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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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시계(視界) 속 디아스포라

고명철

1. 디아스포라 당사자의 심문, “외국인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코로나19가 불러온 팬데믹은 한국 사회의 외국인 디아스포라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가뜩이나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순혈주의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국민주의와 국가주의가 외국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배타적 차별을 낳고 있는 터에, 자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외국인 디아스포라에 가중되는 어려움을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다. 팬데믹 이전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시적 전언을 음미해 보자.

같은 하늘 땅 아래 있고 

같은 빨간 피 흐르고 있고.

같은 일을 하고 있고

같은 땀을 흐르고 있고

외국인은 왜 노동자가 아닌가요?

말을 못 한다고

문화를 모른다고

피부색 다르다고

외국인은 왜 노동자가 아닌가요?

차별을 조용히 받아야만 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하고

주는 대로 먹어야만 하고

어디에도 가고 말할 곳이 없고

잘못이 없어도 욕먹어야 하고

필요 없는 이상 버림받아야 하고

외국인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노예가 아니면 노동자?

담바 수바, 「외국인은 무엇인가요?」(《작가들》, 2006년 겨울호) 전문

세상이 옛날처럼 돌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항상 바쁘다

달과 태양 그리고 별들이 옛날처럼 빛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어둡다

나는 왜 나처럼 되었나

나의 마음은 아프다

어느 날 하루 나는 마른 꽃처럼 마음도 말랐다

당신은 나를 알아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

하나의 진실을 꼭 잡으면

너는 나를 버린다 나를 바보라고

그래도 나는 왔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나를 모른다 하늘은 있지만 구름이 없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바람은 있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다

단비르 하산 하킴,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를」(《작가들》, 2011년 여름호) 전문

   위 시 두 편은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어로 직접 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당사자의 주체적 목소리가 시로 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한국인을 향해 묻는다. 한국의 일터에서 함께 노동하는 자신들에게 가하는 민족·인종·성·종교 등 차별의 배타적 인식을 거둘 수 없느냐고. 그들도 한국의 노동자처럼 동등한 노동자로서 인식될 수 없느냐고. 노동자로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그들이 한국에서 노예적 삶을 살기 위해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그들은 한국 사회를 향해 심문한다. “외국인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체념과 비통의 정념 때문에 그들은 타방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처 입은 내면 풍경을 발견한다. 지금‑여기에서 영원한 타자로서 살고 있는 그들은 “마른 꽃처럼 마음도 말랐”으나,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한국 사회가 “당신은 나를 알아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나는 어디에도 없다”는 환멸의 통증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당신의 사랑”을 접어버릴 수는 없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디아스포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지구화 시대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디아스포라가 직면하고 있는 사안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한국문학의 형상적 사유는 어떨까. 한국문학의 주체적 시선으로 포착된 외국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2.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탈북 디아스포라

   21세기 한국문학의 시계(視界)에서 주목해야 할 쟁점 중 하나는 민족문제에 대한 진취적 상상력을 벼리는 일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 일국적 차원으로 민족을 사유하는 대단히 협소한 문학적 인식과 저항적 상상력으로는 이 문학적 쟁점에 대해 유효하게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창비, 2007)와 정도상의 연작소설 『찔레꽃』(창비, 2008)이 거둔 문학적 성취는 주목할 만하다.

