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9호
디아스포라와 세계문학: 그 '파괴적 성격'을 중심으로
김남일
ⓒ 한국문학번역원
1950년생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팔레스타인 문인으로는 갓산 카나파니, 마흐무드 다르위시, 파드와 투칸 등에 이어 제2세대에 속한다. 그는 오슬로 협정(1993)이 체결된 직후 국경의 다리를 건너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의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1)반백의 머리로. 무려 25년 만이었다. 따지고 보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 그 다리를 건널 때 그는 행복했다. 단 이스라엘 당국자는 2년 동안은 돌아올 수 없는데, 2년이 넘어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무슨 말인가. 정확히 2년이라는 기간에 맞춰 돌아오라는 것. 문제는 그 2년 세월에도 그가 여전히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돌아올 차표를 살 돈이 없었다. 어찌어찌 돈을 구해 다리 앞에 섰을 때는 시간이 지났다. 단 이틀. 그때부터 그는 꿈 많은 유학생에서 돌아올 기약 없는 망명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의 아내는 예루살렘 출신이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녀는 마침 아버지와 함께 쿠웨이트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때 예루살렘에 없던 사람들은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아내의 가문이 600년간 그곳에 살며 내린 뿌리는 하루아침에 잘려 나갔다. 그때부터 망명지를 떠돌아야 했다. 나중에 요르단강 서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그때도 예루살렘 방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친척이 죽었을 때 신청서를 내자 ‘당국’은 크게 선심을 썼다. 그녀는 단 이틀간이지만 예루살렘에 머물며 문상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경계를 넘는 일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일상이 되었다. 버겁고, 끔찍하고, 수치스럽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
자카리아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4년 초여름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제10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겸 제1회 아시아청년작가 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국제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높은 곳’에 줄을 댈 수 있는 후배를 통해 급히 좀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얼마 후 그가 겨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의 설명을 들었다. 세상에,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여권을 가지고 ‘감히’ 대한민국 땅에 입국을 시도한 것이었다. 공항의 관리들에게 잘못은 없었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여권 때문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 터.
마침내 한국의 동료 작가들을 만나는 기자 회견장.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대표가 건넨 인사에 자카리아가 소감을 밝혔다.
“여기 오는 데 스물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고 공항에서는 여권 때문에 또 시간을 꽤 허비했지만, 솔직히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라말라에서 어머니한테 가는 것보다는요. 거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지만 높이 9미터짜리 장벽, 그건 어찌할 수가 없거든요.”
말로만 듣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흔히 ‘이산(離散)’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디아스포라’는 주로 바빌론 유수(幽囚)와 이후 로마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도처로 뿔뿔이 흩어졌던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던, 그래서 그들의 간난고초를 대신하던 용어였다. 지구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그 뜻이 확장되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해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경을 넘는 이들까지 두루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가장 고전적인 전형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용어의 출전과 관련 깊은 유대인들이 세운 근대 이스라엘 국가에 의해 쫓겨나거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안타깝게도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다. 지난해 늦여름, 갑자기 타계 소식이 날아왔던 것이다.
“
나의 개 키위가 죽기 한 달 전에 내게 물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언가, 자카리아?” 나는 답했다: “잘 모르겠네. 그래도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는 내가 말해 줄 수 있네. 인간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네. 눈물의 꼭지는 항상 잠겨 있어야 하네. 안에 차오르는 눈물을 흘려보내려면, 인간은 댓가지의 일곱 구멍에 손가락을 올려놓아야 하네. 그렇게, 댓가지가 그 대신 울 거라네. 시가 그 사람 대신 울 거라네.” 그렇다네, 키위, 인간의 손은 일곱 구멍 뚫린 댓가지 위에 있고, 그의 영혼은 쇠 꼭지처럼 잠겨 있다네. 2)
”
라말라에 있는 그의 집에 가서 봤던 개 이름이 키위였던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뒤늦게 안, 키위의 죽음에도 애도를 표한다.
유엔난민기구(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의 발표(2024년 6월 13일)에 따르면, 지난해 난민이 1억 2,000만 명으로 전해에 비해 무려 600만 명이 늘었다고 한다. 가자 사태로 인해 추방당한 이들도 거기 포함됐을 것이다. 시리아 내전, 수단 내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고전적’ 난민들에, 중남미 도처에서 미국만 바라고 무작정 죽음의 행진을 하는 이들, 미얀마의 군사 독재를 피해 밀림으로 숨어든 이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쪽배에 몸을 싣고 인도양을 헤매고 있을 로힝야족 등등……. 이들에게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조차 사치로 여겨질 만큼 상황이 끔찍하다.
