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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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작가들

Will you be my home? Or not?: 이창래가 그려낸 부유라는 여정

황유지

▲ 이창래 작가 © Michelle Branca Lee

  최근 이창래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My Year Abroad)』(강동혁 옮김, RHK, 2023)이 국내 출간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이창래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점쳐지기도 하는 인물이다. 유명세나 노미네이트를 차치하더라도 이창래의 작품은 반드시 다음 작품을 끌어다 읽게 하는 모종의 에너지로 넘실댄다. 그리고 그의 소설 뒤에는 이런 질문들이 남는다. 무엇이 나를 만드는가? 누가 나를 보호하는가? 어떻게 나를 증명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말들의 도시. 우리는 이곳에 산다. 거리의 외침은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언어로 이루어진다. 가장 이상한 합창곡. 우리는 상인 무리들을 지나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간판에 주의를 기울인다. 모두가 성난 목소리로 극적으로 말을 한다. 완전히 시대착오다. 그들은 우리가 뭔가를 사거나, 우리가 가진 것을 소리쳐 팔거나, 아니면 꺼지기를 바란다. 그 계속되는 외침은 우리가 여기 속해 있다는 것, 아니면 스스로 속하게 만들라는 것, 그것도 아니면 꺼지라는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 557쪽.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 길에 오른 이민 1.5세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창래(1965- )는 1995년 첫 장편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정영목 옮김, 나무와숲, 2003)을 발표함과 동시에 주요 문학상 6개를 휩쓸며 전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어딘가 불일치의 껄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경계에 선 자들. 시민권의 함의를 의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해야 하는 사람들, 시민권에 자신을 일치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인물과 함께 그와 필연적인 언어의 운명을 겹쳐놓는 이 소설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자 고백의 시작점이다. 이어 1999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고 미국으로 이민한 ‘프랭클린 하타’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 이민, 입양 등의 다양한 디아스포라 양상을 보여주는 『척하는 삶(A Gesture Life)』(정영목 옮김, RHK, 2014)을 내놓는다. 그런가 하면 2004년 발표한 『가족(Aloft)』(정영문 옮김, RHK, 2014)에서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중산층 가정을 통해 자본주의 내 이상적 가족의 모습을 다시금 헤집으며 보다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010년 『생존자(The Surrendered)』(나중길 옮김, RHK, 2013) 에서는 한국전쟁에 얽힌 인물들을 통해 전쟁이라는 상처와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죄의식과 자기 학대라는 징벌 양상을 보여주며 폭력과 기억에 대한 웅숭깊은 질문을 던지고, 『만조의 바다 위에서(On Such a Full Sea)』(나동하 옮김, RHK, 2014)를 통해 가상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기도 한다.
  2021년 미국에서 발표되고 2023년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그의 신작은 다시 한번 세대를 경유해 12.5퍼센트라는 한국인의 피와 그 피를 준 엄마의 끝내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을 자신의 결핍이라 믿는 청년 ‘틸러’의 방황과 모험을 그린 장편 서사다.
  한 번 생겨나면 좀처럼 진화될 줄 모르는 불안의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는 틸러는 화학자이자 사업가인 중국계 이민자 ‘퐁’을 만나 곧장 모호하고도 막대한 부와 그에 상응하는 무궁무진한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퐁의 에너지에 이끌린다. 틸러의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늘 선을 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은 그가 퐁에게 빠져드는 이유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것은 불안함과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해서 정체성 찾기와 청년기의 소요라는 혼란의 에너지와 맞물리며 모험 서사의 동인을 구축한다. 격동의 중국 역사 속에서 무참히 쪼개져 버린 가족사를 온몸으로 지나온 자의 고요와 고독이 응축된 묵직한 에너지는 한 청년의 호기심을 중년의 곁에 묶어놓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중국 선전,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의 시간은 표면적으로는 합법적 환각 에너지 드링크를 만들고자 떠난 비즈니스 여행이지만, 그 안에는 무시무시한 자본의 음모가 고대 중국 황제의 욕망을 체현한 영생을 좇는 자산가의 열망과 버무려지고, 원시의 아름다움은 제국-식민주의의 재현과 엉망으로 뒤엉켜 폭력과 노예의 시간으로 수렴된다. 동서양의 온갖 불법과 부조리의 망라와 같은 곳에서 결국 도망쳐 나온 틸러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불안을 안고 사는 그의 대안 가족, 밸과 빅터주니어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정작 불안을 끊어낸 것은 뜻밖에도 밸의 자살 시도와 그것을 중지시킬 수 있었던 퐁에게 선물 받은 주머니칼이었다. 우연은 그렇게 삶을 밖으로 내몰기도 하지만 우리의 ‘지금’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음을 알려주며 그제야 내 삶을 온전히 끌어안게 만들기도 한다.
  완벽한 삶에 대한 환상이 우리의 젊음을, 지금 이 순간을 망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기어이 강박적으로 불안의 발원을 헤집어 보지 않고는 묵살할 수 없는 것이 젊음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창래의 신작이 전작과 결이 다르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건 고요와 안정의 집에서 모른 채 눈 감고 쉬고 싶은 마음과 불안의 머리채를 끝내 잡아채서 그 얼굴을 확인하고자 하는 집요함이 충돌하며 ‘내 집을 찾고 싶어’ 그러나 ‘그렇지 않기도 해’ 식으로, 나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나를 알아가는 한 인간의 끈질긴 정체성 찾기의 다른 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증명으로 나란히 놓일 수 있다.

“당신은 정말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프랭클린 하타. 내가 알았던 누구하고도 달라요.”
―『척하는 삶』, 418쪽.

나는 그게 사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침내 그게 나한테 필요한 시기였다는 걸 알았다.
―『타국에서의 일 년』, 656쪽.

  그의 글쓰기는 점차 희석되어 가는 혈족의 기원 찾기나 성공적인 이민자로의 안착에 몰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쩌면 우리를 영원히 불안하게 하는 본질을 향해 생을 기꺼이 던지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보다 보편성을 획득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민자’라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에 억눌려 정작 고민의 자리를 획득하지 못했던 자아 정체성. 그러나 끝내 지울 수 없는 얼룩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거기에 포개진다. 경계로 밀어붙이고 경계를 넘어서 경계를 초월함으로써 확인하고 싶은 그것은 디아스포라를 괄호쳤을 때 남는 ‘나’에 대한 질문들일 것이다. 방대하고 다양한 서사의 재미도 재미지만 이창래의 소설을 경유하며 건져 올리는 것은 서사를 걷어내고 난 뒤에 남는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모양새의 사유들이다. 그래서 그의 부유라는 여정은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더 많은 세계를 떠돌지도 모르겠다. 이창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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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을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