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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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서쪽으로 떠난 여자

정도상

  “미서야, 가자.”
  상추를 끝물로 낸 늦여름, 미서와의 여행길에 올랐다. 이름처럼 미륵의 서쪽으로 가는 여행이었다. 미서는 아주 작은 키에 통통하면서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눈이 깊었다. 시골집 마당에 있던 우물보다, 더 깊은 눈을 가진 여자. 여행하는 중에 노르와 자파한테 상추를 모두 뽑고 딸기를 심을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장님, 잘 다녀와.”
  노르와 자파의 배웅을 받고 보스턴백 하나만 메고, 미서와 함께 바그다드로 향했다.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도시였다.
  허름하고 낡은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하니 모래바람에 섞인 뜨거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서울에서 바그다드로 오는 길은, 내가 미서한테 가는 길처럼 멀고 어려웠다. 한국 외교부는 일반인의 이라크 여행을 금지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만 승인했다. 그 예외를 만들기 위해 온갖 짜증을 참아내며 많은 돈과 시간을 썼다.
  서울에서 예약해 두었던 안전요원과 포드의 검은색 엑스퍼디션이 내 앞에 섰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소총으로 무장한 안전요원이 딱딱한 억양의 영어로 내 이름을 물었다. 내가 이름을 말하자 그가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수염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선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안전요원이 들고 있는 소총에서 전쟁 중인 땅의 냄새가 났다. 쇠와 화약의 냄새를 미서는 싫어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바그다드의 풍경은 궁핍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고대의 풍족한 풍경은 기나긴 시간과 함께 퇴색되고 낡아버렸다. 머리숱이 거의 없는 늙은 할아버지의 궁핍한 얼굴로 바그다드는 나를 맞이했다.
  바그다드 그린존 밖에 있는 쉐라톤은 늙고 낡은 호텔이었다. 아무렇게나 짐을 놓아두고 입은 옷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스프링은 탄력이 없었고 끽끽거리는 소리만 냈다. 천정에서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선풍기 날개가 느릿한 속도로 하염없이 돌아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가 마치 미서의 자전거 바퀴처럼 느껴졌다. 선풍기가 중얼거리네. 미서라면 이렇게 말했을 터였다.
  “킥킥, 사랑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라……. 킥킥, 외할머니가 내게 읽어주던 원불교 교전의 한 대목인데, 지금도 기억이 또렷해. 킥킥, 이 술잔도 없고, 내 앞에 너도 없고, 네가 없으니 나도 없고, 징징거릴 것도 없고, 화낼 것도 없고, 섹스도 없고, 킥킥거릴 것도 없고.”
  여의도에서 가까운 마포 공덕동 어느 갈빗집에서 돼지껍데기를 안주로 씹으며 미서가 말했다. 미서가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에서 음악 프로그램 작가로 밥을 벌고 있을 때였다.
  “없고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없는 게 없으면 있는 것 아닌가?”
  “킥킥, 그렇게 쉬울 거면 굳이 경전에 쓰지 않았겠지. 킥킥, 무슨 뜻인지 오래도록 생각을 궁굴려야 겨우 알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건배!”
  우리는 소주잔을 들어 건배했다. 나는 반만 마셨고 미서는 단숨에 털어 넣었다.
  “야! 넌 또 술을 꺾어 마시냐? 다 마셔라, 응!”
  미서의 강요에 나는 나머지 술을 비웠다.
  우리는 두 해 전에 드라마 문학학교에서 만났다. 미서는 강원도 바닷가에서 올라온 촌년이었고, 나는 금강 근처의 작은 소도시에서 국립대학을 마치고 상경한 촌놈이었다. 촌것들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어서, 한눈에 서로의 주머니가 비었다는 걸 눈치챘다. 주머니는 비었지만 오기와 열정은 가득했다. 미서는 갈 데가 없어 문학학교 강의실에서 몰래 자기도 했다. 책상을 붙여 놓고 박스를 깔고 신문지를 덮고 잤다.
  나는 끝내 시인이 되지 못했다. 온갖 공모전에 시를 보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다. 본심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는 고시텔에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미서는 계간지에 시를 투고했고, 시에 담긴 슬픔의 뼈와 살을 읽어낸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 시인이 되었다. 미서는 미친 듯이 시를 썼고 등단 일 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나 미서 역시 가난했다. 시를 쓰면서 밥을 벌기 위해 시가 아닌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편의점에서 알바비라도 받는 날이면 미서를 불러냈다. 그렇게 만나 공덕동에서 돼지갈비를 굽거나 맛집으로 유명한 가든호텔 뒤의 떡볶이집에서 라볶이를 먹었다.
  내가 상상했고 문장으로 만든 이야기는 모두 휴지통으로 갔다. 다른 사람의 당선작을 읽어볼 때마다 절망감과 수치와 질투가 나를 휘감았다. 이따위 형편없는 것을 당선작으로 뽑다니……. 결국에는 아침 드라마 보조작가의 보조로 계약서도 없이 일산의 어느 오피스텔로 출근했다.
