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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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신화의 나라

조숙희

에필로그1)

  1983년 가을, 대학에서 교육철학의 역사라는 교직 과목을 이수했다.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플라톤이 쓴 『향연』과 아카데메이아를 만났다. 아테네의 등에로 지목되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당시 내 젊었던 가슴에 평생 메울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스키마를 남겼다. 아마 그때부터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었을 것 같다. 그것은 까마득한 꿈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꿈이 주는 매력이지 않은가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다. 내면에서는 불가능과 성취라는 두 기둥이 자주 각축전을 벌였다. 덕분에 자주 깨어 있었다고 기억된다. 이 깨어 있었음의 공간은, 오늘 이 글을 씀으로써 다시 호명되어 나와서, 의미를 완성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졸업 후 나는 경남 K읍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산골에서 예수를 전하던 얼굴이 해맑던 전도사에게 시집을 갔다. 간도 크게, 제가 무슨 구도자인 양. 뭇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지척에 두고 잠들면서, 저 너머에 있어 가보지 못한 서양 나라들과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그곳에서 삶의 찬가를 써 내려갈 기회가 주어질 수 있지 않겠냐며 끝을 맺고는 했다. 나는 목회자의 아내였고, 그 의미는 내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살겠다고 남편과의 혼인 서약에서 겁 없이 맹세했다. 신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몽땅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기적인 존재일까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소명

  1990년 9월 어느 날 이른 아침, 남편은 북그리스 테살로니키시 기차역에 내렸다. 당시 그는 이스라엘 유학 중이었고, 욤키푸르2) 방학을 맞아 클래스 메이트들과 여행을 하고 있었다. 성경 「데살로니가 서」를 상상하자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고 했다. 남편이 출구를 나서던 순간, 예상치 않은 광경이 앞으로 훅 다가오는 진동을 느꼈다. 어떤 무리의 남자들, 허접한 차림, 현지인의 것보다는 더 진한 구레나룻, 우수와 불안을 동시에 뿜어내는 듯한 동공의 남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남편의 당황한 시선은 그들 매부리코 위에 붙어버렸다고 했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내전3)으로 빵을 찾아 내려온 그 당시의 경제 혹은 전쟁 난민이라고 했다. 남편은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소위 ‘소명’이 남편을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깜빡이는 플래시처럼 찾아왔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남편을 그렇게 부르셨다. 원래 진리는 찰나에 나비의 팔랑임처럼 살짝 드러났다가 스스로 지운다고 말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한다고. 그 짧은 순간이 언제 나타나느냐는 신의 영역일 것이다. 그때 그 순간을 연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해 드린다. 그 길이 벼랑일지라도 가야 하는……. 전혀 기대치도 않았던 사건. 그 후 내 가족의 삶은 이 운명의 길을 향하여 치닫게 된다. 테살로니키역 광장에 모여 있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로 가야 한다는. 어떤 식으로 건…….

