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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열여섯 시간, 이름 모를 해변

김송포

열여섯 시간

하루를 벌었다
캘린더 메모를 보았는데 스케줄이 하루씩 앞당겨 있다
결혼 날짜도 모임도 마감일도
분명 토요일이었는데 금요일로 변경된 결혼식이라니
앗, 여기는 LA
한국에서 자란 땅의 나침판에 익숙할 뿐
12시간을 비행기로 달려온 나에게 하루를 선물 받았다
금 같은 시간 벌이에 무엇을 하지
밥을 할까 운동을 할까 글을 쓸까
저 뜨거운 태양의 빛에 고개를 숙일까
캘리포니아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하루가 젊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난 금요일에 결혼식에 참석하고 난 후
토요일엔 지구로 시간여행을 떠날 것이다

혹 너와 내가 만나지 못한다

하여도

하여간

하마터면

하루 일찍 마감일이 촉박해도

횡재한 열여섯 시간에 입을 맞출 것이다

이름 모를 해변

해변 이름은 몰라요 카타리나 섬 근처에 있다는 것 말고 아는 게 없어요 그저
먹빛의 태평양 가까이 바다 옆길을 걷고 있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이 안 나요

두어 번 마주친 남자와 해변의 조각을 무심히 바라보듯 바닷가를 걸어요 미국과 한국의 거리만큼 떨어져 전혀 몰랐던 남과 여

여럿이 걸어도 단둘이 걷는 것 같은 착각

모르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어요. 해변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도 외워지지 않는 문장처럼 알려고 하지 않아요

옆에 있는 남자의 이름도 성격도 나이도 알고 싶지 않아요 우연히 스치듯 스릴 있듯 스미듯 다가오는 이변,

잠깐의 설렘이라고 해요 오렌지 카운티 근처 비치를 거닐었다는 것 외엔 묻지 말기로 해요

이 작품은 웹진 《너머》에 투고되어 선정된 작품입니다.
필자 약력
김송포_프로필.jpg

전북 전주 출생.
2008년 시집 『집게』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시문학》 우수작품상, 포항소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부탁해요 곡절 씨』, 『우리의 소통은 로큰 롤』, 『즉석 질문에 즐거울 락』 등이 있다. 현 ‘성남 FM 방송’ 라디오 문학프로그램 진행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