  보조작가의 보조가 하는 일이란 자료 조사였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온갖 자료를 검색해서 보조작가한테 전달하고, 화장실 청소나 분리수거, 심할 때는 보조작가 대신 욕을 바가지도 먹기도 했다. 가끔 주인공의 캐릭터나 조연의 캐릭터에 대해 조언하면 얼굴에다 손가락질을 해대며 ‘네가 뭘 알아서 까불어’라고 소리쳤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정작 조언대로 캐릭터를 수정하고도 그들은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 무렵 미서는 음악 프로그램의 작가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가끔 미서의 목에 걸린 방송국 출입증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미서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고, 다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미서는 광화문에서 어떤 남자를 오래 기다렸다. 그 남자는 끝내 오지 않았고, 미서는 버림받았다. 미서는 차인 게 아니라 남겨졌다고 우겼다.
  양념갈비보다 돼지껍데기를 더 많이 먹은, 미서가 두 번째로 남겨진 어느 날이었다. 십일 월이었던가? 비바람이 몹시 불어 노란 은행잎이 나비처럼 허공을 맴돌던 밤이었다.
  “킥킥, 가질래?”
  미서가 출입증을 풀어 내게 주었다. 내가 왜 이걸 가져. 필요 없어. 미서의 출입증을 그녀의 소주잔 옆에 놓았다. 나는 출입증의 사진에 불만이 많았다. 그 사진에는 미서의 웅숭하고 깊은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오종종하니 못생긴 얼굴만 보였다. 미서의 영혼은 그녀의 눈동자와 문장에 담겨 있다. 나는 미서의 눈과 문장을 사랑했다. 미서의 눈과 문장은 옛 주막에서 팔다 남은 막걸리를 마시고 혼자 노래 부르는 주모의 몸과 마음을 닮아 있었다. 외로움과 슬픔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노래가 아슬아슬한 미서의 시.
  “킥킥, 유학이나 갈까 봐.”
  “유학? 너, 돈 있어?”
  “킥킥, 속물. 뭘 배우고 싶은지 먼저 물어봐야지.”
  미서의 말에 내 얼굴이 빨개졌다. 소주를 마셔 열이 올라온 게 아니라 창피해서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한없이 창피해져서 괜히 먹지도 않을 양념갈비를 뒤적거렸다. 너무 익어 딱딱해진 고기였다.
  “킥킥, 그냥 떠나고 싶어. 마음을 자꾸 버리니까, 내 앞의 길이 너무 위독해서…….” 미서가 말했다.
  많이 아팠구나.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 미서를 위로할 수 없었다. 위로는 얼마나 헛되고 헛된가.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에 미서는 안주도 없이 소주만 거푸 마셨다. 나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며 식당 안을 보니, 미서는 턱을 괴고 앉아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시인으로 유명해진 조그맣고 통통한 여자의 마음을, 그 마음의 풍경 속으로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 미서 앞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미서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
  “킥킥, 통장을 탈탈 털면 오십만 원쯤 있어. 내 전 재산이야. 킥킥, 그걸로 비행기 표를 살 거야.”
  “어디 가서 뭘 공부하려고?”
  “킥킥, 아직…… 정하지 않았어.”
  몇 달 후, 미서는 거짓말처럼 혼자 가던 먼 집을 남겨놓고 더 먼 곳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나는 미서가 떠난 뒤에야 늦게 한국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미서는 친절한 친구가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바람결에 소식을 들었다. 새벽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나는 소말리아로 가서 해적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해적이 된 소말리아 사람들의 그 마음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말리아 해변 가득 온갖 오염 물질을 갖다 버린 유럽의 사람들. 게다가 예멘에서 온 어부들이 소말리아 바다의 물고기를 쓸어가고 나면, 남는 것은 지독한 굶주림뿐이라고 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부모의 마음을 유럽 사람들은 지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소말리아의 어부들은 최후의 몸부림으로 내전 때문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소총을 집어 들었고 마침내 해적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마음 속에는 해적이 살았다.

  탕, 타다다당!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총 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직도 전쟁 중인가, 생각했다. 창문으로 살펴본 바그다드의 거리는 어두웠고 조용했다. 현실의 바그다드는 비현실의 바그다드 카페처럼 황량했고 궁핍했다. 끊임없이 모래바람이 불고, 키 작은 나무가 흔들리는 길을 따라 뚱뚱한 여자가 걸어가던 그 카페에도 질투와 사랑이 있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니, 별 탈은 없겠지. 나는 미서가 담긴 보스턴백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미서를 다시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

  뮌스터역에 내렸다.
  기차는 암스테르담을 향해 떠났고, 나는 천천히 역사를 빠져나왔다. 비가 많은 도시라고 했는데,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제네바를 거쳐 뮌스터에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 이틀 동안 여러 번 기차에서 내려 되돌아가고 싶었다. 미서와의 미적지근한 관계가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사랑도 없고 이별도 없는 이 관계는 무엇인가?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한동안 가만히 서서 눈앞의 풍경이며, 풍경 속의 사람을 바라보는 게 내 습관이다. 나는 역사 앞의 뮌스터 시가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종교전쟁을 치른 도시답게 중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과 현대의 건물이 잘 어우러진, 단아한 교양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더 많았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흐르고 있다.
