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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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홍범도』 김세일

김필영

김세일의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항일 민족주의에서 소비에트 국제주의로

김필영(카자흐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장편소설 홍범도』에서 『역사기록소설 홍범도』로

  김세일(1912-2000)1) 의 러시아식 이름은 김 세르게이 표도로비츠(Kim Sergei Fedorovich)이다. 그는 제정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에서 태어나 1932년 소왕령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원동국립출판사에서 번역원으로 종사했다. 1937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 후 김세일은 교사로 근무했고 1945년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소련군에 징모돼 참전 후 평양에 남아 소련군 신문사에서 일했다. 1954년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외국문출판사에서 일하며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김세일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레닌기치》에서 기자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다.
  김세일의 『역사기록소설 홍범도』는 다섯 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1989년에 제1-3권이, 1990년에 제4, 5권이 출판됐다. 이 소설은 1965년 10월 23일부터 1969년 5월 24일까지 《레닌기치》에 연재됐던 『장편소설 홍범도』를 김세일이 《레닌기치》 독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을 참고하여 수정하고 보완한 개정 증보판이다(5권, 321-323쪽). 제1-3권은 《레닌기치》에 연재됐던 『장편소설 홍범도』의 일부를 고친 것이고, 제4권은 자유시 사변을 다룬 것이며, 제5권은 홍범도의 만년 생활에 관한 것이다(5권, 333-334쪽).
  『장편소설 홍범도』의 집필 경위에 따르면(1권, 19-20쪽),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에 거주하던 노혁명가 이인섭이 김세일을 찾아와 ‘홍범도 일지’, 혁명가들의 수기, 노의병들의 회상기 등 중요한 사료들이 포함된 20여 권의 필기장을 주며 그에게 홍범도 장군에 관한 전기나 소설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김세일은 1989년 개정 증보판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역사기록소설 홍범도』로 수정하며, 비록 이 작품이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역사 기록물이란 점을 부각시켰다. 『역사기록소설 홍범도』는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된 홍범도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제5권 말에는 김세일이 필사한 ‘홍범도 일지’ 사본이 첨부됐다.

항일 민족주의자에서 소비에트 국제주의자로

  김세일은 소련 해체를 전후하여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만난 고려인 가운데 유달리 고르바초프를 비난하며 소련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작가였다. 《레닌기치》에 발표된 김세일의 시와 소설 작품들은 대체로 고려인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국제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2) 김세일의 이런 작가 정신은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소비에트 문학에 당성을 강조하던 시기로, 레닌이 주장한 사회적 사실주의가 문학 창작의 근간이 됐다.3)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의 바탕이 된 『장편소설 홍범도』는 1965년 《레닌기치》가 주최한 최초의 문예 현상 모집에서 소설 부문 1등에 당선됐다. 김세일은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에서 홍범도 장군의 성장 과정, 항일 의병 활동과 무장 투쟁,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경험한 자유시 사변과 레닌과의 만남, 이만에서의 농업조합 설립과 경영, 강제 이주 후 크즐오르다에서의 만년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김세일은 소설 창작 과정에서 뛰어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반복된 항일 무장 투쟁 활동에 여성 의병 박영란 등 허구적 요소들을 가미하여 사건을 비교적 흥미롭게 전개했다. 이런 허구적 요소의 일부는 최근에 출간된 홍범도 장군을 다룬 소설에 그대로 차용되기도 했다.4)

