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호
디아스포라의 틈 사이에 피어난 꽃
정은희
마흔이 되던 2015년 나의 운명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 나는 현재 남편을 만났다. 다른 문화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사고방식도 다르며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던 프랑스인 남자였다. 내 나이 마흔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나는 솔로에서 결혼을 한 부부의 삶으로, 한국에서 프랑스로, 대도시였던 서울에서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 마을로, 그리고 한국어에서 프랑스어로 바꿔 나가야 했다.
그리고 2023년 현재, 나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산 지 7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에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언어의 문제가 컸다. 이 글에서 나는 연애에서 국제결혼, 신혼 이후 마주친 현실, 암 치료, 시댁과의 갈등, 프랑스 시댁 양육 환경의 문제, 이혼할 뻔한 일 등을 포함한 수많은 갈등과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담아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국제 부부로서 살면서 겪는 의사소통에 관한 갈등과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거의 나의 삶에 대한 진단이자 프랑스에서 앞으로 한 단계 성숙한 삶을 위한 지표가 될 것이다.
2015년 음력 설날, 마흔 살을 특별하게 스카이다이빙으로 시작하기 위해 홀로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하늘을 새처럼 날아올라서 빙글빙글 돌다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자유 낙하의 짜릿함을 느꼈다. 언제까지 내가 인생을 살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가 생을 마감하는 날에는 한 줌의 먼지로 하늘에 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 불허였다. 사망동의서에 서명하고 나의 인생을 마감하는 법에 대해 생각했던 그날, 역설적으로 나는 생의 기쁨의 문을 여는 만남을 가졌다. 프랑스 남자와의 그 영화 같았던 만남은 이후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한여름의 신기루 같았던 여행이 끝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서로를 보고 싶은 마음에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나는 재회는 설레임의 극치를 맛보게 했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모두 떨어지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우리가 같이 보낼 수 있는 제한적인 그 시간은 오히려 행복의 절정을 안겨다 주었다. 우리의 연애는 기다림, 설레임, 기쁨, 황홀, 열정, 슬픔,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일, 지하철, 잠으로 점철된 나의 회색 빛 일상에 그와의 연애는 내 속에 숨어 있는 다채로운 무지개 색의 감정을 일깨워 주었다.
나와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측하기 힘들었던 그 남자는 만남마다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안겨주었다. 내 생일을 위해 하루를 통째로 할애해서 그는 손수 요리를 해주었고, 나에게 피아노를 쳐주며 샹송을 노래해 주었고,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한여름의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과 별똥별을 선사해 주었다. 인간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이 남자를 내 인생에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 심장은 고장 난 것처럼 마구 뛰었고,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은 롤러코스터마냥 기쁨과 슬픔 사이를 널뛰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을 느끼며 나는 그의 포로가 되었다. 그의 매력이라는 올가미에 걸려서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에 빠져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헤어지는 슬픔과 남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고통스러운 고독 속에서 지내며 비행기 값으로 하늘에 돈을 날려 버리는 대신에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살고 있는 프랑스에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2016년 체리의 계절에 나는 프랑스 남부의 온천이 있는 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열정적인 연애와 연속적인 모험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많은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법률적인 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우리는 공증인에게 결혼 이후의 재산 분할에 대한 법적 서류인 결혼계약서에 서명했고, 시장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우리는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첫눈에 반하고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꿀과 같은 달콤한 허니문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외국어였던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이 당시의 언어 수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의 그리움과 열정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언어를 초월해서 느낄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자 현실적인 문제가 쓰나미처럼 밀려 들기 시작했다. 공증, 시장과의 인터뷰 등과 같은 결혼 전에 거쳤던 관문은 워밍업과도 같았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기간이 막을 내리고, 행정적인 처리 문제가 서서히 부부 갈등의 커다란 원인으로 대두되며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던 나는 결혼 이후 프랑스에서 처리해야 했던 모든 행정 처리를 남편에게 의지했다. 