 산속으로 가고 있던 라뱁이 갑자기 말했다. 나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대답했다.
“떠나야지.”
“귀가한 여객처럼 이곳에 영원히 살면 어떨까?”
“그건 끔찍한 일이야.” 나는 한곳에 익숙해지고 영원히 정착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철새들은 계절에 따라 옮겨 가고, 귀신고래는 먹이와 번식을 위해 이동하고, 제왕나비는 생태 환경의 변화와 자기의 진화로 인해 9천 킬로미터 너머의 곳으로 여행가는 것과 같이, 버려진 고아도 영원히 한 고아원에 머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익숙해지고 적응하며 한곳에 정착한 결과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파멸이다. 만약 옮겨 가야 하는 동물들이 이동하지 못한다면 극도의 혹한이나 굶주림, 아니면 피하지 못하는 천적이나 열악한 환경을 겪고 파멸의 결과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곳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항상 이동해야만 살 수 있으니까. 나도 그들 중의 하나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한곳에 익숙해진다면 그곳의 끔찍한 것들도 알게 될 것이니까. 나아가 그 끔찍한 일들에도 익숙해질 것이니까. 그것이 끔찍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끔찍함이다.
잠시 동안 조용했던 개는 다시 짖기 시작했다. 소리는 가까워졌다. 소리가 나는 방향에는 나무인지 철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것으로 만든 작은 문이 보였다. 더 가까이 가보니 한 정원이 나타났다. 짖고 있던 개는 문 앞의 나무에 목줄로 묶여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흉악한 맹수가 아닌 작고 마른 하얀 진돗개였다. 심지어 인형처럼 귀여웠다. 개는 우리를 보더니 신기하게도 짖기를 멈추었으며 꼬리를 살짝 흔들기도 했다. 나와 라뱁은 그 진돗개에게 허락을 받은 듯이 천천히 정원에 들어갔다.
정원에 들어가니 나무로 지은 작은 건물 세 개가 보였다. 중간의 건물에서 미약한 빛이 흘러나왔다. 전등이 아닌 촛불이나 옛날에 쓰던 호롱불의 빛과 같았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빛과 함께 미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리지도 않았고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왠지 경서를 읽는 소리인 것 같았다. 양쪽의 두 건물 앞에는 벗은 신발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스님들이 자는 방인 것 같았다. 창문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나와 라뱁은 왼쪽 건물 앞의 돌계단에 앉았다.
“나는 고향에서 식물을 많이 키웠어. 가끔 그들이 생각나.” 라뱁이 발 옆의 들풀을 보며 말했다.
“그들의 이름이 뭐야?”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이름을 안 지었는데.”
“그럼 생각날 때 어떡해?”
“음……그냥, 생각하지.”
“근데 이름은 왜 안 지었어?”
나는 라뱁이 키웠던 식물들이 이름이 없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슬퍼졌다. 마치 어린 시절에 『어린왕자』를 읽을 때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고 그냥 ‘장미’라고만 부른다는 것에서 느꼈던 슬픔과 같았다. 소중하고 사랑한다며. 소중하고 사랑하면 적어도 이름을 지어 줘야지. 그래야 그것을 부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 시를 써 줄 수 있고 또한 누구에게 그것을 말할 때 ‘그것’이라는 아무 온도도 없는 대명사가 아닌 그것만을 지칭하는 어떤 유일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말할 수 있잖아. 나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어느 날에 그 식물이 죽으면 너무 슬플까 봐 그래.” 라뱁은 내 마음 속의 슬픔을 모르는 듯이 말했다.
“이름이 있어야 그 슬픔을 기억할 수 있고, 그를 애도할 수 있지 않아?” 나는 다시 물었다.
“나는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을 애도하지 않으려고 해.” 그것이 라뱁의 대답이었다.
나는 키웠던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오래 썼던 핸드폰, 노트북, 책상, 볼펜, 좋아하는 신발, 양말, 안경 등등에게 모두 이름을 지었다. 그것을 유일한 존재로 의미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존재의 문법이다.