  역사 바로 옆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전거 거치대도 무척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오직 레저로만 탄다. 일상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거의 찾기 어렵다. 모두 유니폼을 착용하고 값비싼 자전거를 타는 동호회가 대부분이다. 올림픽 경기에라도 나갈 차림새로 몰려다니는 자전거 행렬만 보다가 일상에서 자유롭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풍경을 보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쾨니히슈트라세를 따라 뮌스터 도심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약간 퇴색된 빨간 지붕의 집들과 다양한 형태로 지어진 벽돌 건물 사이를 걸으며 미서를 생각했다. 나는 변한 게 거의 없는데, 미서는 어떻게 변했을까? 피카소 미술관을 지났다. 전화를 해야 하는데. 사전에 어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탓에 못 만날 수도 있다. 미서를 못 만나면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룸이라도 찾아야 했다.
  구시가지에 들어와서야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미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지만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기 주변의 벤치에 앉아 메모에 적힌 독일어를 연습했다. 안녕하세요. 미서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낯선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봤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받았다. 할로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연습했던 말이 하얗게 지워져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영어로 할 걸, 후회가 밀려들었다. 절망감을 안고 몸을 돌리는데, 미서는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미서였다.
  “……미서!”
  “네가 왜 여기에?”
  “너, 보러 왔어.”
  “나를? 왜? 일단 비켜 전화 좀 하고.”
  나는 비켜섰고 미서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나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쏟아내는 미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가 익숙했다. 단돈 오십만 원으로 머나먼 이곳 뮌스터에서 고고학 공부를 시작한 당돌한 여자. 그리움도 설렘도 없이 낯선 도시의 모퉁이에서 문득 미서를 만나다니…….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그 무엇이 나를 휘감았다.
  “너도 참, 뜬금없다. 나를 왜 보러 왔어?”
  “그, 그냥.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싱겁긴. 호텔은 정했어?”
  “아, 아니. 이, 이제 막 기차에서 내렸어.”
  “너도 참, 대책이 없다.”
  “미, 미안해.” 이렇게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삼 년 만에 만났으면 환영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격한 포옹은 아니더라도 악수 정도는 해야 정상인데, 미서의 약간 쌀쌀맞은 태도는 여전했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
  미서가 앞장섰고, 나는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갔더니 호수 옆에 드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잔디밭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햇볕을 쬐고 있다. 여자들은 젖가슴을 그대로 내놓고 올리브유를 듬뿍 바르고 문질렀다. 대낮에 공원 같은 곳에서, 남녀가 팬티만 입은 나체 상태로 삼삼오오 어우러져 있다니. 그들 사이를 걸어가며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곤란했다.
  “야, 거풍하는 젖가슴 처음 보냐? 눈동자 돌리지 말고 따라 와.”
  미서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생회관 식당이었다. 파스타와 함께 소시지가 나왔는데 짜고 맛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또 한참을 걸어 시내에 있는 어느 빌딩으로 갔다. 그곳이 미서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였다. 뮌스터대학은 캠퍼스가 없고 시내 곳곳에 단과대학이 산재해 있는 방식이었다. 기숙사도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있다고 미서가 말했다. 남녀를 구분하는 기숙사도 없다고 했다.
  미서의 방은 작았다. 앵글로 만든 서가에는 독일어로 된 온갖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다. 그중에서 한 권을 뽑아 펼쳤더니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짐작되는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요즘엔 쐐기문자를 공부하고 있어.” 미서가 말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점토판에 찍힌 그 쐐기문자를 배운다고? 나는 속으로 기가 죽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의 안부를 시시껄렁하게 주고받았다. 미서는 어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곧장 고고학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기숙사 공용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며 웃기도 했다. 미서는 지난 여름방학 때 이라크에 가서 유적발굴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모래 언덕 아래에 사천 년 된 고대 도시가 묻혀 있었어. 그 도시를 붓질로 발굴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어. 석사 1년생이라 보조연구원도 아닌, 그냥 막노동 아르바이트였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에 있는 황량한 황토 언덕이었는데. 바그다드에서 세 시간쯤 떨어진 곳인 것 같아…….”
  미서는 시간의 지층에 붓을 대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팔월 어느 날 아침 여섯 시 무렵이었다. 동쪽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분홍빛이 점점 붉어지면 사막 저편에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뜨거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붓질을 해야 했다. 붓질을 시작하자마자 오래된 고문서에서 피어나는 냄새와 꼭 닮은 황토 먼지가 매캐하게 코를 자극했다. 에취, 재채기가 터졌다. 서너 번의 계속되는 재채기에 횡격막이 떨리고 아팠다. 숨을 가다듬고 겹겹이 쌓인 지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뼘의 지층에 담긴 시간은 대략 백 년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이천 년 어느 무렵이었을 거무튀튀한 지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노랗게 탈색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횡격막의 수축을 견디며 다시 붓을 잡고 그 부분을 쓸어내렸다. 삽이나 호미로 파내면 간단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지도교수의 간곡한 당부를 떠올리며 붓질에 집중했다.
