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1호
디아스포라 한인 문학의 정체성과 미래
이형권
2021년 목포 문학상 장편소설 부문은 재미 교포인 이숙종 작가의 『보트하우스』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목포 문학상은 상금의 규모나 목포의 문학적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화제를 낳았다. 국내외 전문 작가 수백 명이 장편소설 371편을 응모했는데, 수상자가 미국에 사는 교포 작가였다는 사실도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 이 작품은 국내 작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여 수상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교포 문학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동안 교포 문학은 그 작가층이 두텁지 못하고 한글과 관련된 언어 환경이 열악하여 전문성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보트하우스』는 이러한 평가를 넘어서 국외의 교포 작가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물론 이 작품이 교포 문학이 보여주는 일반적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교포 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1)을 갖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보트하우스』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과연 한국문학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한국문학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이 질문에 관한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문학은 보통 ‘한국 사람이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작가는 ‘한국 사람’이고, 작품의 내용은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이고, 표현 수단은 ‘한국어’이어야 하는 것이 한국문학의 조건이다. 이는 작가의 국적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교포 작가들이 대부분 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외에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문학 활동을 하는 교포 작가들은 현지의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숙종 작가도 일찍이 미국에 이민 가서 그곳의 국적을 취득하여 살고 있다. 작가의 국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보트하우스』는 ‘한국인’ 작가의 작품이 아니므로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할 수 없다. 그 내용도 미국에 사는 한인의 삶과 사랑을 주제로 하지만, 그것이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보트하우스』는 한국문학의 조건 가운데 ‘한국어’라는 조건만을 충족할 따름이다. 국외의 교포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은 대개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보트하우스』와 같은 작품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는 그동안 교포 문학, 해외 동포 문학, 국외자 문학, 외지(外地) 문학, 한민족 문학, 한글 문학, 한인 문학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 명칭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각기 장단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한인 문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이때 ‘한인’은 한민족의 혈연적·언어적·문화적·정서적 동질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는다.
한인 문학의 지배적인 표현 수단은 한글이다. 한인 작가들은 낯설고 척박한 이국땅에서 국외자로 살아가면서 한글 공동체를 꿈꾸어 왔다. 국외의 한인 작가들이 한글 문학을 개척해 온 역사는 한국 근대사의 어두운 국면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삶은 멀리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해 오던 시대나 외침이 많았던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사이에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와 만주 일대로 이주했고, 1910년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에는 경제적인 동기와 함께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국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에도 한반도는 4대 강국의 패권 다툼과 전쟁, 분단, 독재 정권으로 인해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한인 문학의 규모는 특정 국가나 지역의 한인 분포2)와 비례한다. 현재 한인이 많은 지역은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중앙아시아(러시아) 등의 순서이다. 이들 가운데 일본은 한민족의 이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은 군인이나 군 관련자 40만여 명을 포함하여 700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반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된 것인데, 일본으로 끌려간 인원만 해도 200만 명을 상회3)할 정도이다. 가혹한 노동과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본의 한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귀국길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국땅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의 한인들은 그 척박한 땅에 한인 문학을 통해 한글 공동체의 꿈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의 한인 문학 역시 이러한 비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한인들의 이주를 계기로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인 문학이 가장 활성화된 곳은 미국과 중국이고, 일본과 러시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침체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국가 간 교류나 정치적 성향과 연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4개국 외에도 규모는 작아도 북미의 캐나다,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그리고 호주 등에서도 한인 문학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캐나다의 한인 문학은 미국 못지않게 발달했는데,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토론토나 벤쿠버 지역에서 다수의 한글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을 정도이다. 한인 문학은 이처럼 지리적 분포가 다양하고 그 국적이나 언어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인 문학의 범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한인 문학의 범주>
구분 | 작가 | 거주지 | 언어 | |