배우자 비자를 정식 체류로 바꾸기 위해 근무 시간 도중에 남편은 전화로 여러 번 문의를 했고, 나의 건강 보험 카드(Carte vitale)를 신청했으며, 나의 국제면허증 교환을 위해 경시청에 연락을 했다. 게다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인터넷 설치, 전기, 주거래 은행 변경 등의 행정 처리 업무가 넘쳐났다. 과부하가 걸린 남편은 나의 행정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본인도 행정 처리에 능숙하지 못하므로 본인의 약점을 부인인 내가 보완해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직장에서의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집에서 영어로 말하고 싶지 않으며 프랑스어로 말하겠다고 선포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이것을 해낼 리는 만무했다. 나는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는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 갓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로는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했다. 이 상황이 되자 나는 비로소 내가 내렸던 결정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한국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남자를 믿고 프랑스에 왔다는 사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스스로 내 팔다리를 자르고 사람들과 고립되어 외딴 섬에서 남편만 바라보면서 그 어떤 학대도 견디면서 살 것이라고 다짐하고 자발적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집에서 프랑스어로만 말한다는 남편의 일방적인 결정에 프랑스어를 못하는 나에게 남은 선택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잃어버리고 마흔이 넘는 중년의 나이에 문맹이 되어 버렸다.
본래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체류증 갱신이 되지 않아서 나는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 되었던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체류증이 없는 나로서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러 한국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 마지막 가신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나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나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이 무렵 내가 들은 프랑스어는 나의 뇌로 전달이 안 되어 나는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였고, 입이 있어도 프랑스어를 말할 수 없어서 벙어리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항상 남편의 입, 귀, 머리를 빌려야 나의 생각을 남에게 전할 수 있었던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흔 살이 넘은 한 명의 어른으로서 내 삶의 책임자가 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나는 남편에게 커다란 짐을 지우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책임 의식이 강했던 아빠는 내게 항상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나의 뿌리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기둥이었다. 나에게 하나뿐이었던 소중한 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는데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조차 남편과 시댁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로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했다.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가슴이 미어져 오는 서러움과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불효, 프랑스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눈에서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직장 스트레스에 번아웃이 된 남편은 활활 타고 있는 불길 같은 나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휘발유를 부었다. 남편은 끊임없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모든 잘못의 원인은 전부 내 탓이라고 했다.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내가 한국어로 한마디라도 할라 치면 남편은 프랑스어로 열 배 아니 백 배로 나에게 갚아 주었다. 남편은 입으로 하는 독설을 내뱉는 새로운 취미를 하나 가진 듯 싶었다. 열정적인 사랑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독설로 바뀌었다. 나의 삶을 반추했다. 그가 좋아서, 그와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어서, 모국도 버리고 나의 가족도 버리고 친구들도 모두 버리고 그를 따라왔는데, 그는 왜 나를 비난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까? 도대체 이 남자는 눈을 뜨기만 하면 아침부터 불만 보따리를 나에게 쓰나미처럼 풀어내고 있는 것일까? 내 전 재산을 털어서 로또를 샀는데 그 로또가 꽝이 된 듯했다. 게다가 프랑스인 남편을 필두로 해서 프랑스인 시댁 식구들과 프랑스인 남편의 친구들은 프랑스어도 말하지 못하는 동양인과 결혼했다며 끝없는 돌림노래처럼 비판의 행렬에 가세했다. 