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title_text

2호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 문학사와 현황과 전망

윤의섭

1. 중국 조선족 문학의 개략적인 전개 과정1)

   이 글의 제목은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지만 이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에 거주했거나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문학을 다루어야 하므로 본 장에서는 ‘중국 조선족 문학’이라는 다소 국지적인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현재 조선족이 중국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전 세계 곳곳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문학 활동에 대해 ‘중국 한인 한글문학’,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라는 명칭도 쓸 수 있다. 중국 내 한인이나 우리나라의 중국 한인 등을 모두 포함하여 국경을 초월한 한민족 공동체인 ‘한인’이라는 인식으로 함께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한글문학의 범주에서 볼 때 ‘한인’이라는 명칭이 민족성을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라는 명칭을 쓸 필요도 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의 시작은 만주라고 불리던 지금의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창작되고 발표된 ‘재만 조선인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토지를 수탈당한 조선인들 일부는 농사지을 땅을 찾아 만주로 갔고 수많은 난관과 고초를 겪으며 정착했다. 이 시기의 이주와 개척의 역사는 곧바로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설 분야에서는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박영준, 황건 등의 작품이 있다. 최서해의 단편소설 「홍염」(《조선문단》, 1927.1)은 조선에서 발표되었지만 만주에서 한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민의 대립과 생활상을 보여주어 재만 조선인 문학의 초기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다. 강경애 역시 중편소설 「소금」(《신가정》, 1934.5~10)을 통해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소작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안수길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간도에 기자로 머물며 겪은 만주 체험, 만주 이주의 역사 등을 소설화했다. 특히 그의 중편소설 「벼」(《만선일보》, 1941.11.16.~12.25)는 조선인, 중국인, 만주 원주민, 일본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고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김창걸의 「암야」(《만선일보》, 1939)는 가난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현실, 여성이 매매를 당하는 현실 등 당시 이주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시 분야에서는 리욱, 백석, 이육사, 유치환, 윤동주, 심연수, 김조규, 박귀송, 박팔양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시인들은 《북향》(1935.10 창간), 《가톨릭 소년》(1936.3), 《만선일보》(1937.10)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만주시인집』(박팔양 편, 제일협화구락부 문학부, 1942.9), 『재만조선인시집󰡕(김조규 편, 예문당, 1942.10) 같은 합동 시집에 작품을 수록했다. 당시 조선에서 시집이 발간되었거나 비교적 잘 알려진 시인 외에 주목할 시인은 리욱이다. 리욱은 1907년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태어나 1910년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 강장동으로 건너왔다. 1924년 소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첫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며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전까지 재만 조선인 문학 시기에 리욱은 시 「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 등을 《만선일보》, 《조광》, 《조선지광》 등에 발표했다.
‘재만 조선인 문학’으로 칭할 수 있는 조선인 문학 활동 시기는 1945년 광복 전후까지로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일제와 이에 맞서는 조선의용군, 중국군,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뉜 중국인 간의 전쟁터였다. 재만 조선인의 항일 투쟁은 훗날 김학철 등 조선의용군 출신 작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초기 중국 사회주의 국가의 건국 이념에 부응하는 경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투쟁은 일면으로는 중국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 많은 재만 조선인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230여만 명 중 130여만 명은 귀환을 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이 중국에 남기로 결정한 데에 영향을 준 두 가지 사유는 토지 소유와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일 것이다. 