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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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편집자의 말

고명철


  2024년 노벨 문학상의 영예는 한국의 작가 한강에게 돌아갔다. 아시아 작가로는 다섯 번째 수상자로 기억될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문학 안팎으로 미치는 문화적 파장을 실감한다. 그중 어느 독자의 반응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수상 소식을 듣고 벅찬 기쁨 속에서 올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은 번역작이 아니라 원전으로 맘껏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인터뷰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여기에는 여러 문화적 의미들이 내포돼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다양한 쟁점과 토론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강의 문학이 그의 모어(母語)를 표현 수단으로 하고 있다는, 즉 한글로써 사유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그의 문학과 번역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좋은 번역이 그렇듯이 상호 주관적 관계를 바탕으로 문화의 경계를 횡단하는 가운데 보다 ‘높은 차원’의 문화적 가치의 경이로움을, 한강의 문학은 갖고 있다. 이것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한글 표현의 글쓰기가 더 이상 제국의 변경에서만 자족하는 것 이상의 다(多)보편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한글 내셔널리즘’에 갇히지 않는, 그리하여 모든 민족어의 창조적 힘은 어느 특정한 보편 가치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세계의 다보편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한강의 문학은 보여준다. 이후 한글 글쓰기가 어떤 문화적 가치를 추구할지, 그래서 세계의 다보편 가치를 창조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하는 역할에 열심할 것을 기대해 본다.

  《너머》의 이번 호 특집은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2024 디아스포라 문학예술행사’에서 열린 문학 세미나의 발표 중 네 편의 글로 이뤄진다. 특집의 주제가 ‘디아스포라 문학의 안과 밖: 돌아보고, 내다보며’이듯, 김남일의 「디아스포라와 세계문학」에서는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천착하고 있는 언어의 문제에 집중한다. 정치사회적 이유로 조국을 떠나 타방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작가들이 모어(母語)와 타자의 언어들 사이에서 힘겨운 문학적 분투를 실천하고 있는 세계문학적 성취를 주목한다. 비르기트 가이펠의 「한국계 독일·오스트리아 문학의 최근 발전」은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 안나 김의 문학 세계를 자세히 분석한다.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서의 한국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축적되고 있음에 반해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여, 안나 김과 같은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의 작품 번역 소개가 잘 안되고 있는 현실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 이것은 한나 미셸의 「기억 노동자와 감정의 모범 시민」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다. 현재 한국계 미국 작가들이 그들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고 미국 현지에서 문제작으로 주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작가를 제외하고는 한국 독서계에 번역 소개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활발한 번역 작업을 통해 ‘기억 노동자’가 함의하듯, 이들 한국계 미국 작가들이 주목하는 디아스포라 문학이 탈식민지화된 역사 인식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폈으면 한다. 이주혜의 「흩뿌려진 것들은 기어이 이야기로 탄생한다」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룬 영화 세 편을 작가의 시선으로 매우 촘촘히 해석한다. 세 편의 영화가 보여 주는 디아스포라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한 조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도모한다”는 “디아스포라 문화 콘텐츠의 수행 방식”을 이해한다. 디아스포라가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널리 흩뿌린다는, 그래서 이들 이야기의 소멸과 생성에서 볼 수 있는 뭇 존재의 자연스러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이번 호 〈너머의 새 글〉에서는 시(김화숙, 사공경, 서미라, 에밀리 정민 윤, 윤석정, 정철용), 소설(보메이, 심윤경, 아스트리드 트로치, 이수정, 전춘화), 에세이(김재동, 미쓰라 아슈토쉬, 이병군, 이리나, 이스모일로브 샤코비딘) 부문에서 웅숭깊은 문학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난해 《너머》 신인상 수상자들(이수정, 정철용, 김재동)의 작품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기대한다.   〈디아스포라 깊이읽기〉에서는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장편 『동조자』와 자이니치 작가 양석일의 장편 『피와 뼈』, 프랑스로 두 차례에 걸쳐 이주한 근대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세계를 해당 작가의 정치역사의 맥락 속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리뷰 K-문화〉에서는 한국계 미국 작가 고은지의 장편 『해방자들』이 갖는 문학적 성취를 주목한다. 공교롭게도 특집에서 이 작품을 언급하는 한나 미셸의 글과 함께 읽어 보면 『해방자들』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질 것이다.
  〈경계를 넘는 작가들〉은 《너머》가 각별히 애정을 쏟는 꼭지인데, 이번 호에는 재일조선인 사상가이자 에세이스트 서경식, 한국계 미국 디아스포라 시인 박남수, 중국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을 소개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디아스포라의 조건에 있되, 각 부문에서 그들이 보인 디아스포라의 문제의식은 디아스포라 자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공붓거리를 제공한다.

  2024년 겨울을 맞이한 《너머》 9호는 세계의 도처에 존재하는 디아스포라에 지속적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한글로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높은 차원’의 문화적 가치를 지구별 뭇 존재와 함께 궁리하며, 다보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너머》의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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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는 트리콘의 대표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1998년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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