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7호
박탈된 존엄과 추방당한 정체성
조춘희
탈북시를 사유하는 한 방식
벌써 십여 년 전, 조해진의 소설에서 ‘처음’ 만난 ‘로기완’은 낯설었다. 실제 인물이 아님에도 그가, 브뤼셀을 떠나 영국 어딘가에 라이카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믿음이 생겼으며, 또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었다. 살다가 문득 그리워지는 유년기의 벗처럼, 혹은 기억 너머에 두고 온 아득한 추억의 편린처럼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고는 했다. 때로는 그가 이국의 고아원 구석진 자리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마른 울음으로 통곡하고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소설에서 만난 그를, 이후에도 상념과 환영으로 종종 불러냈다. 소설 속 김 작가가 그러했듯이,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1) 그러나 이방인의 감수성에 공감하기 위해 애쓰는 김 작가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로기완은 소설 밖으로 나와 실재가 되었다. 로기완을 만나고 몇 해가 지난 후, ‘백이무’의 시를 만났다.2) 현실 어딘가에 실존하는 백이무 시인의 존재는 소설 속 로기완의 좌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구적 인물로서의 로기완과 실존하는 시인의 좌표가 중첩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자신의 정체와 그 실존함을 밝힐 수 없는 존재라는 데서 백이무는, 로기완이 된다. 허구적 인물이지만 실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반대로 실재하지만 자기 은폐가 불가피한 존재의 허구적 인물-되기에 동조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로기완과 백이무는 필자의 세계에서 동의어로 인식되어 왔다. 이들 존재가 좌정한 비-존재적 좌표는 비국민이자 무국적자로서의 위태로운 정체성을 증거하며, 국적성으로 무장한 국민 내부자로서는 이들과 끝끝내 공감 불능의 좌표에 대치해 있음을 재독케 했다.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는, 개별적 존엄성과 이름이라는 정체성이 박탈된 그들을 우리는 손쉽게 ‘탈북민(북한이탈주민)’이라는 집단성으로 규정해 왔다. 이들 탈북민은 실체가 모호한 존재, 혹은 스스로 유령화-되기를 선택한 비존재들로 호명된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북한 사회에 대한 보도나 재현은 정치 담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그곳 주민들의 존재적 고유성이나 삶의 개성은 소거된 채 전파되는 탓에 추상적 이해에 그친다. 상황이 이러하니 혹여 탈북민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교만이요, 오만의 소지가 있다. 솔직히 오늘을 살아가는 국적성 내부의 우리는 탈북민뿐 아니라 무수한 타자들에 무관심하다. 그러니 탈북민에 대한 공감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관심과 더불어 특정 집단에의 차별과 혐오를 뚫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세계 질서는 초국적 이동성을 보장한다. 그럼에도 햇수로 분단 80년이 된 남북은 여전히 이념의 벽을 높이고 있다. 지척에 있어도 갈 수 없는 영토라는 표상은 남북의 고립과 대립을 강화할 뿐이다. 단절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공동의 역사를 기억할 경험적 주체, 즉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산을 경험한 세대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단절의 감각마저 통각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안타깝게도 통약불가능한 좌표에 팽팽하게 대치한 채 긴장감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지속가능한 어떤 유의미한 교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 로기완‘들’이나 백이무‘들’을 환기하는 상상적 소통이나마 절실하다. 물론 개별성이 삭제된 채 탈북민이라는 집단성으로 호명되는 한계가 있지만, 이들이 처한 난민적 정체성을 사유함으로써 공감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때 “냉전의 산물인 동시에 북한 전체주의의 현재를 증험”3) 하는 탈북민이라는 좌표는 존엄한 개인을 소거하고 이들을 경계해야 할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극복해야 할 정체성의 요건으로 수렴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탈북시4)를 탐사하는 일은 이들을 다시 개별적 고유성으로 발견하는 작업과 닿아 있다. 