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9호
흩뿌려진 것들은 기어이 이야기로 탄생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영화 세 편을 중심으로
이주혜
ⓒ 한국문학번역원
디아스포라(diaspora)가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씨앗들이 떠오른다. 바람에 의해 들판에 흩날리는 나무의 씨앗도, 어린아이의 무구한 입김에 훅 날리는 민들레 씨앗도, 새가 몸으로 이동시키는 열매의 씨앗도 전부 내게는 디아스포라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그것은 우선 디아스포라의 씨앗이 원주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자리에 다른 문화와 전통, 언어를 뿌리내린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발생한 이미지이겠지만, 내게는 방향성 없이 흩뿌려진 디아스포라의 씨앗이 어디서든 기어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는 곡진한 인상으로 더 깊게 남았다. 디아스포라라는 씨앗이 어디선가 뿌리를 내린다면 그 열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디아스포라 기록도 성경 「신명기」 28장 25절의 “그대가 이 땅의 모든 왕국에 흩어지고”라고 하지 않던가. 그 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이야기, 그리스인의 이야기, 이른바 ‘집시’의 이야기, 아일랜드인의 이야기, 아프리카인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종교, 전쟁, 추방, 박해, 노동, 기근, 노예 제도 등 디아스포라 발생의 다양한 원인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역사와 시대, 문화권을 막론하고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어 온 디아스포라 현상과 그것이 발생시킨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인류가 자아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고 언제나 문화적, 상징적 매개를 통해 이해한다는 폴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혹은 서사 정체성) 개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곳곳의 디아스포라를 만나고 이해의 시작을 경험한다. 성경에 처음 기록된 이후 디아스포라는 다양한 역사서와 구술 문학, 서사시, 소설 등을 통해 동료 인간에게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리고 이야기의 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에 이르러 이야기는 영상 매체의 옷을 입고 더욱 생생하고 깊이 있는 디아스포라의 얼굴을 조명한다.
이 글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어 온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방식 가운데서도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 최근에 제작·개봉된 영화 세 편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북미 지역 이민 1.5세대의 만남과 이별, 언어의 교차 등을 ‘인연’이라는 화두로 담아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2024), 그리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도 어찌 보면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온 해외 입양인 서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담아낸 말레나 최 감독의 〈조용한 이주(The Quiet Migration)〉(2024), 마지막으로 분단이라는 외면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가 발생시킨 디아스포라, 탈북민의 이야기 〈로기완(My Name is Loh Kiwan)〉(2024)이 그것이다. 이 중 〈패스트 라이브즈〉와 〈조용한 이주〉는 셀린 송 감독과 말레나 최 감독이 각각 이민 1.5세대이자 해외 입양인 당사자라는 사실이 이야기에 핍진성을 강화하고 또 〈로기완〉이 2011년 출간과 함께 “이방을 떠도는 탈북인의 운명에 대해 놀랄 만큼 차분한 공감을 자아내는 넉넉한 품과 세심한 결”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 문학의 놀라운 성취로 인정받은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보았다』를 출간 13년 만에 영화로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점 등이 눈에 띈다. 이 글은 이 세 영화를 중심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 그리고 각각의 재현이 강조하는 디아스포라의 본질과 현상은 무엇인지를 미력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나리〉(2021), 〈성난 사람들〉(2023) 등 한국계 배우와 감독이 주축이 되어 제작되고 이른바 미국 주류 문화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계보를 잇고 있다. 평단의 주목과 찬사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듯 이 작품은 뉴욕비평가협회상,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전미비평가협회상, 런던비평가협회상, 미국감독조합상,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등을 말 그대로 휩쓸었다. 〈미나리〉가 한국 이민자 가족의 과거 정착기와 그 과정의 애환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성난 사람들〉이 정착을 향한 아시안 이민자들의 여전한 불가능성과 현실적 분노를 속도감 있게 그려 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12년 간격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관계의 우연성과 선택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디아스포라의 끊임없는 유동성을 보여 준다.