  손가락뼈였다. 기원전 2000년 전에 묻힌 누군가의 손가락. 크기로 보아 아직 덜 자란 소녀의 손가락이라고 짐작했다. 병에 걸려 죽었을까? 미서는 잠시 추측하다가 모눈종이에 손가락뼈가 발견된 지점을 표시하고 나무 상자에 놓았다.
  손가락뼈가 발견된 지점부터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붓질에 쓸려나간 황토 속에서 다른 손가락뼈와 손 그리고 팔목이 드러났다. 미서의 양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속에서 무언가 멀미 같은 게 올라오려고 했다. 미서는 붓을 놓고 교수를 불렀다. 교수가 해를 등지고 걸어오는 걸 보는데,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속이 쓰릴 정도의 지독한 허기였다. 미서는 교수한테 쏟아져나온 뼈를 가리켰다.
  조금 더 해봐.
  짧은 말을 남기고 교수는 돌아서서 기원전 2000년경의 토기 파편들이며 돼지 뼈와 염소 뼈를 관찰했다. 대학원 지도교수의 말이니, 꼼짝없이 조금 더 해야만 했다. 지도교수 에밋 클로제는 서른 살의 미서보다 스무 살이나 더 먹은, 금발의 덩치 큰 독일 남자였다. 발굴 현장에 쌓인 황토와 모래를 고무 들통에 담아가 채로 쳐서 유물을 걸러내던 이라크 청년들이 아침을 먹으러 캠프로 돌아가고 미서는 혼자 남아 캔을 따서 참치를 마른 빵에 발라 먹었다.
  미지근한 생수로 입을 헹구고 미서는 다시 붓을 잡았다. 붓질을 시작하니 오래지 않아 검은색의 지층 속에서 사람 뼈가 무더기로 나왔다. 미서는 붓질을 멈추고 에밋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정도라면 지도교수의 지침을 따라야 했다. 미서는 뼈의 크기를 조심스레 측정했다. 허벅지 뼈나 골반의 크기가 모두 성인의 뼈가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모눈종이에 뼈가 쏟아져 나온 위치를 기록했다. 뼈가 얼마나 넓게 묻혀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죽음들이었을까? 뼈를 맞추고 뼈에 새겨진 칼자국이나 미세하게 남은 바이러스를 측정해야 겨우 사인을 알아낼 터였다. 그 시간은 또 얼마나 길 것인가? 탄소 측정을 하고, 바이러스를 실험실로 보내고, 현미경으로 뼈에 새겨진 흔적들을 추적하는 일련의 작업은 모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과거의 기록들, 유물에 남은 흔적들로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맞는 지난한 퍼즐 맞추기가 고고학이다. 고고학은 역사인가? 역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시간의 지층 속에 들어 있는 미지의 퍼즐 조각들은 또한 무엇일까? 퍼즐에 담긴 고대 인류의 생활이 지금 나와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할로, 미서.
  돌아보니 지도교수 에밋이 물통을 흔들었다. 한눈에 커피라고 알아봤다. 보기만 했는데도 코끝에서 고소하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커피 한 모금이 간절할 때였다.
  여기 이 뼈들. 숫자가 예사롭지 않아요.
  미서는 에밋한테 수북하게 드러난 뼈를 가리켰다. 에밋은 무더기로 쌓인 뼈와 지층에 박혀 있는 뼈를 유심히 살폈다. 큰 덩치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뼈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 미서는 피식 웃었다. 귀여운 남자로군. 오십 줄에 들어선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뼈를 발굴했다. 에밋은 제물로 바쳐진 소년 소녀거나 학살 현장일 수도 있거나 무덤 골짜기일 수도 있겠다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서는 이런 떼죽음을 발굴하는 게 정말 싫었지만, 끝없는 삽질과 붓질로 청동기시대 어디쯤의 지층을 조금씩 파 내려갔다. 움푹 들어간 골짜기의 바닥이 드러나자, 며칠 동안 이어진 뼈 발굴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 날부터는 골짜기 옆의 언덕을 발굴하기로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발굴 현장에 나왔다. 지시에 따라 삽으로 일 미터 정방형으로 땅을 잘랐다. 독일에서 온 연구진들이 발굴을 하면 압둘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라크 사람들이 흙과 모래를 들통으로 실어나갔다. 미서는 연구원이 아니지만, 에밋의 배려로 연구원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기원전 2000년경의 지층에서 두어 뼘 정도 밑으로 파 내려가자, 진흙으로 만든 염소며 개 그리고 토기 파편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조심스러운 붓질로 진흙 개며 염소를 들어냈다. 이어 작은 바퀴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귀리며 보리, 새카맣게 탄 밀이 쏟아졌다. 돼지 뼈와 소뼈며 염소 뼈도 섞여 있다. 기원전 2300년 무렵의 유물로 추정하며 미서는 허리를 폈다.
  문득 발밑에서 뒹구는 까만 덩어리를 보았다. 아궁이 속에 넣었다가 깜빡 잊고 있다가 늦게 꺼낸, 까맣게 탄 감자가 생각났다. 이라크 유적지에서 감자가 발굴될 수는 없지만, 감자 비슷하게 생긴 덩어리를 보니 반가웠다. 탄 껍질을 떼어내고 김이 풀풀 피어나는 뜨거운 감자를 먹으며 함께 웃던 식구들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수 없어 지난 삼 년 동안 미서는 한국의 강원도 바다에 발을 담그지 못했다. 그곳 산촌의 마을 사람들은 비탈진 밭마다 감자를 심었다. 감자를 보니 식구들이 그리웠다.