---|---|---|---|---|
한글(문학) | 비한글 | |||
한인 문학 | 한민족(한국인+외국인) | 국외 | ① | ② |
한국 문학 | 한국인(한민족+타민족) | 국내+국외 | ③ | ④ |
외국 문학 | 외국인(한민족+타민족) | 국내+국외 | ⑤ | ⑥ |
한인 문학은 협의로 볼 때 ①에 해당하고, 광의로 볼 때는 ②까지 포함한다. 작가는 거주하는 한민족이지만, 국적으로 볼 때는 한국인일 수도 있고 외국인일 수도 있다. 가령 국외로 이주하여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 가운데는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현지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민족 개념으로 보면 외국 국적으로 취득했다고 해도 한인은 한민족 구성원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언어 문제에서는 다소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데, ①은 누구나 인정하는 반면에 ②는 논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다만 과거에는 ②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일부 한인 작가들이 현지어로 문학 활동을 해온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창래 작가4)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는 미국 작가이기도 하지만 한인 작가이기도 하다. 독일의 한인 작가 이미륵5)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나이지리아의 치누아 아체베(C. Achebe)나 케냐의 응구기 와 티옹오(N. W. Thiong'o) 같은 아프리카 작가들이 영어로 창작을 하지만, 그들을 미국 작가로만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인 문학은 한국문학과 다르다. 한국문학은 국적 개념을 중시하는 차원에서 작가가 반드시 한국인이어야 한다. 한민족이 아니어도 한국 국적이 있으면 한국인이므로, 그가 작품 창작을 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한국문학에 포함된다. 한국인이 한글이 아닌 언어로 창작을 한 경우에도 앞서 말한 한인 문학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문학이다. 그리고 한글로 창작했지만, 다른 언어로 번역한 작품도 역시 한국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어로 번역되었다고 그것을 영국 문학이나 미국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인 문학은 또한 외국 문학과도 다르다. 우선 외국 문학은 작가가 한국인은 아닐지라도 한민족에 속한다면 한인 문학에 포함할 수 있다. ⑥은 당연히 엄격한 의미의 한인 문학이나 한국 문학일 수 없지만, 현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 가운데 한인이 창작한 것이라면 한인 문학에 포함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한글 문학은 ①, ③, ⑤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들 가운데 타민족 한글 문학은 한인 문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인 문학은 ‘한인이 한인의 사상과 감정을 한인의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이때 ‘한인’은 창작의 주체를, ‘한인의 사상과 감정’은 그 내용을, ‘한인의 언어’는 그 표현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문학이라는 개념이나 형식적 개념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한인 문학의 정체성 문제는 그 특수한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한인 문학의 특성6)은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인 문학의 규모는 특정 국가나 지역의 한인 분포와 비례한다. 현재 한인이 많은 지역은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중앙아시아(러시아) 등의 순서이다. 이들 가운데 일본은 한민족의 이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은 군인이나 군 관련자 40만여 명을 포함하여 700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반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된 것인데, 일본으로 끌려간 인원만 해도 200만 명을 상회할 정도이다. 가혹한 노동과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본의 한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귀국길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국땅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의 한인들은 그 척박한 땅에 한인 문학을 통해 한글 공동체의 꿈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의 한인 문학 역시 이러한 비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한인들의 이주를 계기로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인 문학이 가장 활성화된 곳은 미국과 중국이고, 일본과 러시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침체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국가 간 교류나 정치적 성향과 연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 4개국 외에도 규모는 작아도 북미의 캐나다,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호주 등에서도 한인 문학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캐나다의 한인 문학은 미국 못지않게 발달했는데,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토론토나 벤쿠버 지역에서 다수의 한글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을 정도이다. 한인 문학은 이처럼 지리적 분포가 다양하고 그 국적이나 언어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인 문학의 범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한인 문학은 디아스포라를 기본적 모티브로 삼는다. 디아스포라는 한인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서 다른 특성들도 이와 관련이 깊다. 어느 한인 시인은 “아리랑 목에 감기고/ 외로운 영혼의 비상 우러르는/ 나는 디아스포라”7) 라고 노래할 정도로 한인의 삶에서 디아스포라는 매우 종요로운 요소이다. 한인 문학에서 디아스포라는 일차적으로 모국을 향한 향수를 통해 구체화된다. 향수는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평생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정서이다. 한인 작가들이 한글 문학을 창작하는 것도 모국어를 통해 향수의 정서를 달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한인 문학이 추구하는 다양한 정서나 주제들도 대부분 향수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방인 의식과 관련되는 문화적 이질감이나 사회적 소외감도 디아스포라 한인 문학의 중요한 내용에 속한다. 이국에서 산다는 것은 언어를 비롯하여 사고방식, 의식주의 생활 방식 등 모든 것이 낯설기 마련이다. 더구나 현지에서 문화적으로 적응을 한다고 해도 이방인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윤기의 소설 「뿌리와 날개」에서 이야기되듯이, 한인은 낯선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공의 날개도 달지 못하는 존재이다. 한인 작가들은 이민자의 이러한 삶의 고충을 빈도 높게 작품화한다.
