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9호
동조자
고명철
베트남계 미국 디아스포라, 비판적 성찰의 겹시선:
비엣 타인 응우옌 『동조자』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학술적·비평적 논의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창작 성과가 자못 축적되고 있다. 베트남학(Vietnamese Studies)에서 베트남 전쟁이 주된 관심사인 만큼, 베트남 문학이 진력하고 있는 창작과 비평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학이 거둔 성과의 대부분은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 혁명(가)의 성취에 절대적 비중을 둠으로써 이른바 혁명 서사 계열의 문학이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베트남의 개혁 개방인 ‘도이 머이’(1986) 이후 혁명 서사 계열 외에 베트남 사회 내부의 문제를 비판하든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적 문제의식의 작품들이 발표되면서 베트남 문학의 쇄신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들 문학의 바탕에는, 북베트남의 정치사회적 이념과 혁명적 정동을 근간으로 베트남 통일 공화국을 이룩한 반제국주의 문학 전통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이후 베트남식 사회주의 근대를 추구하는 문학의 힘이 한층 더욱 배가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비엣 타인 응우옌(1971- )의 문학은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베트남 전쟁 와중 남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1975)되자 가족과 함께 난민 신세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성장한 그는, 말하자면 베트남계 미국인, 베트남의 디아스포라로서 삶을 살아간다. 북베트남 주도의 베트남 통일 과정에서 그는 통일 베트남 공화국 국민의 삶이 아니라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난민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비엣 타인 응우옌의 첫 작품인 장편 『동조자』(2016)1)는 남베트남 패망과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으로 인한 철수를 경험하고, 미국에서 난민의 삶을 살면서 겪는 베트남계 미국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동조자』는 베트남 내부의 혁명 주체의 시선, 곧 베트남의 국민국가의 서사 주체의 시선과 다른 차원의 디아스포라 주체의 시선으로 베트남을 그리는바, 이것은 베트남 전쟁 무렵의 베트남에 대한 복합적 탐색은 물론 지금여기 베트남계 미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도 소홀히 간주할 수 없는 문학적 성취다.
베트남 전쟁에서 세계 초강국 미국은 패배했다. 아무도 예측 못했듯,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이어 미국은 패전했다. 어떤 전쟁도 그렇듯이 비록 베트남이 제국 미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그 희생의 대가는 인간의 상식을 초과한다. 그래서 전쟁의 격전지뿐만 아니라 제노사이드가 자행되고 삶의 모든 기반이 파괴된 것도 모자라 밀림을 포함한 베트남의 자연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한 베트남의 곳곳에서는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도는 유령의 존재들이 곧잘 목도된다. 베트남에서 이 유령은 베트남의 산 자와 유리된 채 산 자의 삶을 위협하고 해코지하고 두려움을 안겨주는 등 산 자를 괴롭히는, 그래서 산 자가 퇴치해야 할 부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대신 산 자의 삶의 경계로 틈입하여 함께 더불어 유령 존재의 형식으로 살아내는 ‘경이로운 현실’을 실감하도록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반(反)폭력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런데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에서는 베트남에서 생명력을 지닌 유령이 허무하게 무참히 없어진다. 전쟁의 패자인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한 미군의 광기를 할리우드 영화로 재현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유령마저 철저히 절멸시키고 그 스펙터클한 장면이 연출한 현실 부재의 초과현실을 베트남 전쟁의 현실로 대체시킨다. 그러면서 이 초과현실은 베트남 전쟁의 유령 서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경이로운 현실’을 마술과 신비로 가득 찬 반문명과 야만의 세계로 치부해 버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남을 구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하여, 엄청난 화력을 퍼붓고 밀림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으로 고엽제2)를 살포한 데서 드러나듯, 미국은 상대방 적을 이기는 것을 넘어 아예 그 타자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데 궁극의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야말로 맹목적인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써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베트남 민족해방 혁명의 주체를 절멸시키는 비인간의 야만성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면모는 『동조자』에서 베트남 전쟁을 영화 촬영하는 두 폭파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B‐52 폭격기가 적의 은신처를 폭격하는 장면인데, 이 무지막지한 폭격이 적의 “살아 있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자들의 땅을 정화하고, ‘킹 콩’(적의 은신처-인용자)이 시체 위에서 승리의 춤을 추고, ‘어머니인 대지’의 얼굴에서 히피의 미소를 지워 버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어, 우리는 미국인들이야.”(1권, 288쪽)란 장면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이렇게 폭격 촬영을 하다가 남은 휘발유와 폭발물로 계획에 없던 베트남의 공동묘지를 파괴하는바, 감독은 대본에 없는 장면을 졸속으로 만들어 미군을 공격하는 게릴라가 공동묘지에 은폐하고 있으므로 “이 신성한 영역에 155밀리 백린탄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말살하는 공격”(1권, 291쪽) 장면이 그것이다. 이 두 폭파 장면에서 예의주시해야 할 것은 살아 있는 상대방 적을 죽이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 이미 죽은 자들의 땅을 정화한다는 미명 아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폭파 장면의 스펙터클을 스크린으로 재현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베트남 전쟁 서사들이 유령 존재를 통해 전쟁으로 초토화된 대자연과 대지와 관계를 맺은 ‘경이로운 현실’로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반(反)폭력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반해 할리우드 문화산업은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자가 얻은 생명력, 즉 유령 존재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경이로운 현실’ 자체가 생길 수 없는 불모화된 대지에서 인간의 말초적 쾌락 감각을 흥분시키는 데 몰입한다.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문화예술적 접근은 할리우드 문화산업을 떠받치는 미국의 군수산업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충실하며, 이처럼 전쟁에 대한 스펙터클을 반복 재생산할 수 있는 제국 미국 주도의 질서를 적극 활용할 따름이다.3)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패전을 할리우드 문화산업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전도시키는 문화적 상징폭력을 신랄히 비판한다.
