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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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김소운, 경계인의 문학적 여정

박현수


▲ 김소운 시인 © 국립한국문학관 소장 및 제공



  일본의 저명한 미학자인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는 해방 이전에 문학청년으로서 한국의 어느 번역 시집에서 이장희의 「봄철의 바다」라는 시를 인상적으로 읽고 거기에 배의 기적소리를 “VO-”라고 표현한 것을 자신의 시에 차용한 적이 있으며, 또한 이 시집을 통해 한용운, 유치환, 이육사, 백석 등의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가 말한 번역 시집은 바로 김소운의 『조선시집(朝鮮詩集)』이다.
  『조선시집』(1943)은 김소운(金素雲, 1908-1981)이 한국의 대표적인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에서 발간한 두 권짜리 역시집이다. 자신의 일역 시집 『젖빛 구름(乳色の雲)』(1940)의 증보판으로서, 『조선시집』에는 한국 시인 44명의 186편의 시가 번역되어 있다. 1954년에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에서 한 권으로 출간되어(총 40명의 120편), 일본에서 최고의 번역 시집으로 평가받으며 십여 쇄를 거듭할 정도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조선시집』은 단순한 번역 시집이 아니라, 시선집 자체가 희귀한 당시 조선의 형편에 우리 근대시의 전범을 제시한 책으로,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제시한 책으로도 의미가 깊다. 여기에는 이상(李箱)의 알려지지 않은 시가 두 편 전한다. 「청령(蜻蛉)」과 「한 개의 밤(一つの夜)」이 그것인데, 이는 김소운이 이상의 사후에 그의 산문을 시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작가 소개에 “「한 개의 밤(一つの夜)」과 「청령(蜻蛉)」 2편은 생전에 역자에게 보낸 일문 사신(私信)을 약 5분의 1로 줄여서 시형으로 고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는 이상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자 이상의 산문이 지닌 시적인 가치에 대한 고평이라 할 수 있다. 다소 무리한 시도라 평가할 수 있는 이런 사례는 김소운이 이 책에서 번역 시집의 역할 그 이상의 것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김소운이라는 작가를 잘 모를 것이다. 1980년대까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수필과 몇 번 마주쳤던 사람은 그를 다만 수필가로 알고 있을 뿐이리라. 그러나 애초에 김소운은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는 1921년에 《동아일보》에 「쓸쓸한 바람」이라는 시를 최초로 발표한 것으로 보이며, 1925년 10월부터 1926년 5월까지 20여 편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도 스스로를 ‘시인’, ‘일개 시도(詩徒)’라 부르며 시에 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는 시집 출간도 시도하여 출판사에 원고까지 넘겼으나 경제적 문제로 세상에 배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김소운의 진정한 가치는 번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문단과 언론에 알려져 유명 인사로 등극한 것도 번역 덕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으며, 1920년, 그의 나이 12세 때에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친척을 찾아 도일하여 고학 생활을 하며 일본어를 익혔다. 이후 여러 차례 현해탄을 넘나들며 일본인이 지닌 잘못된 한국 인식을 바로잡고, 한국의 문학을 일본에 알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게 되었다.
  김소운은 1924년경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접하며 그들의 민요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요를 시와 동등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민요 채집의 계기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자신이 채집한 민요를 골라서 번역한 원고를 들고 당시의 유명한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를 찾아가 보여주었으며, 기타하라가 이를 읽고 뛰어난 번역을 칭찬하며 그를 일본 문단에 소개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민요 일역 모음집인 『조선민요집』(1929)이다. 이 책으로 김소운은 한일 문화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그는 한국의 민요, 동요, 현대시 등을 유려한 필치로 번역하여 일본의 문인들에게 한국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일종의 ‘조선시 붐’을 일으켰다.
  김소운은 한일 문학의 교류에 가교 역할을 한 경계인이었다. 그의 번역은 일방통행적인 한일 문학 교류의 방향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일 간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그의 번역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의 번역이 지닌 기본적 의의는 부정되지 않는다. 일본 문인들의 고평(高評)을 읽고 있으면, 그의 번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지기도 한다. 일본 문학과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이 그의 번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우리에게 그 숨은 가치를 알려주길 기대한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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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평론가.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에 시 「세한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사물에 말 건네기』, 평론집 『황금책갈피』 등이 있다.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