“
아침 일곱 시 삼 분에 떠나는
뉴욕행 직행 기차를 타기 위해
십삼 년 하루같이
나그네의 마음으로 산다
기다림의 시간 속으로 나는
새들의 날개짓을 따라
내 마음 반쪽 떼어내어
그대 창가에 날려 보내고
목화송이처럼 흩어지는
메마른 설움에
오늘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
어둡고 가라앉은 하늘을 이고
내 눈동자 열리는 곳에
그리운 그대여
빈가지 끝
바람 부는 레일 위에
꽃씨 뿌리며
파도처럼 울고 있네
김송희, 「나의 노래」 (미동부 한국문인협회, 《뉴욕문학》 5호, 1995) 전문
이 시는“뉴욕” 인근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며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 일곱 시 삼 분에 떠나는/ 뉴욕행 기차”를 타는 일을 “십삼 년” 동안이나 지속해 왔다는 이민자의 삶은 고달프다. “나그네의 마음으로 산다”라는 것은 마음의 고향을 잃고 유랑하듯 살아가는 모습이다. “나”는 마음을 위로해 줄 “그대”를 찾아보지만, “오늘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일 뿐이다. “목화송이처럼 흩어지는 / 메마른 설움”만이 가슴에 가득하기에 “그대”의 부재는 더욱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삶의 희망을 찾아보려 해도 “어둡게 가라앉은 하늘”처럼 막막할 따름이다. 하여 “빈 가지 끝”과 같은 허망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바람 부는 레일 위에” 싹도 틔우지 못할 “꽃씨 뿌리며 / 파도처럼 울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고달픈 이민 생활 속에서 “그대”라는 삶의 동반자마저도 잃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민자의 모습이다.
한편 한인 문학의 디아스포라는 과거 지향적 향수를 넘어 새로운 삶의 의지, 이국적 문화에 대한 동화, 토포필리아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인 문학은 이제 한인을 타자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적응하고 주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한인은 내국인보다 더 탈영토화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바디우(A. Badiou)가 말한 망명(exile) 주체와 닮았는데, 그는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존재8)이다.
“
하나의 내가
또 하나의 나로 태어나기 위해
낯선 곳으로 찾아가 나를 버린다
한 덩이 허기일까
내 유목의 피는 잠들지 못하고 늘 속삭인다
혁명이 필요해!
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
새로운 곳으로 탈옥시켜다오
식상하고 상투적인 악몽들
다 내려놓고
새로운 곳에 대한 두근거림
새로운 원석을 캐러 떠나게 해다오
늘 다른 곳에서 다르게 태어나고 싶은
목마른 내 욕망의 이름이여
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
새로운 곳으로 탈옥시켜다오
장효정, (재미시인협회, 『외지』, 서울문학, 2001) 전문
시의 제목인 “망명의 시간”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망명”은 혁명에 실패하고 다른 나라로 도주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는 낡은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굳이 “망명”이라고 한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혁명의 어려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어떠한 혁명도 쉽사리 이루어지거나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혁명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혁명에 의해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혁명 정신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낯선 곳으로 찾아가 나를 버리”는 일을 반복해야만 한다. 실제로 인류 역사의 진보는 혁명이 혁명을 부정하고, 혁명이 다른 혁명을 낳는 과정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노마드 정신과 맞닿는다. 혁명 정신은 ‘홈 패인 공간’을 벗어나 ‘매끄러운 공간’으로 질주하는 유목민의 생리와 닮았다. 이 시에서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 / 새로운 곳으로 탈옥시켜” 달라고 소망하는 “나”는 바로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한인을 표상한다.
