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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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로마 이야기

평론: 문종필

'불안'을 안고, '불안'을 품고

문종필(문학평론가)

  소설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의 『로마 이야기』(마음산책, 2023)가 국내에 최근 번역·출간되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처음에 알지 못해서 청탁이 오기 전까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청탁이 온 후에야 그녀의 삶과 문학에 대해 천천히 느리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줌파 라히리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경계인(디아스포라)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는 어떤 존재일까.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곳에 오래도록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는(했던)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는 능동적인 이동과 수동적인 이동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가로부터 추방당하는 존재일 수 있고, 또 비슷한 맥락에서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등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출생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해외로 버려진 존재도 이에 해당한다. 몇 년 전에 개봉한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1)의 주인공들이 이에 속하고, 최근에는 탈북민 이야기를 다룬 송중기 배우의 주연 넷플릭스 드라마 〈로기완〉(2024)의 이야기도 이런 삶과 무관하지 않다. 해외로 입양되어야만 했던 입양아의 삶을 그린 그래픽노블 작가 전정식의 『피부색깔=꿀색』(2013)과 『베이비 박스』(2023)도 이 범주에 들어온다. 제정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소수민족, 노동자에 대한 약탈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야만 했던 우리에게 친숙한 미술가 마크 로스코 역시 자기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니 경계인이나 다름없다. 안타깝지만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재일 조선인 고(故) 서경식 선생님의 삶도 이 범주에 들어온다. 앞서 소개한 작품의 일부 주인공들은 타국에서 병아리감별사로 일하거나, 거리에 버려진 병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화장실 구석에서 삶을 이어나간다. 이들은 직업 선택 권한이 없을뿐더러 머리카락 색이 검다는 이유로 늘 괴롭힘 대상이 된다. 이유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나열하고 있으니, 내가 접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디아스포라 개념을 느슨하게 확장해 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서 확인되는 여러 흔적이 이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과 장소를 이동해야만 하는 사람 대부분이 이들과 다르지 않으니 그렇다. 자신에게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익숙하고 편리한 분위기를 등지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 자체가 곤혹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곤혹의 정도가 더 지독하거나 덜 지독하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도 마찬가지다. 나는 매일 인천에 있는 신포시장을 지나 차이나타운 근처를 배회한다. 이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내 귓속에는 종종 낯선 언어들이 들리는데, 이들의 사연을 추적하다 보면 디아스포라로 명명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림자처럼 오랜 시간 인식되지 못한 채 곁에서 존재했었는지 모른다. 이들의 존재가 독특하거나 유별나거나 특별한 존재라기보다는 잠시만 고개 돌리면 우리와 함께 힘겨운 삶을 견디고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견딘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살아가기 위해 버티는 절박한 사연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구별 짓기는 어리석다.

  줌파 라히리 소설 자체가 특별한지는 모르겠다. 감정이입하고 읽으면 좋지 않은 문학이 없고, 다양한 장르와 매스컴을 통해, 경계인의 삶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알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줌파 라히리와는 다른 경계인의 문학에 대해 ‘차이’를 운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일 수 있지만, 그 문학이 빛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별 짓기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 당대의 의무이고, 여전히 편견과 혐오가 작동하는 뼈아픈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경계인의 문학은 끊임없이 자랑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문학이 괴롭고 즐겁고 획기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고 불만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뭐랄까. 이야기가 넘치는 시대에, 무수히 많은 영상매체와 문학이 아닌 여러 다른 장르에서 쏟아지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와 견줄 때, 흥미 품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동시에 했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쓸까. 이런 이야기가 흥미 있을까. 너무나 뻔한 이야기는 아닐까. 이것인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다른 형식의 조건을 생각해 볼 수 없을까. 디아스포라의 삶도 다양한 모험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작가로서의 변신을 도모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줌파 라히리의 책을 번역 출간하는 ‘마음산책’이라는 출판사가 과거의 화려한 작가의 인지도만을 겨냥해 관성의 힘으로 계속해서 홍보해 책을 판매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출간된 줌파 라히리의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나 입장을 적기보다는 그녀의 삶 자체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소설과 에세이 쓰기를 꾸준히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질문 자체를 해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글쓰기가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삶의 시간을 애정 있게 바라보면 ‘문학’의 표정은 하나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상징이라면 지루하지도 탑탑하지도 덜 매력적이지도 않다.

  줌파 라히리는 세 개의 언어를 횡단한 사람이다. 앞서 소설 형식의 변주를 이야기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계속해서 언어를 횡단한다. 횡단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언어 벵골어는 나의 뿌리이고, 이탈리아어는 도착점이다. 두 언어 모두에서 나는 약간 못생긴 어린아이 같다.”(「삼각형」) 1) 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여기서 벵골어와 이탈리아어 사이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언어는 바로 영어다. 그러니까 줌파 라히리는 벵골어에서 영어로, 다시 영어에서 이탈리아어로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문학적 정체성을 바꾸며 모험을 시도했다. 물론, 내용의 측면에서는 디아스포라만이 응시할 수 있는 틈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언어만큼은 그녀에게 파괴적인 모험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법과 구문이 당신을 바꾸고, 다른 논리와 감정으로 이끌어 줄 겁니다.”(「변신」) 2)