  홍범도(1868-1943)는 빈천민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범동이었다. 범동은 일찍이 조선 진위대 나팔수와 제지공장 노동자로서 겪은 모욕과 착취에 살인과 폭행으로 맞서며 불평등한 사회에 반항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저주하며 범동은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고 수행하기 위해 신계사에 출가했다. 지담대사는 범동에게 글과 병서를 가르치며 애국주의를 고취했고 새출발을 결심한 범동의 이름을 범도로 개명했다. 하지만 범도는 “가난한 자들은 중 노릇도 해 먹기 곤란하다는 것”(1권, 93쪽)을 깨닫고 산에서 만난 여승 단양 이 씨와 백년가약을 맺고 환속한 후 뜻밖의 봉변으로 아내와 헤어져 쫓기는 몸이 됐다. 범도는 변복하고 총, 탄약, 장검을 구입한 뒤 산속으로 들어가 지담대사에게서 배운 병법과 군대에서 익힌 전법을 연구하고 사격술과 검술을 연마했다. 홍범도의 의병 활동은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됐다. 홍범도는 골동연 포수들을 결집하여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미쳐 날뛰는 왜놈들과 싸워야 하겠소. 그러자면 우선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개질 하는 일진회 회원놈들부터 없애 버려야”(1권, 156쪽) 한다며 의병대 조직을 결의하고 대장에 천거됐다.
  홍범도 의병대는 필요한 군자금을 친일 세력을 습격하여 마련하거나, 직접 노동해서 벌거나, 조선인 노동자로부터 의연금을 받아서 충당했으며 군자금의 일부는 피난민 구제와 유가족 지원에 사용했다. 김세일이 소설에서 설정한 여성 의병 박영란은 군자금 모금과 작전에 필요한 정보 수집과 연락에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의병대원의 아내와 동지로서 사랑과 투지를 보여준 전형적인 소비에트 여성상이었다. 여성 의병 박영란의 형상은 김세일의 장편 서사시 「새별」(《레닌기치》, 1961년 2월 15일자)의 주인공인 소비에트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홍범도의 의병 활동은 애초부터 그 대상이 왜적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친일 세력을 처단하는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빈천자와 여성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홍범도는 후치령, 천보사골, 한대골, 바배기골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패를 맛봤고, 그 와중에 왜놈의 감옥에서 아내가 목숨을 잃고 왜적과의 전투에서 아들 양순이 전사하는 아픔도 겪었다. 전투 후 그는 늘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전투의 승패에 따른 원인을 분석하며 대책을 세웠고 의병대원들에게 그들이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을 확신케 했으며, 의병대의 승전을 자신의 공로가 아닌 “의병들의 집체적인 계교, 정의로운 투쟁의 승리에 대한 공통한 심신의 승리”(2권, 88쪽)로 돌렸다.
  홍범도는 중령에서 무기 획득이 어렵게 되자 노령 연해주로 밀사를 보내 왕족 이범윤을 통해 무기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어렵게 마련한 군자금 2만 원을 그에게 갈취당했고, 밀사는 여권 불소지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범도가 직접 이범윤을 찾아 해삼위로 갔지만 이범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범윤의 행태에 분개한 소왕령 애국청년들의 모금으로 홍범도는 추풍의 토호 문창범을 통해 재차 무기 구입을 시도했지만 다시 그에게 농락당했다. 홍범도는 “자기들은 조국 강토에서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왜적과 결사전을 하고 있는데 소위 애국 지사라는 량반들은 해외에 나와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고대광실에서 지내며 호의호식하며 사리사욕만 채우고 국권을 회복하기 전부터 정권 쟁탈을 일삼고 있다”(2권, 218쪽)며 울분을 토했고 이범윤과 같은 왕족이나 양반 출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뒤 의병 활동이 날로 어렵게 되고 신해혁명 이후 만주가 마적과 홍의적의 천지가 된 상황에서 홍범도는 이전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지금 형편에서 군자금을 모집한다든지 무기를 구입한다든지 하자면 어쨌든 로령 연해주에 가야만 된다”(3권, 77쪽)며 군인총회를 열어 의병대 일부는 제대시키고 일부는 둔병 형식으로 장백현에 머물며 때를 기다렸다. 이 시기 홍범도는 독립 후 세워질 나라는 문벌을 폐지하고 양반 통치를 없앤 평등한 사회가 구현되는 정치 체제를 갈망했다. 홍범도는 일단 대원 몇 명과 함께 해삼위로 가서 부두 노동자로 취업해 여비를 마련하며 유인석을 찾아가 러시아 당국의 제지로 노령에서 의병 활동이 불가하니 애국 문화계몽 운동에 힘을 쏟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들었다. 홍범도는 일행과 같이 야쿠티야 금광으로 가서 노동하며 그곳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노동상조회가 지원한 군자금으로 무기를 마련하여 1915년 중령 밀산으로 가 때를 기다렸다.

