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호
고래의 노래, 얼
정철용
고래의 노래
오래 부르던 노래를 이제 불러들인다
모래 위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는 고래
둘러싼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오늘 저녁 내 노래에서 풀려나간 별들이 보이고
화음처럼 밀물이 들어오는 소리도 들려온다
내 나이만큼이나 낡은 기타를 메고
바닷가 마을들만 떠돌아다니며
겨울에는 해변의 라이브 카페에서
여름에는 모래사장에 세워진 간이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지도 어언 삼십여 년
누구나 내 노래를 좋아했지
내 커다란 몸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련하고 신비한 목소리로 부르는 바다의 노래들
손님들이 감사의 표시로 사주는 맥주를
그들과 함께 어울려 엄청 마셔댔지
어디서 왔느냐는 그들의 물음에
나는 늘 바다 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돌렸고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는
항상 말없이 웃어주었는데
마오리 무명가수에게 그들이 붙여준 이름은
그래, 바로 고래였지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서도 짐작도 못했을 테지
사실 나는 진짜 고래였다는 것을
저 깊은 바다 속을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어느 날 보게 된 이 섬나라의 아름다운 해변에 반해
바다를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이렇게 뭍에서 홀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도 어렸을 때 부르던 노래만은 버리지 못해
나는 고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죽은 고래의 뼈와 가죽과 힘줄로 손수 만든 기타를 뜯으면서
바다의 노래를 들려주었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내 노래에 사람들은 열광했지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열광은 가라앉았고
불러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떠돌이 무명가수로
레퍼토리가 뻔한 싸구려 악사로
노래보다는 술을 더 잘하는 술고래로
나는 퇴락한 바닷가 마을들만 떠돌게 되었지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여기
내가 처음 뭍을 밟았던 그 바닷가에
삼십여 년 만에 다시 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에 잘 나가던 노래는 억눌린 울음이 되고
억눌린 울음은 아프게 내뱉는 신음이 되고
결국은 숨 가쁜 죽음이 되어
나는 다시 그 바닷가 그 모래밭에
이렇게 한 마리 고래로 누워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뚫고
내 귓속으로 밀려드는 바다의 물결 소리
내 부모 형제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
그래,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고래는 마침내 숨을 놓는다
얼
몇 년 만에 홀로 고국을 방문해서
그새 많이 늙으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뭐가 얼씬거리는지 얼핏 거실 창 밖을 쳐다보시던 어머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신다
얼씨구, 저 여편네 또 왔네
얼른 밖으로 나간 어머니께서는
얼멍덜멍 가을걷이들을 늘어놓은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는
얼금뱅이 할머니의 손을 잡아채고는
얼룩덜룩 페인트칠 벗겨진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가신다
얼빠진 노인네야
몇 달 전 아들네가 교통사고로 다 죽었거든
며느리랑 손녀딸이랑 일가족이 모두 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글쎄, 동네에 낯선 사람만 나타나면
덥석 손 잡으며 아는 척하고
뿌리치면 몰래 뒤따라가선
그 사람 들어가는 집까지 쫓아 들어간다니까
츠츳, 오늘은 널 따라 들어온 모양이구나
잠시 후 돌아와서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며칠 후 모처럼 한가한 날 아침
혼자 목욕탕에 다녀오다가
마을 어귀에서 서성대고 있는 얼금뱅이 할머니를 만난다
얼이 빠져서 굴속같이 컴컴하던 할머니의 두 눈이
나를 보자마자 반짝 불이 켜진다
다짜고짜 내게로 달려오더니
내 두 손을 꼭 잡는다
이제 오는구나, 내 새끼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에미랑 딸내미는 같이 안 온겨?
아무튼 추우니 어여 집으로 들어가자
얼떨결에 닥친 이 사태에
얼간이처럼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얼싸안은 할머니의 두 손도 차마 뿌리치지 못한 채
얼쩡얼쩡 할머니의 집까지 이끌려간다
얼크러진 집 안으로까지 끌어대는 할머니를
얼렁뚱땅 거짓말로 간신히 따돌리고는
얼른 나는 어머니 댁으로 도망쳐온다
다행히 이번에는 쫓아오지 않아서 안심하면서도
내가 좀 잘못한 게 아닌가 싶어
얼마간 얼얼해지는 마음이
얼음침 잔뜩 맞은 얼갈이 배추 같다
그날 밤 꿈속에선
얼금뱅이 할머니가 밤새 나를 쫓아다니고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새벽녁이 다 되어서야 겨우 어머니 댁에 닿았는데
대문을 열어주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아, 얼금뱅이 할머니 얼굴이다
얼치기 아들은 소리 없이 울었다
196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교 졸업 후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10년 넘게 공연기획자로 일하다가 2001년 새천년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아내와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대도시 오클랜드에 정착해서 10년 넘게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2014년 작은 시골 마을 카티카티로 이주하여 원예 노동자로 일하면서 현재까지 또 10년 넘게 살고 있다. 2006년 제8회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23년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