  줌파 라히리는 동료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로 말에 공감하며 “변신은 격렬한 재생 과정, 죽음이요 탄생”(「변신」) 3) 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이러한 시도와 모험은 문학적 소재의 형식적인 측면을 넘어, 존재론적인 측면 자체에서도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갱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모국어를 버리는 것을 넘어, 익숙한 영어마저도 버리고 이제는 이탈리아어로 문학적 활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실제로 실험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와 소설책을 이탈리아어로 출간하고 있으니, 책 출간만을 놓고 본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직 그녀는 작가로서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시간을 내다본다면 그녀의 이행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이 목소리를 단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언어의 언어의 언어를 반복하는 일이 생각처럼 편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쓰던 언어를 잠시 묶어 두고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나의 문화와 존재를 바꾸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긍정적인 면에서 내 피부에 기록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입히는 것일 수 있으나, 이 행위 자체가 마냥 즐겁지는 않다. 습관의 영역에서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두려움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이주한 줌파 라히리의 부모는 벵골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설가의 부모는 벵골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자기 뿌리를 잃어버리는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이다. 가깝게는 식민지를 겪었던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어학자들이 모국어인 한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도, 시인들이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고 한글로 작품을 썼던 것도 뿌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고 마음 편한 나의 언어를 잠시 밀어두는 행위는 불안과 위험을 내재한다. 그런데 줌파 라히리의 경우는 벵골어를 뒤로한 이후, 지독하게 연습했던 영어가 다시 자신의 언어가 되어가던 찰나, 그 언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문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불안’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불안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이 빈 공간에서, 이런 불확실에서 왔다. 빈 공간이 내 원천이요 운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빈 공간에서, 이 모든 불확실에서 창조적 충동이 나왔다. 액자를 채우고자 하는 충동이”(「삼각형」) 4) 라고 말이다. 그렇다. 그녀의 문학적 출발점은 이처럼 텅 빈 공간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빈 공간을 채우고 꾸미고 갱신하는 것이 그녀에게 문학이자 놀이이자 예술인 것이다.

  줌파 라히리의 문학에서 의도적인 ‘불안’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생각된다. 자신의 작품 활동과 관련이 있는 책 표지에 관해 쓴 에세이집에서 이러한 사실을 재치 있게 적고 있다. “내 이야기의 대부분이 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며 그래서 갠지스강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데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내 표지들」) 5) 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줌파 라히리가 오랜 시간 활동했던 배경이 ‘미국’이었고, 그랬던 탓에 자신의 이야기는 미국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 출판사 쪽에서는 “신비한 분위기의 인도 궁전 사진”(「내 표지들」) 6) 을 작품 표지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소설가에게 직접적인 ‘불안’을 제공한다. 책의 표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옷을 입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살아 있는 표지, 죽은 표지, 완벽한 표지」) 7) 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런 개성과 자유의 영역을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으니 말이다. 즉, 내면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는 불안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은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시선으로까지 번진다. 자기 고향과 언어를 품에 안지 못하고 다른 곳에 도착했을 때, 과연 사람들은 편견 없이 그 사람의 고유한 개성과 숨결을 느끼며 대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당당할 수 있을까. 이처럼 ‘불안’의 요소는 그녀의 문학에서 다양하게 작동되는 엔진이다.

  2024년에 쏟아지는 동시대의 수많은 작품이 여전히 이 지점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으니, 소설가의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답은 못 하겠다. 세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이 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마음이나 인식을 위한 발전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파이가 적어서 이렇게 서로를 지독하게 구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시선과 편견 속에서 저 멀리 이국땅에서 건너온 디아스포라는 약체 중의 약체가 된다. 타국의 언어를 모르니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고, 과거 자신의 나라에서 명망이 높다고 한들 새로운 공간과 장소에서 그런 기억과 흔적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가 줌파 라히리는 이런 경험을 오랜 시간 담담히 이겨냈고, 이런 불안의 힘으로 자신의 문학을 무기 삼아 지금껏 작업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런 불안을 언어 횡단이라는 다소 위험한 방식으로 과감히 몸을 더 멀리 내다 놓기도 한다. 이런 이행 자체가 국내에서 줌파 라히리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근에 출간된 『로마 이야기』는 뭐랄까. 대단하거나 위대하거나 흥미로운 연출로 여겨지지 않는다. 평범한 재현적 연출로 채워졌다.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틈’의 시선에 해당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조연의 삶이 농축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이유로 이 텍스트에 온전히 침투해 감정을 섞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탈리아어가 한국어로 번역된 사연이 있을 것이고, 여러 언어를 횡단하는 소설가가 이탈리아어로 자신의 문학을 실험한 결과물이 번역된 탓에, 한국어로 느끼는 언어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비겁한 핑계일 수 있다.

“밝은 집은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밝은 집」) 8)

  한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밝은 집은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소설이 그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한 이방인 가족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햇빛이 비치는 공간을 처음으로 마련하게 되지만, 주변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지원받은 집을 포기하게 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 결정 이후, 아내와 아이들은 고향으로 떠나고 작중 화자인 ‘나’만 홀로 이곳에 남아 집 없이 여러 공간과 장소를 떠돌이처럼 배회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비유’와 ‘상징’으로 번진다. 이 지점과 순간과 장면이 줌파 라히리가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장면과 사연을 단순히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배경음악’과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많은 독자와 출판사가 그녀의 문학 읽기를 여전히 즐거워하는 것일 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파괴적인 형식(내용)이 아쉽다. 작가의 애틋한 ‘의도’와는 별개로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를 건축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지점에 대해 자꾸 미련이 남는다. 소설은 ‘이야기’이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1)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마음산책, 2015), 125쪽.

2) 같은 책, 「변신」, 128쪽.

3) 같은 책, 「변신」, 130쪽.

4) 같은 책, 「삼각형」, 127쪽.

5)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내 표지들」, 『책이 입은 옷』(마음산책, 2017), 65쪽.

6) 같은 책, 「내 표지들」, 66쪽.

7) 같은 책, 「살아 있는 표지, 죽은 표지, 완벽한 표지」, 82쪽.

8)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로마 이야기』(마음산책, 2023), 125쪽.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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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계간 『시작』에 「멈출 수 없는 싸움」으로 문학평론을 시작했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를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다.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