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호
헤이므지
최국철
양금월이 남편과 함께 아들딸 사 남매를 끌고 두만강 건너편에서 헤이무지로 건너올 때까지, 오 년 후 남편 김장송을 잃고 자식 넷을 홀로 키워야 하는 과부로 남을 줄 꿈에도 몰랐다. 황소같이 튼실했던 김장송은 8월 중복 피밭 김을 매다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벌건 물때가 끼고 침수 식물들이 죽어가는 늪에 고인 물을 기껏 마시고는, 그날 밤부터 “아이구 배야―”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하고 뒷간을 나들며 뒹굴었지만 의원(병원)이 있다는 훈춘 시내가 너무 멀어서 두만강을 건너 홍의리에 가서 한약을 지어와서 달여 먹었다. 스승도 없이 독학해서 한의(中医)를 겨우 깨친 늙은 한의원은 양금월의 말을 듣더니 아랫배에 ‘적’이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김장송 아랫배에 쇳덩이같이 무거운 ‘적’이 점점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소화 계통에 치명적인 무리가 따른 것이다. 왕년에도 여름에 김을 매다가 샘물가로 가기 싫어 늪에 고인 물을 마셔도 뒤탈이 없어 방심했는데 그해 고온 기후로 호수에서 붕어가 떼로 허연 배를 드러내며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썩어가는 물을 기껏 마셨으니 아무리 튼실했던 구척 대장부라도 탈이 안 생길 수 없었다. 김장송은 그 후부터 조청도 녹는 찔찔 끓는 8월에도 아랫배에 누빈 베 이불을 감고 뒷간에 숱한 피똥을 싸다가 지난해 피가을하는 10월 중순에 아내와 네 자식들을 남겨놓고 돌아갔다. 남편이 기화를 당하자 양금월은 앞길이 캄캄해서 헤이무지에서의 농사를 접고 자리를 뜨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원시림이 울창하게 선 백무고원(白茂高原) 삼포리(현재의 연사군 소재)에 있다는 남편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홍의리에서 남편과 갈라져서 경신 회룡봉(지방 이름) 쪽으로 올라간 시동생 김의송을 찾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 두 갈래의 길은 다 아득히 먼 길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편의 고향 삼포리는 너무 먼 걸음이고 추운 곳에서 늙은 시부모 모시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집와서 말 몇 마디도 엮어보지 못하고 갈라진 낯선 시동생을 찾아 회령봉으로 찾아가긴 더 어려웠다. 남편은 자기가 죽으면 자식들을 데리고 삼포리 고향 집으로 들어가라고 부탁했지만 가장 확실했던 이 걸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장송은 젊은 시절 백무고원으로 흘러 들어간 청진(지방 이름) 바닷고기 장사꾼에게서 소금에 절인 ‘고마이(고등어)’를 처음으로 먹어본 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젊은 혈기에 동해에 나가 고기 잡는 어부가 되어 바닷고기 실컷 먹어보겠다면서 둘째 동생 김의송을 끌고 고향 집을 가만히 탈출해서 바다와 가까운 청진을 바라고 내려왔다. 어부 그게 말이 쉽지 아무나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대륙에 가면 살기 좋다는 말에 다시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입구 마을인 서수라리에 왔다가 거기에서 홍의리 출신 양태송을 만나 친구로 사귄 후 다시 대륙과 가까운 홍의리에 들어왔다. 성실했던 김장송은 그때까지 친구가 자기의 여동생과 마주 세우려는 심사도 알지 못했다. 그해에 양금월과 벼락잔치를 치렀다. 말이 결혼이지 시집이 너무 멀어 애 다섯을 낳아도 여지껏 시부모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정도 없었다. 두만강을 건너와도 피농사라 애들이 크면 삼포리로 돌아가 살자고 했던 남편은 결국 헤이무지 원혼으로 남아 버렸다. 살아가면서 남편이 기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잃고 보니 기둥이라는 말로 도저히 표현이 안 될 만큼 무거운 줄 몰랐다. 앞길이 캄캄했다. 양금월이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 좌표가 없어 어쩔 줄 몰라 할 때 곁에서 살고 있던 친동생 양태봉이 나섰다.
“누배(누나) 매부가 세상 떠난 마당에 친가 외가 따로 캘 게 뭐우? 이데느(이젠) 세사에 우리 두 형데밖에 안 남았는데 또 갈라디겠수. 소문에 그쪽은 개마고원과 가까이 닛어 무세(아주) 추븐 곳이라던데 생판 모르는 그기 가서 어떻게 샬자구 기래우? 허술한 피낟 농사라도 따이 있는 헤이무지에 남아서 애덜을 굶기지 않게 하는 게 샬아가는 질(길) 같소.” 양금월은 동생의 권고를 듣고 헤이무지에 그냥 눌러앉아 살아가기로 했지만 홀로 농사해서 어린 사 남매를 굶지 않게 하는 일이 그렇게도 애달팠다. 다행히도 그사이에 큰아들 김유식이 열세 살 소년에서 농사일하는 끌끌한 열여덟 살 청년으로 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피낟 밥이라도 입에 떠넣을 만했다. 이제 김유식의 밑으로 열다섯 살 된 둘째 김유선, 열두 살 된 셋째 김유익 외에도 아홉 살짜리 외동딸 김금녀가 있었다. 남편이 사망할 당시 겨우 두 살 된 막내딸이 이름도 모르는 급성병으로 죽어 오 남매가 졸지에 사 남매로 되었다. 김장송이 죽으면서도 잡았던 손을 풀지 못했던 자식들이 점점 성장하고 있으니 힘든 농사 걱정만은 덜게 되었다. 셋째 유익이도 호미 메고 나왔고 금녀도 집에서 피받 밥과 보리밥까지 지을 줄 알고 있었으니 살아가는 일이 점점 쉬워졌지만 그래도 집에서 베틀에 앉아 마냥 베만 짤 수 없어 날마다 밭으로 나와야 했다.