  홍범도의 의병 활동은 조선이 일제에 합병되기 전까지는 항일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을 점령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주의가 강조되었고, 합병 이후에는 침탈당한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한 국제주의가 반영되었다. 홍범도는 조선 의병 활동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홍의병이든, 러시아 빨치산이든, 중국관료보위단이든 모두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켜 황제 정권을 전복시킨 레닌의 신당이 빈천자들의 정권이고 그 정권을 소비에트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홍범도는 “과연 이런 정권이 있단 말인가!? (……) 빈천자의 정권이 세상에 있고 또 로씨야에 그런 정권이 섰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얼마나 좋으랴!”(3권, 116쪽)며 감탄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가 서명한 조선인 해외망명자 회의에 초청장을 받고 홍범도는 그곳에 들러 무산자 정권이며 피압박 민족의 정권인 소비에트를 위해 나선 다민족 적위병들과 소비에트 통제 아래 상점들이 배급 체제를 도입한 것 등을 보고 “망국 출신인 조선 녀자를 외교위원으로 등용하는 이런 참된 인민 정권이오 합동 민족의 정권인 쏘베트 정권을 위하여 나도 목숨 바쳐 싸우련다”(3권, 120쪽)며 소비에트 정권에 관심을 갖고 왕가둔에 남겨둔 의병들을 데려오게 했다.
  타 독립군 부대들이 노령으로 간 것을 확인한 후 홍범도 부대도 독립군이 힘을 합치고 훌륭히 무장하려면 만주에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노령으로 갈 준비를 마치고 부대원들에게 “거기 가서도 왜놈들과 싸울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피압박 민족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쏘베트 붉은 주권이 서 있는 로씨야로 간다는 걸 반드시 알고 있어야”(3권, 275쪽) 함을 강조하며 그곳에서는 왜놈의 총이 필요 없으니 러시아 무기로 재무장할 것임을 설명했다. 홍범도 부대는 일단 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의용군으로 개칭한 뒤 홍범도가 총사령관이 됐고, 이어서 정치적 의도가 다른 군정서와도 연합하여 통의부를 만들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가 임명됐다. 하지만 이만에서 무기를 바치고 자유시로 가려고 기차에 오를 때 김좌진 등은 슬그머니 만주로 도망쳤다. 통의부는 1921년 2월 자유시에 도착해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 소속 조선 빨치산 연합부대인 싸할린특립부대(이하 싸특부대)에 편입되어 자유시 부근 마사노프에 배치됐다. 자유시에 있던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싸특부대 편입을 반대하고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 고려지부를 부추겨 고려혁명군사의회 설립에 가담했다. 고려혁명군 사령관 칼란다리슈빌리가 싸특부대를 고려혁명군에 편입시키토록 명령했으나 싸특부대 지휘관 박일리야가 이를 거부하자 칼란다리슈빌리는 싸특부대의 강제 무장해제를 결정했다.
  추풍에 도착하나 연해주 상황이 복잡한 것을 인지한 홍범도는 다른 독립군 부대와 연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출정하는 왜놈 군대의 주요 교통로이기도 한 만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독립군 부대를 새로 개편하면서 홍범도는 처음으로 ‘동무’란 소비에트 식 호칭을 채택했는데 이는 “우리 볼세위크들은 그 ’동무’란 말에 ‘사회 정치적 평등’이란 의미까지 포함”(3권, 183쪽)시킨다는 김알렉산드라의 말에서 그가 차용한 것이었다. 1920년 만주 일대에 기동하는 일본 출정군을 토벌하기 위해 홍범도는 부대를 무단봉으로 옮겨 봉오골 최진동 부대와 간도 안무 부대 등과 협동 작전을 펴기로 하고 봉오골 전투 총사령관에 임명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오골 전투 후, 청산리로 향하던 서일의 군정서 부대가 일본군과 접전하였했으나 김좌진의 전략 부재로 700명 가운데 50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김좌진과 나머지는 도망쳤다. 다행히 때마침 도착한 홍범도 부대가 지형을 이용한 전술로 기관총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고 대승했다. 만약 홍범도 부대가 그때 청산리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군정서 부대는 전멸했을 것이라며 김세일은 소설에서 여러 차례 김좌진이 도주한 것과 그의 전술 부재를 강조했는데 아마도 그는 이 사실이 역사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봤던 것 같다.
