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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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짱깨, 쪽발이, 그리고 ‘朝鮮人’ - 덧붙여 시발, Fuck, 가오리방쯔에 대한 考察

구본환

   욕의 본질은 ‘나와 너를 구별’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욕설에서 나는 절대 이러한 존재가 아니지만 너는 반드시 이렇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며 저주의 염원을 담는 점에서 주술적이기까지 하다. 욕의 종류에는 성, 신분, 직업, 출신지, 신체의 비하나 죽음, 질병에 대한 바람, 동물에 대한 비유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심한 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에…….


   #1
   한국에 있으면서 동창들과 단체 메신저를 주고받았다. 친한 친구 한 명이 중국에 거주하는 나를 ‘짱깨’라고 불렀다. 나는 미국으로 애들을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인 그에게 ‘양키’라고 불렀는데 개의치 않았다. 역시 최근 고조된 반중 정서와 해방 이후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타고 견고해진 영원불멸, 절대 진리의 한미 동맹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채팅방을 나왔다.


   #2
   수업 중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던 중국 학생들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이 장면에서 항상 있는 일이었다. 드라마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러시아인의 이름이 한국에서 가장 흔한 욕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한국어를 잘 가르쳤기 때문일까? 욕은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아니, 그것보다 이 욕은 이제 중국에서도 흔히 쓰이는 일상어가 되었다.


   중국인을 비하하는 멸칭에는 ‘짱깨’ 또는 ‘짱꼴라’가 있다. 짱깨는 한자어 또는 중국어 ‘장궤(掌櫃)’, ‘짱궤이’에서 온 말로 돈 많은 부자, 돈 궤짝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중국집, 중국요리, 짜장면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1) 이 단어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경제적 영향력과 이익을 넓혀 가던 중국 화교 세력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원하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실제로 1927년, 1931년 한반도에서는 화교 배척 사건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화교 사회가 위축하는 사건이 있어왔다.2)
   그런데 이러한 조선인과 화교로 대표되는 중국인의 갈등의 이면에는 교묘한 일본의 분열 정책이 있었다. 흔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잘 사용했던 분권 통치 정책, 즉 ‘Divide & Rule’에 기반한 것이었다. 지배자 입장에서 끊임없이 피지배층을 민족으로, 종교로, 계급으로, 성별로, 이데올로기로 갈라쳐 갈등을 야기하고 힘을 축적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식민 상태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중반 일본의 세력하에 있던 조선 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중국인 간의 대립과 반목은 사실상 이등 국민을 가리는 것이었고 이는 알게 모르게 일등 국민으로서 일본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현상이 되었다.3)



▲ 3년째 북한과의 교역이 멈춘 단동해관.

   압록강을 사이에 둔 쌍둥이 도시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것은 압록강 다리다. 국경도시이니만큼 기차가 다리를 건너자마자 닿는 곳은 해관이다. 이 해관 앞에 여러 북한의 상점, 상인들이 있어 그들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소와 냉면집, 식당들이 많다. 하루는 택시를 타고 그 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용모 단정한 아가씨들이 단고기 식당 앞에서 거리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가오리방쯔(高麗棒子)’, 중국인 택시 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고려인 몽둥이’,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그날따라 내 중국어 발음이 정확해서였을까? 택시 기사는 차 안에 또 한 명, 남쪽의 가오리방쯔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해관 앞 얼마루의 북한 냉면집 메뉴. 보통 북한 화교들이 운영한다.

   오래된 남북 관계의 침체와 코로나로 인해 단둥 한인 사회는 그 규모가 200명도 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에 비해 단둥에 있는 ‘북(北)의 가오리방쯔들’은 최소한 몇천 명, 혹은 몇만 명이 있다 하는데 북한 식당 외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단둥시 외곽에 있는 수산물 가공 공장이나 식품 공장 같은 곳에서 일명 ‘외화벌이’라는 활동으로 통제된 단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단동 기차역 앞에 있는 모택동의 대형 동상. 방향은 북경을 향해 있다.