때는 1924년이다. 6월을 잡으면서 푸르싱싱하게 자라던 돌피는 8월 중순쯤 기지개를 켜면서 이삭이 패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민간에서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 이 시기를 삼복철이라고 한다. 봄보리농사보다 절기가 늦은 피농사는 ‘대풀이’라 부르는 호미씻기가 끝나도 돌피밭은 그냥 매야 했다.
삼복 날씨가 화가마같이 뜨겁다. 헤이무지 피농사꾼들은 선기가 도는 새벽녘에 밭으로 나가서 김을 매고 정수리로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한낮 동안은 훌떡 벗고 두만강에 들어갔다가 숲이 우거진 버들밭 속에 앉아 땀을 들인다.
“너네 네 형데 다 나왔꾸나. 누배두 이제 새끼덜이 낙을 볼 때가 왔구먼.” 밭머리로 외가대기를 메고 송아지를 끌고 지나가던 양태봉이 밭머리까지 나온 김유식 사 남매를 부럽게 바라보며 알은체했다. 이들 네 형제는 하나같이 소 외양간 벽에 얼룩이 가듯 얼굴이 땟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양태봉은 매형이 병사한 뒤로 이모저모 도와주던 친인이다. 암소가 있고 여유가 있는 양태봉은 헤이무지에서 장고봉 동쪽 기슭 아래에 있는 태봉지(현재 태봉지-라고 함)에서보리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늘 자기네 보리밭 머리에 손바닥만 한 신개지를 뚜지고 거기에 보리무(보리밭 머리에 심는 무)를 심고 오는 길이다. 오늘 누나가 아홉 살짜리 막내까지 끌고 나와서 피밭 김을 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다. 누나도 이제 고생이 끝나 가는군……. “지난해에 진 쟝마루 올해 피뇽사 디써(대충) 먹을 만하게 되겠구마.” 두만강에 장마가 지면 그해 농사는 쑥밭이 되지만 그 대신 이듬해부터 상류 쪽에서 씻겨 내려온 흙탕물이 밀려들면서 땅을 비옥하게 걸군다.
“글쎄 그런 거 같소만. 돌피는 띠키(찧기) 심(힘)들어서 그렇티 피 숭그무(심으면) 다른 농사다야 헐쑤.” 양금월이 동생에게 알은체했다.
“뭐 방아야 보리던 피던 다 심들디.” 양인수는 헤이무지에서 제일 유식한 농군이다. 친정 부모들이 선후로 세상 뜨자 유일하게 남은 누나와 매형을 뒤따라 여기로 건너올 때까지 양인수는 농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건너와서 한동안 누나 집에 얹혀살면서 눈치가 보이고 장가들면서 억지라도 호밋자루 잡으면서 어느덧 보리밭 머리에 무까지 심을 줄 아는 실농사꾼으로 되어 있었다.
“피낟 밥은 방기 한방이면 배가 풀쎡 꺼디구 먹구 먹어두 배가 부른 벱 없디므 누배 멩년부터 우리 돌피하구 보리농사 줴뿌리구 지장(기장) 하구 죠(조) 숭구(심다)디 않컷수? 금댱(금당촌, 경신지구에서 제일 먼저 정착한 조선인 촌)에서 언녕부텨 지장 숭군다던데 나두 멩년엔 죠이두 숭구구 지장두 숭굴가 하우 뭐 양관평에서 듕국(중국)인덜이 죠이 농사하는 걸 보이 벨게 아입데 금당 텨형(처형) 하는 말이 지장씨 걱뎡은 하디 말라구 하니까 멩년부터 우리두 지장 숭궈서리 찰떡이라두 쳐먹어 보기우.”
“지장농사 죠농사 죠킨한데(좋다) 가라디(수강아지풀) 당해내기 심들어 그러디.”
“어느 뇽사 쉬운 게 닜슈?”
“외삼추이 더 됴키사 물이 많은 여그메 쳔수댑이 베(벼)농사 하무 더 죠채임둥 보 째기 심들어서 그렇티.” 큰아들 김유식이 끼어들었다. 어디에서 귀동냥해서 들었는지 천수답 벼농사까지 알고 있었다.
“베농사 그게 무세(아주) 심든 농사야 돈뚝에 서서 씨를 줴뿌리구(직파) 짐 잡구 먹는 쉬븐 농사 아이야.”
“맛있다는 입팝(쌀밥) 한함디 한번 콱 묵어 봣스람. 갠데 외삼추이 새박(벽)에 나와 보이 밤새루 질(길) 옆에 선 낭그들에 무슨 죙이(통고문)들이 터덱터덱 붙어 잇덩게 닐본 아덜(일본 사람)이 부텨 놧재이우? 외삼추니 손에 줸 게 그것 같투란데 우린 뭘 썼는디두 모르우.” 김장송이 큰아들에게 명지한 사람이 되라고 유식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구차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아직까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이 되어 있어 이름이 아깝다. 죽어가던 김장송이 “샤능게 심 들어서 죵가를 디킬 큰아들을 셔당(서당) 문 앞 한번 지웃거리디 못하게 해서 까막눈을 맨들었다”고 한탄한 큰아들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망한 열세 살부터 호밋자루를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크면서 점점 우악해졌고 그 나이의 청춘이 그러하듯 고집스러웠고 문맹답게 포악했다. 요즈음 들어 자꾸 강동(러시아 연해 지구)으로 가서 총 차고 싶어 했고 대처에 나가 누군가를 떠박지르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이들 사 남매는 물론 죽은 김장송과 양금월 모두 문맹들이다.
“음 니거?” 양태봉이 흐늘흐늘 늘어져서 ‘고려종이’라고 부르던 한지를 흔들어 보였다. 양금월네 다섯 식구는 아무도 그 내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양관평 닐본 경찰 아덜이 푸름한 아적(새벽)에 마타(마차) 타구 와셔 부틴 것 같드라. 툐쟈비(토자비, 중러 경계비) 쪽에 겨우 한 딥만 샤는데두 니걸 부텨 놓았던데 강동서 웃동네 양관평하구 여기 헤이무지 거텨서 셔간됴 쬭으로 나가는 독닙군덜을 잡거나 알캐주므 둅쌸 두 말 쥬구 그 외 덧돈 오십 원도 언저 준다고 썻더라.”