열두 살 ‘나영’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 ‘노라’가 된다. 12년 후 스물네 살이 된 ‘나영’을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해성’이 찾아낸다. 두 사람은 인터넷 영상 통화를 통해 지역과 시차라는 한계를 넘어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노라’가 아닌 ‘나영’이 되어 전하는 한국어는 영락없이 열두 살 소녀의 억양과 목소리다. 어쩌면 각자 처지의 한계를 ‘무리해서’ 넘어야 겨우 가능한 두 사람의 대화는 12년 전으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늘 나영을 향했던 해성의 시선과 그런 해성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모르는 척 새침을 떨기도 했던 나영의 얼굴은 12년 후 영상 통화 스크린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왜 이민을 가야 하느냐는 해성의 질문에 12년 전 나영은 엄마의 말을 빌려 대답했다. 한국에 있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고. 둘이 함께 하교한 마지막 날 해성이 “야!” 하고 나영을 불러 본 다음 해성은 왼쪽 골목길로, 나영은 오른쪽 계단 길로 움직이는 장면은 각자의 수평 운동과 상승 운동을 통해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라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노벨상을 받으려고 이민을 간 나영은 스물네 살이 되어 퓰리처상을 욕망하는데, 해성과의 무리한 대화는 그 욕망에 방해가 된다. 희곡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나영은 자꾸만 한국행 비행기표를 검색하는 자신이 겁나고, 결국 해성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면서 둘의 대화는 중단된다.
다시 12년이 흘러 서른여섯 살이 된 해성은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의 나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실제로 24년 만에 만나 “와, 너다.”라는 말로 관계를 시작하는데, 이때 해성이 “너다.”라고 지칭하고, 포옹하고, 함께 산책하고, 눈을 마주치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너’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해성의 ‘너’는 서울에서 헤어진 열두 살의 나영일까, 영상 통화를 나누었던 스물네 살의 나영일까, 아니면 작가 레지던스에서 만난 백인 남편 아서와 함께 살며 영어로 글을 쓰고 영어로 대화하고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서른여섯 살 노라일까?
일본에서 태어나 독일에 거주하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나란히 글을 쓰는 작가 다와다 요코는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름이란 경계를 넘을 때 변모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뿐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법명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자로 들어가거나 결혼을 하거나 새로이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이름이 변하기도 합니다.1)
”
이름은 경계를 넘을 때 변모할 뿐만 아니라 호명의 순간 새로운 경계를 창출하기도 한다. 해성이 나영을 나영이라 부를 때와 아서가 나영을 노라라고 부를 때, 나영이자 노라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되어 결계와도 같은 공간을 탄생시킨다. 그러니 해성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날 밤 나영(노라)과 아서와 함께 바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대화의 공간은 중첩되어 열린다. 나영과 해성이 한국어로 대화하는 공간과 노라와 아서가 영어로 대화하는 공간, 그리고 가끔 해성과 아서가 어설픈 영어와 어설픈 한국어로 띄엄띄엄 대화하는 공간은 각기 다르다. 세 공간은 서로를 침투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곁에 존재하며 서로를 간섭한다. 아서는 한국어를 하는 노라가 불안하고, 해성은 영어를 하는 나영이 서운하다. 언어의 다름은 이해의 불가능성과 오해를 만들어 내는데, 언어의 달라짐이야말로 디아스포라가 겪어야 하는 본질 중 으뜸일 것이다. 이탈리아 출생 작가이자 화학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는 처음 수용소에 끌려갔을 때를 언어를 박탈당한 순간과 등치시켜 진술한다.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디시어를 배우지 않았던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주로 통용되는 독일어와 폴란드어, 이디시어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 그에게 언어의 박탈은 생명의 박탈과도 같았을 것이다. 레비의 예처럼 디아스포라가 경험하는 최초의 박탈 중 하나가 언어일 텐데, 〈패스트 라이브즈〉는 디아스포라 경험이 어떻게 언어를 변화시키고 그 언어의 달라짐이 어떻게 관계의 다름으로 이어지는가를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 수작이다. 해성은 한국어로 말하는 열두 살 나영이나 스물네 살 나영과는 잠시 만날 수 있어도 영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노라와는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서른여섯 살 노라는 그러므로 전생이나 후생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나마 어떤 관계,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는 선택할 수 없다. 