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9호
부산 제1부두: 어느 왕조의 유물
김응교
현재 부산역 제1부두 (출처: 김응교 제공)
윤동주는 명동마을과 용정에서 자라면서 바다를 보지 못했다. 평양에서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바다를 보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때 바다를 보았다는 흔적은 글에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가 바다를 본 것은 1937년 9월이다.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교수는 『만주지나 기차시간표』를 검토하여 송몽규가 교토에 갔을 차편과 시간을 추론해 낸다. 당시 교토대학 문학부 사무실에 2월 15일자로 작성한 지원자 명부에 송몽규 이름이 있으니 적어도 13일에는 경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론한다.
“
1942년 당시의 열차시각표에 따르면 13일 23시 01분 경성역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를 타면 14일 7시 35분에 부산잔교역 도착, 9시 30분 출발 부관연락선으로 18시 15분 시모노세키항 도착, 20시 30분 시모노세키역에서 출발하는 도쿄행 특별급행으로 15일 7시 32분에 교토역에 닿을 수 있었다.1)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표를 검토하면 윤동주의 일본행도 추적할 수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부관연락선’ 혹은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 관부(關釜)의 ‘관’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의 끝 자인 관(關)이고, ‘부’는 부산의 부(釜)다. 부산과 하관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는 연락선을 일제강점기에 부관연락선 혹은 관부연락선이라고 했다. 그때 “14일 7시 35분에 부산잔교역 도착”이라는 대목에 등장하는 ‘부산잔교역’은 지금의 ‘부산항 제1부두’를 뜻한다.
부산항 제1부두는 1898년 부지 확장 공사를 시작으로 하여, 본래 ‘잔교식 부두’로 만들어졌다. 잔교식 부두란 가운데 콘크리트로 된 일종의 말뚝 같은 기둥을 바다에 세우고, 그 기둥 위에 판을 올려놓은 방식이다.
윤동주가 배를 탔던 1930년대 관부연락선 부두 터미널
(출처: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1930년대 부산 중구 중앙동 관부연락선터미널과 경복환
(출처: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1930년대 부산 중구 중앙동 관부연락선터미널
(출처: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갈 때는 당연히 제1부두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당시 저 배를 타려면 ‘도항(渡航) 증명서(證明書)’라는 문서가 있어야 했다. 그 도항증명서가 쓰여 있는 시가 윤동주의 「참회록」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기로 한다. 일본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을 타려면 ‘도항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하여, 주민등록과 졸업장에 쓰인 이름이 같지 않았다. 졸업 직후 북간도로 귀향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윤동주는 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 「참회록」 전문
”
일제에 망한 왕조(王朝)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이고, 그 후예는 구리 거울에 남아 있는 “내 얼굴”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윤동주는 자신의 성씨를 바꾸어야 했다.
이 시를 쓰고 닷새 후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에 제출한다. 연희전문 학적부를 보면 윤동주라는 이름은 빨간 줄로 지워지고,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로 새로 쓰여 있다.
‘만 24년 1개월’은 이 시를 쓴 1942년 1월 24일에 그가 태어난 1917년 12월 30일을 빼면 정확히 날짜가 맞다.
윤동주가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왜 그리 부끄러운 창씨개명을 했을까, 괴로워할 것이라고 한다.
기쁨이 없고, 부끄러운 고백을 「참회록」에 쓴 그에게 일본행 유학이 무슨 희망이고 사랑이 될까. 「참회록」의 육필 원고를 보면 여백에 ‘생존(生存)’, ‘생활(生活)’, ‘힘’ 등의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다.
이제까지 연구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에 유학 갈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미즈노 나오키 교수는 그 논리를 뒤엎는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서도 일본 대학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들 이름이 여러 대학 유학생부에 나오기 때문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경우는 특이했다. 가족들이 이미 창씨개명을 했기에 호적과 학적부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학에 호적과 학적부에 쓰인 이름이 같아야 입학할 수 있기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이 아닌 창씨 ‘신고’를 했다는 것이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주장이다.2)
부산항 제1부두는 분명 식민지인이 노동자가 되든 유학생이 되든 일본으로 가려는 조선인은 누구나 굴욕적으로 가야 하는 공간이었다.
1912년 제1부두는 경부선과 그대로 연결되도록 완공되었다. 제1부두에서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운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무기들도 옮겨야 했다. 군수물자 수송도 무역이나 여객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다.
일제는 놀라운 일을 기획했다. 뭍에서 달리던 기차를 그대로 배에 싣고, 다시 배에 실었던 기차를 뭍에 그대로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온 기차는 그대로 배 안으로 들어가, 부산까지 실려 갔다가, 부산에서 그대로 철도길에 올라, 그대로 조선 땅을 거슬러 올라가 만주로 향하는 방식을 일본인들은 계획했다.
지금 남아 있는 부산항 제1부두에는 물류창고가 남아 있다. 윤동주가 일본에 갈 때 있었던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는 부산 비엔날레도 했고,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슬픔의 장소였지만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 미즈노 나오키, 정한나 옮김, 「일본 유학시절의 윤동주와 송몽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세학풍연구소 편, 『윤동주와 그의 시대』, 혜안, 2018, 199쪽.
2) 미즈노 나오키,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했는가」, 류양선 엮음,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며』, 다시올, 2015, 198-202쪽.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씨앗/통조림』을 냈고, 세 권의 윤동주 이야기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를 냈다. 평론집 『좋은 언어로: 신동엽 평전』, 『그늘: 문학과 숨은 신』, 『곁으로: 문학의 공간』,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일본적 마음』, 『백년 동안의 증언: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韓國現代詩の魅惑)』(新幹社, 2007), 영화평론집 『시네마 에피파니』 등을 냈다. 번역서는 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양석일 장편소설 『어둠의 아이들』, 『다시 오는 봄』, 오스기 사카에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일본어로 번역한 고은 시선집 『いま、君に詩が來たのか: 高銀詩選集』(공역, 藤原書店, 2007) 등이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동주의 길’, 《서울신문》에 ‘작가의 탄생’, 《중앙일보》에 ‘김응교의 가장자리’를 연재했다. 중국, 일본, 프랑스 파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윤동주를 강연했고, CBS TV 〈크리스천 NOW〉 MC, 국민TV 인문학 방송 〈김응교의 일시적 순간〉을 진행, KBS 〈TV 책을 보다〉 자문위원, MBC TV 〈무한도전〉, CBS TV 아카데미숲에서 강연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순헌칼리지 교수이고, 신동엽학회 학회장이다. 샤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대산문화재단 외국문학 번역기금 등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