따라서 1945년 광복 이후 중국 내의 조선인 문학 활동은 중국에 귀속하여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서 문학 활동을 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다고 봐야 한다. 1945년 광복 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될 때까지 나온 작품으로는 소설에서 김학철의 「균열」(《신문학》, 1946.4), 「담배국」(《문학》, 1946.7) 등이 있고 시에서 합동 시집인 『태풍』(연길한글연구회 편, 1947)과 리욱의 시집 『북두성』(연길시직공인쇄공장, 1947) 등이 있다. 이 외에 설인, 천영걸, 박귀송 김순기, 김례삼 등의 시인이 있다. 이 시기의 소설은 주로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비교적 빠르게 현실을 반영하는 시에는 조국 조선의 광복을 기뻐하는 내용도 있고, 토지를 준 중국 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으로 소수민족의 일원이 된 중국 내 조선인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건국 후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 공민으로 살았다. 조선족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국가적 동일성 정책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환경에 놓였다. 이런 가운데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중국 조선족 문학’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활발히 창작되었고 발표되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 정부가 수립되어 연변 지구가 조선족 자치구로 지정되고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은 1953년 제1차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학예술일꾼대회를 통해 문예 조직을 정비하고 1956년에는 제1차 연변조선족자치주 작가대표회의를 열어 중국작가협회 연변 분회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백화만발, 백가쟁명’ 방침을 제시했다. 조선족 문학인들은 조선족 문학의 유산을 발굴,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펼쳤다.
1957년 6월 8일 마오쩌둥이 내린 강령 이후 전국적으로 반우파 투쟁이 벌어졌다. 김학철, 김순기, 채택룡, 주선우, 서헌, 김용식, 조룡남 등의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이 우파로 몰렸고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강제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조선족 문학인이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개인적인 내용을 다루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8년부터 1959년에는 대약진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대중적인 창작 운동인 신민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에 대한 수정자본주의 비판 강령을 내렸다. 모든 문예 정책에서 계급투쟁과 새 중국의 성격 강화라는 테제를 더욱 강고히 하라는 지시였다. 중국 조선족의 ‘민족’과 관련된 모든 사상과 활동은 비판을 받았고 문학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내용만이 허락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연변문련’이 해산되고 《장백산》 등의 잡지가 폐간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약진운동이 벌어진 시기부터 문화대혁명기 전인 1966년까지 소설 분야에서는 혁명적 낭만주의, 계급투쟁, 사회주의 사상이 전면적으로 표출된 작품이 양산되었다. 「쇠물이 흐른다」(림원춘, 《아리랑》, 1958), 「청춘은 빛난다」(리창역, 《아리랑》, 1958), 「끝없는 추구」(리근전, 《연변일보》, 1959), 「처녀기술원」(윤금철, 《연변문학》, 1959), 「우린 폭파수로 되었다」(리송길, 《연변문학》, 1960), 「청춘기」(리근전, 《연변문학》, 1961), 「범바위」(리근전, 연변인민출판사, 1962), 「새 생활」(김호봉, 《송화강》, 1963), 「어려운 일」(장은민, 《흑룡강신문》, 1963), 「밭갈이 가세」(허흥식, 《연변일보》, 1964), 「붉은 마음」(리동규, 《연변일보》, 1965), 「봄날의 이야기」(김성학, 연변, 1966) 등의 작품이 있다.
같은 시기에 시 분야에서도 중국을 ‘조국’으로 찬양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칭송하는 시와 시집이 다수 발표되었다. 시집으로는 『 동풍만리』(김철, 연변인민출판사, 1958), 『 청춘의 노래 』(감경석 외, 연변인민출판사, 1959), 『들끓는 변강 』(임효원 외, 연변인민출판사, 1959), 아침은 찬란하여라』(김철 외, 연변인민출판사, 1961), 『연변시집(1950~1962)』(임효원 외, 연변인민출판사, 1964), 『변강의 아침』(강호혁 외, 연변인민출판사, 1964) 등이 있다. 시는 「고동하 시초」(김성휘, 1958), 「염전」(리욱, 1958), 「조국 찬송」(김철, 1959), 「배나무를 심으며」(리욱, 1959), 「최신지도를 그리는 사람들께」(임효원, 1959), 「나는 가리라」(김성휘, 1960), 「뜨락또르운전수」(남룡성, 1961), 「태양 송가」(리두송, 1962), 「지부서기의 손길」(김경석, 1963), 「지경돌」(김철, 1964), 「대지의 아들」(한원국. 1965), 「농업지원의 길에서」(윤태삼, 1966) 등이 있다.