한인 문학은 태생적으로 한국문학에서뿐 아니라 현지의 주류 문학에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다. 한인 문학은 한국문학의 소수자이자 현지 문학의 소수자라는 점에서 이중적 소수자 문학, ‘타자의 타자’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소수자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다수자의 중심적 권능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에너지를 간직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수자 문학은 변두리의 소외된 문학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넘어 새로운 사유과 감각을 창출하는 문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G. Deleuze·F. Guattari)는 이러한 소수자 문학의 특성으로 언어의 탈영토화, 정치성, 발화의 집단성9) 등을 든다. 한인 문학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다양한 양태로 변용해 나타난다.
한인 문학에서 언어의 탈영토화는 한글 자체가 국외에서는 소수자의 언어라는 데서 출발한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그곳에서 한인 작가가 사용하는 한글은 소수자의 언어이다. 현지어로 창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체코의 작가 카프카(F. Kafka)가 독일어로 그런 것처럼, 한인 문학은 현지어를 통해 언어의 탈영토화를 지향하기도 한다. 또 한인 문학은 현지에서나 국내에서나 주류 문학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소수자의 가치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띤다. 슬픔이나 고독과 같은 개인적 정서마저도 사회적·인종적·계급적 소외의 차원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인 문학 작품 가운데는 모국이나 현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 정신이나, 현지의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 정신이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정치적 이유로 망명을 한 작가의 경우 그런 성향이 더 강하다. 한인 문학은 집단적 발화 행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 문학이다. 한인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집단적 발화를 통해 한글 공동체나 한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다. 다수의 한인 작가들이 일련의 문단을 형성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형상화하면서 개인의 문제보다 집단의 문제에 집중한다. 가령 모국의 문화나 자연을 호명하면서 한인으로서 자아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도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
“
고향 생각이 나서 어렵게 물 건너온 항아리 한 점 구해 놓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낮은 산이 묵화로 그려져 있고, 유채꽃 같은 안개가 강물처럼 가물거리는 평범하디 평범한 그런 항아리. 저 항아리가 고향을 떠나 바람으로 떠도는 나에게 무슨 위안이 되랴. 무슨 기쁨이 되랴. 속 깊이 되뇌이면서도 내 살 여물고 내 뼈 여문 고향 산천 바라보듯이 소중히 아껴서, 항아리 산에 앉은 먼지도 털고. 아아 또한 한갓 세속의 먼지일 뿐인 나도 털면서 내내 바라보거니. 혹시 꿈속에서라도 산꽃 향기 흐르고, 여울 소리 내 아픈 영혼 속으로 물결처럼 흐를 것을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배정웅, 「남미통신―물 건너온 항아리」(배정웅,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 창조문학사, 2007) 전문
이 시의 “고향 생각”은 국외 이민자들의 집단적 서정에 속한다. 시의 표제로 쓰인 “물 건너온 항아리”는 한국에서 건너온 물건인데, “나”는 그것을 애지중지하면서 고향의 자연과 문화를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있는 듯 없는 듯 낮은 산”과 “유채꽃 같은 안개”가 그려져 있는 “평범한 그런 항아리”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항아리”가 특별한 것이다. “나”에게 “항아리”는 “내 뼈 여문 고향 산천”을 마음속에 되살리면서 이민 생활의 고달픔을 위안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고향의 순정한 자연, 즉 “산꽃 향기”를 맡고 “여울 소리”를 실제로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여 “꿈속에서라도” 포근한 고향의 서정이 “내 아픈 영혼 속으로” 들어와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모국의 문화나 자연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소수자 문학은 타자의 가치를 옹호한다. 한인 문학에서 타자의 가치는 한인이 처한 정치적 소수자이자 문화적 소수자의 위치와 관련된다. 가령 미국에서 한인은 사회적으로 보통 흑인, 소수민족, 여성, 장애인, 부적응자 등과 비슷한 부류로 구분된다. 하여 한인은 주류 계층이나 지배 계층에 진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다른 지역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한인은 중국에서 수많은 소수민족의 하나이고, 일본에서는 무지하고 가난한 ‘조센징’이라는 편견 아래 놓인다. 러시아에서 한인 처지는 스탈린의 대대적인 고려인 강제 이주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인 문학은 이처럼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한인의 삶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 자연히 한인 작가들은 소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와 공감을 추구하기도 한다.