  까만 덩어리가 감자가 아니라면 또 어떤가? 연구실로 가져가 탄소측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 조사를 해보면, 무엇인지 드러날 터였다. 미서는 연구원이 아니라 시간 노동을 하는 발굴자에 불과했기에 청동의 시간을 견디고 견뎌, 문득 드러난 덩어리를 청동 감자라고 명명했다. 미서만의 명명이었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 문득 목이 메었다. 입술에 까만 껍질을 붙이고 환하게 웃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모두가 불립문자였다.

  아침을 먹고 두어 뼘을 더 파 내려갔다. 이번에는 점토판이 몇 개 나왔다. 쐐기문자가 찍힌 점토판이었다. 기원전 2500년에 여기는 무엇 하는 곳이었을까? 점토판의 쐐기문자는 주로 무언가를 빌려주고 받았다는 증명으로 사용되었다는데, 곡물상회였을까? 온갖 생각을 하며 붓질을 계속하다 보니 잘 다듬어진 바닥이 나타났다. 일 미터를 발굴했는데 무려 오백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감자 비슷한 게 제일 반가웠어. 감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강원도 내 고향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어. 해는 또 얼마나 뜨거운지, 머리카락이 몽땅 타서 대머리 되는 줄 알았지.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너무 목이 말랐어.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 이게 첫 발굴의 경험이었어. 바그다드에서였지. ”
  “바그다드, 나도 가보고 싶다. 바벨탑도.”
  “바벨탑? 나는 가봤지. 창세기에 나오는 탑인데 허물어져 그저 흔적만 조금 남은 탑이었어. 문명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어떤 허망 같은 것만 황량하게 남았더라.”
  “이 두 눈으로 직접 꼭 보고 싶어.”
  “내 안에도, 네 안에도 있잖아, 욕망과 허망으로 쌓아 올리는 탑, 작든 크든. 그걸 뭐 멀리까지 가서 봐?”
  미서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내 욕망과 허망은 고대의 탑처럼 고고학적 유물이 된 지 오래였다. 시나리오 작가의 꿈은 뼈가 되어 화석화되었고, 정규직의 삶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딸기 농사를 거들 수도 있다. 물론 서울이라는 바벨탑에서 내려와 원시적 노동의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조금 생긴 것이지 결심을 굳힌 것은 아니었다. 나는 미서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야?”
  “네 안에 있다는 그 바벨탑, 여기에 올려봐.”
  “킥킥, 웬 달마 흉내?”
  뮌스터에 와서 처음 들어보는 미서의 ‘킥킥’이었다. 말머리에 자주 쓰던 ‘킥킥’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손바닥을 오므렸다.
  “이번 여름에는 베를린 박물관에서 알바하기로 했어. 에밋이 추천서를 써주었어. 다행히 여름 내내 베를린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서 유물을 분류하면서 지내게 되었어.” 미서가 말했다.
  이상하게도 ‘에밋’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거슬렸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날 밤은 미서의 작은 기숙사 방에서 함께 지냈다. 설렘도 섹스도 없는 편한 밤이었다. 미서의 기숙사 방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고 나는 암스테르담을 향해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플랫폼을 떠날 때까지 미서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문장을 버렸다. 문장을 버리니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서울에서 청춘의 생을 탕진했다. 나는 홍대 입구의 어느 작은 점방에서 심장 위에 나비 문신을 새긴 뒤에, 빠삐용처럼 서울을 탈출했다.

*

  그때로부터 미서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오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도와 딸기와 상추를 번갈아 재배하면서 살았다. 사랑이 없으니 연애도 없고, 연애가 없으니 결혼도 없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가끔 외롭고 스산했지만 편하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과 즐겁게 지냈다.
  딸기농장에는 태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카르텔을 형성해 떼로 움직여 다녔다. 옆 농장에서 만원이라도 더 주면 즉시 거기로 옮겨 갔다. 그들이 출근하지 않으면 딸기나 상추를 딸 수가 없었다. 사람의 손으로 하나씩 따줘야 하는 딸기와 상추였다. 머나먼 이국에 와서 막노동을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기에 예고 없이 농장을 떠나도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우즈벡 사람이나 키르기스 사람들은 건축 현장에서 막노동을 주로 했고 평도 좋았다. 태국인 노동자들이 몽땅 떠난 어느 날, 인력시장을 운영하는 선배한테 부탁해 급하게 데려온 노동자가 우즈벡 남자와 키르기스 남자였다. 우즈벡 남자는 노르지예프고, 키르기스 남자는 자파로프였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줄여서 ‘노르’와 ‘자파’로 불렀다.
  막노동으로 다녀진 투박한 손길에 딸기가 많이 상했지만 그들의 우직함에 마음에 들어 컨테이너를 사다 숙소를 만들어 함께 살자고 했다. 그들은 돈을 아낄 수 있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키르기스어와 우즈벡어가 함께 어울려 잘 지냈다. 키가 큰 노르는 백인에 가까웠고, 중간 키의 자파는 몽골인에 가까웠다.