올리브밭 밭둑 끝

  1997년 8월 5일 어두운 새벽, 억수 같은 소나기 속에 비행기는 김해공항을 떴다. 시어머니는 대합실이 떠나갈 듯 우셨다. 어머니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네 명의 어린 것들 손을 잡고,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떠났다. 먼저 영국에 들러 최종 사역지에서 만날 서양 문화 충격에 대한 완화의 기회와 글로벌 사역자로 살아가기 위한 언어 연수를 1년간 받았다. 그다음 해 여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불멸의 왕 알렉산더의 제국이 있었던 마케도니아주, 주도 테살로니키시에 도착했다. 소속 단체의 유럽 초창기 멤버가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이십 대의 감격도 기억하셨다. 남편의 소명을 따라 아이들과 마침내 그리스로 온 것이기에, 젊은 날에 품었던 비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하든 나는 그리스 땅에 온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를 위함이라는 맥락에서는 나에게도 상통하는 점이 눈곱만큼은 있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감히 아테네 청년들의 깨어남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한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그때까지의 내가 온전히 죽어야만 가능했던 이 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직면하던 어려움들을 내 것인 양 끌어안고 많이 신음했다. 소명의 길에 부딪히는 어떤 것들이라도 신께 올려 드리면 ‘내가 너희를 가볍게 하리라’4)던 언명을 자주 잊었던 시간이었다.
  우리의 삶은 이미 비쌌던 현지 물가, 사역지에 대한 주변 인식 부족, 비자 건 등으로 인해 난관이 예상되었던 차라,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스 현지인들은 내 나라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네 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경제적 문제,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지만, 길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어느 천사의 도움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대학원에 합격해 언어 학교 2년 수학을 허락받았다.
  집은 시내 가까운 곳에 얻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 사는 동네였다. 어렸던 셋째와 넷째는 현지 학교로 갔다. 셋째가 현지 학교에 간 지 며칠 뒤 픽업을 갔는데, 윗옷 앞쪽에 핏자국을 흥건히 묻혀서 학교를 나왔다. 친구가 때려서 코피가 많이 났다고 했는데, 어느 교사 한 사람 나와서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초등 고학년인 첫째와 둘째는 특수학교로 배정받았다. 이 학교가 어느 정도 열악한 환경이었는지 몰랐다. 나중에 아이들이 추억처럼 들려주던 경험담을 듣고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 학교는 그리스로 이주해 온 외국 학생들 사이에 악명 높았던 ‘빨리노 스투돈’5)이었다. 주 구성원들은 빵을 찾아온 난민 가정의 아이들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가장 일반적인 교양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큰 아이들은 학교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집에 와서 말하지 않았다. 어찌하든 현지에 적응하는 것이 가족의 목표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셋째 아들은 성장하면서 코뼈가 두 번이나 부러졌다. 그때나, 30년 가까이 달려온 지금이나, 그리스라는 이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 땅 올리브밭 밭둑 끝에서 찬바람을 맞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테살로니키 지역 개신교회에 참석하면서 우리 사역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여러 사람을 만났다. 왜냐하면 남편이 소명을 받은 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현지어를 배우면서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아본 결과, 아뿔싸! 비명을 질러야 하는 사실 앞에 멈췄다. 그동안 서구 사역자들이 이 땅에 들어왔고, 나름대로 그때까지 유입된 난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종류의 사역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사실 전략적으로 백인 사역자가 백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사역이 더 효율적 실천이었다. 우리는 희생을 치르고 기꺼이 먼 길을 왔는데,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일까.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주먹을 쥐어보았지만 다리는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화인(火印)

  도착 1년이 끝나가던 그해의 여름, 삼 개월간 땅 밟기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가 어느 종족에게로 가야 합니까?’ 집에서 시내 중심 에그나띠아 로(路)까지 걸어서 왕복 2시간 구간을 정하고, 90일간 매일 반복했다. 지중해 지역의 고온 건조 여름 날씨에 매일 바싹 말라가는 잡초처럼, 우리도 그렇게 샛노랗게 지쳐갔다. 기도로 가까스로 일상을 지탱하던 어느 날, 마침내 하나님은 그분이 숨겨둔 보석을 꺼내 보였다.
  갑자기 큰길 사거리에서 구걸하던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건만 이제야 그들이 보였다. 사람의 얼굴이 어쩌면 저렇게 까맣게 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남편은 그들의 진한 턱수염이, 미지의 땅을 헤매는 듯한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바로, 자신이 테살로니키역 광장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그들은 신의 기적을 상징하는 손바닥만 한 구름6) 크기의 사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바람의 자손, 로마 7)(집시)였다.
  한국인과 로마! 이것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비제의 오페라에 나오는 집시 카르멘과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로 뭇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로마. 그들과의 만남은 이제 낭만과 신비로움을 넘어 현실에서 직면해야 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운명이 되었다. 이 결합의 형태는, 적어도 나와 남편에게는 발갛게 달군 인두로 지져서 어떤 방법으로도 지울 수 없게 새긴 화인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내 힘으로는 이 끈을 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툭 떨어짐을 느꼈다. 자신에게 침 뱉고 조롱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치른 예수의 사랑과 독생자를 주기까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한 하나님 사랑의 지극히 작은 한 조각이, 감히 나와 남편에게 이접된 것 같았다. 나의 이기적 고민은 사랑이 되었다. 형제를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나에게 가장 불가능한 이슈가 가장 큰 테마가 되었다.
  개신교회 친구들이 우리 사역의 대상이 바뀐 것을 알고 궁금해했다. 자신들의 나라가 동양인을 사역자로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강한 부정적 의구심을 품은 이웃도 많았다. 로마족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하자 걱정했다. 로마들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실망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섬김받을 가치가 없는 무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삼십 대 중반이었다. 치기 어린 젊은 날의 용기로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신을 믿을 뿐만 아니라 불굴의 한국인이라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야 그들의 말이 너무도 정확한 예언이었음을 알았다.