“뎌런(저런), 그거 덴베 볼 만하우 시방 돈 오십 원이라므 둥굴이(황소) 값인데 그기 다 보리쌸두 아닌 죱쌀 두 말이라므 그게 어디우.” 유식이가 흥분했다. 열 살에도 장가가는 세상에 열여덟 살이라면 과년한 총각이다.
“야 유식아. 모딘 소리 그만 줴치구 날래(얼른) 피밭 김이나 헤베라(매라). 우리 같은 피뇽샤군덜은 니병(독립군)인디 뭐인지 알 게 머이니? 다시는 더러운 그렁 망채(소 천엽) 소리 마라 무깍디 맨숀으루 육컬포(육혈포, 리벌버 권총)를 가진 니병 붓뜰 소리 하다니, 씨가 될 말 니제 다시 내지 마라.” 양금월이 독을 쓰며 큰아들을 나무랐지만 이제 당장 아들을 장가보내자면 돈 몇십 원은 있어야 할 것 같아 큰 걱정이었다. 더구나 당장 소도 사야 한다. 어느 때까지 동생 소 신세를 져야 하는가. 봄에 씨를 파묻을 때까지 가을 농사가 끝나면 보리와 피쌀 팔아 밑천을 챙길 생각이었지만 올해도 7월 장마가 지면서 농사가 시원치 않다. 꼴을 보면 큰아들 장가들 밑천은커녕 그저 굶지 않아도 소득이다.
“그려 넷(옛)날부터 호미깡대 멘 농사꾼은 창과 방패 든 군죨하구 녁끼디(엮이다) 말랬다 했어. 괜스레 앞뒤 모르구 헷뜰대다(나대다)가 닐본 아덜한티 녁껴 변을 당해도 워디에 송세(송사)할 수두 없구 말이디. 아무리 서방(장가) 갈 밑천이 없다 해두 그날만 눈 꾹 감구 지나치면 서방 가게 돼 있디.” 구차한 얼굴에 넌판대기 깔고 세상을 모르는 체하는 재간이 따로 있다. 구차해도 짝이 있고 그날만 지나가면 장가가게 된다. 건장했던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은 김유식은 열여덟 청년답게 키가 구척 같은 장신이라도 아직까지 충동적이다.
“한늬 피밭 뚜질게믄 앗싸리(아예) 육켈포를 찬 니병이라두 되고 싶수 강동에 육켈포를 찬 니병덜이 끓는다는데 거기라도 갸볼가나.”
“이넘이 점점 어벌짝이 커서 맹탕 소리만 텨대냐 그게 농사딧는 넘이 하는 딧이야.” 양금월이 큰아들이 당장 독립군으로 가기라도 하는 듯 야단쳤다.
“기래게 넷날부터 죠운 남뎡네는 또로병(졸병) 안한다 했디 기랠게므 아싸리 쇼금 장시하는 게 더 낫것다. 딥사대(집사대) 뉸만 피하문 니네 형데덜 이 광목 옷두 입을 게구 누배두 물항라 초매(치마)라두 닙지.” 양태봉은 나이 들면서 점점 포악하게 변해 가는 큰외조카가 은근히 걱정된다. 글 모르는 문맹은 가르치면 되지만 성격이 모진 건 고칠 수 없다.
“에이구 아무리 기래두 기렇티 잽히므 멕(목)이 날아가는 쇼금 장시야 어찌하우?” 양금월의 마음도 편치 않다.
“에이씨 니럴바엔 뎐란이라두 콱 텨뎌라.” 어머니와 외삼촌이 자기를 핀잔주자 김유식은 호미를 팽개치고 그 걸음으로 두만강가로 나갔다. 열여덟 살이면 년부 역강, 천방지축이라고 한다. 여름내 땀에 절어 곰삭은 유식의 베천등거리 여기저기 벌집 같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김장송은 생전에 늦가을 감자를 캐면 밭에서 두 가마니씩 지게에 메고 가까운 쏘련(러시아) 하싼 마을에 가서 아마포(亚麻布)라 불리우는 피륙을 바꾸어왔다. 헤이무지와 가까운 하싼 지역에 고려인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인이 많았다. 헤이무지 사람들은 발이 굵고 거친 이 피륙을 ‘마우재천’이라고 불렀다. 거칠어도 집에서 손으로 짜서 질이 좋다는 보름베보다 견딜성이 좋아 피륙은 모두 쏘련에서 물물교환해 얻었다.
“헨니메 또 물괴기(물고기) 겅지러 가우?” 동생 유선이와 유익도 덩달아 따라나섰다.
“임마덜아 니덜은 기슴이나 매.” 김유식은 자기를 따라나서는 두 동생을 사납게 흘겨보았다.큰형이 눈을 부릅뜨자 바야흐로 따라나서려던 세 동생은 멈칫거렸다. 동생들에게는 큰형은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재르 어띠해야 하뉴.” 양금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는 우직한 큰아들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부지중 후― 한숨을 내쉬었다. 양금월만은 큰아들이 길 건너 피밭에서 부모들을 따라 밭김을 매는 황순덕이란 처녀를 보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청년이라면 웅성을 뽐내는 시절이다. 지금까지 기장밥 한 끼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네 자식들이라두 그중에서 장차 가업을 떠맡을 큰아들이 제일 안쓰럽다.
늪 주변에 누룽지 조각처럼 악착스레 붙어 앉은 보리밭에서 보리가 익어갔고 그 속에서 꺽-꺽 해방스러운 꾕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당장 봄보리 누름이 시작될 것이다.