현생의 노라 곁에서 노라와 함께 사는 아서는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노라를 볼 때마다 두려움에 떤다. 아서의 공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해성에게 나영은 떠난 사람이고 아서에게 노라는 언제 떠날지 몰라 불안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의 얼굴인 나영이자 노라는 이렇듯 늘 떠나고 떠날 예정인 사람이다. 그러나 노라가 해성을 공항으로 보낸 후 밤길을 걸어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아서에게 당도했을 때, 그의 품에 안겨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 우리는 깨닫는다. 늘 떠나고 떠날 예정이었던 나영이야말로 마지막에 홀로 남겨진 사람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의건 타의건 한 번의 바람에 날려 흩뿌려진 디아스포라의 조각은, 마침내 뿌리를 내리더라도 당분간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또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어서 홀로 남겨진 채 끊임없이 유동하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이 현재 살아가는 뉴욕을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명명하고 선택한 것은, 미국이라는 공간과 영어라는 언어가 남편 아서처럼 ‘자신의 세계를 넓혀 주는 존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캐나다라는 처음 이주지와 영어라는 언어는 나영의 부모가 결정하고 선택했겠지만 이후 노라라는 영어 이름과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직업, 그리고 함께 글을 쓰고 대화하는 아서와의 결혼은 노라의 선택이었다. 선택이 가능했던 노라는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거쳐 지금은 토니상을 욕망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택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1973년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에 입양된 말레나 최 감독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덴마크의 농장 가정에 입양된 한국 태생 칼의 이야기를 〈조용한 이주〉에 담아냈다. 말레나 최 감독은 한국계 입양인의 처지를 어느 날 갑자기 농장 들판에 떨어져 깊은 구멍을 낸 운석에 비유한다. 운석과도 같은 이방인 칼은 낙농업 강국 덴마크에서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을 예정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상승 욕망으로서의 이주를 보여 주었다면, 〈조용한 이주〉의 화면은 광활한 공간과 수평 이동만을 반복해 보여 준다. 이중 유일한 수직 이동이 운석의 낙하, 즉 서지훈이라는 이름의 한국 소년이 덴마크로 입양되면서 칼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지훈이었던 칼은 입양과 함께 무리 없이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로 이동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기는 한가? 〈조용한 이주〉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칼 앞에 펼쳐진 세계는 언뜻 광활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아버지 한스가 꾸려 가는 농장과 어머니 카렌이 살뜰하게 가꾸는 집과 부엌은 언젠가는 칼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칼이 원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없다. 과연 칼은 아버지의 농장과 어머니의 집을 물려받을 의지가 있는가? 영상 속 칼의 표정만 보면 그에게는 농장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어 보인다. 농업 학교를 나온 것도 그의 뜻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덴마크에 와서 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부터 그의 의지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을 것이다. 칼은 늘 아버지가 시키는 농장 일을 묵묵히 수행하지만 쉴 때나 놀 때는 언제나 혼자다. 상상인지 기억인지 모를 곳에서 어린 칼은 밤의 들판에서 불붙은 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놀고, 농장 일을 마친 후 혼자 마을 농구장에 가며, 식구들과 밥을 먹고 외식할 때도 혼자만의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사실 상상은 칼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데, 칼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공간에서 자신의 생모일지 모르는 아시안 여성을 만나고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안 또래 여성과 사귀는 것은 현실에 칼을 위한 공간이 부재함을 드러낸다. 칼에게 현실은 소외와 상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아버지는 칼에게 오직 자신의 농장을 물려받을 대체 인력만을 원하는 것 같고, 어머니는 오래전 유산한 자신의 아이를 향한 그리움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친척들은 칼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종 차별과 혐오의 말을 내뱉는데(“네 고향으로 가 버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처받은 칼을 위해 나서 주지 않는다. 칼의 상처는 운석이 떨어지며 만든 깊은 구덩이처럼 검게 파였다. 디아스포라 칼은 정착에 실패하고 이대로 싱크홀 속으로 꺼져 버릴 운명일까?
