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_text

4호

구릉에서의 생각, 도천행보

김준태

구릉에서의 생각

한동안 잊고 살던 게 있다. 마음 아지랑이 일면 보이던 곳. 말달리던 고구려 사내는 못 되더라도. 폐병 따윈 두어 번 삼켜내면. 해운대 별하늘 아래 초병도 되고. 육군 전사로, 남도의 사랑과 이별도 알게 되더라는 걸.

밤새 짓던 코볼*을 덮으며 명함 한구석 끄적이던 글자 몇 톨. 북방행 결기 찬 시인은 아닐지라도. 외로웠던 어머니 있고, 우적우적 시대를 걸어온 아버지 있으니. 구원은 아니라도 위로는 되겠지, 슬그머니 나선 무명 시인의 길.

참을 수 없는 울음만으론 턱도 없음을 깨달았던 날. 훌쩍 날아와 이름 없는 세월을 살았다. 있기는 한 것일까, 진짜로 죽고 진짜로 사는 길. 읽는 이 없고 듣는 이 없는 허름한 움막의 숨결만 오래 품었다.

말까지 잊었나, 덜컥 겁이 날 때면. 물가에 나가 오래 서성였다. 다른 건 못해도 살기는 하자. 갈매기는 갈매기대로 청둥오리는 오리끼리. 따로 또 함께 사는 모습이려니. 여기도 전설이 있고 푸르고 쓸쓸한 노래도 있으니.

슬라브 둥근 눈인사는 나도 크고 둥글게. 카리브 총각의 으쓱거림은 허풍 섞인 큰 손짓으로. 읽어주는 이 없는 시는 시대로. 허술한 노래는 더 깊고 나직하게. 두어 번 죽다 살아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구릉에 서니 또 생각이 인다. 더도 없이 덜도 없이 생겨난 그대로 살아가는 거. 귀한 마을 사람이 있고 움킬수록 아롱지는 한글이 있으니. 시로 전하고 노래로 감싸면 그대로가 꿈꾸던 그곳이 된다는 거.

* 코볼(COBOL):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도천*행보(陶泉行步)

결국 고향 말만 남더라
박사도 따고 교수도 해봤지만
어디라도 바람 불면
다시 낙동강, 따라 걷던 사내애 떠오르고

미국으로 캐나다로
영어깨나 한다고 살았는데
갈수록 장단이 일더니
이젠 열었다 하면 시조 가락이네!

어허, 가도 가도 삼천리
그 한 자락 깔면
모를 것도 없고 지울 것도 없더라
눈 감으면 찬연한 그 흰빛

학 날갯짓에 휘어 담기던
강물 번뜩이고
누가 묻든지 말든지
여든 넘으니 고스란히 거기더라며

사철 흔들흔들 빚어내는 그 익살은
뒤주에 쌀 떨어져도 살 수 있지만
마음에 정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 마을 으뜸 풍류남아의 창(唱)

* 도천: 이동렬 교수의 호(수필가, 웨스턴대학, 이화여자대학 교수 역임).

필자 약력
프로필_김준태.jpg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한다. 1994년 《시와 시론》을 통해 등단한 뒤, 시동인 문학 운동에 힘을 더하다 1998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청하문학회 회원이며 현재 《시.6.토론토》 시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현지 문예 강좌와 문학 행사, 출판 제작에 관한 기획과 진행을 담당한다. 저서로 시집 『저 혼자 퍼덕이는 이 가슴은』, 『가스페 블루스』, 『세인트 클레어의 레그맨』, 『시간을 보여주마』, 『고드름 속에 박힌 물소리』, 『검은 물소 한 마리』 등이 있고 산문집 『울타리 없는 정원』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공공누리로고

출처를 표시하시면 비상업적·비영리 목적으로만 이용 가능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 등 변형도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