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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떠도는 말, 시베리아 이민사를 듣는 밤

정철훈

떠도는 말

떠도는 말에게서 내 이름을 처음 들었다
우수리스크청년회관 앞에서
말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말을 붙이던
노랑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고려인 소녀

내 딸이 처음 아빠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내가 마지막인 듯 너를 쳐다볼 때
너는 처음인 듯 나를 쳐다보았다
네 눈동자 속 푸른 하늘은 오직 너의 것

너는 나홋카에서 왔다고 했다

눈이 많이 내리고 북해의 파도가 온종일 밀려드는
해안가 통조림공장에서 일한다고
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금이 갈 것 같은 너의 말

너의 말을 주워들고 입김을 불어줄 때
너는 졸린 듯 하품을 하고

오래전 모국을 떠난 말이
우수리스크청년회관 앞에서
외국어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

시베리아 이민사를 듣는 밤

하바롭스크 모텔 관리사무소 아낙은
밤새 시베리아 이민사를 들려주었다
간간이 계단을 올라온 이국종 투숙객들에게
방 배정을 하고 열쇠를 내주면서

안경 속으로 굴러가는 쓸쓸한 밤의 발음들
책상의 작은 액자엔 처녓적 빛나는 사진
성장한 아들은 흑해 연안 소치에 살고
이혼한 남편은 모스크바에서 성공했다고
조용히 입을 다문 쓸쓸함

아낙은 동양과 서양이 반반 섞여 있었다
살아온 내력을 다 말하지 않았지만
어디쯤에서 운명이 틀어져 여기까지
흘러든 것은 자명한 사실

대국(大國)의 외로움이 러시아 지도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의 유물론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낙의 이민사를 듣는
밤의 적막과 푸른 광기
벽에 붙은 지도의 기나긴 아무르강이
돌아오지 못하는 강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필자 약력
프로필_정철훈.jpg

1997년 《창작과 비평》에 「백야」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가만히 깨어나 혼자』, 『어떤 말이 공기에 스미면』,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모든 복은 소년에게』, 산문집 『소련은 살아있다』,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감각의 연금술』, 『문학아,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 오렴아』, 전기 『김알렉산드라 평전』, 『내가 만난 손창섭』,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백석을 찾아서』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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