   이 두 작품은 모두 탈북 디아스포라를 다루고 있되, 그들이 서사적으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분단의 문제를 한반도의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거시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기존의 이른바 분단 서사에 낯익은 독자들에게 이 두 소설은 새롭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은 이 작품들에서 탈북자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국가의 상상력에 갇힌 민족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긴밀히 연동하는 현실 속 민족문제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탈북 디아스포라에 대한, 또 분단 체제를 넘어 평화 체제를 추구하려는 문학적 인식과 실천의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탈북자에 대해 북한의 정치경제적 억압을 못 견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다분히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이념형 탈북으로 규정하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황석영과 정도상의 소설에서는 탈북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의 기득권 세력이 가속화하는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스러운 인민의 삶을 온전히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성찰을 드러낸다. 북한에 대한 황석영과 정도상의 이러한 서사는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북한 사회를 배제적 시선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국제사회의 정세 속에서 약소자인 북한의 인민을 인류애적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이주하는 동안 아랍인을 만나 결혼하여 행복을 꿈꾼다. 분단 체제가 일국적 차원의 민족문제(즉, 민족국가 하나되기-통일국가)로 허물어지거나 남한이나 미국 중심의 서구에 의해서 허물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현재 지구상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차별적 대우를 감내하고 있는 북한과 아랍 민족의 정치윤리적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서구 중심의 근대로 재편된 분단 체제에 대해 모종의 비판적 성찰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정도상은 ‘충심’을 통해 탈북자에 대한 편협한 반공주의적 인식을 바로 잡게 하고, 탈북자들이 겪는 온갖 고충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통해 분단 체제를 허물기 위해서는 정녕 무엇을 어떻게 숙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혹 우리가 남과 북의 민족문제를 남한이 북한에 대한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속류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도상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렇듯이 탈북 디아스포라에 대한 황석영과 정도상의 문학적 실천은 21세기의 한국문학이 민족문제를 더 넓고 깊게 성찰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의 민족문제는 황석영에 의해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정도상에 의해 남과 북의 섣부른 통일(統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생공존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통이(統二/通二)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탈북 디아스포라 재현의 서사에서 흥미를 배가하는 또 다른 문제작이 있다. 이응준의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민음사, 2009)은 가상 역사 소설로 “대한민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흡수통일”1) 이후의 현실을 다루며, 권리의 장편소설 『왼손잡이 미스터리』(문학수첩, 2007)는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뒤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사는 탈북민을 통해 실재와 가상현실의 착종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흡수통일 이후의 현실, 즉 ‘통일 대한민국’과 분단 체제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두 작품 모두 북한 주민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내고자 애를 쓴다. 이응준과 권리는 한국전쟁을 미체험한 젊은 세대이고, ‘6‧15선언’ 이후 진전된 남북 교류의 문화적 혜택을 듬뿍 받은 세대이며, 무엇보다 냉전 시대의 정치사회적 이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이에 자유롭지 못한 냉전의 아비투스와 단호히 결별한 세대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 대한 자못 흥미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이응준과 권리는 대한민국 일방의 정치사회적 헤게모니 지배로 귀결하는 분단 체제의 동요가 배태할 수 있는 현실을 예각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북한의 주민들이 ‘2등 국민’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실제 그렇게 되는 현실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다.

“앞에서는 인권, 인권 해도 정작 실질적인 도움은 안 주는 정부가 문제야. 보수파와 미국은 탈북자는 난민으로 둔갑시켜 탈북자 인권을 정치적으로 팔아먹고, 진보파는 북한 체제 붕괴될까 봐 인권 문제는 아예 외면해 버리고 있잖니? 당리당략만 하다가 김정일이 미사일 발사 실험에 뒤통수나 맞질 않나. 내는 김정일이 독재 정권, 수령 절대주의 싫어서 내 발로 나온 사람이지만, 사회 돌아가는 모양 보면 내 생각이 옳았나 삭갈려. 저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우리한테 정직한 직업이나 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요샌 기획 탈북 막자고 정착금도 분할 지급한다는데, 기케 하면 가게 하나 차릴 수 있겠어? 다 탈북자 수를 줄이려는 속셈이지.”
  “헬싱키 그룹이 또 한 건 하는 건가? 인권 문제로 압박해서 소련과 동구권을 무너뜨리려구.”
  “옳지. 이게 다 미제 놈들 때문이야. 탈북자 다 받아 주면 중국이 국경 단속 세게 할 거구, 결국 탈북자들 더는 못 나오게 될 거야. 경제봉쇄 조치해서 고난의 행군하게 만들더니, 인차 북한에 인권 공세로 밀어붙인 다음, 조선 반도를 이라크로 만들 셈인 게지. 미국 가면 집도 주고 직업도 주고 시민권도 주고 해서, 출세까지 한다지만 난 절대 미국 안 가, 흥!”

『왼손잡이 미스터리』, 111-112쪽

   무엇보다 무서운 현실은, 대한민국의 보수파와 미국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진보파 모두 탈북자를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만 할 뿐, 탈북자가 대한민국에서 ‘2등 국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누구도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리는 탈북자의 시선을 빌려 “안개 속에 살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나라”2)가 곧 대한민국이며, 탈북자가 이러한 안개의 나라에서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묵시록적 현실을 매우 차분하면서도 냉정히 드러낸다.