탈북의 감수성을 형상하는 탈북민의 경험적 시편은 시적인 것의 발화이자 증언이다. 즉 이들의 목소리는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언어인 동시에 탈북민의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데 입각한다. 재북과 탈북 경험을 발화하는 탈북 작가들의 시를 통해 유령으로 떠도는 로기완과 백이무들의 안부를 묻고자 한다. 도처의 당신들, 안녕하신지요?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북한은 금기의 장소로 규정된다. 반공과 통일 담론을 동시에 학습-당한 세대에게 북한은 명확한 실체이기보다 독재 체제가 표상하는 상상적 공포로 인식되어 왔다. 가령 반공 담론의 세뇌는 북한 주민을 괴물의 형상으로 상상하게 했으며, 이들을 향한 적대화는 공포를 조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폭력적 혐오를 심화했다. 돌이켜보면 소련의 해체(1991)와 동구권의 몰락, 그리고 김일성의 죽음(1994)으로 이어지는 1990년대 초반에는 이러한 공포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공존했었다.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통일의 필연성이 공생했던 모순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남한은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 체제를 강화했으며, 북한은 김정일 세습으로 정권 안정을 꾀했지만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세계적 고립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한 경제난과 자연재해가 중첩되었다. 오늘날 북한 사회에 대한 주요 이미지는 소위 고난의 행군기(1994-1999)라 불리는 당시의 기아와 아사 실태에서 조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밧줄을 감을 자리가 있었더냐/ 아가의 빼빼 마른 몸에/ 수갑이 채워지더냐/ 거밋발같이 가느다란 두 손목에// 열한 살이라고는 하지만/ 너의 키는 일곱 살에 머물러 있었고/ 너의 몸은 살이 없어/ 삭정이처럼 바삭이 말라있었다// 한줌같은 너의 작은 몸을/ 구렁이같은 밧줄로 휘감고/ 총탄을 박아넣은 원수들아// 그 자들은 네가/ 살인을 했다고만 믿는다/ 그 자들은 모른다/ 굶어 죽어가는 자의 정신이/ 과연 어떤지/ 네가 왜 그 짓을 했는지// 그 자들은 먼저 굶어죽은/ 너의 부모동생 생각해본 적 없다/ 배고픔에 시달려 11년을 살아온/ 너의 분노 헤아려 본 적 없다// 고작 11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난이 고문한 혹독한 굶주림/ 그것의 몸부림 때문에 더는 더는 달랠 길이 없어/ 끝내 너의 뇌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굶음으로/ 죽음으로/ 끝내 부서져버린 아가야/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명(命)/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한(恨)이라도 남기지 않을 걸/ 너의 죄는 그 땅에 태어난 죄다
―김수진, 「어린 사형수야」 전문5)
”
굶주림과 아사, 그리고 그로 인한 참담한 비극에 대한 탈북 작가들의 기록은 전술한 1990년대 중후반의 경험에서 기인하며, 이들 시편은 탈북시의 주제 유형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열한 살이”지만 고작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육체를 통해 “어린 사형수”의 “살인”이 “그 땅에 태어난 죄”로 인한 “혹독한 굶주림”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스무 살 로기완이 “159쎈티미터의 단신, 47킬로그램의 마른 몸”6) 탓에 어린아이로 오인해 고아원으로 보내졌듯이, 또한 동생의 “키는 158센티미터, 몸무게는 36키로그램의 강영실(영양실조)”7) 이었다는 이가연 시인의 회고에서도, 굶주림은 이들의 육체적‧“정신”적 발육 부진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때 김수진의 시적 발화 방식이나 주제 유형은 백이무의 시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특히 부언을 부기함으로써 시의 목적을 “증언이나 고발의 르포르타주의 좌표”8) 에 위치시킨다. 알다시피 이를 통해 사건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강화하고 북한의 실태와 그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복무한다.