그런데 모든 이산이 다 슬프거나 참혹한 것만은 아니다.
다와다 요코의 경우, 1979년 스무 살도 채 안 된 그녀는 대학 졸업식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일본을 떠난다. 첫 기착지는 인도였고, 이후 1982년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는다. 한 달여에 걸친 그 긴 기차 여행의 경험은 전율에 가까울 정도의 감동을 안겨 주었고, 그녀는 마침내 독일의 함부르크에 새로운 거처를 정했다. 그때 이후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언어였다. 하루빨리 독일어를 잘하게 되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두 개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도랑’과도 같은 것을 발견하여 그 안에서 살아 보고 싶었다. 3)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 첫 번째 도랑이 1987년 일본어와 독일어로 된 시집 당신이 있는 곳만 아무것도 없다(あなたのいるところだけ何もない, Nur da wo du bist da ist nichts) 와 1989년 출간한 첫 독일어 소설집 목욕탕(Das Bad) 이었다. 그때부터 독일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는데, 머잖아 일본에서도 군조신인문학상(1991)을 수상하고, 이어 아쿠타가와상(1993)까지 수상하며 일약 일본 문학계의 총아로 대두한다. 이후에도 그녀의 행보는 거침없었으니, 이제 우리는 독일어 작품집 20여 권과 그만큼의 일본어 작품집을 동시에 출간한, 실로 드문 이력의 한 작가를 마주하게 된다. 그 많은 저작 중에서 세 작품만은 작가가 직접 독일어와 일본어로 같이 집필했는데, 그 경우에도 독일어로 먼저 글을 쓰고 그것을 다시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옮겼다 한다. 4)
물론 독일은 낯선 땅이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상황에 부닥치는 일이 그녀의 일상이 된다. 그러는 사이 ‘고국’은 점점 멀어진다. 실은 그녀 스스로 원했던 게 모어(母語)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런 ‘엑소포니(Exophony, エクソフォニ)’의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1년 3월 11일 이후 더 이상 ‘초심’만 즐길 처지가 아니게 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돌아갈 수 있던 고국이 이제는 없다. 가령 「불사의 섬」(2011) 5)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쓰나미 이후 일본은 혼란에 휩싸였고, 2015년에는 Z그룹이라고 자처하는 일당들에 의해 완전히 민영화되었다. 그리고 2017년 연이어 발생한 태평양지진으로 인해 네 개의 원전이 더 폭발하자 일본은 이제 아무도 가지 않는 절해고도가 되었다. 민영화된 정부도 ‘쇄국’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피폭된 노인들은 오히려 건강해지고, 젊은이들은 거꾸로 무기력해졌다. 노인들은 백 살이 넘도록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젊은 세대를 돌봐 준다.
열도 밖에 있는 ‘나’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일일이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니까.
“
‘일본’이라는 말을 들으면 2011년에는 동정을 받았지만 2017년 이후에는 차별받게 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패스포트를 받으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일본을 떠올리지 않아도 좋을지 몰랐지만 왠지 신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버린 탓에 오히려 이 패스포트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희한하기도 했다.