“뭐 아직 열여덥 샬이라 키만 컷지 헴 들디 못해 그러디 서방(장가) 가서 자식덜을 보느라므 어시덜이 지지한 군말 안 해도 디절루 다 알아서 해낼 거니 걱뎡 마우.”
“글쎄 그래무 얼매나 조컷수. 빨리 연분이 터져서리 서방보내므 걱뎡 덜할디.”
“배짝이 따라붙구 새끼 있음 다 죠케 변하기 마련이디유. 나뚜 유식이만 할 때 더했디만두 디금 보우 뇽샤두 할 줄 알구.”
“글쎄 얼시덩 그날이 왔스람 죠컷수.” 양금월은 그제야 얼굴 기색을 풀었다. 장가 보면 잘될 것 같았다.
“긍게(그런데) 죠이를 숭궜다가 가라디가 왕-하므 어띠우?”
“어느 농사 심이 안 드는 게 있수? 그래두 죠를 숭궈야디 죠밥 먹어야 배가 뜬뜬하구 덜 배고프디.” 영금월의 말대로 조 농사에서 ’가라지(강아지풀)’의 폐해에 컸고 그만큼 농부들의 미움을 받은 풀도 드물었다. 농민들은 분명 조씨를 심었는데도 가라지가 자랐기에 조가 변종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뚜 난 피뇽샤 보리뇽샤 죠수.” 건너온 후로 지금까지 피농사와 보리농사만 해왔다. 다른 농사는 언감생심이다.
흔히 가을을 천고마비에 비유한다. 천고마비에서 돌피가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는 곡물이다.이 시기 소들도 가을이면 익은 돌피를 먹고 엉덩이가 피둥피둥 살이 오르면서 앞발로 땅을 헤쳐대면서 영각 소리를 터친다.
하지만 헤이무지에서 살아갔던 변민들의 돌피농사는 초라한 식재료뿐이었다. 깨끗한 앞마당에 헌 삿자리를 펴고 그 위에 널어서 말리노라면 알이 저절로 부실부실 떨어진다. 식량이 떨어져 급하면 큰 가마에 슬쩍 데쳐서 알을 털어내서 건기를 들였다가 해가 설핏 기우는 “보리 저녁”1)
때에 절구에 피쌀을 뽛는다. 분명 햇밥인데도 부실부실 풀기가 없고 입안에 들어가도 착착 감겨드는 맛도 없다. 보리밥이 방구 한방으로 풀썩 배가 꺼진다면 우실거리는 피밥은 먹고 먹어도 배부른 줄 몰랐다. 헤이무지 같은 습지대는 피농사가 제격이다. 헤이무지 사람들은 “돌피, 개돌피, 강피, 물피” 되는 대로 이름하고 개떡 같은 ‘피낟 밥’이라고 폄하해도 어쩔 수 없이 하루 세끼 보리, 감자와 함께 혼식했다.
이때 두만강가로 건너가는 길목에 농사군 차림이 아닌 이십 대 중반의 남녀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름인데도 협화복을 걸치고 어깨에 낚싯대를 걸쳤고 여인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삼복철인데도 얼굴에 연지곤지를 처바르고 있었다.
“헤이무지가 이제 개뙹 냄새가 풍기게 됐구먼.”
“져 청여이(청년) 겨흥(경흥)서 굴러왔다는 투젼군이라구 쇼문난 뉵사길(육사길) 아잉가?”
“그런 것 같슈. 겨흥 바닥에서 죠막손이구 소문났다던데 뎌런 야바위군이 왜 이런 구섹으로 흘러 들어왔지 요상하구먼. 져 청여이 요새 마을에 셔당(서당) 채린다는 말이 돕데.”
“글쎄 그런 말은 돌더라만 아무리 훈댱 없어두 뎌런 야바위군에게 뉘기 자식을 매끼겠수. 월청꾼이 난쟁이 죠와한다구2) 피 숭구(심다)는 농사 하기 싫으이 셔당이라두 채려야 먹구살 것디.”
경흥읍 도박판에서 야바위를 부리다가 북도에서 제일 포악하다고 소문난 길주 도박꾼들에게 오른쪽 식지를 잘려 조막손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육사길이다.
“그래두 여기메 셔당 하나 없으이 뉘긴가 매낄지두 모르디 뭐. 겨흥서 신식핵교 댕겼다구 잴잴 쟈량딜 햇으이 훈당(장)깨나 하겠디므.”
“셔당 채린다문사 죠킨 하것디. 짤랑거리능 신식핵교(管学) 댕겼다구 쟈량딜 해두 내느 네 쟈 셕델 문매이 맨들어뚜 도박재한테 못 매끼겟수. 보라이 니런 일 생길가 봐서리 내 언녕부터 동새에게 훈댱하라 햇댄수? 동새 먹은 글발이 오듁하우 딘서(真书, 汉字)두 알것다 언문(谚文)도 주르르 꿰구 있는데 이참에 져 청여이 나서기 뎐에 동새 먼져 나서우.”
“내가 딘서 알구 언문 알아두 셔댱서 배운 거구 뉵사길은 그래두 관학 나오디 않앗수.”
“신식이던 구식이던 글발은 다 마찬가디것지 헤이무지 딥딥이 쟈셕덜이 아주까리에 개뙹참애(아주까리에 개똥참외, 속담) 달려서 두렁두렁 거려두 어느넴 하나 글발 먹은 넘 없수. 죠선서 살 때 큰아바이(친정아버지)가 동새에게 강 건너가면 농사하디 말구 꼭 셔댱 채리구는 말한 걸 니젓수?”
“훈댱이라…… 글쎄 생각해 보구 셔댱 채린다구 해서 디금 되는 거 아이구 그래뚜 외죠카네 하구 헤이무지 애덜 까막눈 맨들 걸 생각해 보면 캄캄하구먼 굶디 않구 쌀 걱뎡 없이 쟐살자구 강 건너와서 새끼덜에게 글공부도 못 시키믄 안 오기보담 못하디.” 대처에서 관학이란 신식학교가 일어서는 세상에 서당 차린다면 구식 같지만 헤이무지처럼 유축진 변연지구는 아직도 신식학교가 아득히 먼 하늘 끝에 있었다.