박제 엉겅퀴

  그리스의 로마 마을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대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마약이 판을 치는 정착촌, 다음에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들판, 주로 쓰레기 매립장 위에 만들어진 캠프 등이다. 정착촌에는 드물게나마 땀을 흘리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있었다. 반면 들판 캠프8) 를 돕는 이들은 전무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가야 할 땅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 가족과 약 30년에 걸친 로마들과의 동고동락이 시작되었다.
  로마들이 사는 마을은 민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경찰조차도 들어가기 꺼린다. 드물기는 하지만 싸움 끝에 살인이 나기도 한다. 캠프의 입구는 쓰레기가 바람에 날리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건축 폐기물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3월의 들꽃들이 현란하게 피어올라 로마 마을의 존재를 알리고, 6월 태양 빛이 사정없이 쏟아지면 앉은뱅이 가시풀만 살아남아 죽은 듯이 엎드려 여름을 견딘다. 엉겅퀴는 마치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군락으로 흙길 가에 늘어섰다. 칙칙하게 비틀려버린, 사람 키를 넘는 그 식물을 볼 때마다 ‘나의 사람’들의 숨소리를 본다. 박제된 엉겅퀴 줄기 속에, 내가 똬리를 틀고 앉아, 로마들처럼 세상을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일까. 그것이, 왜 나는 로마를 나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될까. 논리적인 해명이 안 되고, ‘○○는 ○○다’라는 동어반복만 나올 뿐이다. 나는 그 답 없음 속에서 자주 서성인다.
  로마는 바랑카라는 천막집을 짓고 사는데, 재료는 길거리에서 주워 온 헌 문짝과 유리문이고, 비가 스며듦을 방지하기 위해 겉면에 천막을 덮는다. 천막을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를 키우지 않고, 그래서 쥐가 들끓고, 그래서 먹이 사슬의 원칙에 의거하여 뱀들도 산다. 정신없는 뱀들은 바랑카 위쪽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갓난아기가 곤히 잠자는 요람 위로, 스르르 천정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온 동네는 소동이 난다.
  나는 남편과 심호흡을 하고 저 후미진 곳을 점령하고 사는 그들의 마을로 들어간다. 세상에서는 멸시받는 그들, 이 땅에서는 주인인 그들에게 인사한다. 간식, 헌 옷,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한 그들의 반응은 조롱이거나 고마움이었는데, 사실 거의 전자였다.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하는 우리 부부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렸다. 과일이라도 팔아줄라치면 시중가의 두세 배를 불렀다. 세상에서 사람대접 한번 공평하게 받은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이 소유한 아버지의 품성은 마른 바람 부는 광야에서 만들어진 원초적 아버지의 그것이었다. 그들의 왕국에서는 그들의 법만이 유효했고, 그들은 그 법대로 살았고, 그 법은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아, 권력을 가진 세상은 그들을 훔치는 자라고 규정했다. 반면 그들은 저 바깥세상을, 거기에 사는 우리를 ‘발라미’, 즉 ‘이방인’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자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세상 한쪽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본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존귀하고 값진 존재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그들이 알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미션일 것이다. 저주를 운명처럼 짊어진 로마들, 쫓아오던 두려움이 마침내 그들의 땅에 도착하면, 다시 피해서 도망하고, 또 이동하고……. 그것은 폐기된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로마들 또한 우리와 동일하게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뛰어난 걸작품이라는 것이다. 공의로우심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그들 속에 파괴된 공의로움과 사랑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돕는 것이 미션 수행자의 핵심 의무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죄인이라, 신의 뜻의 성취에는 시간이 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인내를 삼키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더 배워야 했다.