김수진은 시 「꽃 같은 마음씨」9) 에서 굶주린 부부가 “죽 한 공기”를 두고 서로 양보하다가 “늙은 꽃제비”의 “배고픔”에 “죽그릇”을 나누는 마음을 “가난 속에서도 타버리지 않는/ 꽃 같은 마음씨”라고 말하거나, 「꽃제비 아이들의 의리(義理)」에서도 “옥수수 한 이삭”이나 “시래기 한 조각도” “서로에게 베”푸는 꽃제비 아이들에게서 “죽음 속에서도 살아남은” “의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대다수 탈북 작가들의 시편에서 굶주림은 범죄나 죽음, 반인륜적 선택들로 귀결된다. 예컨대 백이무의 시에서는 굶주림이 야기한 보다 잔혹한 실상을 형상한다. 시 「최후의 몸부림」10) 에서는 “앞마을 굶어죽은 늙은이와/ 뒷마을 얼어 죽은 늙은이를/ 서로 바꿔치기 해 먹었다는 이야기”나 “웃집의 굶어죽은 애기와/ 아랫집 앓아 죽은 애기를/ 역시 맞바꾸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먹어야 사는/ 그 처절한 최후의 몸부림” 곧 “더는 사람이 아”닌 인륜을 저버린 “인육이야기”에서 생존 자체가 스스로의 존엄을 위반하는 비극적인 서사를 다룬 바 있다. 결국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되레 “죽음이 곧 해방이”(백이무, 「해방」)라는 좌절로 귀결되는, ‘살아남음’의 혹독함을 목격하게 된다.
“
오늘은 또/ 뭘 자기비판해야 하노/ 죄진 일 없어도/ 죄를 무덤처럼 쌓아야 하는 모임/ 새벽부터 마음이 불편하오/ 그 놈의 주(週)생활총화 때문에// 또 누구를 꼬집어/ 죄를 만들어야 하노/ 죄 없는 죄 만들어서라도/ 남을 꼭 꼬집어야 하니/ 네 마음 내 마음 다 불편하오/ 그 놈의 호상비판 때문에// 장작 패듯 나를 실컷 두드리다가/ 남도 실컷 물어뜯어야 하니/ 너도 나를 배신/ 나도 너를 배신/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고/ 미워하는 마음만 쌓이게 하니/ 배신만을 만드는 세상 ―김수진, 「생활총화」 부분11)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스파이단은 제도적으로 아이들을 소야만인으로 개조해 당의 강령에 조금이라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12) 오세아니아는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증오를 세뇌하고 서로를 향한 염탐과 고발을 일상화한다. 마찬가지로 “굶으면서도 만세를” 강요했던 독재 체제는 “더러운 정신병 바이러스”(김수진, 「세뇌(洗腦)」)를 세뇌했다. 시 「생활총화」에서도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북한 체제의 폭력성이 잘 드러난다. “죄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장작 패듯 나를 실컷 두드리”고 “남도 실컷 물어뜯”는 상호 감시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서로를 “배신”하게 만든다. “생활총화”의 원리는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고/ 미워하는 마음만” 축적해 종국에는 타자와 자신마저 배신하게 만듦으로써 개별적 존엄성을 박탈하는 데 있다. 이처럼 굶주림과 독재 체제는 존재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자유를 말하는 내 입술이 지지리도 어색하다”(도명학, 「결박된 자유」)는 도명학 시인의 고백에서 억압되고 통제된 자유에 대한 감수성이 드러나며, “탈출, 방랑, 수감, 치욕, 죄인, 죽음”이라는 단어 대신 “따스함, 온정, 사랑, 풍요”와 같은 “단어들과 친숙”하고 싶고, “독재가 없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송시연, 「진정 사람」)는 간절한 바람에서는 그간 탈북민들이 “자신을 굴종에 유기”하는 “독재의 사슬에” “세뇌”되어 있었음을 독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탈북시의 언어는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송시연, 「세뇌」)의 분노이며, 절박한 증언이다.
탈북민은 굶주림과 억압의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북을 결행한다. 이는 북송이나 죽음과 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존엄성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가 된다. 국경을 이탈한다는 것은 ‘국민-아닌-(비)존재’로 정위하게 된다는 의미이며, 허상으로나마 소속되었던 기왕의 정체성을 횡단한다는 뜻이다. 무국적자-되기는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박탈함으로써 세계 속 유령으로 자신의 좌표를 재구상하는 일이다. 이때 탈북은 자발적인 탈주로 보이지만, 실상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결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탈출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안정적인 재영토화 또한 기대하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자신을 불확정성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그렇기에 탈국경은 탈정체성과 무정체성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며, 이름-없음 혹은 이름의 은폐와 삭제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한다. 그럼에도 폭력과 착취의 영토로부터 자기-추방과 자기-박탈을 감행하는 것은 살아남기, 그리고 제대로 실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표출로 볼 수 있다.