아버지 앞에서 또 한 번 심각한 혐오 발언을 접하고, 동시에 어머니가 오래전 잃은 아기에게 침잠하는 모습을 목도한 칼은 스스로 싱크홀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싱크홀은 추락과 실패의 구덩이만은 아니었다. 싱크홀을 통과한 칼은 현재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아파트 옆 정자에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멸치 똥을 따는 할머니들 곁을 지나가고,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고, 시끌벅적한 재래시장 통로를 지나간다. 시장에서 전집 주인이 건네는 동그랑땡 하나를 받아먹기도 하고, 생선 가게에 진열된 생선들을 신기하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모로 짐작되는 여성을 만나는데, 그 여성은 칼에게 다정한 미소만 건넬 뿐 말을 건네거나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칼의 상상은 딱 그만큼인데, 디아스포라 환경이 제한했을 칼의 상상과 욕망의 한계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동시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결국 칼은 한국의 서지훈으로 돌아가지 않고 덴마크로 돌아온다. 그러나 싱크홀을 통한 공간 이동을 경험한 후의 덴마크는 이전과는 다른 장소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칼에게 혐오 발언을 한 동료에게 덤벼들고, 어머니는 유산한 아기의 태아 사진을 보여 주며 “너보다 더 멋진 아이는 가질 수 없었을 거야.”라는 진심 어린 사랑을 고백한다. 칼은 아버지에게 “아빠, 나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솔직히 말한다. 칼과 한스와 카렌은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짜 가족을 이루고 새로운 출발점에 선다. 어떤 영화는 끝남과 동시에 새로 시작하고, 어떤 이주는 도착과 함께 새롭게 출발한다. 칼은 운석처럼 불현듯 덴마크에 닿았고, 영원히 마찰하는 것만 같은 성장기를 거쳐 싱크홀보다 검은 상처를 키웠지만, 스스로 상처 속에 뛰어듦으로써 조용한 이주의 한 마디를 완수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칼은 또 이동 중일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 생겼으므로. 그가 상상의 프레임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을지, 상상을 현실로 끌어와 실제 만남을 도모할 수 있을지, 결국 그의 선택이 어떤 이름과 장소에 도달하게 할지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이 한 편의 디아스포라 영화가 우리에게 조용히 던지는 가능성의 씨앗들이다.
이민이 어느 정도 선택의 결과이고 입양에는 자신의 선택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난민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선택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난민 서사 중 탈북자 이야기는 참혹한 현실과 그 안에서 어지럽게 교차하는 한국사로 인해 우리에게는 어느새 ‘가깝고도 먼 이야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영화 〈로기완〉은 넷플릭스 공개작, 유럽 현지 촬영, 원작 소설과의 관계 등으로 화제를 몰고 우리에게 당도했다.
영화 〈로기완〉은 북한 출신 남성 로기완이 탈북 후 연길에서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와 난민 지위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EU 난민 심사관은 로기완에게 정착금을 노리고 난민 신청 중인 조선족이 아니라 진짜 북한 출신임을 증명하라고 하지만, 로기완에게는 확고한 증거가 없다. 끊임없는 자기 증명을 요구받는 한편, 로기완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공중화장실 바닥에 누워 밤을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련한 돈을 도둑맞기에 이르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계 이민자 마리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로기완에게도 마리에게도 삶은 지독하게 비참하고 희망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데, 북한과 남한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출신지가 대변하듯 내일이 없는 두 청년의 삶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 준다.