   이응준과 권리의 작품을 통해 설마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우려가 기우(杞憂)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헤아려볼 수 있다.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으나, 분단 체제를 동요시키는 과정에서 맞닥뜨려야 할 북한 주민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슬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3. 외국인 이주와 디아스포라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위력 속에서 주목되는 사회적 현안 중 하나는 외국인 이주노동과 관련한 것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으로 유입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한 노동 환경과 조건을 감내하고 있다.

(1) 시의 디아스포라

그 여자를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난다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에 빼앗긴 조선땅이 싫어

살아도 더는 살 수 없는 조국이 싫어

흑룡강으로 떠났는데

그 여자는 할애비가 버린,

땅 설고 물 설은 모국의 귀퉁이에 와서

허벅지 하얗게 내놓고 상반신 출렁이며

‘이름도∼모∼올∼라요 서∼엉도 몰라,

첨 만난 사내 푸우움에 어∼얼싸∼안겨여어∼’ 


곰팡내 물씬 풍기는 단란주점에서

올망졸망 두고 온 식솔들

눈망울에 수평선을 담고 노래 부르는데, 씨발

왜 그리도 부아가 치솟는지

휘청휘청 밖에 나와 해장으로 국수를 먹는데, 씨발

국물은 왜 그리도 뜨거운지

전봇대에 기대어 오줌 누는데, 씨발

왜 죄 없는 가랑이만 축축이 젖는지

김수열, 「연변 여자」(『바람의 목례』, 애지, 2006) 전문

여주군 가남면 국도변 어느 여주쌀밥집,

베이지색 유니폼에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를 서두르는 젊은 여인이 있네 (중략)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반도 최북단 항구도시 함흥서 왔다고 하네 (중략) 남쪽에서 가장 힘든 일은, 부모 형제 그리운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말씨를 고치는 것과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는 일이라네 너무 배가 고파서 울며 울며 꽁꽁 언 시린 겨울강 홀로 건너 먼 길 돌아 돌아왔더니 이젠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네

(중략) 

참을 수 없이 가볍기만 한 내 호기심이, 입놀림이 더없이 부끄럽기만 하네

곽효환, 「탈북 캐디 이소희」(『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0) 부분

   연변에서 온 조선족 여성은 단란주점에서 술 시중을 들며, 함흥에서 온 북측 여성은 골프장 캐디를 하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조선족 여성과 북측 여성 모두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두 시적 화자의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시적 인식은 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반성적 성찰이다. 조선족 여성의 대중가요를 듣는 시적 화자의 치솟는 “부아”는 그 여성의 내력 전반에 대한 어떤 모종의 분노와 슬픔, 그리움, 안타까움 등이 버무려진 ‘부아’다. 그 여성의 청승맞은 노래에는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살 수밖에 없던 삶의 고통이 흩뿌려져 있다. 그 고통과 단절 짓지 못한 채 조선족 여성은 한국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삶의 내력에 동반된 고통을 시적 화자는 해결해 줄 수 없다. 다만 치솟는 ‘부아’의 정념을 통해 그들의 내력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우리 모두를 향한 통렬한 반성적 성찰을 일상에서 수행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부끄러움으로 자책한다. 한국 사람들과 말투가 다른 탈북민들에 대한 “참을 수 없이 가볍기만 한 내 호기심이” 정작 한국 사회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고자 하는 그 사람들에게 정착을 더욱 힘들게 하는 구체적 차별의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 대해 시적 화자는 그 심각성을 인식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내부자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이 한국으로 이주한 외부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한국 사회에서 구별 짓고 배타적 차별을 구조화하는 인식이라는 점이 매우 문제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하종오 시인의 지속적 시작(詩作)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경 없는 공장』(삶창, 2007), 『아시아계 한국인들』(삶창, 2007), 『입국자들』(산지니, 2009), 『제국』(문학동네, 2011), 『남북상징어사전』(실천문학사, 2011), 『제주 예맨』(도서출판b, 2019) 등에 이르는 일련의 시집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물론 여기에는 생존의 절박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떠난 북한 동포를 포함)의 삶과 현실에 대한 시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난 시절 한국의 노동자들이 겪은 노동자의 상처와 고통을 되풀이해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민주화의 도정 속에서 한국의 노동 현실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제반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을 고려해 보건대, 외국인 노동자들을 둘러싼 노동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내부에 작동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식민의 내적 논리를 간과할 수 없다. 한국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열등하다고 판단되는 아시아의 이웃 나라들에 대한 편견은 준제국주의(準帝國主義, sub­imperialism)의 모양새로 드러나곤 한다. 여기에는 한국이 민주화를 정착시키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선진국의 위상을 이룸으로써 은연중 아시아의 문명을 선도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따라 값싼 아시아 노동력이 한국의 노동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일어나는 노동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한국 사회는 적실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종오는 이와 같은 비판적 문제의식 속에서 순혈주의와 국가주의(혹은 국민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증언하고 비판한다. 더 이상 일국주의(一國主義)의 맹목성에 갇혀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산적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없으며,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같은 약소자들이 다 함께 행복을 나누며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다문화 시대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시적 진실을 하종오는 노래한다.