   이렇듯 이 시기에 많은 양의 중국 조선족 문학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중국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찬양과 혁명적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은 작품이 한글로 쓰였고 배경이 연변 지구라는 점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경향은 중국 국민으로서 철저히 중국의 정책을 따라야 그나마 소수민족의 지위를 유지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의 중국 조선족 문학을 보면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조선족이 중국에 정착하고 중국인과 동화해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은 문화대혁명기였다. 이 시기에는 더 강경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사상으로 인해 문학이 정치의 부속적 도구가 되었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영웅적 인물을 만들거나 철저한 자기비판을 통한 계급투쟁을 보여주는 작품만이 발표될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 역시 그동안 애를 쓴 보람도 없이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못하고 한글 사용까지 비판 대상이 되는 등 암흑기를 맞이한 것이다. 문화대혁명기에 발표된 시집으로는 『장백에 울리는 노래』(김응준 외, 연변인민출판사, 1972), 『격전의 노래』(박화 외, 연변인민출판사, 1975), 『공사의 아침』(김철석 외, 연변인민출판사, 1976)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작품을 창작하였어도 발표는 하지 못하고 개혁개방기에 이르러서야 발표한 경우가 많다.

1976년 10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었다. 1978년 10월 연변문학예술일꾼연합회 제2기 제3차 전체위원(확대)회의 소집을 기점으로 하여 각종 문예지가 창간되면서 중국 조선족 문학은 새로운 출발을 했다. 문화대혁명에서 벗어난 직후의 시기에 문화대혁명으로 겪은 고통과 트라우마를 다룬 ‘반성문학’, ‘상흔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소설 「원혼이 된 나」(박천수, 《연변문예》, 1979.2), 「한 당원의 자살」(리원길, 《천지》, 1985.7), 「볼세위키의 이미지」(정세봉, 《장백산》, 1991.2) 등의 작품이 있다. 이후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더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중국 조선족 문학은 양적·질적 측면에서 큰 성과를 이루고 있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가 맺어진 이후 한국에서 작품을 출간하는 작가들이 늘어났고 재조명된 작가들의 작품도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출간되었다. 수교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주해 온 중국 한인들 중 한국 문단이나 자체적으로 만든 문인 협회 등을 통해 작품 발표 활동을 하는 작가들도 상당수 있다.

   개혁개방기로 들어선 1980년대 이후에 역사소설과 세태소설이 다수 발표되었다. 역사소설은 중국 조선족이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기를 거쳐 연변에 정착하고 그 후 문화대혁명기의 고통을 겪어온 역사적 과정을 성찰하며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정립하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숲속의 우등불」(류원무, 1980), 「고난의 연대」(리근전, 1982), 「체포령이 내린 ‘강도’」(이태수, 1984), 「격정시대」(김학철, 1986), 「새벽의 메아리」(김운용,1986), 「설야」(이원길, 1989), 「먼동이 튼다」(김길련, 1993), 「눈물 젖은 두만강」(최홍일, 1994) 등이 있다. 조선족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변화와 조선족 사회의 생활상을 형상화한 세태소설로는 「구촌 조카」(홍천룡, 1981), 「가정 문제」(서광억, 1981), 「청춘략전」(김훈, 1981), 「몽당치마」(림원춘, 1983) 등이 있다. 또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 의식을 다룬 작품으로 「눈내리는 길」(리혜선, 1984), 「사내 많은 여인」(허련순, 1989), 「그녀의 세계」(리선희, 1989), 「그림자의 저쪽」(허련순, 1992) 등이 있다. 반우파 투쟁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과 계급문학의 지침에 따라야 했던 조선족의 시 분야에서는 1980년대 이후 개인의 감정을 드러낸 서정시, 연시 등이 등장한 가운데 많은 시집이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민족의식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났으며 풍자시가 등장했고 ‘몽롱시’로 시작된 모더니즘 시도 발표되었다. 서정 서사시, 장편 서사시 등 ‘장시’의 창작 역시 활발했다. 리욱, 설인, 임효원, 김창석이 활동을 재개했고 김철, 김성휘, 조룡남, 한춘, 문창남, 남영전 등이 시를 발표했다.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천지의 전설』(남영전, 1981), 『푸른 꿈』(남영전, 1988), 모더니즘 시 「추억」(김정호, 1986), 풍자시 「배심, 결심, 야심」(이상각, 1986), 「말뚝」(문창남, 1986), 연시 「사랑의 시편」(김응준, 1984), 「사랑은 날개」(김응준, 1986) 등이 있으며, 『풍운기』(리욱, 1982), 「떡갈나무 아래에서」(김성휘, 1981), 「소나무 한그루」(김성휘, 1985) 등 ‘장시’가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중국의 도시화, 한국 경험, 현대사회 속의 개인감정 등을 드러내는 시가 나타났다. 조광명, 윤청남, 김영건, 림금산, 박설매, 석화, 리순옥, 윤영애, 김영춘, 허련화 등 비교적 젊은 시인들이 등장하여 시를 발표했다.