나는 빨간 표지에 핀 국화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 순간, 국화 꽃잎이 한 장 많아져 열일곱 장 있는 듯이 보여 오싹했지만 패스포트 표지에 핀 꽃의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날 리는 없다.6)
”
자발적이든 아니든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세계 각 나라와 민족, 또 각 민족어의 문학사 역시 이런 세태를 반영한다. 어떤 이유로든 모어의 자기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들이 구축하는 문학을 결코 홀홀하게 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학을 모국의 문학사에서 받아들일지 말지 하는 것부터 시작해 실로 많은 문제와 의구심 또한 여전하다. 가령 『저지대』를 쓴 인도 이민자 출신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경우, 그녀는 ‘이민자 문학’이라는 범주 자체를 아예 거부한다.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거주자 문학’도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렇듯 당당하게 말하는 줌파 라히리의 부모는 벵골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건너가서도 딸에게 벵골어만 쓰도록 강요했다. 그녀는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녀 스스로 전혀 미지의 언어 속으로 횡단/모험을 감행한다. 그녀는 언젠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호텔에서, 길에서, 그리고 상점과 레스토랑에서 들은 이탈리아어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져 버린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7)
“
이탈리아어는 내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언어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
그로부터 그 ‘무분별하고도 말도 안 되는 열망’을 위해 20년간 꾸준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데, 스스로 이탈리아어로 글도 쓰겠노라 다짐한다. 그 다짐은 마침내 현실이 되어 우리는 이제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까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대체 그녀는 어째서 모어인 벵골어보다 익숙해진 영어를 놔두고 갑자기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솔직히 그녀는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갈 때마다 구속받고 제한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그녀는 더 자유롭다고 느꼈다. 어째서? 그건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9)이었다. 그녀는 창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노라 말한다. 솔직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 봤자 그녀는 다만 이탈리아어의 언저리만 맴돌 뿐 훨씬 더 안쪽으로 들어가 언어의 심장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바로 그런 ‘거리’가 저로 하여금 무모한 도전을 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를 채울 수 있다면 난 더는 이 언어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10)
”
다와다 요코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기가 그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무언가 두 개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도랑’과도 같은 것을 좀 더 화려하게 표현해서 두 언어 사이의 ‘시적 계곡’이라고 말한다. 11) 그런 그녀에게 ‘떠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비난이 못 된다. 그녀는 ‘정처(定處)’가 아니라 “어디를 가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두꺼운 눈꺼풀, 여러 가지 맛을 알 수 있는 혀, 어디를 가도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복잡한 눈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12)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모험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
단편 「끝도 없이 달리는」13) 역시 앞서 언급한 「불사의 섬」처럼 3·11 이후를 다루는 일종의 재난 소설이다. 꽃꽂이를 배우러 다니던 미망인 아즈마다 이치코는 젊은 여성 다바다 토오코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려 할 때 커다란 지진이 왔고, 둘은 피난소로 가야 했다. 거기서 난민 생활을 하지만 둘은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토오코의 가족이 그녀를 찾아오면서 그 행복은 일순간에 깨져 버리고 만다.
이 소설의 특징은 내용보다도 아주 정교한 ‘일본어 유희’에 있다. 가령 일본어 한자를 분절하여 새롭게 쓰는 것도 즐거운 놀이가 된다.
“
오염된 환경에서도 제초제 사용이 금지된 이래, 잡초(雜草)가 자라는 것은 빨랐고(早), 송곳니(牙) 형태의 날카로운 싹(芽)이 벼에 달라붙어 물어 댔다. 아무리 인간이 묘목(苗)을 공들여 키우더라도 논(田)은 마침내 잡초의 바다로 덮이고 말 것이다. 14)
텐쨩은 전혀(全然) 익센트릭한 점이 없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全然)의 연(然)에 불이 붙어 타기(燃) 시작했고, 혀가 화염(炎)이 되었다. 15)
”
일본을 떠나 자발적 디아스포라로 사는 작가에게 오히려 모어인 일본어에 대한 관심/무관심이 이렇듯 기발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겠다. 물론 일본이 당한 전대미문의 재난을 이런 식으로 말장난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은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역자의 말마따나 다와다 요코의 실험이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침묵을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과 금기를 넘어서, 어떤 식으로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타자’를 만들고, 그들의 말들을 모으고, 대화의 활로를 뚫는 것이야말로 소설가의 길이자 사명임을 환기”시킨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16)
주지하듯 일본어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한자로 구성된다. 그중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재난 소설이자 「불사의 섬」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헌등사」에서는 대지진 이후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국과의 모든 교류는 물론이고, 인터넷도 외래어도 외국어 교육도 번역도 사라진 일본을 그린다. 그러다 보니 가타카나 또한 쓸 일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더 정확히는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빵집에 가면 ‘가타카나’ 냄새가 나는 묘한 빵 이름을 만나게 된다. 빵집 주인이 자신이 구운 빵에 ‘하노오바(刃の叔母)’, ‘부레멘(ぶれ麺)’, ‘로텐부로쿠(露天風呂区)’ 등 이상한 이름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17) 빵집을 찾은 손님(요시로)은 이렇게 말한다.
