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7호
사회주의 국가의 ‘흰 옷 입은 사람’
차성연
▲ 김성휘 시인 © 김혁 작가 제공
김성휘(1933-1990)는 김철, 리욱, 임효원, 남영전, 석화 등과 함께 중국 조선족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했던 1세대와는 달리, 1933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나 자란 김성휘 시인은 1955년 12월 《연변일보》에 「첫 괭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물학적 탄생과 시인으로서의 첫 출발 모두 중국 조선족 자치 구역의 자장 내에서 이루어졌던 데에서,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 정체성이 김성휘 시 세계의 토양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향(한반도)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주 경험의 형상화가 시 세계의 토대가 되는 여타의 디아스포라 시인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김성휘의 초기 작품에는 한민족(韓民族)에서 중국 조선족으로의 자기-인식의 변화 즉 스스로를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위치 지우는(positioning) 과정이 담겨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설치를 거치며 “형제 민족과 언어는 달라도” 1)
중국 땅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사지을 땅을 분배받고 한글을 사용하며 자치주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중국 조선족 시인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정책에 적극 동조하며 당을 찬양하는 시를 창작하기도 한다. 김성휘 시인 또한 「달려라 렬차여」(1957), 「나는 북경에 제일 가고 싶소」(1960)와 같은 시들을 통해 ‘모 주석’을 찬양하거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기대감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에서도 농업을 통해 고향(연변) 땅을 일굼으로써 국가에 복무하겠다는, ‘조선족’ 정체성을 통한 역할 수행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소수민족 우대 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중국 조선족 시에서 민족적 색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시인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으며 김성휘 시인 또한 1년여의 감금 생활 속에서 창작에 제한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 개혁개방기에 이르러 다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김성휘 시인은 『들국화』(1982), 『금잔디』(1985),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고향생각』(1989)과 같은 시집을 발간하며 2)
‘조선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서정적 시편들을 주로 창작했다. 초기 시편들에도 민족 정체성은 김성휘 시의 주요 테마였지만 개혁개방기 이후의 시 세계는 역사성이 깃든 그리움과 애잔함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즉 중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수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그 속에서 끝내 잃지 않고 지켜온 고향(연변)에 대한 애정이 그의 시를 서정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선심을 써서/나에게 선사한 이름이 아니오이다,/나를 키워준 정든 땅에서/내 힘으로 내 땀 흘려 새겨안는 이름이길래//울어도 그로하여 울고/웃어도 그로하여 웃는/모든 기쁨과 모든 슬픔을 낳는 나의 보모/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겪었습니다,//매양 내 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노래할 때마다/나의 눈에 이슬이 맺힘은/슬퍼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입니다.”(「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 1981)와 같은 시들을 보면 간난신고의 세월 속에서 스스로 구성해 온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노동으로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온 자부심이 그 애정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성휘 시의 민족 정체성은 생래적으로 부여받은 한민족 정체성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수행적(遂行的)으로 성취해 온 구성적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김성휘 시인은 ‘중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체제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긴 시간 작품활동을 해왔지만 늘 ‘중국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 시편들을 창작해 왔다.
1) 김성휘, 「나는 북경에 제일 가고 싶소」(1960), 『서정시, 서정서사시선』(중국조선족문학대계 해방후편) 18, 연변인민출판사, 2013, 135쪽.
2) 김은영, 「김성휘 시에 나타난 ‘주체’의 변모 과정과 새로운 주체」, 『한중인문학연구』 21권, 한중인문학연구, 2007, 131쪽.
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2018년 평론집 『쓴다는 것, 이토록 이상한 곳에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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