앞서 말한 책에서 다와다 요코는 “집이란 가족도 건물도 아니고, 문화와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으로 다시 보면 로기완과 마리는 집 없는 사람들이다. 로기완은 연길에서 어머니를 잃는 순간 집도 잃었고, 마리는 어머니의 안락사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집을 버렸다. 로기완이 집을 뺏긴 사람이라면 마리는 스스로 집을 불사르고 나온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집이 되어 준 순간이 있다. 그 신기루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사랑하며 짧은 시간을 보냈다.
로기완은 자신이 탈북자임을 증명할 서류가 없지만, 그가 탈북자임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이 있다. 로기완이 생존을 위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정육 공장에 조선족으로 위장 취업했을 때 만난 선배 직원이자 조선족 여성인 김선주는 로기완의 “이켔시오, 저켔시오.” 하는 말투만 보고 그가 북한 출신임을 알아본다. 말끝마다 ‘동무’를 붙이는 로기완에게 “너를 버린 곳이 뭐가 좋아서 계속 그곳 말을 쓰냐.”라고 타박하면서도 김선주는 로기완의 신분 증명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김선주에게 한 사람을 증명하는 근거는 출생증명서 같은 서류가 아닌 그 사람의 몸에 밴 언어였던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과 해성, 노라와 아서가 달라진 언어로 인해 관계에 끊임없이 간섭을 받았던 것에 반해, 〈로기완〉의 기완과 마리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상대에게 집이 되어 주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어라는 같은 언어를 쓴 덕분일 것이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집 없는 디아스포라에게 집이 마련되는 시작점은 이해 가능한 언어가 생기면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언어가 이해를 시작하고 언어가 관계를 구축하며 언어가 잠시나마 집이 되어 준다. 여기서 언어란 단순히 발음 기관을 통해 조성되는 음성 언어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한 심사 과정을 통과해 마침내 브뤼셀에 정착할 권리를 획득한 로기완은 정착할 권리가 생기자마자 떠날 권리를 향해 출발한다. 이때 정착할 권리, 떠날 권리의 대상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언어와 관계라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즉 로기완은 브뤼셀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갈 권리를 손에 넣자마자 새로운 집, 달라진 언어, 다시 찾고 싶은 관계를 추구할 권리가 필요해진다. 투쟁은 계속되고,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또 한 가지 본질이다.
디아스포라의 본질은 이동이다. 유동이기도 하고 변화나 변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서울에 살던 열두 살 나영이 캐나다로 와 백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열두 살 노라와 같은 사람일 수 없듯이, 덴마크 백인 남성에게 혐오 발언을 듣고 운석이 뚫어 놓은 싱크홀로 들어가 버린 칼은 한국의 아현시장에서 전집 주인이 건넨 동그랑땡을 받아먹고 빙그레 웃는 칼과 결코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디아스포라의 조각들을 씨앗으로 흩뿌리고, 이 씨앗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이렇게 태어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떠난 사람이자 남겨진 사람인 나영(노라)의 울음을, 운석처럼 낯선 땅에 떨어진 칼의 막막함과 쓸쓸함을, 자기 증명의 압박 속에서도 언어와 관계의 끈을 놓치지 않는 로기완의 분투를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동을 본질로 하는 디아스포라는 더불어 이야기의 전파를 창출하고, 이렇게 전달된 이야기는 우리를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다시 말해 이동과 변화의 동의어인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우리까지 디아스포라의 한 조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도모한다. 요컨대 함께 이동하기 혹은 함께 달라지기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디아스포라 문화 콘텐츠의 수행 방식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1) 서경식·다와다 요코 지음, 서은혜 옮김, 『경계에서 춤추다』, 창비, 2010.
읽고 쓰고 옮긴다. 쓴 책으로 『자두』,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누의 자리』,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눈물을 심어 본 적 있는 당신에게』,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이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멀리 오래 보기』, 『동등한 우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