“
서지향이라고 그녀의 이름을 발음해 보고 맞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사무실로 일주일에 3번씩 출근했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그곳에 나타났다.
다른 날은 그가 일하는 법무법인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 사무실은 미국 원주민을 위하여 법률적 문제를 무료로 해결해
주는 곳이다.
변호사, 법대생, 법률 보조원 등이 자원봉사자로 일하곤 했다.
그녀만 시간당 임금을 받았다.
미국 원주민이 많지 않아서 히스패닉, 흑인 등 소수계를 위해 일하는 민간단체와 사무실을 공유했다.
여자는 학교에 자리를 얻을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리고 밖에서 그를 만났다.
『보트 하우스』 (이숙종, 『보트 하우스』, 문학과지성사, 2001), 64쪽
이는 “서지향”이 “캠벨”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서지향”은 한인 이민자이고 “캠벨”은 미국 원주민인 모히탄족 출신이라는 점에서 둘은 모두 미국 사회의 타자 혹은 소수자들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보트 하우스”10는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다. 둘은 “히스패닉, 흑인 등 소수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 공감과 연대, 사랑을 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런데 “캠벨”이 소수자의 권익을 옹호하다가 살해되면서 “서지향”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다. “서지향”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이주해 온 미국에서 다시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서지향”은 낯선 땅 미국에서 자유스럽지 못하고 안정적이지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 보트 하우스는 보트도 아니고 하우스도 아닌, 보트의 자유로움도 하우스의 안정감도 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삶을 상징한다. 그러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보트 하우스의 벽난로에 피어오르는 불의 상상 혹은 불의 명상을 통해 현실 너머의 원초적 시간을 꿈꾼다. 이처럼 한인 문학은 소수자의 삶을 형상하는 데 바쳐진다. 이민 현지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면서 그러한 처지를 새로운 삶의 역설적 에너지로 삼는 한인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한인 문학은 국내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지역마다 일정한 규모의 문학장을 형성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지역 문학의 단위를 서울 지역, 경기 지역, 충청 지역, 강원 지역, 경상 지역, 전라 지역, 제주 지역 등으로 나뉜다. 국외의 경우 한인 문학을 기준으로 미주 지역, 아시아 지역, 유럽 지역, 오세아니아 지역 등으로 구분한다. 미주 지역은 다시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으로, 아시아 지역은 다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지역 등으로, 유럽 지역은 독일, 프랑스 등으로 세분된다. 다만 이 지역들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질적, 양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이러한 구분은 등가성이 부족하다. 국내 문학은 서울과 경기 지역 중심의 수도권 문학이 지배적이고, 국외에서도 미국이나 중국의 한인 문학에 비해 다른 지역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역 문학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생산한 문학 작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 모든 문학이 지역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작가든 어느 지역을 주거지로 삼고 작품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언어, 문화, 지리, 사회, 정치, 경제 등과 관련된 특이성을 전경화하는 문학이다. 이는 중앙 지역이 가지지 못한 로컬리티 차원의 개성을 발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인 작가가 세계 각 지역에서 그곳만의 로컬리티를 활용하여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한국 문학의 확장성 제고를 위해 매우 긴요하다. 가령 각 지역의 독특한 지리적 로컬리티를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제공한다.
“
맨하탄 어물 시장에 날아드는
갈매기. 끼룩끼룩 울면서, 서럽게
서럽게 날고 있는 핫슨 강의 갈매기여.