   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반응에 나는 담담하게 ‘시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 어원은 동사 ‘씹하다’에서 나왔는데, 단순히 ‘성관계를 하다’라는 뜻의 ‘Sex’보다는 ‘Fuck’에 가까운 의미가 있다. 어떤 친구가 버스를 타고 용산을 지날 때 지나가고 있던 흑인 미군에게 이 욕을 장난삼아 했다가 씩씩거리면서 쫓아와 식겁했다던가?
   모든 집단에는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금지의 규칙이 있는데, 이를 보통 금기(禁忌), 타부(taboo)라 한다. 현대 사회에 와서 왜 굳이 이런 금기가 있을까 싶게 의아한 미신 같은 것들도 많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두 가지 절대적 금기가 있어왔다. 하나는 존속살인,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거나 그 반대로 자식을 죽이거나 형제들끼리 살인하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지금 말하는 ‘씹하다’ 혹은 ‘Fuck’의 뜻인 근친상간(近親相姦)인데,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이 금기가 얼마나 파괴력이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고운 말을 쓰자는 외국인 강사 선생님의 호소에 학생들은 수긍했을까? 이 한국 욕은 어원을 차치하고라도 발음상 외국인들의 이목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시’라고 발음할 때는 그간의 모든 스트레스와 짜증을 모아 오는 듯하고 연이어 터지는 /f/의 발음은 폭탄과도 같이 모든 것을 터뜨리며 날려버릴 것 같다. 아마도 욕은 너와 나를 가르는 다름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만큼 체제보다도 영원할 것이고 인류가 두 명 이상 있을 때까지도 존재할 것이다.



▲ ‘한국성’ 상가의 모습. 지명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곳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 시기, 한반도와 이곳 안동(단동의 옛 지명)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인을 조선인들은 ‘쪽발이’라고 낮잡아 불렀다. ‘쪽발이’는 일본인들이 신는 왜나막신인 게다나 일본식 짚신인 조리에서 온 편족(片足)의 형상에서 기원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식민지인인 조선인을 그대로 ‘조센징’이라고 불렀다. 이 ‘조센징’은 나라도 없이 보호받을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이라는 멸칭의 뜻이 있었다. 대부분의 욕이 한 개인으로 한정되는 경향에 비해 ‘조센징’은 범위를 넓혀 선대의 무능함, 자신이 속한 집단인 국가까지 포함하여 한 개인의 세계관을 모두 능멸하는 것이었다.4) 그런데 이 ‘조센징’의 한자어, ‘조선인(朝鮮人)’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곳은 현재 이곳 단둥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둥의 중국인들은 북한 사람들을 보통 ‘차오시엔런’, 즉 조선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전자의 경우인 ‘조센징’처럼 멸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 강물 앞이 바로 북한땅이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지난했던 10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을 전후로 ‘조선인’의 ‘조센징’이 나라 없는 민족의 멸칭으로 쓰였다면 지금의 ‘차오시엔런’은 분단된 남북을 전제로 북을 지칭하는 실질적인 단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시대나 바로 후대에 ‘조선인’이라고 하는 단어의 실체가 사라져 불리지 않게 되고 사멸한 역사적인 언어로 변화하기를, 그리하여 북의 너와 남의 내가 새로운 공통된 하나로 지칭되기를 압록강 너머 그곳을 보며 소원해 본다.


참고자료

1) 조항범, 『우리말 ‘卑語’, ‘俗語’, ‘辱說’의 어원 연구』,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9, 298쪽.

2)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 경계 밖에 선 한반도화교 137년의 기록』, 도서출판 동아시아, 2018.

3) 이희재, 『번역전쟁』, 궁리, 2017.

4) 물론 한국 사회만 한정한다면 최고의 욕은 ‘빨갱이’이다. 엄혹했던 시기와 현재도 이 욕은 개인의 낙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물리적이고 사실상 폭력적인 개입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비극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한중일 범위를 넓혀 보았을 때의 관점을 서술해 보았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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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환, 요동대학교 조선어학과 한국어 강사로 재직 중이다.
2008년부터 중국 요녕성 단둥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0~2021년 계간지 『제주작가』에 단둥을 소개하는 「단동통신」을 연재한 바가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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