머지않아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아내가 부른 배 부둥켜안고 있으면

남편이 쳐다보고 웃었다

첫 아이 낳아도 혼혈이라는 것

둘째 아아 낳아도 혼혈이라는 것

아내는 생각하지 않았고,

걔들이 농토의 주인이라고

걔들이 가문의 후손이라고

사내는 생각하였다

하종오, 「코시안리」(『아시아계 한국인들』, 삶창, 2007) 부분

지금

한국에서 몸 푼 한국인 산모는

친정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요

지금

한국에서 몸 푼 베트남인 산모와

한국에서 몸 푼 필리핀인 산모와

한국에서 몸 푼 태국인 산모와

한국에서 몸 푼 캄보디아인 산모는

시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요

시방

아기들은 똑같은 소리로 우네요

하종오, 「지구의 해산바라지」(『제국』, 문학동네, 2011)

   그렇다. 한국 사회는 다문화 사회의 징후를 넘어 다문화의 일상을 살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온 외국인 이주자들이 한국 사회의 약소자인 외국인 디아스포라로서 숨죽이며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다문화적 가치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시문학은 세계시민들의 아름다운 삶의 터전으로 거듭나는 원대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적 윤리를 다듬어야 할 행복한 고뇌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2) 소설의 디아스포라
1) 외국인 이주노동, “나는 이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 먹었다.”3)

   21세기 한국문학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로 유입되기 시작한 아시아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산업연수생제(1991~1993)’와 ‘고용허가제(2004~2006)’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어엿한 주체로서 이른바 다문화 사회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 과제를 떠안고 있다.4)김재영의 단편 「코끼리」(『코끼리』, 실천문학사, 2005), 박범신의 장편소설 『나마스테』(한겨레신문사, 2005), 이명랑의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실천문학사, 2005), 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실천문학사, 2005), 손홍규의 장편소설 『이슬람 정육점』(문학과지성사, 2010) 등은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선도적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김재영의 단편 「코끼리」의 한 대목을 주목해 보자.

    「코끼리」에서 한국인 노동자 ‘필용’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의 대화에서 단적으로 읽을 수 있듯이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적 대우는 그들이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1960년대의 개발독재 이후 성장제일주의란 맹목적 신화에 갇힌 채 ‘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한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이 겹쳐 있다는 게 적시되고 있다. 노동자의 이 같은 문제는 1970·1980년대의 민족·민중문학 계열의 작품에서 흔히 목도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한국 소설 지평에서는 그 명맥이 거의 사그라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 현실의 구조악(構造惡)과 행태악(行態惡)은 새로운 양상으로 존재하며, 그러한 모순과 부정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고스란히 겪고 있음을 김재영은 주목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관계, 즉 상하의 위계 관계가 조성되고 있다는 점을 뚜렷이 드러낸다. ‘필용’의 말처럼 한국인 노동자가 하지 않으려는 이른바 3D 업종의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은연중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말하자면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한국인 노동자와 동일한 계급이면서도 민족과 인종의 차별에 따라 ‘계급 이하의 계급’, 즉 ‘저층 계급(under class)’으로 전락하고5)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다룬 한국문학에서 주목할 문학적 상상력이 있다. 이렇게 외국인 디아스포라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서구 중심의 근대적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해법을 찾는다든가, 아니면 성급히 소여(所與)된 탈근대적 사유에 의해 해법을 찾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매우 익숙한 방식, 즉 자연의 비의성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직면한 이주노동의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있는 상상력의 재현이다. 물론 자연의 비의성과 신화적 상상력을 통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탐색하는 일이 자칫하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한국이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 시선을 지닌 채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여 자연의 비의성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서구 중심의 일의적(一義的) 근대를 창조적으로 넘는 ‘대안의 근대’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박범신의 『나마스테』에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네팔의 신비스러운 자연의 풍경, 힌두 문화를 표상하는 다양한 신들과 신화적 상상력의 풍요는 한국 자본주의의 복판에 던진 이주노동자가 험난한 현실을 손쉽게 도피하기 위한 서사적 재현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것들은 ‘국민’이란 근대 규범의 안쪽에서만 허락될 뿐 그 밖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매우 협소한 차원의 인간의 위상을 부정하고 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근대 규범 바깥으로 밀려난 인간과 자연의 교감, 삶의 근원에 대한 사유의 새로운 발견은 한국문학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조우함으로써 재성찰한 귀중한 문학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문학과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조우는 타자에 대한 탐색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홍규의 장편 『이슬람 정육점』은 한국인과 외국인 이주노동자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관계까지 포괄해 한국의 다원주의 사회의 양상을 두루 다룬다. 달리 말해 『이슬람 정육점』은 한국문학이 아시아의 디아스포라적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관계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서사적 진실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한다.