   대략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나온 중국 조선족 문학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과거 재만 이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향이나 조국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작가들이 쓰는데, 이때의 ‘고향’은 과거 조선족들이 정착한 연변을 중심으로 한 장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1950년대~1960년대에 미처 발표하지 못해서 뒤늦게 출간하거나 재발표한 작품들이 많아서 ‘고향’이나 ‘조국’이 중국만이 아니라 조선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 중국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 억눌려온 조선인이나 한인으로서 민족의식을 분출하고 민족적 공동체의 긍지를 드러내는 내용을 보여준다. 또 항일 투쟁을 치르며 중국 공민으로서 고난을 겪어온 조선족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들 역시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의 삶을 경험한 조선족의 문학작품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한인 공동체 문화에 대한 의식, 나아가 디아스포라의 삶과 의미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는 개인 정서와 생각, 변화한 도시의 일상을 담은 작품들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나온 작품들은 주로 ‘조선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작가의 삶과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2. 21세기 중국 한인 한글문학의 현황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 한인의 한글문학은 더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2000년대를 전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 한인의 한글문학 활동은 중국과 한국,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중국 한인의 한국 경험과 한국 체류, 문단 교류, 학술적 활동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민족의 언어를 공유하는 중국 한인의 한글문학 역시 풍요로운 전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글 매체인 《연변일보》,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등의 일간지에 한글문학 작품을 게재하고 있으며, 문예지인 《연변문학》, 《송화강》, 《도라지》, 《장백산》, 《문학과 예술》 등도 발간하고 있다. 1951년 창간한 《연변문학》은 제호를 바꿔가며 꾸준히 발간되어 2019년에는 통권 700호를 맞이하기도 했다. 《연변문학》 문학상 시상식도 개최하는 등 중국 한인의 한글문학 발전에 많이 기여하고 있다.2)

   소설 분야에서는 도시 생활, 한국 경험, 중국과 한국을 넘나드는 재이동의 노마드 현상, 월경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김혁, 허련순, 김금희 등이 있다.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을 다룬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2015)을 발표한 바 있는 김혁은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연변문학》, 2003.10∼2005.2)를 통해 도시로 이동한 조선족의 삶을 보여주었다. 허련순은 코리안 드림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으로 월경한 조선족의 현실과 민족적 정체성을 다루었다. 허련순의 『바람꽃』(범우사. 1996),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인간과 자연사, 2004), 『중국색시』(북치는 마을, 2016) 등은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김금희는 필명 금희로 조선족의 한국 월경과 코리안 드림의 허구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다루면서 조선족만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점을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 2015)에 수록된 「월광무」, 「노마드」 등이 주목을 받았다.3)

   시 분야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 많은 시집이 출간되었다. 도시화와 한국 경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포용을 내용으로 한 시들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한인들이 한국에서 신인상 등을 통해 등단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리삼월은 시 「거리의 얼굴」(남영전 주편, 《장백산》 제77기, 1994.5)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얼굴은/언제나 어디서나 낯이 설다”라며 도시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을 표출한다. 김성옥은 시 「서울의 하늘」(남영전 주편, 《장백산》 제108기, 1999.6)을 통해 “초만원의 서울에서/어제가 깜깜인/할아버지의 손녀인 나”의 “하루살이” 같은 존재성과 한민족으로서 느끼는 이질감을 나타낸다.4) 재한동포문인협회(2012년 결성)는 주로 중국 한인 문학인이 참여하는 《동포문학》을 발간하고 있다. 2013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해마다 한국 출판사를 통해 발간되고 있으며 많은 시인이 시를 발표하고 있다. 일례로 《동포문학》 9호(바닷바람, 2020)에 수록된 시인은 4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김택(본명 림금철) 시인은 제38회 《연변문학》 문학상(《연변문학》, 2019)을 수상했다.5) 시 「타공」, 「쇠먼지」 등을 통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일터에서 힘겨움을 견디는 노동자의 생활과 감정을 드러낸다.
오늘날 많은 중국 한인 문학인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한다. 또 중국에 거주하더라도 한국의 각종 매체에 작품을 게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중국 한인의 한글문학 활동에는 국경이나 국가라는 경계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글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작품을 쓰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즉 경계 없음은 국경이나 국가라는 범주를 초월한 한글문학이라는 민족적·전통적·문화적 범주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중국 한인 문학인들이 쓰고 있는 한글문학의 범주는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한글문학 범주와 동일한 영역인 것이다.