야생 학교

  새로운 캠프에 처음 들어가서 선물을 얼마간 나누다가 보면 친구가 된다. 다음 전략으로 길거리 학교를 연다. 모든 엄마가 좋아한다. ‘학교로 사용하게 바랑카 실내나 처마를 좀 빌려줘요’라고 말하면, 표정이 좀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경쾌하게 말한다. “돈을 주면요.” 그 말의 의미는 ‘내가 너에게 나의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주는 것이니까, 너는 나에게 돈을 주어야 해’라는 뜻이다. 이런 시작은 피해야 한다 싶어 대답은 웃음으로 대신한다.
  아무데나 자리를 잡는다. 길바닥에서 열리는 간이 학교다. 단 한 번도 학교 문턱에 가본 적이 없는 아이들. 그들은 아무리 춥고, 더워도, 눈비가 쏟아져도 잘 따라왔다. 먼지로 옷 입혀진 머리카락들, 얼룩투성이 옷, 눈가에 달린 눈곱 사이에서 아직은 초롱초롱한 아이들 영혼의 이면을 보았다. 나는 더듬거리는 현지어 실력으로 목청 높여 꼬마들의 선생님이 된다. 돗자리를 편 땅바닥에는 야생 동물들의 배설물뿐만 아니라 꼬마들의 오줌도 똥도 깔렸을 것이다. 그 야생 향기 위에 세워진 학교. 끝 간 데 없는 하늘이 우리 학교 지붕이고 봄에는 앵앵 벌도 날아와 수업을 거들기도 한다. 한국인 최초 야생 학교 교장이자, 집시족 선생님이라는 영예를 입은 듯하여 가슴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숫자와 알파벳과 색깔 이름들, 자기 이름 쓰기도 가르친다. 크레파스를 과자로 알고 먹는 친구가 있어 질겁을 하고 말리기도 한다. 연필과 크레파스가 아이들 주머니 속으로 자주 사라진다. 피가 나도록 서로 꼬집고 싸우기도 하여 그들 속에 도사린 원죄의 야성을 본다. 검은색으로 마구 칠한 하얀 도화지에 숨겨진 그들의 상처가 내 것에 겹쳐서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마지막 순서에는 사탕이 기다리기에, 아이들은 학교가 마칠 때까지 좌우지간에 기특한 인내로 버틴다.
  문제는 여름이면 타는 듯이 뜨겁고, 겨울이면 너무나 추운 것이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양말 몇 켤레 위에 부츠를 신고 땅바닥에 앉아 수업을 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낸 뒤 캠프를 빠져나올 때는 몸이 얼어 있었다. 그럼에도 결코 돈을 주고는 장소를 구하지 않으리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들의 이런 이기심을 내 가슴으로 충분히 싸안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나는 할 수 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내 사랑의 주머니에는 균열이 세차게 진행 중이었고, 그 파괴됨의 위기를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사실 그 주머니는 원래 채워진 것이 별로 없던, 반쭉정이였음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사랑

