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K-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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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K-문화

실패를 예감하는 디아스포라 리코딩

백이원

독립 다큐멘터리 「더 한복판으로」 제작 노트

  머리 위로 또 한 대의 전철이 지나간다. JR 노선을 천장으로 받치고 있는 탓에 이 작은 가게에서는 전철의 배차 간격을 진동과 소음으로 알아챌 수 있다. 곧 돌아오겠다던 감독은 카메라만 뻗쳐 놓고 나가서는 영 소식이 없다. 그사이 나는 훈연되고 있었다. 달궈진 숯불 위로 지글대는 호르몬1)들과 함께.

  “아이고, 다이조부?(아이고, 괜찮아?)”

  이 가게의 주인장이 묻는다. ‘양희’라는 한국 이름이 있지만 모두 ‘모리야’ 언니라고 불렀다. 모리야는 시어머니가 하던 노점을 이어받은 양희 언니가 이곳 츠루하시역 굴다리에 만든 호르몬 가게의 이름이다.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난 언니는 모국어가 일본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아이고, 아이고’ 거렸다. 어떤 아이고는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아이고는 반가운 손님이 왔다는 것이고, 내게 건넨 아이고는 괜찮냐는 물음이었다. 내가 프로듀서로 합류하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나를 이곳 모리야로 불러냈다. 의아했다. 서둘러 참관해야 할 촬영이 왜 오사카 지방법원이 아닌 호르몬 가게인가 싶던 것이다. 제작 중인 영화가 재판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이다. 그날 카메라에는 천장을 울리는 진동과 호르몬 구이가 내뿜는 하얀 연기만이 리코딩되었다. 2015년 2월, 오소영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더 한복판으로(The Hanbok on the Court)」2)의 첫 촬영 날이었다.

  다큐멘터리 「더 한복판으로」가 첫 관객을 만난 건 2020년 가을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한국 경쟁작으로 초청되면서다. 첫 촬영부터 관객을 만나기까지 5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 영화가 해외(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100퍼센트 가져가야 했던 사정과 상업영화와 달리 투자를 받아 제작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작 기간이 긴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앞서 잠깐 언급했듯 「더 한복판으로」가 일본 오사카에서 4년 6개월간 지속된 하나의 재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이신혜 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5세3)로, 일본 내 재일동포 사회와 재일동포 여성인 자신에게 가해지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개인으로선 일본 최초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일본 우익 단체 ‘재특회’와 극우 커뮤니티 사이트 ‘보수속보’다. 재특회가 주도하는 헤이트 스피치 시위는 도쿄, 오사카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대되며 재일동포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었고, 이신혜 씨의 사진과 개인정보는 보수속보라는 웹 사이트에 공유되며 온갖 조리돌림과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왜 이신혜 씨였을까? 저널리스트인 그가 일본 내에서 일상화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를 비판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썼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두 우익 단체는 자기주장을 펼치는 이신혜를 집중 공격의 대상으로 특정하고 온오프라인을 망라하며 괴롭혔다. 이신혜 씨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배경이다. 감독은 이신혜 씨의 재판을 통해 일본 내 헤이트 스피치가 민족차별을 넘어 여성 혐오 문제를 내재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재일동포 여성의 시각으로 헤이트 스피치 문제를 풀어보고자 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이신혜 씨를 비롯해 다수의 재일동포 여성들이 나온다. 실제로 이신혜 씨 곁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고, 그가 소개하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서는 어떤 측면으로든 반쪽짜리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재판을 따라가는 동시에 재일동포 여성들의 삶을 함께 조망해 보고자 한 것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하며 가장 경계했던 점은 혐일 감정이다. 일본 내에서 이루어지는 헤이트 스피치가 한국 사회에서는 ‘혐한 시위’로 쉽게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 중에 조금이라도 이 영화가 한국 관객들의 민족의식을 섣불리 건드려 혐일 감정을 일으킨다면 제작에 5년이 걸렸든 10년이 들었든 개봉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일찍이 판단했다. 헤이트 스피치는 다만 일본에만 있는 혐오 시위가 아니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만연해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페미니스트, 퀴어, 재난 생존자와 유족, 이주노동자, 난민 등 헤이트 스피치 대상도 다양하다. 실제로 제작진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헤이트 스피치를 직접 촬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정된 러닝타임 탓에 일본 촬영분 위주로 추리다 보니 해당 촬영분이 편집 과정에서 빠졌고 이 부분은 감독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점으로 남았다. 「더 한복판으로」는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응하는 방식이 혐일 감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제작되었다. 따라서 영화는 재판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으로 일본 사회라는 하나의 구조에서 재일동포와 여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담담히 보여주는 동시에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며 응원하는 재일동포 여성들의 삶, 그리고 이신혜 씨의 재판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들의 연대를 영화의 또 다른 큰 줄기로 가져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모리야’다. 촬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작은 호르몬 가게가 왜 중요한 곳인지 깨달았다. 헤이트 스피치 시위가 있던 날이나 재판을 앞둔 날이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모였다. 모리야 언니가 잰 손길로 호르몬을 구워주면 사람들은 김치 한 접시를 곁들여 하이볼을 들이킨다. 한 잔의 술이 부르는 이야기에는 국적도, 국경도 없다. 조선 무용가 강휘선 선생이 평양 공연을 추억하고 민족학급 강사 양천하자 씨는 한글 교육에 대해 고민한다. 재특회를 상대하느라 땀을 빼고 온 카와카미 씨와 재판을 응원하러 부러 먼 길을 달려온 카오리 씨도 있다. 모리야는 오사카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지탱해 주는 애환의 장소였고, 시어머니의 노점을 이어온 가게의 역사가 그렇듯 재일동포 여성들이 100년에 달하는 세월을 버텨내고 지켜온 삶의 터전이었다. 나 스스로 디아스포라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발동하는 자격지심과 언제고 맞닥뜨리게 됐던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게 해준 것도 모리야에 모인 언니들이다. 서울에서 카메라 한 대만 덜렁 들고 온 내게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춤을 추는 것으로, 때로는 눈물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의 인내와 지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 한복판으로」으로부터 벌써 멀리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2020년 완성된 「더 한복판으로」는 이후 서울여성독립영화제, 한국여성인권영화제, 디아스포라영화제, 제주여성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국내 관객을 만났다. 일본에서는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경쟁작 부문에 초청되었다.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늘 관객이 고프다. 영화제가 아니고서는 (그것도 초청을 받지 않고서는) 관객을 직접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소영 감독과 나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상영회라도 자리만 있다면 「더 한복판으로」를 들고 직접 찾아갔다. 도쿄, 오사카, 이와테, 그리고 나가노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그중에서도 나가노 상영회는 도심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진행됐다. 마을의 예술극장을 대관했는데 사실 말이 극장이지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으로 최대로 받을 수 있는 관객이 9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극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한복판으로」를 총 8회 상영했고, 영화를 보러 온 총관객의 수는 55명이었다. 무려 두 번의 회차는 만석이었다. 관리자가 말하길 운신이 어려운 사람을 뺀 마을의 모든 사람이 보러 온 숫자란다. 창피하게도 그날 감독이 울었다. 흥행에 성공한 것에 감격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작은 마을인지라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온 이웃을 알아봤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의 불이 켜지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그 사람이 앞으로 나와 감독을 끌어안고 울며 말했다.