소련(러시아)과 가까운 변방지구에 관가나 부자들이 출자해서 꾸리는 관학(신식학교), 러시아어와 한자를 배우는 서원(书院), 천자문, 동몽선습을 배우는 사숙(私塾), 세 가지가 있었는데 사숙을 서당(书堂)이라고 이름하기도 했다. 관학과 서원은 대체로 시가지거나 큰 마을에 섰다면 서당은 시골에 있었다.
“꼭 훈댱하우 고종 디샤여3)에두 쟈셕덜 글공부 시켰는데 니게 먈이 되우.” 헤이무지에 농가가 십여 호가 있었지만 집집마다 자식들이 7월 행두가 달리듯 주렁주렁 벌겋게 달려 있었다. 모두가 글 모르는 문맹으로 부모 따라 밭에 나와 김매고 강가나 가 물고기를 잡았다.
“셔댱 그게 가벼운 닐(일) 아이라서 좀 생각해 보구 누배 짐 매우 쇠를 멕여야 하니까 내 먼저 들어갈게.” 양태봉이 여운을 남기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각 고기 통발을 건지는 체 두만강가로 나갔던 김유식은 휘바람을 휘휘 불면서 피밭 김을 매고 있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황순덕이 밭머리로 나오길 기다렸다 땡볕에 빨갛게 익은 황순덕이 부모 몰래 샐쭉 웃어 보이자 버들가지에 아가미를 꿴 묵직한 물고기 꿰미를 들어보이면서 가져가라는 손시늉을 보이고 밭머리에 슬며시 놓고는 또다시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자기 집 피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버들로 만든 통발에는 하룻밤만 지나도 두어 사발씩 들곤 했다. 바다 입구와 가까운 곳이라 물고기가 유별하게 많았다.
한편, 강가 버들 숲으로 들어간 육사길은 주위에서 자기들을 보는 눈이 없자 희쭉거리며 뒤따라선 옥분의 비단 치마를 들쳤다. 녀인은 남자들의 욕정을 잘 아는 듯 아주 익숙하게 응부했다. 바지춤을 내린 육사길이 씩씩거렸다.
“아지매요 여그가 양관평 맞씀니껴?” 처음으로 들어 보는 말씨다. 이 사람이 남도 사람 아닐까?
“아니디우 여긴 헤이무지란 곳이디유. 넷날엔 두루 양관평이라두 부르는 사램덜은 간혹 있어두 이제 가근방엔 다 헤이무지라구 부르디유. 여기루 올라오기 전 질(길)목 마을이 듕국(중국)사램덜이 살멘서부터 양관평이라고 따로 이름 가뎠지우.” 30대로 보이는 낯선 길손은 먼 길을 걸어온 모양 얼굴에 피로가 꽉 차 있었고 몸이 지쳐 있었다.
“이런, 그렇게두 명념했는데두 길을 외꼈씀더. 아지매요 여그 어디 가서 쌤치물 마실 수 있씀니꺼?”
“하 헤이무지엔 물이사 쌔구 버렸디만두 정작 사램 마실 물은 귀하디유. 샘치물 여그서 이슥이(한동안) 올라가야 하는데.” 양금월이 허리를 펴고 둘째 아들을 불렀다. 남편이 늪에 고인 물을 마시고 세상 뜬 후 매일 자식들에게 갈증 나도 절대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다.
“유선아 이 길손 델고 장구봉(장고봉) 아래 샘치물터로 가거라.” 양금월이 둘째에게 분부했는데도 큰아들 유식이가 자기가 간다면서 먼저 나섰다. 조금 전에 황순덕의 해쭉거리는 웃음기를 보고 돌아와서 김을 매면서 금빛 사념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눈앞에는 온통 황순덕의 빨갛게 웃어주던 모습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 황순덕한테 장가들면 얼마나 좋을까, 길손을 샘물가로 데리고 갔다가 내려오는 걸음에 아무래도 그쪽으로 에돌아 가서 다시 한번 황순덕의 웃음을 봐야지.
길손은 원래 양관평에서 장고봉 북쪽 기슭으로 뻗은 길을 따라 로씨야 첫 마을인 하싼 마을 지나크라찌노(克拉斯基诺)를 거쳐 짜르비노에서 배 타고 울라지 브스또크(海参崴) 돌아가는 걸음이다. 여기로 올라오기 전 마을인 양관평에서 동쪽으로 뻗은 자드락길을 따라 장고봉 뒤 늪 옆에 뻗은 길로 빠지면 되는데도 첫걸음이라 길을 잘못 잡고 헤이무지로 들어온 것이다.
“보니까 무세(많이) 초기든 것 같은데 먼져 물이나 마이구 우리 딥에 들가서 변변찮은 피낱뱁이라두 자시구 가구려. 죠은 음셕은 아이라두 넷날부터 헤이무지 인심은 강동(러시아 연해주)가는 길손을 그져 굼게 보내는 벱이 없었습디비. 유식아 길손에게 물 멕이구 그 쟈리에서 딥에 델구 들가서 피낱뱁이라두 대접시켜 보내자꾸나.” 어머니의 분부를 받은 김유식은 대꾸도 없이 지친 사내를 안내해서 장고봉 아래쪽에 있는 샘물가로 갔다.
“아 쌤치물.” 사내는 샘물을 보자 허겁지겁 엎디어 황소같이 물을 들이켰댔다. “생골”이라 불리는 물새우가 헤엄치는 이 샘물은 물이 맑지 못하고 약간은 탁했지만 헤이무지 사람들은 밭으로 나오면 다 이 샘물로 갈증을 달랜다. 옆에 서서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서 있던 김유식의 눈길이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셔대는 길손의 허리에 멈추어서 떠날 줄 몰랐다. 길손의 허리에서 파르스름한 윤기가 도는 권총 총신이 드러났다.