고층 건물 사이를 길 잘못 들은
갈매기. 부산 포구에서 끼룩끼룩, 서럽게
서럽게 울던 갈매기여.
눈물 참을 것 없이, 두보처럼
두보처럼 난세를 울자.
슬픈 비중의 세월을 끼룩끼룩 울며
남포면 어떻고 다대포면 어떻고
핫슨 강반이면 어떠냐. 날이 차면
플로리다쯤 플로리다쯤, 어느
비치를 날면서 세월을 보내자꾸나
박남수, 「맨하탄의 갈매기」 전문
이 시는 “맨하탄”이라는 미국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시인은 “맨하탄의 어물시장”에서 “길 잘못 들은/ 갈매기”가 “서럽게 날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산 포구”에서 본 “갈매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갈매기”의 모습이 이방인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자기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내려와 살던 남한 땅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삶도 서럽고 슬프다고 여기는 것이다. “슬픈 비중의 세월”이 담겨 있는 “갈매기”의 울음을 통해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 “두보처럼 난세를 울자”고 한다. 어차피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이니 그것을 수용하면서 낙천적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떠도는 이방인의 삶은 “갈매기”의 방랑처럼 이북의 “남포”나 부산의 “다대포”이든 미국의 “핫슨 강변”이나 “플로리다”이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강물에 둘러싸인 “맨하탄”의 지리적 특성을 시적 상상의 토대로 삼고, 그와 분위기가 유사한 모국의 항구 도시를 떠올리면서 이방인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다.
한인 문학은 또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성을 지향한다. ‘세계문학 공화국’을 주창한 문학 이론가 카사노바(P. Casanova)는 세계문학의 궁극적 지향은 주변부 작가들이 중심에서 차용을 했느냐, 문학적 교통이 중심에서 주변부로 흘러갔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종속된 작가들의 투쟁의 형식들, 특이성들, 고난들을 복원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인 조이스, 카프카, 입센, 베케트, 다리오 등에서 보듯이 많은 문학적 혁명들은 주변적인 곳들과 종속적인 지역들에서 발생했다는 점11)에 주목한다. 한인 문학은 전위적이고 전복적인 특성이 부족하기는 해도, 이방인으로서, 주변인으로서 고난을 극복해 온 한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아래의 시에서 한인을 세계시민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그와 관련된다.
“
우리는 코리안 아메리칸
20세기에 새로 나온
우리 이름이 좋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힘줄에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할아버지들이
한 맺혀 흘린 피가 돌고 있다.
그 무렵에 “사진신부”로 건너온
할아버지 외할머니 찌든 땀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가슴을 적신다.
배달땅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 넋을 지켜온
물빛과 하늘빛 곱게 받아
코리안 아메리칸은 마음의 눈이 맑다.
어이없이 한동안 빼앗겼던
조국 코리아를 되찾는 싸움에
북미대륙도 태평양 대서양도
뜨겁게 출렁이던 양심의 소리가
코리안 아메리칸 뼈속에 새겨져 있다.
오늘은 미국 어느 구석에서든지
반갑게 손을 잡는 사람들.
유난히 정이 많고
슬기로운 사람들.
늡늡한 코리안 아메리칸이
코리아를 크게 만들고
아메리카를 더 장하게 만들어 간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지금
새 세상을 이룩하는 세계 시민
세계의 하늘이 코리안 아메리칸을
자랑스럽게
사랑스럽게
밤낮 비추어주고 있다.