  하루 일이 끝나면 그들은 멀리 있는 아내와 자식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스마트폰 영상에서 만나는 가족들과 우즈벡 말과 키르기스 말로 주고받는 그들의 사랑은 눈물겨웠다. 중앙아시아의 평원이나 고원에 있는 작은 마을을 떠나올 때 갓 태어난 딸은 벌써 세 살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고향에 가지 않았다. 버는 대로 고향의 아내한테 부치고 그들은 검박하게 하루를 견뎠다.
  어느 해, 딸기 출하량이 적어 값이 두어 배로 뛰었을 때 우리 농장의 딸기는 풍년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 둔 벌통에는 꿀이 가득 찼다. 꿀벌이 딸기꽃에 앉아 빙글빙글 맴을 잘 돌면 딸기가 보기 좋게 영글어갔고, 대충 돌거나 돌다가 말면 딸기가 찌그러졌다. 벌통의 꿀을 수확하면 노르와 자파에게 주었다. 일종의 보너스였다.
  노르는 티무르 황제와 사마르칸트며 부하라를 자랑했고, 자파는 이식쿨 호수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고향에서 양이며 야크를 치는 유목민이었고, 한국에서는 일터를 떠도는 유목 노동자였다. 그들의 이동하는 권리를 나는 존중했다.
  딸기 풍년으로 돈을 번 그해 봄, 비닐하우스 안에서 상추는 쑥쑥 잘도 자랐지만 약관에 내는 가격은 형편없었다. 약관에 상추를 내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노르와 자파는 놀면서 월급을 받는 게 미안하니, 농장을 떠나 건축 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착한 무슬림으로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할랄식품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아무리 꼬셔도 삼겹살은 냄새까지도 피했다.
  “노르, 자파 이리 와.”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상추밭을 뒤로 하고 컨테이너 숙소 앞 작은 평상에 우리 셋은 마주 앉았다. 노르와 자파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농장에 일이 없으니 떠나야 하는데, 숙소까지 제공하는 일터는 거의 없었다. 유목 노동자한테 숙식 제공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사마르칸트와 이식쿨 호수에 가지 않을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노르와 자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농담.” 자파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사장님 쵸큼 나빠. 고짓말 마.” 노르가 내 등을 툭 쳤다.
  “농담 아니고,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내가 진지하게 나오자 그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상추, 오떠케 해?” 자파가 비닐하우스 안의 상추를 가리켰다. 돈이 되지 않는, 탐스럽게 자란 상추를 보니 속이 상했다.
  “그냥 두지 뭐.”
  그렇게 해서 즉흥적으로 농장을 떠나 노르의 고향과 자파의 고향에 가기로 했다. 먼저 우즈벡의 노르의 고향에 들렀다가 노르를 두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가서 총알택시를 타고 키르기스 국경으로 가자고 계획을 짰고 실행에 들어갔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부하라에서 이틀을 보냈다. 4세기경에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여 왕국을 세웠던 천년의 골목길에서 미서를 잠깐 생각했다. 조로아스터는 차라투스트라다. 차라투스트라를 사랑했던 오래전 유목민의 도시. 칭기즈 칸의 호라즘 정벌 때도 파괴되지 않았고 그 후 여러 번의 전쟁에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하라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부하라의 깊은 골목에 있는 식당에서 나와 노르 그리고 자파는 웃고 떠들었고 춤추고 노래했다. 고향에 돌아온 유목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행복과 설렘이 가득했다.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까지 낡은 택시를 탔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답게 아무르 티무르의 유적이 곳곳에 널린 도시였다. 오전에 아무르 티무르의 무덤에 갔다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바지를 걷어 올린 개구쟁이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골목은 깊었고 길었다. 그러다 불쑥 낡은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그곳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축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은 잔뜩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맨발로 뛰어들어 공을 찼다. 아이들은 쉽게 곁을 내주었다.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총알택시를 타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 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파는 샤슬릭도 사 먹었다. 국경에 있는 출입국 사무소를 통해 키르기스로 넘어갔더니 자파의 친구들이 대접한다고 벤츠 승합차를 대기해 놓았다. 승합차를 타고 예약해 둔 파크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 곧장 시내 음식점으로 갔다.
  음식점에 갔더니 무슬림이 아닌 친구들이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그들은 귀한 친구한테만 대접한다는 말순대를 내놓았다. 말순대는 너무 비려 비위가 상해 헛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헛구역질을 참아냈다. 그들의 환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말순대를 두어 점 더 먹었다.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보드카로 간신히 달랬다.
  “자파.”
  친구 중의 하나가 자파한테 무어라 길게 말했다. 자파는 그 말을 들으며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자파, 뭐라는 거야?” 내가 한국말로 물었다.
  “이 친구가 오늘 새벽에 비옷 입고, 대마밭 누벼 좋은 것 가져왔어. 대마 엑기스, 담배에 넣어 피워.”
  “대마? 야, 한국에 가면 걸려! 감옥 가.”