나는 자신감을 잃었고 상실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언어 능력 상실에 대한 자책이 더해짐으로써 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니 바닥을 뚫고 지구의 내핵까지도 닿을 판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 시골 촌구석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바다에 홀로 떠가는 조그마한 외딴 섬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이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휘몰아치고 있을 때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엄마가 맞벌이를 할 때라서 어린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빠는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직장에 갔다. 그러면 나는 아빠 자전거 뒤에 앉아 등에 기대어 ‘<과수원길’>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조용히 혼자서 노래를 부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병의 촉매제는 고독과 우울이라고 했던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아빠는 이제 고통 없는 하늘나라로 가신 것 같아서 나도 아빠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2019년 9월, 나는 조직검사를 받고 오른쪽 유방에 종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사기를 3번 찔러서 조직을 채취해 내면서 많은 피가 흘렀지만 아프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고 지냈던 지난 세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의 피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를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그 모든 감정들이 응어리가 되어 나의 깊은 마음 속을 파고 들어가서 곪아 터져서 더 이상 파고 들 공간이 없었는지 유방의 종양이 되어 표면으로 드러난 것만 같았다. 확실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항암 치료를 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삼중 음성 유방암’을 진단 받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니 머나먼 타국에서 말 못하고 이렇게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사라지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이 세상을 뜨고 싶은 언어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고 싶었다. 이때부터 나는 치열하게 읽고 열정적으로 사고하고,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유방암 종양 제거 수술,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동시에 프랑스어를 배우러 다니며 이 언어와의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의사의 부족과 교육 시설의 부재라는 만년 문제가 있는 프랑스 시골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난민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집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직업 훈련기관으로 가는 것 뿐이었다. 그 도시에 가기 위해서는 아침에 한 대뿐인 버스를 타야 했다. 항암 치료로 인해 신체적으로 버티기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나는 대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책가방을 등에 짊어 메고 언젠가는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말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생사 새옹지마였다. 신체적으로 고통을 주었던 유방암 치료는 오히려 나에게 남편의 손길에서 벗어나서 내가 스스로 자립해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혼자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프랑스어로 듣고 질문에 응답을 하며 나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나의 생존 프랑스어 도전이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로 인해 육체적인 고난의 길이었지만 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나의 정신적 건강은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세 번 태어났다. 첫 번째는 엄마의 뱃속을 나와 울음을 터트렸을 때이고, 두 번째는 행정상의 오류로 인해 내가 호적상으로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오류를 정정함으로써 나는 호적상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프랑스에서 혹독한 유방암 치료 과정을 견디고 나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암 종양을 도려내고 항암 화학요법을 통해 암세포가 자라지 못하게 항암 약물을 몸 속에 집어넣고 이후 불로 쬐어 자랄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방사선 치료를 받고 죽지 않고 살아서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다. 엄마는 딸인 내가 엄마 가까이에서 살면 좋았겠지만, 의료 쪽에 종사하고 있는 남편이 나의 암을 조기에 발견해서 살려 준 거라며 내가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신체적인 건강에는 민감한 남편은 정신적인 건강 관리에는 극도로 둔했다. 그는 일년 365일 중 350일은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어쩌면 그렇게 일어나자마자 매일 규칙적으로 기분이 나쁜지 신기할 정도였다. 남편이 나쁜 기분을 표출하는 방법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비가 많이 내려도 천둥이 쳐도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말다툼을 해봤자 나는 프랑스어로 말다툼을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기에 어차피 백전백패, 내가 지는 싸움이었다. 차라리 나는 나의 내면을 다스리기로 했다. 데스노트 일기장을 마련했다. 남편이 시비를 거는 날이면 나는 일기장을 펴서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우리 부부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을 나의 데스노트에 써 내려갔다. 한국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남편이기에 마음 놓고 한국어로 남편 욕을 갈겨쓰고 나면 마음이 다소 후련해졌다.