   여기서 작중인물 터키인 ‘하산’과 그가 입양한 한국인 고아 ‘나’와 나누는 대화는 외국인 디아스포라를 재현한 한국문학의 성취로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 상처가 있는 인물들이 나누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 타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새로운 윤리감이 실현될 수 있다는 징후를 목도한 것은 한국문학의 큰 성과다.

나는 하산 아저씨의 머리맡에 완성된 지도를 놓고 그가 기도 시간에 맞춰 깨어나길 기다렸던 것이다. 기도하기 위해 일어난 하산 아저씨는 내가 만든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을 발견한 것 같구나.”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아저씨예요. 보세요, 아저씨. 아저씨 얼굴을요. 아저씨는 어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답고 어떤 터키인보다 더 터키인다워요.”
“한국인인지 터키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맞아요.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아무나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네 그림 속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같구나.”
“그래서 그림이예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같은 거죠.”
“네가 아는 현실을 옮긴 거라고 생각했다.”
“안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요. 사랑, 우정, 평화, 자유…… 그런 말은 알지만 그걸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것처럼요.”
“난 너한테 그걸 가르쳐준 적이 없다. 하지만 네가 이런 걸 알게 될 거라고 짐작은 했다.”

『이슬람 정육점』, 220쪽

   ‘하산’이 본 ‘나’의 완성된 지도는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얼굴로 이뤄진 세계지도인데, ‘하산’은 그 완성된 지도를 보고, 사람들이 근대의 정치적 경계인 국경으로 명확히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한 세계로 자연스레 어울려 있는 근대 너머의 세상을 본 것이다. ‘나’의 말처럼 그러한 현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하산’과 ‘나’는 그러한 세상을 향한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위 대화를 통해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다룬 한국문학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극단을 보여준다 해도 손색이 없다. 한국문학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만나 타자와 맺는 관계에 대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서사 과정의 진실을 통해 서구 중심의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다.

  2) 유동적 불완전성,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6)

   외국인 디아스포라를 다룬 소설 중 천운영의 장편 『잘 가라, 서커스』(문학동네, 2005)와 서성란의 장편 『쓰엉』(산지니, 2016), 김연수의 단편 「모두에게 복된 새해」(『세계의 끝 여자 친구』, 문학동네, 2009)는 앞서 살펴본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재현의 서사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에서 주목할 것은 외국인 디아스포라의 피해와 수난 중심의 서사에 비중을 두기보다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들을 함께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섣부른 비평적 판단일지 모르나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디아스포라가 겪는 종래 배타적 차별의 행태악(行態惡)과 구조악(構造惡)에 대한 재현의 서사에 자족하지 않고 한국 사회 내부에 어느 정도 안착한 디아스포라의 정치사회적 삶에 대해 한층 근본적으로 사유한 한국문학의 성취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는 인도인 이주노동자가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전형적 삶을 사는 그는 한국어 여교사 집에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 그 집을 방문한다. 여교사 없는 집에서 그는 면식도 없었던 그녀의 남편에게서 피아노에 얽힌 사연들을 들으면서 서로 서서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물론 인도인 이주노동자는 한국어가 서툴러 남편과 온전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이 그들 사이의 진심을 나누는 데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비록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지는 못하지만 남편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나누는 불완전한 대화 속에서 아주 귀중한 진실을 얻게 된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여교사 ‘혜진’(남편의 아내)의 내면 풍경이 지극히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알게 된바, 이 사실을 서툴고 틀린 한국어로 남편에게 얘기한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의 이러한 내면 풍경을 감지할 수 없었던 터에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시선에 내밀히 포착된 아내의 실존적 외로움에 공감하면서 언제부터인지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 아내의 삶을 성찰한다.