“음 뎌게 뉵켈포(리볼버 권총)겠구나…….” 기실 사내가 허리에 찬 총은 육혈포가 아니라 중국에서 싸창(匣枪), 목갑총으로 불린 독일제 권총이었다. 이 권총이 바로 1921년 11월 레닌이 홍범도에게 선물로 준 유형이다.
“가만, 양관평 순사덜이 뉵켈포를 가진 니병(독립군) 잽으므 돈 오십 원에 죱쌀 세 말 준다고 했디. 아, 그 돈이라면 작은 쇄지(송아지) 사고도 황순뎍한테 장가들련만…….” 이 낯선 길손 잡아볼까 당장에서 김유식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십팔 세 청년다운 우둔한 욕심을 냈다. 견물생심이라고 총을 발견하면서 총 임자를 포획할 욕심이 들자 잠깐 동안 극렬한 흥분으로 머리가 빙빙 돌아가면서 현훈증을 느꼈다. 필경 이 길손은 두만강에서 마음대로 포획하는 “물괴기(물고기)”가 아니다. 그래도 잡아야 한다. 황순덕의 그 빨간 웃음을 남에게 뺏길 수 없다. 이 길손 나하고 하등의 상관도 없는 낯선 사람이다. 이런 좋은 기회 다시 없을 것이다. 황순덕을 생각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김유식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혔다. 잠깐 사이에 욱해서 눈에 달이 오른 김유식은 길손이 몸을 일으키는 그 시각에 와락 덮쳐들었다. 어리무던한 농사꾼 청년으로 알고 아무런 경계 태세도 없었던 지친 길손은 청년이 짐승같이 덮쳐들자 “와 이러는겨?” 경악한 소리를 지르며 엉겁결에 응전했지만 아무래도 힘에 밀렸다.
아무런 원한도 없이 처녀와 황소를 욕심내고 불시에 덮친 헤이무지 십팔 세 농사꾼 청년과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응전한 삼십 대 낯선 사내는 샘물가에서 원한이라도 있는 듯 엎치락뒤치락 생사 판가름 결투를 했다. 주위에 둘러선 버들 숲속에서 귀뚜라미가 한가롭게 울어댈 뿐 고요했다.
한편 큰아들을 보내놓고 이따금씩 허리를 펴고 샘물가를 바라보면서 큰아들이 길손을 데리고 돌아오길 기다리던 양금월은 두 사람 모습이 바이 없자 불길한 예감이 갈마들어 호미를 쥔 채 급히 샘물가로 달려갔다.
“니런! 니런! 왜 니러냐?” 샘물가에 도착한 양금월이 너무도 경악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샘물가 옆에서 아들과 손님이 피투성이 되어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었다.
“어마이 빨리 이넘 붙뜰기유.” 길손을 타고 앉은 유식이가 씩씩 황소 숨을 내쉬며 소리 질러댔다.
“이넘아 좨(죄) 없는 우리 아덜으 왜 해티는 거디(해치다).” 양 씨는 큰아들이 도움을 청하자 급히 다가가서 불문곡직하고 밑에 깔려서 허리춤을 더듬어 권총을 꺼낸 길손의 어깨를 호미로 힘껏 내리찍었다. 낯선 사내는 어깨를 가격당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권총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기절했다.
그날 저녁 무렵 육사길의 전갈을 받은 양관평 경찰서에서 순사 넷이 마차를 갖고 와서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 있던 낯선 사내의 팔목에 쇠고랑을 채우고 경찰서로 끌고 내려갔다.
“누배 시방 이게 먼 날승내(승냥이) 같은 딧(짓)이우. 총 가딘 사램 붙뜰다니 뉵사길 같은 사램이나 할 딧 누배네가 하다이 코밑에 쌀 떠넣는 사램 할 딧이우. 보디 않아두 강동 쬭으로 다니는 독립군 같은데 그런 사램들을 잘못 다쳤다간 큰 액을 댱하우.” 양태봉이 질책했지만 그 낯선 사내는 이미 경찰서에 넘겨져 있었고 순사들이 잘했다고 김유식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인 뒤였다.
“그런 큰 닐을 왜 나하구 연통하디 않았수. 내가 알았더라면 어깨 어벌(상처)에 된장이라두 발라주고 그 길로 강동으로 돌려보냈을텐데.” 양인수가 크게 성냈지만 이미 쏟친 물이라 더 어쩔 방도가 나지 않았다.
이튿날 경찰서 기별 받고 양관평으로 내려간 김유식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으로 돈 오십 원을 받고 좁쌀 세 말을 수레에 싣고 왔다.
“이늠아 살변내는 끔띡한 딧을 쳐디르고두 그런 돈 받구 웃음이 나오더냐? 그 사램덜이 빼앗긴 나라 되찾겠다구 먼 남쬭에서 강동까디 가서 뛰여다니는데 져테서(곁에서) 도와주지 못할 망정 닐본 아덜에게 붇뜰어 바치다니 누배네 이제 뒤풀이를 어찌 감댱하자구 기러우?” 유식해서 세상을 알고 있는 양태봉은 포상을 받고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누나와 조카를 크게 질책했지만 늦었다.
“무신(슨), 우리 농사꾼들이사 나라 따루 닛수? 뉘기 밥 주므 뉘길 따르는 벱이디 니병인지 독립군인지 우리하구사 먼 사둔덜입디비 배고파서 헐떡이는 사램덜이 우리덜에게 멀 줄게 있다구.”
“이늠아 기래두 사램이란 옷깃은 바로 세우구 살아야디. 너희들은 몰라두 경신년 대토벌 때 훈춘 쬭에서 불쌍한 사램덜이 얼매나 듁어나갔노. 닐본 사램들하구 춍 가진 사램덜 멀리해야 하네라. 그련 끔띡한 사고 당하구 그쬭에서도 가만 있자 안 할거다 가만 닛은 또 잽힐 거니 본때 보이자 할 거다. 그나저나 네가 무사해야겠는데 큰 걱뎡이다.” 단순했던 김유식은 외삼촌의 뒷일 걱정에 듣는 체도 않고 코웃음 쳤다. 여기에서 가만히 한 일 먼 강동에서 어찌 알겠다구.