“
속이 가득 앉은 하얀 김장 배추와/ 빨갛게 고추로 물든 양념감을 보니/ 또 가슴이 알알해 납니다/ 저 북에서 사시는 어머님/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친구들/ 김장독을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소금이 부족해 바닷물 길어다/ 배추포기 아닌 퍼런 겉잎을 절구어/ 고춧가루 양념은 생각도 못하고/ 허연 배추를 그대로 김치라 부르는 사람들// 올해 김장은 어떻게 하냐고/ 윗동네 북한에다 소리쳐 물었어요/ 마주 오는 대답은 또 슬퍼요/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울먹이며 하소연이 날아왔어요 ―김수진, 「김장을 담그며」 부분13)
”
시 「김장을 담그며」는 탈북시의 유형화를 탈피하고, 시적 화자의 서정적 목소리를 인상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탈북 작가의 경험적 감수성이 서정적인 시적 발화로 구상된 수작이라는 점에서 탈북시가 지향해야 할 일 방향을 제시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속이 가득 앉은 하얀 김장 배추와/ 빨갛게 고추로 물든 양념감을 보니” 문득 “저 북에서 사시는 어머님/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친구들”은 “김장독을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염려스럽다. “올해 김장은 어떻게 하”는지 굶주림은 나아졌는지, 세세한 사연들과 안부 또한 궁금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조국”은 독재로 점철된 “거짓”의 영토였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고향”(김수진, 「내가 사랑했던 조국」)이기에, “아픈 고향을 두고 떠나온 슬픔”이며 “그리움”(김수진, 「그리움」)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탈북민은 북한 체제로부터 자기-추방을 감행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움의 무게는 재영토화한 정체성을 위태롭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그리움은 혼자 떠나왔다는 죄책감을 가중한다는 점에서 탈북민의 정신적 외상을 심화시킨다. 가령 지현아는 “나 살기 급급하여/ 고사리 같은 너희들의 손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 후회”된다고 고백한다. “너희들의 신음소리 요란한 그곳을/ 뒤로하고/ 자유를 쫓아왔”다는 죄책감에서 이제야 겨우 “누려보는 자유”(지현아, 「미안하다, 얘들아」)지만 이마저도 온전히 향유할 수 없는 탈북민의 처지와 그 심사를 착목하게 된다.
“
주춤하지 말아라/ 네가 살아온 세상은/ 언어를 그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거기에는 단 한 사람의 언어만 있기에/ 죽음 같은 침묵만이 역사를 그렸다// 주춤하지 말아라 붓아/ 골고루 외쳐라 빠짐없이/ 침묵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 이천삼백만의 애절한 외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아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목숨같이 다독여주라// 붓아 무디어지지 말라/ 더 날카로와지라/ 더 용기 있게 파헤치라/ 진실의 무덤을/ 그 목소리/ 통일에 보태지게 ―김수진, 「붓아 무디어지지 말라」 부분14)
”
끝으로 이 시는 탈북 작가의 사명을 상기시킨다. “주춤하지 말아라 붓아/ 골고루 외쳐라 빠짐없이/ 침묵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 이천삼백만의 애절한 외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아라”는 다짐은 생존자인 탈북 작가에게 공통으로 독해되는 책무이다. 독재자의 “언어만” 허용되었던 세상에는 “죽음 같은 침묵만” 있을 뿐, 각자의 목소리로 발화할 “언어를 그릴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존재, 언어를 박탈당한 존재들의 사투를 기억하고 “진실”을 “더 날카롭게” “더 용기 있게 파헤치라”는 명령은 억압당한 존재들의 분노이다. 때문에 탈북시는 작가 “혼자서 쓴” 시가 아니라 “독재의 칼에 맞아 굶주리며 스러져 가는 북한 인민들이 함께 목 놓아 울며 쓴 글이”15)다. 이런 측면에서 탈북시는 증언 문학을 지향한다. 즉, 탈북시의 목적은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고 독재 체제를 고발함으로써 인권 유린의 참혹함으로부터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는 데 있다. 탈북시는 북한 사회의 실태를 고발하고 탈북민의 고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계기를 제공한다. 더불어 “꽃제비의 소원은/ 언제나 텅 빈손을 내밀어/ 남에게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손 가득 무엇인가 듬뿍 쥐여/ 언젠가 남에게 주고 싶”(백이무, 「꽃제비의 소원」)다는 바람처럼, 탈북민은 일방적인 수혜만을 기대하지 않는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 정위하기를 희망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월경은 그간 자신을 규정해 온 국적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스스로 무국적자-되기를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재국민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실존적 혼란이 불가피하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님의 선택 때문에 태어난 고향이 북한이라는 죄 아닌 죄로”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이수빈 작가의 토로에서 한국에서의 정체성 역시 위태롭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완전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16)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이식-되기의 고단함과 분투가 드러난다. 이방인의 내국인-되기는 국적성 내부자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동일화를 위한 부단한 투쟁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이미 차별적이다. 