“빵은 먼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려 주니 좋군요. 먹는 것은 밥이 좋지만, 빵에는 꿈이 있소.”18)
가라타니 고진에 기대면, 일본어의 3표기 체계(‘3중의 에크리튀르’)는 낯선 것,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정확히 가려내는, 말하자면 일본 고유의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결과적으로 외부적인 것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
한자는 일본어 내부로 흡수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적인 것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자로 쓰인 것은 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상황은 메이지 이후 일본의 문어(文語)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처음에 서양의 개념은 한자로 번역되었지만, 동시에 가타카나로 표기하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가타카나는 불전(佛典) 등 한문을 읽기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 적합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서양의 개념이 번역되는 경우는 좀체 없고 거의 가타카나로 표시된다. 외래어는 말해질 때는 외래어라는 사실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지만, 쓰일 때는 가타카나가 외래성을 명시한다. 때로는 히라가나나 한자로 써야 할 일본어를 일부러 가타카나로 써 외래적인 낯설게 하기 효과를 줄 때도 있다. 다시 말해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되는 한 외래적인 것의 외래성이 언제 어디까지나 보존되는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된 것은 일정한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일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
”
이렇게 볼 때 다와다 요코의 언어 전략은, 의도했든 아니든 일본어가 천 년도 훨씬 넘게 지녀온 견고한 표기 체계,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정신적 쇄국’―이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에 대해 새삼 의문을 제기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카프카는 분명히 독일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은 체코에 속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났고, 거의 평생 프라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프라하에서 독일계 유대인 부모를 둔 그가 쓴 독일어가 지닌 소수성에 있다. 그것은 당연히 독일의 독일어와 달랐다. 카프카는 예외였지만, 주변의 독일계들은 체코어를 의식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일부러 표준 독일어를 흉내 내거나 화려하게 구사하려 애쓰던 그들과 달랐다. 그는 체코어 속의 소수적인 언어로서 ‘프라하 독일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간결하고 차갑고 중립적이며 또한 어휘가 빈약한 카프카의 산문”이 완성된다. 20) 게토와 같은 프라하에서 고립된 삶을 영위하던 독일인을 그리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무기는 없었을 것이다. 들뢰즈가 탈영토화된 독일어라 부른 그것!
“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 안에서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언어조차 잘 모르거나, 자신이 사용해야만 하는 다수적인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는 이민자, 특히 이민자 아이들의 문제고, 소수자의 문제며, 소수적인 문학의 문제지만, 또한 우리 모두의 문제기도 하다. 즉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소수적인 문학을 이룰 것이며, 언어 활동을 천착하여 간결한 혁명적 선을 따라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에서 유목민·이민자·집시가 될 것인가. 카프카는 말한다. 요람에서 아이를 훔치라고, 팽팽한 줄 위에서 춤추라고.21)
”
다와다 요코에게 독자들은 굳이 왜 독일어와 일본어라는 두 언어로 글을 쓰는가 하고 흔히 묻는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런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나는 독일어를 결코 잘하지 못합니다. 다만 나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과는 다른 독일어를 쓰려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독일어로 쓰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쓰기를 역으로 이용해서 나는 모국어로 쓸 때에도 잘 쓰는 일본어, 깨끗한 일본어(綺麗な日本語)의 생각을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즉 두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로 진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언어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파괴해 가는 그런 작업을 부끄럽기는 하지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2)
다와다 요코의 문학적 열망은 모어로서의 일본어, 즉 ‘깨끗한 일본어’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데 가닿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재일 시인 김시종의 일본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시는 싫든 좋든 현실 인식의 혁명이고, 그러므로 시인은 일상에 익숙해져 완전히 무지러진 언어로부터 탈피하고 쇄신해야 하는 임무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그는 고향인 제주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재일’ 생활은 유려하고 교묘한 일본어에 등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정감 과다한 일본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나를 키워 낸 일본어에 대한 나의 보복으로 삼아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24)
4·3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왔어도 김시종의 일본어는 확실히 일본인의 그것과 다르다. 한 일본인 평론가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일본어임과 동시에 어딘가 삐걱대는 문체”, “장중하면서도 마치 부러진 못으로 긁는 듯한 이화감이 배어 나오는 문체”라고 평했다. 25) 한마디로 어딘가 홈이 파이고 흠집이 있다는 말. 하지만 그 ‘매끄럽지 못한 일본어’가 현실로부터 철저히 등을 돌린 일본 시의 압도적인 추세에 딴지를 건다. 그리하여 어쩌다 그의 시를 읽게 되는 드물기 짝이 없는 일본의 독자들에게―일본에서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무언가 불편한 심정을 안겨 준다. 동시에 한 발 떨어진 채 자기들의 그 ‘깨끗한 일본어’와 비교해 보도록 만든다. 나아가 어째서 그런 불편함이 생기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연원)까지 더듬어 볼 기회도 준다.