고원, 「우리 노래」(고원, 『고원문학전집 Ⅱ』, 고요아침, 2006) 전문
이 시는 미국 내 한인들의 역사적 내력을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작품이지만, 한인의 디아스포라를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시의 제목에 등장하는 “우리”는 물론 미국에서 살아가는 “코리안 아메리칸”을 의미한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배달땅”과 “북미대륙”의 로컬리티, 즉 “코리안”과 “아메리칸”의 로컬리티가 결합하여 “세계 시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글로컬리즘(glocalism)적 존재이다. “우리 이름이 좋다”는 시구는 그러한 차원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자긍심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 자긍심의 근거는 “1903년 하와이 / 사탕수수밭에서 할아버지들이 / 한 맺혀 흘린 피가 돌고 있”다는 점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고난의 시간을 꿋꿋하게 이겨낸 강인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자긍심의 또 다른 근거는 “마음의 눈이 맑”고 “양심의 소리”를 간직한 존재이자, “유난히 정이 많고 / 슬기로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하여 미국의 한인들은 “코리안”과 “아메리칸”을 아우르면서 “새 세상을 이룩하는 세계 시민”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한인을 국가주의나 혈연주의를 넘어서 글로컬리즘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 시민”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디아스포라 한인 문학이 세계문학을 주도해 나가기 위해 취해야 할 유의미한 시선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특성들은 몇몇 작품에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 세계 한인 문학에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미주 문학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했지만, 그동안의 문학적 성과나 그에 관한 연구물들도 종합적으로 참조하건대, 다른 지역의 한인 문학에 드러나는 특성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역이나 작가에 따라서 이러한 특성들 가운데 어떤 것은 더 강조되고 어떤 것은 덜 드러나기도 한다. 결국 한인 문학의 정체성은 큰 틀에서 디아스포라, 소수성, (글)로컬리티 등의 특성을 바탕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세부적인 특성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드러나는 것이 한인 문학의 실체적 모습이라 하겠다.
한인 작가들의 꿈은,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이 지닌 의미처럼, 이산(離散)의 고통을 견디면서 파종(播種)의 희망을 가꾸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한인 작가들은 이 꿈을 위해 한인 문학을 기반으로 하는 한글 공동체를 열성적으로 구축해 왔다. 그러나 한인 문학은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과거완료형이 될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한인 문학은 작가층이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고 미래를 책임질 후속 세대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급격히 위축하고 있다. 한때 수백 명에 이르던 주요 지역의 문단 구성원의 숫자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아직 일정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일본이나 러시아 지역에서는 그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일본이나 러시아에서는 한글로 창작 활동을 수행하는 현역 한인 작가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인 문학은 이미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인 문학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안을 고안하고 실천해야 한다. 가령 국내외 한인 작가들의 창작 지원, 음악이나 드라마와 같은 한류 문화와 연대, 정부 차원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 등이 필요하다. 현재 문화예술위원회나 지자체들이 추진하는 문학 지원 프로그램이나 한류 문화를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의 각종 지원 대상에 한인 문학도 포함해야 한다. 국내 문단에서도 한인 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연구 활동 등을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또 한인 문학의 후속 세대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언어 문제에 관한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필요도 있다. 앞서도 밝혔듯이 한인 작가가 현지어로 창작한 것도 이제는 한인 문학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인 문학의 미래에 대해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 세계 한인들이 공유할 발표 매체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현재 국외에서 발간되는 한인 문학 문예지들이 지역별로 다수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범위 내에서 발간·유통되는 데 그치고 만다. 지역별로 고립된 채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 각 지역 문학 사이에 연대가 부족하고, 국내 문학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한인 작가들은 국내 문단에 작품을 발표하고자 하는 소망도 크다. 하여 세계 어느 지역의 한인 문학이든 우수한 작품을 발굴하여 독자들에게 전할 문예지를 발간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이번에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의 창간 작업을 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한인 문학장의 발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너머》는 한인 문학을 위해 국내에서 발간되는 최초의 문예지로서,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 문학을 아우르는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인 문학과 국내 문학과의 교류에도 많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국내외에서 외국인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는 디아스포라 한글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최근 들어서 국외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가운데 한류 문화의 붐과 함께 한글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또 취업이나 학업 등을 위해 국내에 이주한 외국인들 가운데 한글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물론 한인의 범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디아스포라 한글 문학 내지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소중한 존재이다. 