  나는 두 손에 쇠고랑을 차는 시늉을 하며 안 된다고 했다. 자파가 친구들한테 뭐라고 설명했다. 자파의 친구들이 모두 웃었다.
  “사장님, 골초잖아.” 자파가 말했다.
  “담배야 피우지.”
  내 말을 듣고 자파가 친구들과 무어라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자파는 더 놀다가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에 호텔로 오겠다고 했다. 승합차를 타고 파크호텔에 내리는데 자파의 친구가 키르기스 담배라며 호텔에서 피우라고 내밀었다. 나는 담배를 받아 호텔로 들어갔다. 다행히 내가 묵는 방은 흡연이 가능했다.
  샤워 뒤에 팬티 바람으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 중간에 무언가 티딕거리는 소리가 났고 맛도 이상했다. 이상해서 살펴봤더니 담배가 아니라 대마였다. 어린 시절, 대마 피우는 법을 선배들한테 배웠던 게 생각나서 연기를 내뿜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한 개비를 다 피웠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한 개비를 깊숙하게 빨아들였다. 약간 어지러웠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처음에는 이쑤시개 굵기의 파동 하나가 발뒤꿈치에서부터 스르륵 올라오더니 등을 타고 머리까지 이어졌다. 이어 성냥개비 정도의 굵기로 더 커진 파동이 내 몸을 훑으며 올라왔다. 나는 그대로 누워 파동을 받아들였다. 성냥개비 크기에서 볼펜 크기로 파동은 커졌고, 야구 방망이 굵기로 커지더니 축구공 크기로, 마침내 파동은 파도가 되어 넘실거렸다. 침대는 사라졌고, 망망대해의 너울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보였다.
  나는 작은 배에 탔다. 너울과 파도는 쓰나미가 되었고, 작은 배는 쓰나미를 넘어 바다로 나아갔다. 서쪽 바다는 노을의 바다였다. 온갖 색조의 주황이 하늘을 덮고 있는 서쪽 바다를 향해 작은 배는 항해를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작은 배도 사라졌고 오직 나만 존재했다. 나는 작은 배처럼 너울과 파도를 타고 바다를 항해했다. 주황의 색조가 사라지고 보라가 점점 짙어졌다. 검은 바다 위에 별들이 총총했다. 북두칠성 주변에서 느닷없이 미서가 떠올랐다.
  지난 오 년 동안 미서와 주고받은 서너 번의 이메일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가 허공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나는 전화기를 찾아 정신없이 번호를 눌렀다. 비슈케크에서 뮌스터로 신호가 갔고, 오래지 않아 ‘할로’ 하며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미서, 미서, 미서’만 중얼거렸다. 남자가 독일어로 무어라 하는 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잠시 뒤에 ‘여보세요’라고 미서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자파가 왔다. 이식쿨 호수 근처의 고향으로 갈 준비를 끝내고, 나를 깨웠다. 내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머리는 맑았고 속도 편했다.
  “사장님, 가자.” 자파가 말했다.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미서한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사로잡혔다.
  “자파, 미안한데. 공항으로 데려다줘. 네 고향에는 다음에 갈게. 꼭, 약속.”
  “사장님, 쵸큼 나빠.”
  자파는 나를 비슈케크 공항으로 데려다줬다. 비슈케크 공항에서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타슈켄트에서 가장 빨리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너무 서두른 탓인지 비행기에 타고서야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다시 뮌스터, 기차에서 내린 나는 후회했다. 어쩌자고 여기를 다시 왔단 말인가? 미서를 그리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기껏해야 이메일만 서너 번 주고받았고, 마지막으로 보낸 답신에 미서는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상처도 없었다.
  천천히 쾨니히슈트라세를 걸어 구시가지로 향했다. 미서와 어떤 약속도 없이 왔기에 조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천천히 걸었다. 아침에 파크호텔에 왔다가 깜짝 놀란 자파를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미친놈인지도 몰랐다. 미치지 않았다면 비슈케크에서 뮌스터까지 날아올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디 즉흥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문득 비닐하우스에서 굵고 긴 대궁으로 자라나고 꽃까지 피울 상추가 생각났다.
  될 대로 되라지, 지금에 와서 어쩌겠어? 그래도 전화는 한번 해봐야겠지.
  나는 구시가지에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러다 어느 한적한 공원 옆에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미서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는 갔지만 어떤 응답도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주변을 십여 분 정도 산책하다가 다시 전화기로 돌아왔다. 발신 신호는 저 멀리 우주로 가버릴 정도로 길게 울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시내를 배회했다.
  종교전쟁 때, 저 새장 같은 곳에 적의 장군이나 목사 혹은 신부를 가두었대. 개신교가 이기면 신부를 가두고, 구교가 이기면 목사를 가두는 식이었지. 저기에 가둬두면 새들이 와서 뜯어 먹었대. 전쟁이란 참 무서워. 살아 있는 사람을 새들이 쪼아 먹게 만드니…….
  미서의 짧은 이야기를 듣고 진저리를 쳤던 기억 속으로 나는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호텔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을 찾아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공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처음에 미서한테 전화했던 모퉁이를 찾아 공중전화로 갔다. 끝내 무응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호텔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어가는데 공원 벤치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미서가 보였다.