  어느 추운 날, 동역자와 함께 캠프로 들어갔다. 로마들은 미국인 남자 A에게 난로를 피운 바랑카 안에 들어오게 하더니, 의자까지 내어주었다. 반면 나는 그날도 한데서, 나를 거절하는 주인의 아이를 가르친다고, 다시 꽁꽁 얼었다. 캠프를 빠져나오는 길, 차 안의 히터에 몸을 녹이는데, 얼었던 얼굴 근육이 풀리면서 눈물이 나왔다. 다른 어느 날, 빈 바랑카가 있어서 햇빛을 피하고자 그 처마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어느새 주인이 돌아왔는데 우리가 앉은 곳을 향하여 물을 마구 뿌려서 아이들과 나를 쫓아내었다. 주인의 아이도 학교에 참석을 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로마 마을에서 술 취한 남자는 남편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흔들었다. 남편은 마약 한 다섯 명의 로마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하고 구둣발에 밟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나는 십 대 소년 두 명으로부터 뺨을 철썩 맞기도 했다.
  쫓아내면 쫓겨났고 놀려도 미소 지었던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한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역의 종결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평안 가운데 있다고 믿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여드는 아이들을 만났다. 적어도 아이들은 무죄였다.
  한국 교회 단기선교 팀의 도움으로 드디어 나무로 된, 한 칸 교실의 야생 학교를 지었다. 알루미늄 창문도 달고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고, 캐비닛에 다음 주에 사용할 학용품도 비축하고, 실내도 예쁘게 장식했다. 이 모든 것으로 자부심을 느꼈고 다 이룬 것 같은 만족감에 기뻤다.
  그러나 다음 주, 정기 사역 차 들어가서 본 학교 모습은, 나의 모든 것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어린 것들이 달려와서 일러 주었다. “우리 아빠가 창문 떼서 팔았어요. 10유로요.” “우리 할배가 의자들 집에 갖고 왔어요.” “언니가 벽에 붙은 종이들 잡아뗐어요…….” 참는 것이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이제는 끝이다’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 현명한 듯싶었다. 차를 돌렸다. 그들의 몰염치를 지금까지 모두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날것들이 오래된 생 비린내를 풍기면서 봇물처럼 살아났고, 눈앞에서 괴물처럼 출렁거렸다.
  운전을 할 수 없어서, 골이 파인 흙길 중간에 차를 멈추고 거친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마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째려보고 떠나자는 의도였다. 바람이 불었던 그날, 찢긴 비닐들이 멀리 공중에서 허수아비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저 못된 인간들 쯧쯧.’ 분노가 다시 나를 엄습했다. 완전히 등을 돌려 차에 오르려는 순간, 그림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늘을 보았다. 비닐이 찢기어 펄럭이는 허공에, 예수님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저쪽 하늘 한편에서 비닐처럼 갈기갈기 찢진 채 뒤척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여기 있단다’라는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린다고 생각했다. 맹렬히 타고 있던 분노 속에, 내 의지와는 별도로 차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쏟아져 나온 눈물에 세상은 온통 뿌옇게 떴다가 가라앉았다. 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9) 구나’라는 생각이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 나의 눈물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칠 줄 몰랐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봄으로써 그의 피 묻은 손바닥을 보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도 찢기었을 그 손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인 맞은 사랑의 흔적은 내 몸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로마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했다. 내 힘으로 로마를 사랑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던 견고한 여리고10) 성은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새 술, 새 부대

  두 주 정도가 지났다. 캠프에 대한 궁금증이 매일 안개처럼 피어났다 사라졌다. 주님이 그곳에 계신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로 가려는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냈다. 혹한, 혹서의 순간에도 임마누엘11) 하나님이 나를 홀로 두지 않았음을, 로마족을 욕하고 보려던 그 순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찾아가 준 것처럼,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 주었던 사실을. 우리 집 아이들이 복음송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마음이, 눈물이 있기를 원해요’를 흥얼거렸다. 그 가사는 예수님 몸에 새겨진 화인 맞은 사랑의 메시지로 나에게 전달되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이르렀다는 생각을 했다. 화인 맞은 사랑을 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 큰 사랑이 근원이 되어 흘러나온 지극히 작은 실개천 하나 꼭 붙잡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과 가벼운 마음으로 캠프 입구에 들어섰다. 우리를 바라보는 로마들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 열림 속으로 새로운 법이 생성되고 있음을 느꼈다. 옛것의 무너짐이 시작되는 거룩한 순간이기를 소망했다. 아이들이 먼저 달려왔다. 코 묻은 입술로 뽀뽀를 해주어서, 얼굴에 개구쟁이들의 코가 묻었지만 행복했다. 로마, 그들과 우리 부부간에 새 부대에 담길12) 새 술이 부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재13) 의 언약이었다. 너머의 실재는 영원할 것 같은 현실의 허상을 깊이 흔들어, 묻혀 있는 진실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사랑이 만들어 낼 새로운 아버지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겠다 싶었다. 로마와 우리는 그렇게 아주 조금씩 하나가 되어간 것 같다. 그들과의 만남은 30년이 가까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그 후에도 야생 학교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새롭게 이동해 오는 이웃들에 의해서였다. 야생 학교가 겪은, 그전보다 더 낯뜨거운 사건들 앞에서도, 이제 나는 여전히 안전하게 서 있었다.
  받은 것을 계수하는 데 익숙한 내 사랑의 방식으로, 이런 사람들을 수용하겠다고 큰소리친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헛소리였는지, 현지인들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늦게 깨달았다. 경험이 쌓여갈수록 스스로 빈 잔을 채울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런 자각을 겸허히 수용하고, 절망에 익숙한 자신의 실체를 정직히 신 앞에 내어놓는 것.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거룩한 회개이다. 이것은 전능한 신의 임재의 충만함과 폭발적인 능력의 부요함을 내 연약함의 자리에 부어지게 초청할 수 있는 보배로운 지혜이다. 성경은 말한다, “내가 약할 때 그때 그가 강함 되실 때”14) 라고.