적어도 탈북은 생래적으로 주어진 국적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능동적 투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갈무리하면, 트랜스내셔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이산과 이주를 선택한다. 예컨대 자발적 이민의 경우 자신의 국적성을 기반으로 합법적 이동을 감행하는데, 이는 자유의지에 기인한 능동적 지향의 일환이다. 그러나 대다수 탈북민들의 월경은 경제적 궁핍과 독재 체제로부터의 도피라는 점에서 생존적‧제도적 차원의 자기-추방의 성격을 띤다. 험로를 이겨내야 하는 ‘아주 심기’를 위한 여정은 녹록지 않지만 자신의 재영토화를 발굴하고 개척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투쟁이다. 소설 속 로기완에게로 돌아가서, 그는 어렵게 획득한 난민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불법체류자-되기를 선택한다. 그간 구상되어 온 무국적 난민에 대한 상상이 일종의 시혜적 관계로 정형화되었다면, 로기완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위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무국적자로서의 좌표를 제시한다. 국적성에 부합하는 지위를 버리고, 실존의 근거를 스스로 규정하는 적극적 난민-되기는 국적성과 무국적성을 정의해 온 기왕의 논리를 균열한다. 이처럼 아주 심기는 국적성의 획득만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외려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자발적 결정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영토에서의 정주 요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힘겹게 탈북에 성공해 대한민국 국적성을 획득했지만, 다시 탈남하는 탈북민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탈북민에게 한국이 최종 정착지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은 탈북자 정책과 우리 안의 차별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탈북민의 정착 지원금을 현실화하고, 심리적 안정과 새로운 연대를 희망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창구가 필요하다. 탈북민이 낯선 이방인의 좌표에 고립되지 않도록 내국인과 일상을 교류할 수 있는 생활 환경의 변화 또한 모색해야 한다. 이처럼 정착 지원 정책의 다각화와 재국민화를 위한 제반 환경이 공생과 공존을 지향한다면 낯섦이 야기하는 차별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탈북문학의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문학의 국적성이 제기하는 탈북문학의 위상에 대한 검토 또한 필요하다. 서경식은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윤동주 문학의 국적성을 예로 들면서 한국문학의 범주에 대해 성찰한 바 있다. 그는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의 문학을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할 수 없기에, “근대 이후 조선 민족의 경험에 뿌리내린 문학”을 통칭하여 “‘민족 문학’”으로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보편성’을 특정 국가에 묶어둘 수는 없”17)기에 국적성으로 문학의 귀속을 규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재북 작가 ‘반디’18)의 위상이나, 제3국에 스스로를 은닉한 백이무 시인의 존재를 통해서도 국적성에 근거한 일국 문학사의 한계를 독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탈북문학을 한국문학의 범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이견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탈북문학의 국적성에 대한 논의가 기왕의 문학/문단 헤게모니에서 규정되고 차별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민족이라는 공통성은 남북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동일성의 요건에서 탈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은 유일하게 이념적 분열을 이겨낸 정체성의 요건이다. 한글이 보증하는 언어 정체성은 우리의 짐작보다 강력하다. 역설적이게도 『1984』에서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조형되는 신어 정책은 언어에 투사된 동질화의 원리를 간취하게 한다. 즉 “신어의 고안 목적은 영사의 신봉자들에게 걸맞은 세계관과 정신 습관에 대한 표현 수단을 제공함과 동시에 영사 이외의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19) 낱말을 없애 사고를 제한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억제함으로써 언어는 명령을 하달하는 통치 수단으로만 기능하게 된다. 언어 표현의 다양성이 억압된다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개성과 존엄성 또한 박탈된다는 의미이다. 이때 한글이라는 언어 정체성이 남북민을 잇는 소통과 공감의 매개가 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며, 남북의 생산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요건이라는 데 있어서도 긴요하다. 다만 이러한 언어 정체성이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이북 방언에 내재한 개성은 탈북민의 실존적 존엄을 증거함에도, 탈북민이 문화어나 이북 방언을 삭제하고 표준어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생래적 언어에 투사된 고유한 정체성을 외면한다는 의미이기에 안타깝다. 서정은 언어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만큼 탈북시에서 이북의 언어미학을 추구하는 것 역시 긍정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창비, 2011, 7쪽.