“닐어버린(잃어버린) 나라를 찾쟈구 닐어났다문 독닙군이구 너텨럼 독닙군 잽으므 그게 마뎍(토비)이디 벨게 마뎍이더냐.” 헤이무즈에서 서당을 차리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양태봉은 그래도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새벽 새벽잠에 빠졌던 김유식은 밖에서 누군가 크게 부르는 소리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뎌련 이 새박에 어떤 미틴 넘이 널 부른다냐?” 자정까지 베틀에 앉았다가 겨우 잠들어 있던 양씨가 잠을 깨면서 투덜거렸다.
“가만 툐쟈비(토자비, 중러 변경 표지석) 건너편 강동에서 너 외삼촌이 걱뎡하던 사램덜이 온 거 아잉가.” 양금월은 새벽에 급하게 큰아들을 찾는 낯선 부름 소리를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삼추이 먼 걱뎡했길래?” 외삼촌의 뒤걱정을 말끔하게 잊고 있던 김유식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뉘기우?” 잔뜩 부풀어 오른 베잠뱅이 차림으로 섬돌 위에 내려서던 김유식은 탕― 옅은 안개 속에서 불시에 울리는 총소리와 함께 광풍에 진대나무 쓰러지듯 섬돌 위에 그대로 쿵― 무너졌다. 울타리도 없는 외주물집 마당 저켠에 허술한 옷을 걸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 둘이 권총을 꼬나잡고 장승같이 뻗치고 서 있었다.
“어굼마 니게 먼 쇗리다냐.” 헤이무지 새벽 상공을 날카롭게 찢어대는 총소리에 와들짝 놀란 양금월은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섬돌 아래에 쓰러진 김유식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마지막 숨을 토하고 있었다.
“유식아! 유식아! 시방 니가 웨 여기 누버 있다니? 아! 아! 샤램 살리우!” 양금월이 큰아들을 가슴에 안고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생떼 같던 큰아들이 불시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자 양금월은 윽―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피를 토하면서 실신해 버렸다.
“어마이.” 어머니 곁에서 곤히 자다가 총소리에 놀란 동생 유선이와 유익이가 일시에 뛰쳐나왔다.
“왜삼추이…….” 그래도 이 와중에서 열다섯 살짜리 둘째 김유선이 외삼촌을 생각해 내고 무작정 외삼촌 집으로 달려갔다.
김유식이 쓰러지자 두 사내는 하늘에 향해 공포탄 한 방 더 쏘았다. 이 총알은 월래 양금월의 몫인데 당신 자식들을 보고 이번에는 용서한다는 위협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두 사내의 등 뒤로 “왜 죄 없는 우리 식구를 잡아서 일본 경찰에 넘겨주었냐!”라는 격앙적인 문구가 따라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헤이무지는 1908년 여름 안중근을 비롯한 동의회(同義會) 의병 부대가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세월은 헤이무지 변민들의 고장난 달구지처럼 덜걱거리면서도 쉼 없이 흘러 1930년대 중기를 지났다.
그동안 헤이무지도 민국 시기의 행정 명칭을 바꾸고 보갑제를 실시하면서 헤이무지툰(屯)으로 바뀌었다. 양인수는 민국 시기에 ‘농서당(农书堂)’ 간판을 걸고 훈장이 되였다. 양인수는 십 세부터 십사 세 사이 어린이들을 선별하여 진종일 수업을 듣는 전일제(全日制), 십오 세 이상부터는 ‘반농반독(半農半讀)’의 반일제(半日制)로 나누어서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는 부모들의 일손을 돕게 해서 큰 호응을 얻어냈다. 양인수는 여기로 건너오기 전부터 학구열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농서당’을 개학하면서부터 나흘 품을 팔아 훈춘에 가서 용정 명동지구에서 교재로 활용했던 『신천초학』 제1권부터 제3권까지 어렵게 구해 왔다. 『동몽선습』이 조선 시대 서당에서 사용한 교재라면 『신천초학』은 1900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이주한 명동 지방 이주민들이 서당에서 사용하던 교재였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파급되어 왔다. 훈장 급여로 보리쌀이거나 피쌀, 감자 같은 곡식을 받아 가정을 영위해 나갔다. 그 후 서당이 구식으로 밀리고 관학이라고 불리던 신식 학교가 들어설 무렵 ‘농서당’ 대신 학교를 꾸리고 자신이 몸소 교원으로 나섰다. 월급은 90전이었는데 학부모들이 감당했다. 양인수 덕에 헤이무지 농사꾼 자식들은 어섯눈을 뜨고 자기 이름자를 쓸 줄 알게 되었다.
양인수가 선손을 써서 서당을 꾸리자 육사길은 피(피쌀)와 보리쌀을 원료로 양조업에 손을 댔다. 쌀이 귀하고 관가의 단속이 심해 가만히 술을 빚는 육사길과 같은 양조업자들을 “밀주업자”라 일렀다. 하지만 보리와 피쌀에 전분 함량이 적었던지 술을 즐기는 러시아인들도 외면했다. 하는 수 없어 옥수수로 술을 빚었다. 그 옥수수 술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러시아와 중국 변계 순라병들의 눈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가 팔아넘기고 이득을 챙겼다. 투전꾼 출신이라 머리 회전이 좋았다. 이때로부터 헤이무지 상공에 옥수수가 발효하는 야싸한 냄새와 향긋한 술 냄새가 돌았다.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는 비료라고 농가들과 옥수수와 물물 교환했다. 헤이무지에 불시에 술주정꾼들이 늘어났다.