   이와 흡사한 개별적 존재의 외로움은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의 주요 작중인물에게서 두루 나타난다. 유년 시절의 외상으로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형은 중국 연변의 조선족 여성 ‘해화’를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욕망한다. 그런데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형은 혹시나 그의 아내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망상으로 아내를 정신적으로 억압하고 감금하는데, 마침내 그녀는 형에게서 온전히 충족되지 않은 행복감과 시동생을 향한 모종의 연모,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의 삶 심연에 있는 이방인의 실존적 외로움 등이 버무려지면서 결국 형과 집을 떠나버린다. 형제는 이 조선족 여성을 찾아 중국 연변에까지 가지만 그녀를 찾지 못한 채 형은 귀국행 선상에서 바다로 투신한다. 여기서도 읽을 수 있듯이 조선족 여성의 디아스포라 삶은 한국 사람들 삶에 깊숙이 스며든다. 그 발단은 결혼 이주 여성의 삶에서 촉발된다. 바로 그 여성 디아스포라의 삶의 혼돈이 연변 지역이 함의하는 고대왕국 발해에서 기원하는 듯하다. 동아시아의 대륙 변방에서 한때 해동성국으로 번영을 구가했으나 그 영화는 역사 속으로 스러지고 그 흔적은 처연히 아무도 돌보지 않은 유적의 형해(形骸)로 남은 것처럼 쇠락해 가는 연변의 현실은 ‘해화’와 같은 조선족 여성이 기회만 되면 이방인으로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고서도 한국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욕망하도록 한다. 이 디아스포라의 삶의 욕망은 형제들의 상처에 뿌리를 둔 실존적 외로움의 내면 풍경과 포개지면서 한국 사회의 심연에 깊숙이 자리하는 자기소외의 문제의식을 한층 섬세히 성찰하도록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성란의 『쓰엉』은 주목해야 할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언뜻 한국의 산골 마을 가일리로 이주한 베트남 여성 ‘쓰엉’과 가일리의 하얀 집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부부(남편 ‘장’과 아내 ‘이령’) 사이의 불륜을 다루는 듯하지만, 정작 작가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쓰엉’과 아내 ‘이령’의 관계다. 결혼 이주 여성으로서 ‘쓰엉’의 소외와 상처는 ‘이령’의 삶과 포개지면서 이들의 관계는 한층 농밀해진다. 말하자면 ‘이령’은 “강을 건너 낯선 나라로 시집온 외국인 여자와 다르지 않았다.”(250쪽) 그것은 ‘쓰엉’이 가일리 마을 사람들에게 감시를 받고 그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되기는커녕 일정한 사회적 존재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얀 집에 사는 ‘이령’은 가일리에서 ‘쓰엉’과 같은 존재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령’과 남편 ‘장’의 서걱거리는 부부 관계뿐 아니라 시댁과의 불화는 그 구체적 양상이 서로 다를 뿐이지 ‘쓰엉’의 남편과 시어머니와의 불화와 흡사하다. 그래서인지 ‘쓰엉’과 ‘이령’은 서로 연민의 시선을 가지면서 금단의 경계를 넘어 사랑한다. ‘쓰엉’에게 ‘이령’은 어쩌면 가일리의 삶이 투영된 자신의 또 다른 존재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성공할 부푼 꿈을 갖고 이주한 베트남 여성 ‘쓰엉’이 가일리에서 사그라드는 자신의 꿈을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이령’은 한때 저명한 소설가로서 다시 보란 듯이 화려하게 재개하고 싶지만 가일리에서 새로운 작품을 좀처럼 쓰지 못한 채 삶의 상처가 지속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령’은 ‘쓰엉’이 가일리에서 마주한 자기 자신이다. 그런가 하면 ‘이령’에게 ‘쓰엉’은 “낮선 나라로 시집와서 외로움을 견디며 살고 있는 어수룩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령은 한여름 햇빛처럼 날카롭고 강렬하게 시선을 파고드는,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여자의 아름다움을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250쪽)을 만큼 ‘쓰엉’은 ‘이령’이 추구하는 “완벽한 미적 필연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에 대한 믿음”(26쪽)을 길어올릴 수 있는 미적 대상이다. 이 문제를 곰곰이 성찰하건대 ‘이령’의 이 욕망은 좁게는 서성란이란 개별 작가가, 넓게는 2000년대의 한국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와 관련한 서사적 재현의 문제를 촉발한다. 그렇다면 『쓰엉』에서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주목할 외국인 디아스포라는 낯선 타방에서 피해와 수난을 겪는 데 자족하는 재현의 서사를 넘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다층적이고 심층적인 재현의 문제와 결부된다.