2) 백이무 시인은 두 권의 시집 『꽃제비의 소원』(글마당, 2013)과 『이 나라에도 이제 봄이 오려는가』(글마당, 2013)에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기 북한의 기아 실태와 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춘희, 「탈북난민과 증언으로서의 서정」, 《배달말》 64, 2019, 340-379쪽 참고.
3) 조춘희, 「동아시아 이주와 탈북난민」,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기획, 『동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54쪽.
4) 탈북시는 ① (작가의 소속 및 국적성 무관) 탈북을 소재로 다룬 작품, ② (소재 무관) 탈북민이 쓴 시, 그리고 ③ (탈북 작가) 탈북 경험을 형상한 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경우에 국한하고자 한다. 이 글의 논의는 2000년대 이후 발간된 탈북 작가의 시집을 망라했으며, 시 전문 인용은 주제 형상화와 시적 미학이 돋보이는 김수진의 작품에서 선정했다.
5) 김수진, 『天國을 찾지 마시라 국민이여 우리의 대한민국이 天國이다』, 조갑제닷컴, 2015, 31-32쪽. 해당 시에는 “옥수수 5킬로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열한 살 꽃제비 소녀를 총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로 시작하는 장황한 부언이 붙어 있다. 이는 해당 시적 발화가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보다 이를 야기하고 방조하는 굶주림의 실상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6) 조해진, 같은 책, 9쪽.
7) 이가연, 『엄마를 기다리며 밥을 짓는다』, 시산맥사, 2015, 107쪽.
8) 조춘희, 「탈북난민과 증언으로서의 서정」, 359쪽.
9) 김수진, 『꽃 같은 마음씨』, 조갑제닷컴, 2016, 38쪽.
10) 백이무, 「최후의 몸부림」, 김성민 외, 『엄마 발 내 발』, 예옥, 2018, 68-70쪽. 이 글에서 시의 출처를 별도로 밝히지 않은 인용 시는 해당 시선집에서 발췌했다.
11) 김수진, 앞의 책, 71-72쪽.
12) 조지 오웰, 정회성 옮김, 『1984』, 민음사, 2003, 39쪽.
13) 김수진, 앞의 책, 95-96쪽.
14) 김수진, 『天國을 찾지 마시라 국민이여 우리의 대한민국이 天國이다』, 155-156쪽.
15) 김수진, 「황당한 북한 이야기」, 『꽃 같은 마음씨』, 127쪽.
16) 이수빈, 『힐링 러브』, 북마크, 2012, 17쪽; 14쪽.
17) 서경식, 서은혜 옮김, 『시의 힘』, 현암사, 2015, 160쪽; 161쪽; 164쪽.
18) 재북 작가 ‘반디’의 출현은 실존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인 북한 사회 내부에도 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움을 야기했다. 국경 밖으로 반출된 그의 작품(소설집 『고발』(다산북스, 2017)과 시집 『붉은 세월』(조갑제닷컴, 2018))은 발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바 있으며, 그의 존재만으로도 재북의 좌표에 대해 탐구하는 계기가 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19) 조지 오웰, 앞의 책, 414쪽.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2014년 《시조시학》을 통해 평론으로 등단했다. 평론집으로는 『봉인된 서정의 시간』(2015), 『시적 정의와 시조 비평의 정체성』(2020)이 있으며, 공저로는 『동아시아의 어제와 오늘』(2021), 『호모 미그란스, 공존불가능성을 횡단하는 난민/이민 서사』(2022) 등이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