유방암 치료도 모두 끝난 2019년 9월, 드디어 나는 국립 대학교 어학당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열망에서 남편에게 요구해서 필사적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국립 대학교 어학당에 가기 위해서 나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어학당은 집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에 있었다. 걷고, 버스를 타고, 트람으로 갈아타고, 또 걸어서 어학당에 도착했다.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어학원에 8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어학원 수업은 하루 3시간인데 오고 가는 길에서 보내는 시간은 두 배인 6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남은 평생을 말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육체적 피곤함을 잊게 해 주었다. 오히려 어학당에 가기 위해 등에 메는 무거운 가방 무게만큼 내 머리에 지식도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었다. 항암 치료로 모두 잃어버린 머리카락도 새롭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달팽이처럼 나의 프랑스어 실력도 향상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국립대학교의 어학당 수업은 정말 좋았다. 실력 좋은 프랑스 선생님들의 체계적인 수업은 프랑스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어학당에서의 모든 수업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비대면 수업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전국적으로 격리 조치가 시행되었다. 정리정돈 안 되는 남편의 성격상 시간표를 짜고 공간을 분배하는 효율적인 일은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배우지 않고 숙제만 하는 비대면 수업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수업을 포기하고 나는 남편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결심했다. 공부는 다음 학기로 미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미룰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 부부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를 하고, 남편이 일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욕실과 지붕을 수리하고, 베란다를 짓고, 시멘트도 직접 갈아서 정원에 셀프로 도로공사도 했다. 이사 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었던 정원이 점점 과실수와 꽃, 나무들이 가득한 숲으로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비로소 나는 남편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조금씩 나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충돌과 이해의 과정을 통해 일상 속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학기가 되었고 코로나로 인해 중도에 그만 두었던 국립대 어학당 수업에 재도전했다. 프랑스 전역에 2차 격리가 시행되었지만 배우는 학생들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비대면 수업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많은 것을 바꾸게 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재택근무 환경으로 근로 방식이 전환됐고 그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시댁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과 결혼해서 시댁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상했던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 집안에서 아이들은 액세서리 같았다. 어른들의 사회적 이미지를 좀 더 빛나 보이게 할 물건으로 비추어졌다. 이 당시에는 한국과 프랑스의 아이 키우는 방법의 문화 차이인가 싶었다. 시아버지는 본인은 대단한 사람이며, 돈도 잘 벌고, 아는 것도 많으며, 본인이 하는 행동은 항상 올바르다고 했다. 반면에 본인 아들인 나의 남편에게는, 너는 항상 틀렸고, 너의 행동은 항상 잘못되었으며, 너는 아는 게 없다며 항상 지적하고 비난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면 항상 시아버지는 본인이 은퇴하기 전에 했던 업적들과 가지고 있는 비싼 물품의 가격과 특성을 나열하느라 바빴고, 시어머니는 남의 불행사를 늘어놓거나 비난하기에 바빴다. 시부모님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같이 하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는 절대 관심이 없었다. 부모가 본인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위해 아이들의 정신을 이토록 짓밟고 황폐화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끊임없는 정서적 학대와 차별에 시누이는 시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의절을 선택했다. 계속해서 정신적인 독극물에 빠져 사는 것을 벗어나서 해방의 길을 택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부모 자식 간에 도덕적 학대, 정서적 학대와 같은 일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 본성의 문제인 것이다.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비난을 해대며 같은 행동을 하지만 단지 각자가 살고 있는 나라의 환경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국립대 어학당의 고급 수준인 DALF C1를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모든 행정 처리를 남편에게 상의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행정 처리의 쓰라린 경험으로 인해 내가 흘렀던 눈물 콧물은 지중해를 만들 만큼의 양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나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경제적 수입을 올렸다. 하루 7시간, 일주일에 35시간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내 이름으로 수입이 창출되었고 드디어 나는 남편 통장에 내 이름을 집어넣어 부부 공동 계좌를 가졌다. 프랑스에 정착한 지 5년 3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드디어 자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프랑스에서 나의 힘으로 뿌리를 내리려고 분투하는 동안, 그 사이 남편은 업무 관련 부상으로 인해 장기 휴직을 하고 있었다. 산을 뛰어다니고 몽펠리에 챔피언 대표로 철인3종 경기에도 출전했던 사람이 아파서 하루 아침에 펭귄처럼 걷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 휴직이 1년 8개월로 장기간이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의 맞벌이 부부들의 하루 평균 대화 시간이 30분이라고 하던데 우리 부부는 잠자는 것을 제외하고 하루에 대화를 하며 같이 보내는 시간이 최저 평균 5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년 평균 1,825시간을 함께 보낸 셈이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1년 평균 시간을 한국으로 따지면 맞벌이 부부가 10년 같이 산 셈이었으며, 결혼한 지 6년째인 우리 부부는 60년을 같이 산 한국의 커플처럼 시간을 보내며 싸우고 있었다.