“혹시, 이 시간에 왜 여기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와 라뱁이 앉고 있던 돌계단 뒤에 한 여성이 조용히 나타났다. 나보다 한 스무 살 정도 연상인 것 같았다. 그 여성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희도 모르고 와 있어요.” 라뱁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미였다. 그때가 나와 미의 첫 만남이었다. 미가 나에게 그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나도 나의 이름을 미에게 알려 줬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존재하기 시작했다.
미는 찾을 것이 있어서 그 시간에 이곳으로 혼자 왔다고 했다. 혹시나 나와 라뱁도 무엇을 찾으러 왔나 궁금해서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미는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지연아, 거의 처음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네. 우린 늘 호칭 없이 이야기를 했으니까. 지연아, 그거 알아? 우리 처음 만난 날에 네가 ‘지연’이라고 나에게 알려주고, 자신의 사라짐을 ‘지연’시키며 존재하고 있다는 뜻을 말해 줬을 때 참 신기한 느낌이 들었거든. 원래라면 그날에 나의 사라짐이 찾아오려고 했었어. 그러나 당신을 만나고, 찾아오려는 그 사라짐이 오지 않았어. 이것이 지연이라는 마법인가 싶었네.
이 동안 정말 고마웠어. 지연의 존재와 지연적인 존재들 모두 고마웠어. 너는 한곳에만 오랫동안 머물면 끔찍하다고 나에게 말한 적 있었지. 그래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고 또 귀화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지.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거고,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지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거야.
나는 이제 고향을 찾으러 갈 때가 됐네. 이것이 돌아감인지 떠나감인지 또는 사라짐인지 나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방랑하는 나는 또 새로운 방랑, 그리고 끝나지 않는 방랑을 시작할 거야. 이만, 안녕.
늘 당신을 사랑하는, 미.”
미가 남겨 준 이 짧은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영원히 미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쓸쓸해진다. 그 세월들은 마치 6월 말의 한 맑은 아침에 햇빛이 비치는 창문 밖에 스쳐 간 온화한 바람처럼, 만져 보는 순간에 그 온화함이 마음속까지 깊이 스며들다가, 또한 순간적으로 철저히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쓸쓸함밖에 없다.
사실 미와의 이별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미에게는 조국이 없으니까. 조국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든 속하지 않고 늘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그때 새벽의 관악산에서 미가 찾으려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스스로 추측한다. 미가 찾으려던 것이든, 미에게 찾아오려던 것이든, 그것이 미가 말하는 자신의 사라짐이 아니라, 자신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어떤 특별한 세계가 아닐까? 미는 이제 그것, 그곳을 찾았나 본다. 아니면 그것, 그곳이 미를 찾았을 수도.
진실과 사실이 다르다. 사실은 잔인하다. 진실은 영원히 알지 못하는 곳에 숨겨져 있다. 사실은 미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진실은 미가 이곳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현상으로 도달하게 만드는 사유들이다. 그 진실은 아마 미 자신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장미를 사러 꽃집에 가고 있다. 미를 위한 장미를. 그 장미를 베란다의 햇빛이 가장 잘 비추는 가장 따뜻한 구석에 시들 때까지 두고 있으려고 한다. 그 장미는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가시가 날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색깔이 찬란했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장미에게 ‘B612’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그것은 어린왕자가 거주하는 소행성의 이름이다. 나의 장미와 어린왕자의 장미를 동일화시키려고 하거나 그의 장미를 무시하려고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니 어린왕자가 개의치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왕자가 그의 장미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장미, 미를 위한 장미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 그리고 나의 장미가 이 이름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의 장미는 이렇게 ‘B612’로서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꽃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다. 늘 같은 길로 갔으나 이번에는 다른 길로 가보려 한다. 마을버스를 타고서만 지나던 길인데 걸어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작은 언덕이다. 올라가다가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터널이 나올 것이다. 터널의 위는 다리인 것 같다. 사람이 걷는 다리인지, 찻길이나 기찻길인지, 아니면 식물들만 자라는 곳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 길에 온 이유는 그 터널에 들어가고 싶어서다. 터널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넘어가는 상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터널에 들어와 있다. 터널 속에서 바람이 더욱 세게 분다. 지나간 차와 버스의 소음이 평소보다 열 배는 더 시끄러운 것 같다. 터널은 바람도 심하고 햇빛도 없어서 밖보다 훨씬 쌀쌀하다. 