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4호
동지사 대학, 정지용과 윤동주 시비 - 3부 시적 삶의 영원한 인연
홍용희
동지사 대학에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후배 윤동주 시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것은 2005년 12월 18일이다. 정지용의 고향 옥천의 김승룡 문화원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옥천 지역에서 채굴한 화강암에 일본 경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압천과 무지개를 형상화하고 비문에는 시 「압천」을 한글과 일본어로 새겼다. 그리고 가로 1.8미터, 세로 1.2미터, 너비 0.7미터 크기로 제작된 육중한 시비를 옥천에서 직접 육로와 해상을 통해 교토 동지사 대학 교정으로 운송했다. 정지용이 1923년 「향수」에서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한 고향 옥천이 82년이 지나, 동지사대 교정의 시비로 대답을 한 셈이다. 동지사 대학은 정지용, 윤동주 시비를 모두 건립하게 되면서 해마다 수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관광객의 주요 여행지로도 자리 잡게 되었다.
동지사대 정지용 시비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삼 묻게 된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15년 연차가 있음에도 이렇게 사후에 이국에서 시비를 통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은 무엇일까? 이것은 단순히 동지사 대학 영문학과 동문이며 기독교를 종교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시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각별한 시적 삶의 인연이 있었다.
정지용은 윤동주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배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 넣은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정지용의 시 세계를 동경하고 내면화하면서 시적 성장을 이루어갔다. 윤동주는 1936년 3월 19일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 『정지용 시집』을 구입하여 정독하면서 정지용의 미의식에 대한 적극적인 지각 반응을 보인다. 윤동주 시 세계의 타고난 기질적 성향, 방법론 등이 정지용과 잘 맞았던 것이다. 그는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면서 여러 표시와 메모를 남긴다. 「압천」에는 “걸작이다”라고 언급하고, 「태극선」에는 “맹목적인”, “熱情(열정)을 말하다”, “그래도 이것이 장하다”, “이게 문학자 아니냐” 등의 감상을 메모했다. 「카페 프란스」에는 “보헤미안”에 줄을 긋고 “豪放(호방)”이라고 적었고 “페이브먼트”에는 영어 “pavement”와 한자어 “鋪道(포도)”라고 표시한다. 그리고 「말」에는 연필로 설명을 달아 놓았는데, ‘꿈이 아닌 생활이 표현되었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적고 있다.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를 선택, 조직화, 의미 부여하는 깊은 지각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윤동주 초시 시 세계의 여러 작품이 정지용의 시적 언어, 이미지, 구성 형식에 깊은 영향을 받은 양상을 보인다.
한편, 정지용은 윤동주 사후에 그의 문학적 부활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해방 직후 자신이 주간으로 재직하던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를 처음으로 소개하고(1947년 2월 13일 자),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에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겼다는 내용의 서문을 통해 그를 일제강점기의 빛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집 서문 말미에서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정지용만의 궁금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곡한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동주의 시적 삶이 지속되었다면 정지용에 대한 윤동주의 영향 관계는 또 다른 생산적인 관계로 역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가 참담하게 절명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면 해방 이후 “부일문사(附日文士)”들의 재등장과 정치적 갈등의 혼란상 속에서 “才操(재조)도 蕩盡(탕진)하고 勇氣(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부당하게도 늙어간다”고 탄식하던 정지용에게 시 창작의 새로운 충동과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정지용이 지향하는 “시와 시인”의 거울로서 시적 삶의 의지와 지표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1945년 해방을 6개월여 남기고 만 28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죽고 만다. 또한 정지용 역시 1950년 한국전쟁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시사의 크고 안타까운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각별한 시적 삶의 인연은 사후에도 지속된다. 이국땅의 모교에서 시비를 통해 청신한 언어 감각과 절제의 미감을 보여준 대표적인 한국의 근대 시인으로 영원히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안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래문명원장,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했다. 저서 『김지하 문학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고요한 중심을 찾아서』 등을 출간했다.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애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계간 《시작》 주간, 《대산문화》 편집위원,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위원, 문화예술지 《쿨투라》 기획위원, 《K-Writer》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