  쓸쓸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 미서를 보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가만히 미서한테로 가서 그 앞에 섰다. 미서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궁금하지도 않은지 고개도 들지 않고 멍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서야.” 내가 그 이름을 불렀다.

  미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점점 눈이 커졌다. 미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너한테 전화했었어. 안 받길래 호텔로 가려고 했지.”
  “응, 여기에 있으니 당연히 전화를 안 받지. 근데 여긴 웬일로?” 미서가 말했다.
  “그냥, 너 보려고 왔어.”
  “너는 여전히 싱겁구나. 언제 가려고?”
  “내일.”
  사실은 내일이 아니어도 좋았다. 모레면 어떻고 글피면 어떤가?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일이라고 대답했다.
  “이 근처에 호텔이 있으면 잡으면 좋겠는데.”
  “호텔은 왜? 집으로 가자. 시내에서 좀 멀어. 버스 타고 한참 가야 해. 에밋도 없으니.”
  미서와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떨어진 어느 주택으로 갔다. 미서는 에밋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에밋의 이혼 절차가 아직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곧 결혼할 거라고도 말했다. 미서의 말에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 들었다.
  “술 마실래?”
  “응. 한잔하지 뭐.”
  “이 집 지하실에 와인이 엄청 많아. 비싼 와인도 꽤 있는데, 그거 마시자.”
  미서가 지하실에 가서 와인을 가져왔고, 곧 안주로 삼을 에그 스크램블을 만들어 왔다. 나는 에밋에 대해서 끝내 묻지 않았다. 다만 좋은 사람이기를 빌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기다리는 게 싫었어. 이상하게도 내가 기다리면, 온다던 사람들은 꼭 늦거나 어긋나더라. 기차역에서 사흘을 기다린 적도 있었어. 킥킥, 기차역 다방 앞에는 칸나꽃이 붉었지. 칸나꽃을 보고 보다가 그만 일어섰어. 그 후로 누구도 기다려 본 적이 없어. 기다림에 지치기보다는 먼저 떠나는 게 좋아졌어. 킥킥, 그 칸나꽃 때문에. 그런데 에밋은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어. 사랑과 동시에 곧장 같이 살았어. 손가락질이 많았는데 킥킥, 비난은 두렵지 않아.”
  와인을 다섯 병쯤 비웠을 때, 미서가 말했다. 새벽녘에서야 나는 거실 소파에 쓰러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미서가 라면 수프를 뜨거운 물에 타서 내밀었다.
  “해장으로 딱 좋더라. 뜨거우니 조심해서 마셔.”
  머그잔에 담긴 라면 수프 물을 후후 불어가며 조금씩 마셨다.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속이 풀어지며 해장이 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버스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아침에 보는 미서의 집은 아늑해 보였다. 오래되었지만 단아한 벽돌 건물과 잘 가꿔진 정원에 참새들이 날아와 지지배배 노래를 불렀다.
  어떤 포옹도 없이 나는 기차에 올랐고, 미서는 플랫폼에 섰다. 차창으로 보는 미서는 참 작아 보였다. 겨우 플랫폼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저토록 외로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내리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 안의 나를 향해 미서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한껏 돌려 미서를 바라보았다. 미서는 점점 작아졌다.

*

  티그리스강 변의 황토 언덕에서 바그다드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지나간 폐허의 메마른 풍광들과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이 고대의 유적 위에 흐르고 있는 도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시간의 지층 속에 묻혀 있고 지금은 전쟁의 흔적이 더 많은 도시에, 나는 미서를 데리고 왔다. 미서와 나는 서로에게 불립문자였다. 서로의 관계에서 문자도 없고 기호도 없고, 사랑도 없고 우정도 없었다. 없고 없었으므로 여기에 있다.
  보스턴백에서 미서를, 미서가 지상에 남긴 뼛가루의 일부를 꺼냈다. 미서는 결혼 생활을 길게 하지 못하고 갑자기 얻은 병으로 죽었다. 암이 몸에 뿌리를 내린 뒤 일 년 만에 미서는 허무도 없고 적멸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 미서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나는 가족의 양해를 얻어 화장한 뒤의 뼛가루를 조금 얻었다.
  미서는 여기에서 에밋과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떠났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황토를 파헤쳤다. 그리고 거기 시간의 지층 안에 미서를 묻었다. 미서는 이름 그대로 미륵의 서쪽으로 떠났다. 딸기를 심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필자 약력
정도상 프로필 사진.jpg

1960년 출생. 1987년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1988), 『아메리카 드림』(1990), 『실상사』(2004), 『모란시장 여자』(2007), 연작소설집 『찔레꽃』(2008)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그대여 다시 만날 때까지󰡕(1991), 『열애』(1995), 『누망』(2003), 『낙타』(2010), 『은행나무 소년』(2012), 『마음오를꽃』(2014) 등이 있다. 동화로는 『붉은 유채꽃』(2004), 『돌고래 파치노』(2006) 등이 있다. 5·18 40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 『꽃잎처럼』(2020)을 발표했다. 제17회 단재상, 제25회 요산문학상, 제7회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