터널 속에서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혼자서 터널 속에서 걷는 나는 열아홉 살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 나는 혼자서 걷기를 좋아했다.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믿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모든 곳에서 하나하나의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남겨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미래 천 년이나 만 년 이후에 그러한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갑자기 보일 수 있게 나타날 수 있다고도 믿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걸었다. 여기저기 나의 발자국을 남기려고 이 세계의 많은 곳에서 열심히 걸었다. 살길을 찾으려고 하는 나의 가엾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아홉 살의 나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걸은 적이 종종 있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그렇게 걸었다. 걷다 보면 목적지가 생길 거라 믿고 목적지 없이 걸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끝까지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목적지가 아닌 곳에서 머물다 집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가서 잠시 쉬기도 했다. 다음날에 또 계속 걸었다. 나의 열아홉 살은 그렇게 보냈다. 지금 이 쌀쌀한 터널 속에서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걷고 있는 나는 열아홉 살 때 매일매일 걷는 나와 마찬가지로 목적지가 없다. 목적지가 없으니 잠시 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서 쉬다가 다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터널의 다른 편으로 나가면 쭉 가다가 집일 것이다. 아니, 집이라 불리는 그곳이다.
나는 집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한다. 도착이라는 말을 두려워해서 최대한 천천히 걷고 싶다. 내가 가는 이 길에 무엇이 보인다. 통통한 샴 고양이 한 마리다. 그 샴 고양이는 나와 한 7초 동안 눈을 맞추고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고양이에게도 그들의 특별한 시계가 있을까? 고양이는 원래 인간의 세계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지 않을까?
예전에 시청 근처에서 봤던 눈이 큰 여자가 다시 보인다. 그때는 이 사람이 어떤 단발머리 여성과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혼자 길에서 걷고 있다. 손에 한 송이의 빨강 장미를 들고 천천히 걷고 있다. 표정이 매우 슬퍼 보인다. 지난번에도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으나 오늘은 그 슬픔보다 더 슬퍼 보인다. 고양이로서 공감하지 못하는 슬픔인가 보다.
이 세계의 도처 동시에 존재하는 나는 그 단발머리 여성이 편지를 보내고 떠난 것을 목격했다. 지금 이 사람은 아마도 그 떠난 사람을 생각하고 있어서 이렇게 슬퍼하는 것 같다.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떠난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으니까 이 사람은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떠난 그 사람은 아직, 아니, 영원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이 보인다. 나의 실체는 비엠에 있으니까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나에게, 아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나의 환상에게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떠났지만 아직도 존재한다. 이것을 꼭 알려 주고 싶지만 알려 줄 방법이 없네.
그러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나는 인간처럼, 인간의 언어에게 기생하여야 하는 존재처럼, 연속성을 가지는 연속적인 존재처럼, 동시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공간내기를 하는 시간처럼, 언어의 유희 속의 언어로 인식하고 사유하며 존재하는 인간처럼, 나는 나의 존재의 진리를 영원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재하는 나는 인간의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나도, 똑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는 환상일 뿐이다.
존재의 진리는 나의 고향인 ‘비엠’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엠’도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의 진리가 존재하게 되는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존재의 진리 자체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존재의 문법을 모르니까.
인간들아, 당신이 존재하는 문법은 무엇일까?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까?
1993년 여름에 중국에서 태어나 2015년 가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영상학 학사를 취득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전공으로 문학 석사를 받았다.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동아시아 영화와 문학을 연구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깊은 애정을 쌓아왔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창작을 계속 하고 있다. 문학 번역과 영화 번역에도 열정을 쏟으며, 언어로 비롯한 사고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언어의 실험을 하고 있다. 다중 언어 창작을 시도하면서 「존재의 문법」이라는 첫 번째 한국어 소설을 완성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