특히 국내에 사는 외국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이 이방 지역이기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디아스포라 의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이들은 비록 한인은 아니지만, 디아스포라 한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인 문학이나 한국문학의 확장성 제고에 함께 해야 할 동반자이다. 외국인이 만든 김치가 한국의 음식 문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외국인이 쓴 한글 문학 작품도 한국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한인 문화나 한국문학의 정체성은 혈연이나 언어 문제보다는 정신적·정서적 동질성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 심사위원들은 『보트하우스』에 대해 “죽음과 소멸의 방식, 인연의 연쇄와 운명 앞에 놓인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은희경), “독자들을 존재의 근원과 삶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로 데리고 간다.”(이승우), “인종과 국적과 제도의 경계를 뛰어넘은 매우 특별한 타인들의 사랑과 삶”(김별아), “사랑 이야기 같았다가 고독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다가 종내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편혜영), “인간의 상처는 어떻게 형성되고 깊어지는가, 그 치유 가능성은 어떻게 열릴까, 심원하게 탐문한다.”(우찬제),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려 깊은 묘사.”(김형중) 등과 같은 호평을 했다. (『문학과 사회』, 2021년 겨울호)
2) 외교부의 통계에 의하면, 180개국에 총 7,325,143명의 재외동포가 체류하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재외국민은 2,511,521명, 외국 국적 동포는 4,813,622명이다. 재외동포가 많은 나라는 미국(2,633,777명), 중국(2,350,422명), 일본(818,865명), 캐나다(237,364명), 우즈베키스탄(175,865명), 러시아(168,526명), 호주(158,103명), 베트남(156,330명), 카자흐스탄(109,495명) 등으로 나타난다. 외교부(https://www.mofa.go.kr) 2021년 재외동포 현황 참조.
3)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휴머니스트, 2019 참조.
4)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3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학교 영문학과와 오리건 대학교 문예 창작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영어로 창작을 했지만, 미국에 이주한 한인의 삶과 생각이 담긴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1995년에 발표한 첫 작품 Native Speaker(국내 번역 『영원한 이방인』)로 펜 헤밍웨이상, 아메리칸북상 등을 수상하면서 미국 문단의 중요한 작가로 부상했다. 오리건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뉴욕 시립대학교 헌터 칼리지 문예창작과 교수, 프린스턴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거쳐 2016년부터 스탠퍼드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5) 본명은 이의경(李儀景)이다. 1899년 황해도 해주 출신의 망명(3·1운동 관련) 작가로서 독일식 이름은 Mirok Li(미로크 리)이다.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1946년 독일에서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독일 문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독일 교과서에도 실렸다. 1948년부터 뮌헨 대학의 동양학부 교수로 있다가 1950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사후에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6) 관련 내용은 졸저 『미주 한인 시문학사』(푸른사상, 2020)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7) 최선호, 「디아스포라 별곡」, 『미주시정신』 2012년 여름호.
8) 권택영, 「소수자 문학이론: 라캉, 들뢰즈, 바디우」,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0-3호, 2016, 20쪽 참조. “가령 19세기 미국의 작가 헨리 제임스는 유럽에 살면서 끊임없이 미국 이야기를 하고, 20세기 모더니즘의 거장 제임스 조이스 역시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을 방황하면서 아일랜드 이야기를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러시아 작가 나보코프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조국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전전하였다. 방랑 중에 그가 쓴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 고향과 러시아인에 관한 것이었다.”
9) 들뢰즈·가타리, 조한경 옮김, 『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2000, 37쪽.
10) 소설 『보트하우스』는 미국에 사는 서지향 교수가 노년의 병중에 지나온 삶의 상처를 회억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다. 그녀의 상처는 수몰 지역에 남겨진 연인의 물속 무덤에 관한 어머니의 기억, 딸을 하나 낳고 남편과 사별한 서지향 자신의 인생과 중층으로 연관된다. 깊은 상처를 겪은 서지향이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소수 민족 원주민 출신의 변호사 캠벨을 만난다.
11) 카사노바(P. Casanova), 차동호 옮김, 「세계로서의 문학」, 『오늘의 문예비평』 2009년 가을호, 140쪽.
이형권,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며 문예지 『시작』, 『시와시학』 편집위원, 국제한인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미주 한인 시문학사』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1998년 『현대시』 문학평론 부문 우수작품상, 2010년 편운문학상 문학평론 부문 본상,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가상, 2021년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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