그런 언어로 시인은 가령 재일동포들이 모여 사는 오사카의 저 유명한 이카이노(猪飼野)를 이렇게 소개한다.
“
없어도 있는 동네./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동네./ 전차는 애써 먼발치서 달리고/ 화장터만은 잽싸게/ 눌러앉은 동네./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까/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 편하다네.// (……) // 시끌벅적 툭 터놓고/ 호들갑을 떨어도/ 음침한 건 딱 질색/ 한물간 시대가 유유자적/ 관습 고스란히 살아남아/ 되돌릴 수 없는 것일수록/ 중히 여겨/ 한 주에 열흘은 줄줄이 제사/ 사람도 버스도 저만치 돌아가고/ 경관마저 드나들지 못해/ 한번 다물었다 하면/ 열리지 않는 입이라/ 가벼이/ 찾아오기엔/ 버거운/ 동네.// 어때, 와 보지 않을 텐가?26)
”
그의 시는 ‘지도에도 없는 동네’의 역사를 이렇듯 당당히 소환해 낸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말한 ‘파괴적인 성격’이라는 명명은 누구보다도 프란츠 카프카에게 어울릴 텐데, 한편으로는 줌파 라히리나 다와다 요코나 김시종 같은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벽이나 산을 마주치는 곳에서 하나의 길을 보기 때문이다. 27) 디아스포라 문학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 자카리아 무함마드, 오수연 편역, 「귀환」, 『팔레스타인의 눈물』, 아시아, 2006.
2) 자카리아 무함마드, 오수연 옮김, 「나의 개가 묻기를」,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강, 2020.
3) 西門保雪, 「다와다 요코 문학 연구: 여성·유랑·엑소포니」,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5, 15-16쪽.
4) 최윤영, 「다와다 요코의 탈경계적, 탈민족적, 탈문화적 글쓰기」, 《일본비평》 12, 2015, 330쪽.
5)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불사의 섬」,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6) 같은 책, 21쪽.
7)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8) 같은 책, 21쪽.
9) 같은 책, 73쪽.
10) 같은 책, 81쪽.
11) 다와다 요코, 유라주 옮김, 『여행하는 말들』, 돌베개, 2018, 52쪽.
12) 같은 책, 48쪽.
13)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14) 같은 책, 189-190쪽.
15) 같은 책, 204쪽.
16)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역자 후기」,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302쪽.
17)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헌등사」,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19쪽.
18) 같은 책, 23쪽.
19)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일본정신의 기원』, 이매진, 2006, 83-84쪽.
20) 김광규 엮음, 『카프카』, 문학과지성사, 1978, 24쪽.
2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옮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1, 51쪽.
22) 이한정, 「일본 현대 작가의 자국어 인식」, 《일본어문학》 40, 2009, 164-165쪽.
23) 김시종, 「시는 쓰이지 않고도 존재한다」, 《ASIA》 68, 52쪽.
24) 김재훈, 「재일시인 김시종 “나의 시쓰기는 소중한 일본어에 대한 보복”」, 《제주투데이》, 2019년 5월 31일자, https://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142. 강조는 인용자.
25) 호소미 가즈유키, 오찬욱 옮김, 「세계문학의 가능성: 첼란, 김시종, 이시하라 요시로의 언어체험」, 《실천문학》 51, 303-304쪽.
26) 김시종, 유숙자 옮김, 『경계의 시』, 소화, 2008, 85쪽.
27) 발터 벤야민, 반성완 옮김, 「파괴적 성격」,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29쪽.
소설가. 장편 『청년일기』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천하무적』, 『산을 내려가는 법』, 아울러 산문집 『책』과 『백 개의 아시아』, 『아시아 신화는 처음이지』, 『꽃처럼 신화』, 그리고 『서울 이야기』, 『도쿄 이야기』 등 ‘한국 근대 문학기행’(전4권)을 펴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