부활

  올해의 그리스 부활절은 5월 첫째 주일이다. 부활절에 나누는 특별한 인사가 있다. 먼저 ‘흐리스토스 아네스띠(Χριστός Ανέστη)!’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알리쏘스 아네스띠(Αληθώς Ανέστη)!’15) 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부활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불가능하다는 정의는 인간의 능력을 기준으로 할 때만 유효할 뿐이다. 우리에게 기적은, ‘신의 관점에서는 일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이라는 단어를 관점을 달리하여 본다면, 부활은 가능성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맨 처음 마을에 마침내 로마교회가 세워졌고, 지역 교계에도 선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은 그 가시풀 들판에서 부흥을 허락하셨다. 저주의 상징인 로마와 그리스 현지인이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남편과 나는 현지 교단의 리더십에 모든 이양 과정을 끝냄과 동시에 그 마을을 떠났다. 자체 리더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빈손이 된 우리는 중북부 그리스 K시 외곽 말라버린 강가에 위치한 로마 캠프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뒤쪽 배경으로 올림포스산 정상, 제우스의 보좌가 위용을 보이는 마을이었다. K시 시민들은 이 캠프를 도둑과 사기꾼들의 마을로 불렀다. 그래도 양호한 이웃이었던 어느 자매가, 믿음으로 거듭난 후 울며 고백했다. ‘우리 집에 우리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훔쳐 온 것이어요. 어쩌면 좋아요.’라고 할 정도였다.
  마침내 도둑과 사기꾼들의 마을에도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린 지가 올해로 11년이 넘어간다. 복음의 능력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현상을 몰고 왔다. 동네에는 여전히 악한 이웃들이 많지만 죄가 무엇인가를 직시하는, 화석이 된 지 오랜 그들의 양심이 되살아났다. 아침이면 로마 캠프의 흙먼지 날리는 입구까지 스쿨버스가 들어와, 수십 명의 로마 아이들을 초등과 중고등학교로 실어 나른다. 우리 교회에서 시작한 야생 학교가 동기가 되었음이 물론이다. 마을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던 무학의 로마 여성들, 10여 명이 40분 이상을 걸어서 야간 성인학교에 가서 지식을 배운다.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도 읽고 쓰는 기쁨을 누린다. 조혼에, 다산에, 가난에, 술 취한 남편으로부터 매 맞던 아내들의 놀라운 변신이 초래되었다.
  경찰청에서는 도시 K의 평균 도난율이 줄어들었다고 칭찬했다. 마을 안에서는 다시는 자동차를 훔쳐서 숨기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게 존경받는 현재의 여성 대통령 사켈라로풀루 여사에게 이 아름다운 소문이 보고되었다. 2022년 5월, 그녀는 이 지역의 순방길에 K시 로마 캠프를 방문하여 로마들을 격려해 주고 갔다. 복음은 무서운 능력으로 이 마을을 그전과 후로 나누어 놓았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의를 향한 갈망을 소수에게 심어 주었다.
  일례를 하나만 더 든다면, 어느 날의 성경 공부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16)’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간 뒤 우리 교회 소속 4명의 형제가 헌 집을 청소하게 되었다. 주인은 수고비를 따로 주지 않고, 청소하다가 쓸 만한 것 건지면 그것이 수고비라고 말했다. 당시 형제들의 경제적인 사정은, 복음 때문에 도둑질도 못 하는 상황이라 더욱 배가 고픈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청소하다가 구석에서 보자기에 돌돌 말린 18,000유로와 2,000달러를 주웠다. 이 엄청난 액수의 돈 앞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살 것인가 예전처럼 살 것인가를 다시 결정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을 만났다. 당장 슈퍼에 가서 아기 우유도 사야 하고, 쌀도 사서 허기를 채워야 하는 그들이었다. 지난주에 배웠던 성경 사건이 그들에게 판단의 기준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은 경찰서를 향했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둑질하다가 잡혀 끌려가서 매를 맞던 곳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주운 돈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전력 때문에 오히려 의심을 받는 해프닝을 겪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교회의 든든한 리더들로 서 있다. 다시 태어난 것, 아나-게니시스(ανα-γέννησις)17) 이다. 부활이다. 한 민족의 부활이다.