이처럼 『동조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폭력적 시선을 서늘하게 응시한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난민의 삶을 살고 있는 남베트남 사람들을 때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때로는 비판적 시선으로 그려나간다. 이러한 서사적 재현이 가능한 것은 작중인물 ‘나’의 정치사회적 조건에 기인한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1권, 7쪽)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작중인물 ‘나’는 “모든 문제를 양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1권, 7쪽)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재능”(1권, 7쪽)을 지닌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영어 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미국 CIA 요원에게 발탁돼 남베트남 군부대 장군의 참모진 중 하나로 신뢰를 받는다. 이후 정보부 장교로서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 사람들이 탈출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그 아수라의 현실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나’는 북베트남 민족해방 혁명 주체들이 마침내 실현한 민족해방의 역사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나’는 보트피플로 겨우 목숨을 건진 동족들이 미국에서 정착하는 삶의 모습을 『동조자』의 곳곳에서 술회한다. 그중 다음을 읽어보자.
“
제법 상당한 비율의 사람들이 복지 혜택뿐 아니라 굴욕도 정기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불알 두 쪽이 나날이 오그라드는 동안 보조금을 지급 받는 임대아파트의 곰팡내 나는 공기 속에서 허물어져 가면서, 동화작용이라고 불리는 전이성 앞으로 인해 핼쑥해지고 망명으로 인한 염려증에 쉽사리 감염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신체적 조건에서는, 통상적인 사회적 병폐 혹은 가족 내부의 병폐도 치명적인 무언가의 증상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저항력이 미약한 그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서양의 나쁜 영향의 매개체라는 역할이 맡겨진 채로 말입니다. 고통 받는 그들의 아이들은 말대꾸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모국어가 아니라 아버지들보다 더 빨리 터득한 외국어로요. 아내들은 대개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그렇게 하는 와중에 남자들이 기억하는 매력적인 연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1권, 153쪽)
우리는 그들에게 찌르는 듯 아픈 패배를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기념품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무언가 다른 피부색, 그것도 특히 미국인의 지갑을 소매치기하는 한심하고 작은 황인종들의 피부색을 포용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음과 양의 이원대립적이고 인종적인 정치관을 지닌,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미국의 존엄성과 좌우 대칭학의 균형미를 위협했습니다.(1권, 194쪽)
”
미국의 난민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조국을 잃고 절대생존을 위해 보트피플의 난관을 헤치고 미국에서의 난민 생활이 겪는 어려움은 그들보다 앞서 지구상 산재해 있는 디아스포라의 난경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사회의 흑백 인종으로 구성된 “좌우 대칭학의 균형미를 위협”하는 황인종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이 부각되고 있다는 사회적 진단이다. 여기에는 세계 초강국 미국을 전쟁에서 패배시켰다는 역사적 충격을 완화 내지 망각하고 싶은 미국의 정치문화적 억압과 차별이 베트남계 미국 디아스포라에게 가해지고 있는 작가의 비판적 성찰을 간과해서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시선에 포착된 남베트남 난민자의 상처가 더욱 돋을새김되는 대목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남베트남 군인들은 미국에서 난민자의 일상을 살면서도 북베트남 민족해방 혁명 주체가 이룩한 베트남 통일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장투쟁을 통해 북베트남 주도로 빼앗긴 남베트남을 수복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 움직임과 군사 훈련과 심지어 라오스 정글 속에서 베트남 침투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목도하는 ‘나’에게 이들의 이 비현실적 모습이야말로 미국 사회에서 난민 주체가 감당하고 있는 역사의 상처인 셈이다.