   요컨대 한국 소설은 『쓰엉』, 『잘 가라, 서커스』,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서 시도했듯이, 외국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서사적 탐구는 물론 디아스포라를 자연스레 ‘사는’ 서사적 탐구를 치열히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디아스포라뿐 아니라 이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국민을 망라하여 인간의 ‘유동적 불완전성’이 지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4. 새로운 세계문학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재현

   디아스포라의 삶과 현실을 다루는 것은 세계문학의 주요한 영역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디아스포라가 아주 면밀히 관련성을 맺고 있듯이, 종래 일국주의(一國主義)에 바탕을 둔 국민문학의 문제의식만으로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것뿐 아니라 디아스포라를 ‘살고 있는’ 것을 모두 다각도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민문학의 문제의식을 전면 폐기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지구화 시대를 살면서 국가를 비롯한 모든 유무형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각종 국가 간 연합체와 정치경제적 결속체 등이 생겨나고 기존 조직과 결속체들이 동요하고 해체되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국가의 정치체(政治體)가 한층 공고해지는 엄연한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국민문학이 다뤄야 할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존의 세계문학에 안주하는 국민문학과 결별하여 새로운 세계문학에 적극 개입·참여·구성하는 국민문학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듯이 구미중심주의를 내밀화한 세계문학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국민문학으로서는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가 함의하는 ‘대안의 근대’를 향한 문학적 실천이 요원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구미중심주의에 나포된 국민문학이 세계 체제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세계의 낙오자, 패배자, 열패자 등으로 수렴하는 약소자의 현실에 주목해 디아스포라를 재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악무한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구성하려는 재현의 윤리학과 그 정치학을 재생산하는 데 복무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에 균열을 낼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문명적 대안의 삶의 지평을 직접 사는 디아스포라의 재현을 치열히 궁리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 작가의 시선에서 한국어로써 이 문제를 다뤘고 앞으로도 더욱 넓고 깊게 다뤄야겠지만, 이후 외국인 디아스포라 당사자의 시선과 그들의 언어로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디아스포라의 재현을 수행한다면, 새로운 문명적 대안의 삶의 지평을 향한 문학의 실천은 한층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학(과 그 경계)에서 외국인 디아스포라가 지닌 삶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소중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21세기의 한국문학이 새로운 세계문학을 구성할 수 있는 문학적 쟁점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이 글은 이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필자가 작업한 성과를 이번 학술대회의 성격에 맞춰 발췌, 부분적 수정 및 재구성한 것이다. 관련 문헌은 다음과 같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에 나타난 분단체제의 문제의식」/「한국문학의 ‘복수의 근대성’, 아시아적 타자의 새 발견」,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보고사, 2016), 「외국인 이주의 시선을 넘어서는 시의 미적 윤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푸른사상, 2015), 「21세기의 한국문학과 리얼리즘, 저항과 변혁의 상상력으로」(『뼈꽃이 피다』, 케포이북스, 2009).

각주

1)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민음사, 2009, 11쪽.

2) 권리, 『왼손잡이 미스터리』, 문학수첩, 2007, 148쪽.

3) 손홍규, 『이슬람 정육점』, 문학과지성사, 2010, 236쪽.

4) 이에 대해서는 박경태, 『소수자와 한국사회』, 후마니타스, 2008, 72~75쪽.

5) 케빈 그레이,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조계원 옮김), 《『아세아연구』》 116호,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2004.

6) 서성란, 『쓰엉』, 산지니, 2016, 18쪽. 이하 작품의 본문을 인용할 때 각주 없이 본문에서 (쪽수) 표기.

필자 약력
고명철 작가 프로필 사진

고명철,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는 트리콘의 대표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1998년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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