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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끝─아라카와, 풀을 밟다

이미자

기억의 끝─아라카와*

여름을 좋아했다
백일홍 해바라기 그리고 무궁화
하늘을 올려다보면 빨강 노랑 보라의 향연
반짝반짝 해수욕
오후에 느끼는 상쾌한 나른함

‘냉방’으로 스위치를 누른다
발밑의 고양이와 함께
방에서 우리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라카와 강가를
유키는 천천히 걷는다
조금 앞서가던 어머니가 멈춰 서서
괜찮다며 손을 흔들며 웃는다
공장의 점심시간 서두르지 않아도 돼
강바람에 잠시 몸을 맡긴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스커트가 날려 들춰진다
치마를 누른다 다시 들춰진다
“유키야”라고 어머니가 부른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 엄마인 유키를
무슨 연유였을까
어머니는 젊었을 때 바다 건너
아라카와 마을에 왔다고 한다
실제 이름을 어머니는 몰랐다
흰 양산이 흔들린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옮긴이 주>
*아라카와(荒川): 사이타마(埼玉)현에서 시작하여 도쿄도를 흘러 도쿄만(湾)으로 흘러드는 하천. 일제강점기 일본에 건너간 많은 조선인들이 이 하천의 다리 아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풀을 밟다

노츠다 공원*은 어디나
온통 무성하게 뒤덮인 풀 풀 풀
이제 막 9월이 되었다
‘풀베기를 연기합니다.’라는 벽보

지독한 무더위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풀이 허리까지 자란 초원을 걷다가
깊은 풀의 바다에 가라앉은 벌레들을 발견했다
몇 개의 아는 이름을 세어본다
작고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의
그것들의 이름을 나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이 얼마나 작고 가여운 생명체인가

풀을 밟을 때마다 내 발바닥에서
뜨겁게 튕겨내는 풀의 힘이 느껴진다

<옮긴이 주>
*노츠다(野津田) 공원: 도쿄도 마치다시(町田市)에 있는 드넓은 종합공원. 주변에 다마(多摩) 구릉이 있어 자연 풍광이 아름답다.

번역정보

번역: 한성례 (일 → 한)

필자 약력

1943년 도쿄 출생. 도쿄조선고등학교 졸업. 1965년 호세이(法政)대학 영문과 졸업. 시집 『아득한 둑』(2000)으로 후쿠다마사오(福田正夫)상을 수상했다. 그 외의 시집으로 『갈빗집 번창기』(2006), 『약수를 뜨러』 (2014), 『달밤과 터널』(2022)이 있다. 문학지 《땅에서 노를 저어라》(2006~2012) 편집위원을 역임고, 시문학지 《이따금》, 《생명의 바구니》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