『동조자』의 서사적 흡인력은 ‘나’가 디아스포라로서 겹시선을 갖고 난민자로 전락한 남베트남 사람들의 삶의 난경을 설득력 있게 재현하는 데 있다. 베트남전의 대참상을 초래한 제국 미국에 대한 매서운 비판은 물론, 패전의 역사적 충격을 전도시켜 그것을 베트남 난민에게 전가하는 미국의 반문명적 폭력을 ‘나’는 응시한다. 그리고 ‘나’는 실향민 신세이지만,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내가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2권, 15쪽)라는 ‘나’의 물음은 디아스포라가 본디 품고 있는 회귀 욕망이란 점에서 대수롭게 여길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의 파문을 일으킨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국으로 돌아간다. ‘나’가 이중 스파이란 점을 고려하면, 남베트남 장교 출신으로 베트남전 패전 후 미국으로 탈출하다시피 떠났지만, 남베트남에 잠입한 북베트남의 고정간첩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공산화된 베트남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닥친 비운(悲運)은 심정적으로 동조해 온 북베트남에 대한 비판적 경계를 갖도록 한다. 통일 베트남 공화국은 ‘나’의 그동안 정치사회적 삶을 강도 높게 재교육하는데, 그것은 남베트남과 미국의 난민 생활을 살면서 정신과 육신에 배어든 서구화를 제거하고, “진정한 혁명 의식을 생산하는 정립과 반정립”(2권, 232쪽)의 유물변증법을 체현(體現)시켜야 한다. 이러한 재교육을 위해 ‘나’는 그동안 겪은 모든 것을 자술서의 형식으로 재현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자술서는 재교육용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자술서를 통해 ‘나’의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고 그것에 대한 반성적 언어가 요구하는, 재교육에 최적화된 공산주의적 주체로서 거듭날 것을 자기 긍정하는 언어가 재교육 위원을 충족시켜 줄 만큼 자술서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반항적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써 주고 달갑지 않은 체류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당과 공화국 영원하기를. 호찌민의 찬란한 본보기를 따르라. 아름답고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자! 나는 이런 구호들이 옳다고 믿었지만, 차마 그걸 적을 수는 없었다. 내가 서구에 오염되었다고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걸 종이에 적어 넣을 수는 없었다. 상투적인 문구를 종이에 적어 두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큰 범죄인 것 같았다.”(2권, 204쪽)
기실, 『동조자』의 중심 서사는 ‘나’의 이런 자술서에 재현된 것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 자술서는 앞서 집중적으로 읽어보았듯이, 베트남 민족의 입장에서 제국 미국의 반문명적 폭력에 대한 비판을 주목하고, 남베트남 난민의 주체로서 미국에서 디아스포라 삶을 사는 가운데 겪는 민족·인종·계급 차별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을 패전한 남베트남 군인의 비현실적 조국 수복의 움직임에 대한 풍자적 시선 속에서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술서의 또 다른 진면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북베트남 주도의 민족해방을 이룬 통일 베트남 공화국의 국민국가의 지반을 굳건히 다지는 과정에서 ‘혁명의 순수성’을 벼리기 위해 재교육이란 미명 아래 교조주의적·강제적 정치의 구속으로 혁명의 생명력을 빼앗는 데 대한 비판의 언어가 자술서의 행간에 배어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독립과 자유——나는 이 단어들을 말하는 데 너무 신물이 났다——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그런 다음 곧 우리의 패배한 동포들에게서 바로 그것을 박탈했던 것이다.”(2권, 292쪽)에 내포된, 통일 베트남 공화국이 이후 추구해야 할 또 다른 혁명의 과제가 생겨난다. 과연, 독립과 자유의 이 원대한 과제는 국토가 통일됐다고 성사된 것일까. 어쩌면 ‘나’의 자술서에서 시종일관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난제는 ‘독립과 자유’가 국가의 정치 심급에서만 국한된 논의를 넘어 (사실 베트남은 통일 국가를 이룩했으므로) ‘독립과 자유’는 민족해방이란 정치적 언어로만 유의미성을 띠는 게 아니라 혁명을 겪은 근대 개별 주체의 자기 세계의 정립이란 면에서 심각히 궁리되어야 할 문제인지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작중에서 ‘나’가 베트남인 어머니와 프랑스 신부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혼혈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잡종 새끼’(1권, 37쪽)라고 반인간적 모멸과 천대를 받아온 터에, 베트남계 미국인으로서 일상을 살아야 할 ‘나’의 현존에게 ‘독립과 자유’는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혁명의 가치보다 결코 작지 않은 또 다른 혁명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의 대미에서,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들이 절실히 공유하고 있는, 그들의 삶을 추동시키는 혁명의 전언과 공명한다.
“
그리고 우리가 이 마지막 문장을, 수정되지 않을 이 문장을 쓰는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오직 이 한 가지만을 확신하고 있음을 자백한다——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 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2권, 302쪽)
”
1) 본문에서 『동조자』의 부분을 인용할 때 비엣 타인 응우옌, 김희융 옮김, 『동조자』 1, 2, 민음사, 2018에서 권수, 쪽수만 표기한다.
2) 미군은 오키나와에 대량의 고엽제를 저장했고 베트남전에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고엽제를 살포했다. 이에 대해서는 개번 매코맥‧노리마쯔 사또꼬,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정영신 옮김, 창비, 2014, 155-156쪽.
3) 베트남 전쟁을 대상으로 한 할리우드 문화산업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패자 콤플렉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이러한 점을 ‘기억 관련 산업’의 측면에서 풍부한 실제 사례를 활용하여 그 정치사회 현상학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 옮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137-170쪽 참조.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는 트리콘의 대표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1998년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