야생화 꽃대

  세계 문명의 모태가 된 나라를 겁도 없이 찾아온 동양인, 가난한 네 자녀 가족. 영어도 서툰 데다가 헬라어는 왜 그리 복잡하던지. 이런 악조건으로 우리는 사역 면에서 거의 실패하고 밀려났다. 비자 문제가 얽혀 지나가는 경찰 그림자만 봐도 가슴이 오랫동안 철렁했다. 내일은 우리의 존재가 이곳에서 지워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자주 두려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도 사역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 했고, 이 지난한 외길에 무조건적인 신뢰로 동참해 준 한국, 미국, 유럽에 있는 한국 교회와 형제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나는 수많은 고난과 실패의 쓴잔을 마셨고, 여전히 밭둑 끝에 서서, 맞닥뜨리는 바람을 치올리고자 애쓰는 중이다. 그럼에도 밭둑 끝에서는 야생화 꽃대들이 꼿꼿이 피어남이 보인다. 나와 그들의 생명이 연장되고 있음이 신기하다.
  목을 죄었던 비자 문제는, 열풍처럼 불어닥친 한류로 말미암아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신분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힘이 들기도 하지만 덕분에 현지어가 향상되어, 남이 가지지 않은 좋은 무기를 가진 셈이 되었다. 신약 성경의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30여 년을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신화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떠나자 약간의 여유가 생겨, 모국어에 목마르던 차에 사이버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신화적 상상력을 만들어 낸 이 땅의 풍성한 인문학적 소스들에 눈을 떴다. 설레는 가슴으로 상상만 했던, 젊은 날에 그렸던 꿈의 지경 안에 이미 충분히 들어와 있는 내가 보인다. 나의 젊은 날을 재물로 받은 신은, 이제 부요한 선택 기회를 허락하는 걸까.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 눈물을 감추던 네 자녀들은, 그리스 현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입 시험까지 치렀다. 자신들의 노력과 선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모두 미국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중이기도 하다. 한국어, 그리스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글로벌 인물들로, 모두 한국과 관련 있는 업종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집 안에서는 한국어만을 쓰는 원칙을 지켰던 것, 방학 때마다 한국어 우리 집 학교를 열어 배우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 아이들의 모국어를 지켜주었던 것 같다.
  성장하면서 경험한 약자, 외국인으로서 만나야 했던 차별의 아픔들이, 현재 선 곳에서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감의 자리를 주었다고 했다. 이제 500만을 육박하는 유럽 난민들로 인해 앞으로의 유럽 사회는 글-글로벌 사회로 갈 것 같다. 예견되는 이런 사회 속에서 해외 거주 젊은이들의 긍정적 역할의 기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말이 서툰 2등 시민이 아니라, 한국의 글로벌 미래를 열어 갈 럭셔리한 기둥들이라 보인다. 그들의 잠재된 역량을 이끌어 내어 꽃피우도록 돕는 것은 정부와 어른들의 역할이다.