3.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의 전망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한인’이라는 용어는 ‘동포’나 ‘조선족’을 대체하는 명칭으로 쓰인다. 그러나 한글문학의 범주에 볼 때 그 작품은 한인들이 전 세계에서 거주하고 이동하며 정착하고 재이동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한인의 작품’이라는 국지성과 귀속성에서 벗어나 ‘디아스포라 작품’이라는 현상성과 탈영토성을 강조한 명칭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라는 명칭은 그 발원지인 국가명을 최소한의 변별 장치로 유지하되 중국 한인 문학인들의 동시성, 다발성, 다양성을 포괄하는 한글문학 현상이나 활동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더욱이 한글문학의 범주에서는 무경계 현상을 보이기 때문에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라는 현상은 이제 한인, 한민족의 한글문학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관점을 요구한다.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은 앞으로도 양적인 면에서 더욱 확산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는 170여만 명에 이르는 중국 조선족이 있으며 중국 조선족 70만 명 이상이 한국에 체류 중이거나 정착해 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문학인들도 상당수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는 문학인은 기성 문인만이 아니라 해마다 한국 문단을 통해 등단하는 신인 문학인도 있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연계하며 각종 문예지와 출판사를 통해 한글문학 창작과 발표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많은 회원이 소속된 재한동포문인협회 등을 통해 한글문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은 한글로 쓴 문학이라는 점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한글문학과 그 문학적 재료가 같지만 역사적·문화적 차이가 있는 만큼 내용, 문체, 어휘 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또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 작품이더라도 어려서부터 익혀온 조선족 언어의 특징과 중국의 한글문학이 갖고 있는 ‘조선족 문학’의 특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중국 내의 한글문학 역시 고유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문학성을 이어가고 있다.6) 이렇게 볼 때 앞으로도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만의 특성이 유지되고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내용 면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 생활상을 보여주는 내용,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내용 등 평범한 일상의 사건, 사유, 감정 등을 더욱 세세하게 다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 성찰을 담거나 노마드의 삶에 의한 애환, 각국에서 월경하며 겪는 체험과 갈등, ‘조선족’이 겪는 사회상 등 디아스포라의 거시적 주제 의식 역시 지속적으로 형상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궁극적으로는 ‘디아스포라’라는 인식 태도는 지워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 작가의 세계관과 일상을 다루는 ‘한글문학’으로 볼 때가 올 것이다. 다만 이때의 ‘한글문학’ 역시 연구자의 관점에서는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이라는 범주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은 아직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본다. 한국의 각종 문예지와 출판사에서 작품을 게재하고 발간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좀 더 많은 독자가 중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만의 고유한 문학성과 세계관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각주

1)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 대해서는 논의나 주장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전하는 것이므로 참조한 부분들마다 구체적인 출전을 표기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참조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정덕준 외,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 푸른사상, 2006; 윤의섭 외, 『해외 한인 문학 창작 현황 자료집 3 중국 조선족 문학』, 한국문학번역원, 2020; 윤의섭, 「탈식민주의적 관점에 의한 중국 조선족 시의 전개 양상 연구 ― 문화혁명기와 개혁개방기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제30집, 현대문학이론학회, 2007, 53~88쪽.

2) 윤의섭 외, 『해외 한인 문학 창작 현황 자료집 3 중국 조선족 문학』, 한국문학번역원, 2020, 12~13쪽.

3) 위의 책, 140~146쪽.

4) 위의 책, 134~139쪽.

5) 《동북아신문》, 2019.7.30.(http://www.dbanews.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21913)

6) 윤의섭, 「중국 조선족 시의 문화적 위상」, 『한중인문학연구』제32집, 한중인문학회, 2011, 88쪽 참조.

필자 약력
윤의섭 작가 프로필 사진

시인, 교수.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전공 교수.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마계』,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등, 연구서 『중국 조선족 문학의 탈식민주의 연구』(공저) 등을 출간했다. 김구용시문학상, 사이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

공공누리로고

출처를 표시하시면 비상업적·비영리 목적으로만 이용 가능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 등 변형도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