  홍범도는 박일리야의 무력 협박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통의부를 이끌고 고려혁명군에 합류하여 싸특부대의 강제 무장해제를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이미 불가항력이었다. 고려혁명군은 결국 무력으로 싸특부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여 1921년 6월 동족상잔의 자유시 사변이 발생했다. 1921년 9월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전하여 러시아 적군 조선특립여단으로 개편되고 홍범도는 제1대대 대대장에 임명됐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태평양 연안국 혁명가 대회에 홍범도는 연해주와 아무르주 빨치산과 만주에서 넘어온 독립군 대표로 참가했다. 거기서 레닌으로부터 전투 공훈 표창으로 권총, 군용 외투와 모자, 금화 100루블을 받고 자유시 사변에 대해 묻는 그에게 “저는 그 사변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4권, 238쪽)라고 단호히 답변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홍범도는 함께 제대한 전우들과 이만 싸인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조합을 조성한 후 벼농사를 지었고, 1924년 전우들의 주선으로 이인복과 재혼했다. 조합원들이 피땀 흘려 개간한 농토를 구역 관리위원회가 국가 땅이라며 차지하니 다른 곳을 다시 개간해야 하는 폐단을 타개하기 위해 홍범도는 1928년 전우들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했다. 농업조합 내에 당 단체가 생기면서 홍범도는 이런 불이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됐고 연해주 조선인 농촌은 점차 집단화됐다. 1937년 강제 이주 시 홍범도 역시 크즐오르다로 이주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레닌기치》에 기고한 글에서5) 홍범도는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며 조국 소련을 향한 애국심을 보였다.
  홍범도 장군은 항일 무장투쟁과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뛰어난 사격술과 훌륭한 전술로 부대 규모나 무기 체계가 열세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전공을 세워 의병대원들은 물론 조선 인민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그가 피해를 입지 않았던 이유도 소비에트 혁명의 적이었던 원동 지역 일제에 대항해 싸운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홍범도의 형상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영욕이나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만을 위해 일제와 친일 세력에 맞서 싸운 “강인한 의지, 대담한 성격, 너그러운 심정”(3권, 195쪽)을 지닌 인간적인 의병대장이다. 혹자는 소설의 서사 구조의 단순함이나 미적 감각의 결여를 문제 삼을 수도 있으나 김세일이 남긴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의 선구적이고 기념비적인 업적은 이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편향에 대해 시끄러웠다. 홍범도는 애초부터 민족해방 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영도권 장악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의 연합을 꾀하며 고려혁명군에 가담했지만 싸특부대의 강제 무장 해제를 강력히 반대하며 동족 간 싸움을 막으려 했다. 김세일이 소설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홍범도가 나중에 자유시 사변의 피해자인 싸특부대를 비판한 것이나 고려혁명군 법원의 재판 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그가 남긴 부정할 수 없는 오점이다. 굳이 우리가 그를 변명하자면, 소련이 조국이 된 홍범도 장군이 맞닥친 당시 상황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두된 이념 대립의 개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각주

1) 《고려일보》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김세일의 사망 연도를 1999년으로 적고 있고, 필자는 그의 사망 연도를 2001년으로 알고 있었다. 필자가 2023년 3월 김세일의 친손자 김세르게이를 통해 김세일이 2000년 7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2) Phil KIM(김필영), “Korean Nationalism and Soviet Internationalism”(고려인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국제주의) ”,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8, Central Asian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2006, pp. 5-31.

3) 김필영,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 강남대출판부, 2004, 184-186쪽.

4) 방현석, 『범도 1, 2』, 문학동네, 2023. 여성 의병 박영란을 차용한 백무아의 형상과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박영란은 실존 인물이 아니고 김알렉산드라는 실존 인물이지만 홍범도 장군이 만난 적이 없다.

5) 이전 빠르찌산 - 홍범도, 「원쑤를 갚다」, 《레닌의 긔치》, 1941년 11월 7일자.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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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 출생으로 프랑스 국적의 재외동포이다. 파리대학교에서 원동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국립동방언어문명대학교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자흐국립대학교와 국립동방언어문명대학교에서 한국학 교수를 역임한 후 강남대학교에서 중앙아시아학 교수로 정년퇴직했다. 카자흐국립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