프롤로그

  진정한 사랑과 용서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부활을 가능하게 했던 저변에는 신의 것을 닮은 사랑과 용서가 함께 있었다. 받은 사랑만큼 주는 사랑이 오가는 곳에서는, 용서할 만한 상황을 용서하는 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용서라고 하지 않는다. 신을 외면하는 인간을 향한 그 신의 사랑,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랑의 원형이자 변화를 역동하게 하는 동인이 아닐까.
  나는 여기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이 진리를 실천하려다가 실패하고 실패한, 빈한한 내 삶의 목마른 아리아를 썼다. 세상에서 이기면 사랑 안에서는 지는 것이라는 역설이 아직도 낯설어서 고민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놓고 내 억울함에 아직도 많은 시간을 기도로 엎드려야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내가 처절히 무너진 그곳에서 내 이기심의 눈물로 피어난, 신의 인내의 새로운 시작의 새 노래이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1)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순서를 바꾸어 본다. ‘과거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언어적 재현이라는 사후적 해석을 통해서 의미가 부여된다’는 라캉 정신분석학의 사후성(Nachträglichkeit)이라는 메커니즘 이론을 적용해 보았다.

2) 유대교의 속죄일로, 1년 중 가장 크고 엄숙한 명절이다.

3)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포기를 선언한 지 3년이 지난 시기.

4)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5) 일종의 난민 학교로, 일 년간 헬라어 알파벳과 기본 문법을 배다. 그 후 지역 학교로 다시 배정된다.

6) 「열왕기상」 18장 44절.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7) 집시(gypsy)라는 말은 비어(卑語)이다. 그들은 ‘나도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의 단어 ‘로마’로 불리기를 원한다.

8) 들판에 산재한 로마 마을. 로마들이 옮겨 다니는 특성을 살려서 캠프라고 부르고자 한다.

9) 「누가복음」 24장 13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절망한 자들이다. 부활의 예수는 열두 제자 안에 들지도 않는 무명의 두 제자를 찾아가서 절망스러운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10)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7일째에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난 후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로 기록되어 있다(「여호수아」 6장 20절)

11) Ἐμμανουήλ(Immanuel): 「이사야」 7장 14절. 임마누엘은 두 개의 말, 임마누(עמנו, Immanu, 우리들과 함께 있다)와엘(אל, El, 하나님)을 조합한 이름으로,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12) 「누가복음」 5장 37-38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13) 라캉이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는 세 개의 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중의 하나.

14) 「고린도 후서」 12장 7절.

15) 그리스어로 부활이라는 단어는 이 아나스따시(η ανάσταση)이다. 아나(ανά)는 ‘다시’, 스타시(σταση)는 ‘일어서다’라는 의미이다.

16) 「사도행전」 5장 1-11절.

17) 아나(ανα)-게니시스(-γέννησις)는 ‘(다시)’ ‘(탄생)’, 즉 다시 태어나다의 의미이다.

필자 약력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대학 졸업 후 국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산골 전도자와 결혼을 한다. 1997년 이후 소명을 받고 그리스의 두 번째 도시 데살로니키에서 야생 들판에 사는 문명의 이방아 로마족의 친구로, 로마들의 대모로 호칭되는 현재까지 충실하게 사역자로 살고 있다. 국내 유명 사역단체 G의 유럽 지역부 초창기 멤버이다. 사역자로서의 삶의 일부가 CGNTV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2003년 국내 이름 없는 어느 월간지에 「천국에 있는 자」로 등단하여 약 80여 편의 수필을 썼고, 다수의 공저 수필집을 출간했다. 어느 날, 써오던 문장에서 문득 구토를 느끼는 증상을 경험하고, 출구를 찾다가 경희사이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도 대학원 세미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문장 쓰기를 모색하고 있다. 일환으로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 스터디에 열정을 쏟고 있는 중이다. 현지에서 비자를 위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는 동시에, 그리스 신화나 비극 작품들과 한국 문학의 공유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