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9호
목화 꽃
김재동
내가 미국 조지아주 남부 지방 목화밭을 본 것은, 미국에 온 첫해인 1988년 여름이었다. 애틀랜타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은 북적였다. 낡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남은 좌석이 몇 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물론 승객의 반 이상이 흑인이었다. 조지아 남부 작은 도시 펨브룩(Pembroke)의 목화밭 위로 떨어지는 달빛은 유난히 푸른빛을 띠었다. 마치 대서양의 밤바다를 연상케 했다. 바람에 목화밭 고랑이 뒤척일 때마다 파도가 출렁이듯 흰 포말이 만들어졌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속살을 하얗게 드러낸 목화꽃의 향연이 아득했다. 어두웠던 초기 미국 목화농장의 아픈 역사 속 주인공들의 검은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 가볍고 푹신한 거위털 이불마저도 흔하게 되었지만,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시골에서는 두툼한 솜이불이 귀했다. 우리 형제들은 무거운 솜이불 하나로 겨울을 나야 했다. 찬바람이 문풍지에 대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겨울밤이면, 서로 이불을 차지하기 위해 용을 쓰다 잠들기 일쑤였다. 이불 하면 목화를 연상하는 우리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목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는 당시 흔치 않은 목화 농사를 지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은 영글기 직전, 제법 배가 볼록한 목화를 군것질 삼아 따 먹었다. 달큰한 맛이 다래와 비슷하다 하여 목화 다래라고 했다. 해 질 녘 아이들은 목화밭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마을 전체가 온통 목화밭이었다. 목화 열매가 부풀 대로 부풀어 꽃이 만개하는 계절이면 들판엔 하얗게 눈꽃이 핀 듯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푸른빛을 띠며 목화꽃은 별처럼 빛이 났다. 초저녁 땅거미가 내릴 무렵, 하얀 목화밭을 등지고 저마다 수확한 자루를 머리에 이고, 줄지어 집으로 돌아오는 아낙들의 행렬은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손수 지은 솜이불을 혼수로 가져왔다. 그 이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견뎌냈고, 4·19와 5·16, 12·12를 거쳐 1980년대 초까지 끈질기게 버텼다. 어머니는 3년에 한 번씩 뭉치고 뒤틀린 솜을 틀어 이불과 요를 다시 만들었다. 매년 봄볕 좋은 날을 받아 이불 빨래를 했는데, 그런 날이면 어머니 모습에서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1980년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그 이듬해 봄도 예외는 없었다. 5월 어느 화창한 날 어머니는 이불 홑청을 뜯었다. 홑청은 빨랫비누로 초벌빨래를 해서 솥에 잿물을 넣어 푹 삶았다. 그런 다음 빨랫방망이로 힘차게 두들겨, 겨우내 묵은 땟국물을 빼냈다. 홑청이 마르는 동안 어머니는 부엌에서 풀을 쒔다. 풀을 먹여 적당히 마른 흰 홑청을 정성껏 강약으로 리듬을 주며 다듬이질을 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 현란한 손놀림, 한 손은 높이 다른 쪽은 낮게 한 손은 빠르게 다른 손은 느리게,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춤을 추듯 역동적인 동작은 볼 수 없었다. 이따금 장단을 맞추듯 휘파람처럼 된 숨을 토해내던, 그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눈썹 위에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목화꽃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화 따는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둠이 내리는 밭둑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좋았다던 어머니. 열아홉 어린 나이에 광산 김씨 가문으로 시집오던 날, 어머니가 느꼈을 당혹감과 참혹함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외조부는 동네 서당 훈장을 했다. 외할머니와 딸들이 목화 농사를 지어 밥은 굶지 않고 살았다. 외조부는 친구였던 친할아버지와 자식을 나누어 갖기로 약속을 했던 터라, 어머니는 신랑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혼례를 치렀다.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시집온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신랑은 사지 육신이 멀쩡했으며 훤칠한 미남이었다.
어머니를 실망하게 만든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가마에서 내려 신랑집에 당도해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친정어머니는 광산 김씨 양반댁이라는 것을 은근히 강조했었다. 밥술이나 먹는 집일 거라 기대하게 했던, 친정어머니의 말과는 달리, 그 집은 친정집보다 작았다. 시부모와 혼기 찬 시누이, 어린 시동생까지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옹색해 보이는 초가였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동네 아낙들이 정지를 드나들며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정지는 좁고 살림살이는 남루해 보였다. 집 앞 채전밭의 제법 풍성한 푸성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고 한다.
어느덧 늦여름 강렬한 햇살 속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어제는 아내가 침대 컴포터를 두꺼운 것으로 바꿔 갈았다. 내가 사는 이 도시는 해발 1,400미터 고산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사막 기후 특성 때문에 여름과 겨울이 길고 일교차가 심하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인 늦여름부터는, 새벽녘 이불 없이는 선득함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머지않아 두텁고 묵직한 어머니의 솜이불이 생각나는 계절이 눈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인도 힌두교 『우파니샤드』에는, 면사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준다고 적혀 있다. 목화꽃은 솜으로, 그 솜은 이불로 다시 태어났다. 이불은 어머니와 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면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듬이질을 힘겹게 마친 후 이불과 요의 홑청을 정성스레 꿰매어 다가올 겨울 준비를 마친 어머니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올겨울 엄마 생각하며 덮으렴.” 어머니 눈가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봄의 끝자락에 어머니는 말기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해 장마가 휩쓸고 간 늦은 여름, 봄 눈이 햇볕에 녹아내리듯 어머니는 슬며시 세상을 떠났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1988년 도미(渡美),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 2008년 제8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2012년 제6회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수상, 2023년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 수필·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24년 ‘서울詩 지하철’ 공모전에 당선됐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경희문인회, 경희사이버문인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신문 매체에 미국 문화 칼럼과 시사 칼럼을 쓰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