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2호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현장을 찾아서: 크즐오르다
김환기
알마티에서 크즐오르다(Kyzylorda)로 가는 길은 비행기였다. 크즐오르다는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의 각종 학교·단체가 이주·이동하여 정착한 곳이다. 당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은 총 17만 1,700여 명이었는데,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흩어져 정착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사회적 신분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들이었다. 강제이주 직전, 극동 연해주 지역에서 역량 있는 고려인 지식인 2,000여 명이 체포되어 숙청당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크즐오르다 지역에는 고려인뿐 아니라 독일, 우크라이나, 체첸 등의 소수민족들도 함께 강제로 이주당해 정착했다. 스텝 지역의 젖줄 시르다리야(SyrDarya)강을 끼고 조성된 콜호스(Kolkhoz, 집단농장: 북극성, 기간트, 붉은동방, 레닌의 길, 삼월일일, 아방가르드 등)에서 농경지를 개척했고, 자녀들은 다른 민족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당시 고려인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집단농장인 콜호스 기간트(Gigant)를 찾았다. 크즐오르다에서 차로 약 2시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 기간트에서는 고려인 노동 영웅이 여러 명 배출되었는데, 1937년 당시 어린아이로 부모와 함께 이주한 고려인 2세 할머니가 현재까지 살고 있었다. 콜호스 근처에 사는 건장한 체첸인(고려인 친구)이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었는데 농장 입구부터 노동 영웅들의 낡은 사진들이 전봇대마다 걸려 있었다.
고려인 할머니가 사는 집은 흙담과 시멘트가 뒤섞인 낡은 가옥이었다. 할머니는 가족을 다 여읜 후 초등학교 동창생인 우크라이나인과 말년에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고 일행 중의 송쟌나 교수가 일러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가 자리를 뜨려 하자 할머니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조선의 노래가 있다며 〈도라지타령〉을 불러주신다. 고려인 콜호스에서 크즐오르다로 돌아오는 동안 옆자리의 송 교수가 연신 눈물을 훔쳤다. 고려인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수로 살고 있는 송 교수의 먹먹한 마음이 전해진다.
크즐오르다에는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과 시인 강태수도 함께 이주했다. 강제이주 직전 극동 연해주에서는 스탈린에 의해 수많은 고려인 지식인이 체포·숙청되는 비극이 있었지만, 홍범도 장군은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강태수는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념적 광풍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된 〈봉오동 전투〉(2019)는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함과 험난한 산악 지형을 이용한 일본군 타격 전략이 돋보이는 영화다. 홍범도 장군은 말년에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를 맡으며 지냈다. 일각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고려극장의 수위로 살다 비참하게 삶을 마무리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항일무장투쟁을 진두지휘한 장군으로서 크즐오르다 고려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존경받았다. 크즐오르다의 고려인 사회는 일찍부터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의 묘지를 조성하고 그들의 항일민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크즐오르다 시내에는 ‘홍범도 거리’를 비롯해 고려인 노동 영웅 김만삼 등의 거리명을 조성하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릴 정도로 현지의 평가는 각별했다. 이렇듯 크즐오르다는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고향이자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금년 가을 시인 강태수의 자기 서사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김필영 해제· 정리, 민속원, 2022)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필자는 책을 엮은 김필영 교수와 인연이 있어 강태수의 1937년 강제이주와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를 읽고 논문을 한 편 쓴 적이 있다. 시인 강태수는 1938년 강제이주 열차 안에서 「밭 갈던 아씨에게」라는 시를 한 수 썼고, 그 시를 크즐오르다의 한 대학 《벽보신문》에 소개하게 된다. 자신의 고향과 다름없는 원동을 생각한 시였는데 시상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짙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 체제에서 횡행하던 동료들의 고발로 강태수는 당국에 체포되었고, 뜻하지 않게 악명 높은 소련의 ‘아르한겔스크(Arhangelsk) 수용소’에 갇히고 만다. 꼼짝없이 21여 년 영어의 몸으로 젊은 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무자비한 철권통치의 비인도적 상황은 시인 강태수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극동 연해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조명희, 최재형 등 수많은 고려인 지식인들이 그렇게 체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픈 역사를 기억한다. 훗날 강태수는 고향 크즐오르다로 돌아와 집필 활동에 매달리긴 하지만, 한 서린 지난 세월을 끝내 풀어내지는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시인 강태수는 생전에 남긴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에서 스탈린 시대에 ‘이념의 종’으로 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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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삶의 뜻을 제대로 모르면서 살아왔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남의 말에 절대복종하며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온 것이 대단히 저주스럽다. 이제는 벌써 늦은 감이 들긴 하지만, 나는 단 하루라도 내 운명의 참된 주인이 되어 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제 눈으로 사물을 판단하며 살아보고 싶다. 무릇 종노릇은 천하다. 하물며 사상이나 이념의 종노릇은 그보다도 더 천한 것이다.
몸은 자유스러워졌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과연 나의 생각과 나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겠는지…….
“사상이나 이념의 종노릇”이 아닌 “단 하루라도 내 운명의 참된 주인이 되어” 살고 싶던 한 인간의 절규가 아닐 수 없다.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과대학장과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다이쇼 대학 대학원 석·박사를 졸업했다. 대표 저서로는 『시가 나오야』,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 『브라질 코리언 문학 선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암야행로』, 『일본 메이지 문학사』, 『화산도』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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