신체 부자유로 인해 남편의 우울증은 심화되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자주 전화해서 본인의 감정의 쓰레기를 버리며 우리 부부의 불난 집에 휘발유를 때려 붓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본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비난의 총알을 쏴 대는지 그들의 이중 잣대, 모순적인 말들을 듣고 있다 보니 내가 미쳐 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편이 시부모와 똑같은 비난 중독자가 되어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만들면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마법의 주술’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Les chiens ne font pas des chats.(역시 피는 못 속인다) ”인데, 두 가지를 살짝 바꾸었다. 직역을 하면 “개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인데, ‘고양이’와 ‘개’의 자리를 바꾸고, ‘개’ 대신 ‘강아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나의 완성된 마법의 주술은 “고양이는 개xx를 낳지 않아.”이다. 정말 화가 많이 날 때 쯧쯧 혀를 차면서 이 마법의 주술을 한번이라도 입으로 내뱉고 나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 시기에 나는 남편이 변하길 바라기보다 내가 바뀌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문제점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그 에너지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위한 길이었다. 나는 남편의 디폴트 값으로 장착된 부정적 에너지에 먹히지 않고 내 정신을 튼튼히 강건하게 쌓아 올리기로 했다.
프랑스에 발을 내딛은 지 7년이 된 해이다. 나는 관광 시설 책임자(Responsable d’établissement touristique)의 직업 교육을 받게 되었다. 많은 과목의 시험을 보고 면접에 합격하고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이 시기 나는 프랑스인들과 함께 직업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프랑스 사회의 시스템에 통합이 되고 사고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었다. 직업 교육을 받으면서 만났던 많은 프랑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다부지게 일을 해냈다. 그들이 ‘책임자(Responsable)’를 양성하기 위한 직업 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끊임없이 찾아가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상황을 개선해 가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줄 아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남녀평등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 덕분에 나는 집에서 자발적으로 50센티미터 크기의 절단기를 들어서 정원의 나무들을 가지치기하고, 예초기를 들어 풀을 베며, 진공 송풍기로 정원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남편을 돕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가정의 책임자로서 해야 하는 나의 일인 것이다.
이 시기의 직업 훈련과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나의 행정 처리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행정 처리도 했다.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의 부가가치세(TVA)를 신고하고,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나는 자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직업 훈련을 끝까지 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인맥도 없어서 구하기 힘들었던 인턴도 만나는 사람마다 부탁해서 기적적으로 구했고, 왕복 20킬로미터를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인턴을 끝마쳤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졸업 발표와 인턴 보고서를 프랑스어로 썼고, 심사위원들이 나의 프랑스어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발음 교정을 매일 연습했다. 나는 건강을 해쳐 가면서 폭주 기관차처럼 매일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갔다. 마른 걸레를 짜듯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바치고 있는 동안 남편의 우울증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앞가림을 하기에도 이미 벅찬 상태였던 나는 남편의 이상을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가 직업 교육을 끝마치던 날, 남편은 우리가 이혼하고 나면 나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겠냐 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앞을 향해 달려왔는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했는지 정말 억울했다. 한국을 떠난 지 어느새 7년, 프랑스에서 내 힘으로 정착을 해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애를 쓰고 노력하며 지내온 그간의 나날들이 남편과 이혼을 하면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우리의 이별 가능성을 비추자 프랑스 사회에서 남편이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현재 나의 상황을 재점검해야 할 때였다. 나는 아직 인맥 구축을 제대로 못했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이혼을 할 경우에 나를 변호할 만큼 법률상으로 프랑스어를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는 자립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적극적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우렁각시가 되기로 했다. 나는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집수리를 했으며, 정원 일을 하루 종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게 일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동안 이 많은 집안일을 해내느라 남편도 애를 참 많이 썼구나 싶었다. 