  “츠루하시, 라츠카시카타 아리가토!(鶴橋、懐かしかった! ありがとう!)(츠루하시가 너무 그리웠어! 고마워!)”

  52년 전 오사카에서 나가노로 도망쳐 온 여자는 이제 등이 굽은 노인이 되었다. 차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연을 갖고 오사카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와의 연락도 끊었다. 52년, 재일동포인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으려 숨죽여 살았던 그 신산한 세월이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둑 터지듯 터져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오늘 집에 돌아가 오사카 츠루하시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볼 것이라는 노인의 말에 감독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독립 다큐멘터리 「더 한복판으로」가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 그래서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평가는 오직 관객의 몫이다. 독립 다큐멘터리가 마이너한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계의 감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더 한복판으로」가 극장 개봉까지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평가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더 한복판으로」가 실패작으로 남아 데이터 무덤 속에 갇히게 된다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오히려 끊임없이 실패하더라도 재일동포를 다룬 영화는 더 많이 더 자주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 몇백 배는 더, 이제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냐 싶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으면 한다. 그게 누구라도 재일동포들의 삶 한복판으로 들어가 「더 한복판으로」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넘치게 담아왔으면 한다.

  요즘 나는 또 다른 실패를 감지하며 서울 한복판에 있는 작은 텃밭을 관찰하고 있다. 그 텃밭에서는 일본 식물인 시소가 자란다. 보기에는 한국의 깻잎과 비슷하지만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식물이다. 시소의 주인은 한국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3세 김리카 씨다. 도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에게 시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시소가 자랄수록 리카 씨의 생각도 자라난다. 자신이 왜 한국에서 살아가기로 한 것인지, 시소의 맛은 왜 그리워지는 건지, 자신에게 고향은 무엇인지. 김리카 씨는 결국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응시해 보기로 했다. 나는 「더 한복판으로」에서 그랬듯 김리카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이방인의 텃밭」을 제작하는 데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영화는 올해 가을에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나 역시 또 하나의 제작노트를 작성하게 될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관객을 그리워하고 부족한 제작비를 메우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이고, 괜찮다.”

  아이고, 하고 곡소리는 좀 하겠지만 또 하나의 재일동포 영화가 나왔으니 괜찮다. 분명, 괜찮을 것이다.



각주

1) 호르몬(ホルモン): 곱창 등의 소나 돼지의 부속물을 일컫는다.

2) 오소영, 「더 한복판으로(The Hanbok on the Court)」, 시네마 달, 2020.

3) 재일동포 1세인 아버지와 2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신혜는 스스로를 재일동포 2.5세라 소개한다.

4) 원고로 법정에 나온 ‘재특회’의 사쿠라이 마코토는 이신혜를 특정해 공격한 이유에 대해 “남자보다는 여자가 좋지 않으냐”고 발언했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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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독립 다큐멘터리 〈더 한복판으로〉를 구성 및 프로듀싱을 했고, KBS 다큐멘터리 〈다큐공감〉, tvN 다큐멘터리 〈휴먼크로니클〉, JCN 다큐멘터리 〈경상지오그래피〉 등에 참여했다. 현재 독립 다큐멘터리 〈이방인의 텃밭〉을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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