내가 나의 성장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집안일을 남편이 해주고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 나는 우리 부부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문제, 남편의 문제 그리고 우리 둘의 문제가 결합된 부부의 문제에 대해 심층분석하기 시작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내가 남편에게 같이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화가 나서 윽박지르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기쁨을 표현했다. 화를 내는 방법으로 기쁨을 표현한다는 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남들을 제대로 칭찬을 하는 법도 몰랐다. 나는 이때서야 비로소 서 남편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에 미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는 프랑스어 어학 실력 자체가 부족했던 반면에 남편은 ‘감정 언어’ 능력이 부족했기에 우리의 갈등이 오랫동안 깊어 졌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알기 위해서 시부모를 먼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자식들의 감정을 무시하던 그들이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온 남편이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감정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나는 시누이가 시어머니와 왜 의절을 선택했는지, 왜 그녀가 어렸을 적 자살 시도를 했는지, 본인 친딸과 의절을 했다는 사실을 시아버지는 무표정하게 로봇처럼 말했는지, 시어머니는 왜 항상 그 모든 것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지, 왜 그들은 자식들을 차별적으로 대했는지, 자식들을 항상 조종하려고 했는지, 이 수많은 궁금증이 드디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은 것만 같았다. 그동안 지옥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그 모든 것이 이 퍼즐 한 조각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정원을 혼자 가꿀 수는 없다면서 극도의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매일 정원 일을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달 동안 매일 해도 끝이 없는 정원 일은 급기야 나의 몸에 적신호를 보냈다.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오른쪽 가슴 부분이 꽉 막히면서 숨을 쉬기가 어렵고 몸에 마비가 오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지내던 나를 보고 남편은 본인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남편이 어렸을 적, 아버지와 알프스 스키장에 갔다. 아버지는 꼬마였던 아들을 본인 수준에 맞는 어려운 난이도의 스키 활주로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스키를 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힘들어서 스키를 이제 타지 못하겠다고 했는데도 아들에게 타라고 강요를 했다. 지친 체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강요에 탔던 스키에 결국 부상을 입었고 헬리콥터에 실려서 응급실에 갔으며 아버지는 아들을 허약한 놈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어느 새인지 남편은 본인 아버지처럼 나를 본인 체력대로 밀어 붙이는 가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아파서 쓰러져 있던 나는 희생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본인이 부모에게서 받은 정서적 학대를 나에게 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모에게서 채우지 못한 정서적 허기를 나를 통해서 채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어를 향상시켜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을 찾기 위해 나의 능력치도 향상시켜야 했다. 나를 위한 절대적 시간 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나를 위한 시간을 희생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내가 본인의 부모처럼 본인을 정서적으로 방임하고 있다고 느꼈고 나를 한계까지 밀어붙임으로써 그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 통해서 본인의 부모를 벌주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부모에게서 정서적 학대를 받아온 남편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본인이 스스로의 감정을 인지하고 바꾸려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본인에 대해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신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본인이 살아오는 동안 절대 의문을 품지 않고 모두 믿었던 시어머니의 논리적이지 않았던 조작된 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친아들인 남편을 그토록 깎아내리면서 비하를 했던 원인은 정작 시아버지 본인의 열등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왜곡된 감정의 주입으로 평생 동안 단단하게 거짓으로 쌓아 올렸던 철옹성에 마침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조그만 틈 사이로 우리 부부는 앞으로 조금은 덜 다투고, 더 아프지 않게 싸우고, 서로의 갈등을 현명하게 조율해 갈 수 있는 희망의 꽃 한 송이가 피기 시작했다.
한국 서울에서 영문학 학사, 재무회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몽펠리에 Université Paul Valéry에서 DUEF(프랑스어대학졸업장) B1, B2, C1을 취득했다. 프랑스 베지에에서 Formation de Responsable d'établissement touristique을 수료했다. 2016년 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 자연 공원에 위치한 시골 온천 마을에 거주 중이다.
출처를 표시하시면 비상업적·비영리 목적으로만 이용 가능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 등 변형도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