큰형 유식이가 변을 당했던 시기, 열다섯 소년이었던 김유선은 어느덧 코밑에 거뭇거뭇한 수염터가 자리 잡고 슬하에 삼 남매를 가진 이십 대 후반 젊은 가장이 되어 있었다.
7월 중순 초복이 지난 이틀 후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선 장고봉 쪽에서 총성이 터졌다.
“모딘 춍소리 나는 걸 보므 또 사램 듁이는 뎐난(전난)이 닐어날 죠딤 아이야.” 총소리에 큰아들을 잃은 후 양금월은 화약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는데 느닷없이 울리는 총소리에 더욱 놀랐다. 자기의 이름 자도 그릴 줄 모르는 문맹이라도 무정한 세월의 강을 건너오면서 인생 경륜을 새겨 온 양금월은 어느덧 자기의 예감을 자신하는 안로인으로 늙어왔다.
며칠 후 날이 훤히 밝으면서 러시아군이 구축해 놓은 장고봉 진지에서 꽝― 탕― 대포와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지고 쉭쉭 두만강 건너편에서 날아온 일본군 산포탄이 장고봉과 기슭에 들어앉은 헤이무지와 늪에 우박처럼 떨어지면서 파편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헤이무지의 초가집들이 삽시에 불타면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 속에서 어른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터졌다.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과 장고봉을 지키고 선 소련군 간의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헤이무지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부르르 떨어댔다.
“저게 무슨 무서븐 쇼리다냐?” 양금월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온몸을 와들와들 떨어댔다. 헤이무지 사람들이 저마다 뛰쳐나와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총소리와 대포 소리를 현장에서 보고 듣고 있었다.
“또 뎐난이 터졌어. 애비야 우리 식구덜이 변을 댱하기 뎐에 강 건너로 피난가야디 않것나?”
“건너편에도 뎐란이 난 것 같은데 강 건너가두 벨루 무사치 않을 것 같꾸마.” 유선이가 잠뱅이 차림으로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을에서 두만강으로 통하는 늪지 옆 자드락길에 우로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 병사들이 밀물같이 누렇게 밀려들고 있었다.
풍진 세월이라더니 헤이무지에서 전쟁이 터질 줄 누가 알았으랴. 말 그대로 마을은 난시판이 터졌다. 마을 장정들과 아낙네들이 아이들이 손을 잡고 동쪽 능선으로 뛰어가고 더러는 늪을 에돌아 서쪽 모래밭으로 뛰어가고 있었지만 마구 날아와서 터지는 포탄에 밀려서 다시 마을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양금월과 김유선 형제들은 섬돌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김유식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양금월은 그때 얻은 ‘가슴떨림병(심장병)’을 앓으면서 밭일은 물론 집에서 베틀에 앉지도 못하고 누가 큰소리쳐도 와들짝 놀라 가슴이 벌렁거려 집에서 겨우 피낟밥이나 하는 정도로 병약해져 있었다. 생때같던 큰아들이 죽어가던 그 참상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다 무고한 길손을 호미로 찍고 경찰서에 넘겨준 그 일이 평생 죄책감으로 남아 괴롭혔고 자기가 벌을 받아 큰병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쉭쉭 날아온 산포탄이 여기저기에 터졌다. 제일 무서운 게 이 산포탄이었다. 게다가 소련 병사들이 진지 위에서 마구 쏘아대는 눈먼 총알이 유탄이 되어 나무 숲속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박히고 있었다.
“메누리는 지금 머함메?” 사색이 되어 있던 유선의 아내 복순이가 헤덤 벼치면서 양금월의 초라한 베개를 강보에 둘둘 싸더니 바로 둘러업었다.
“애기 엎구 피난 가얍디.”
“그게 애기냐? 내 베갠데.” 심장병이 도져 가슴이 떨려도 베개를 용케 알아보았다.
“우리 애기.” 복순이는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부랴부랴 베개를 내동댕이치고 다시 애기를 강보에 감싸고 업었다.
“한제(바깥)에 나가두 맨닐 본 아덜인데 어디루 튀겼슈.”
“애비야 그래두 무승 방툐(방법)라두 생기것지. 벰에게 물려가두 뎡신만 뚁봐루 챙기무 산다고 했네라. 난시에 안즈배 없다고 했소마느 난 딥 구섹에 앉아 듁어두 닐없다만 젊디젊은 너들하구 숀쥬덜이사 샤라야디 빨리 가거라.”
두만강으로 통하는 앞길에 일본군들이 덮여 있어 장고봉 서쪽 능선에 덮인 모래밭을 넘어 세째 김유익이 살고 있는 양관평 쪽으로 빠져 거기에서 다시 강을 건너 경원 쪽으로 시집간 막내 김금녀를 찾아가야 한다.
“재우 재우 챙기우” 어린 딸이 겁나서 와앙― 울음을 터쳤다. 김유선은 막내딸을 들쳐업은 아내 복순이더러 둘째 아들 손을 잡고 먼저 밖으로 나가라 이른 후 가지 않겠다고 뻗치는 양 씨를 억지로 들쳐업고 큰아들을 앞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사이에 서쪽 모래밭 능선에서도 일본군들이 누렇게 밀려들고 있었다.
“마을서 빠디디 못한다므 딥 뒤 토굴에라두 꼼치우자(숨다).” 총소리에 심장이 더 세차게 떨어도 세월을 먹은 양 씨가 달랐다. 그래, 지금은 그 방법밖에 더 없어…… 유선의 머리에는 집 뒤에 겨울에 김치와 감자, 무를 저장할 셈으로 산기슭에 파놓은 토굴이 생각났다. 헤이무지는 산기슭에 선 마을이라 김치움을 만들어도 땅을 파지 않고 평각으로 토굴을 뚫어 김치움을 만들었다.
“빨리 토굴로 피신하기우.” 유선이는 애기를 들쳐업은 아내 복순이더러 큰아들 웅삼이와 둘째 아들 달삼이와 딸 춘애를 데리고 먼저 토굴로 피신하라 이르고는 그 자신은 싫다고 하는 어머니 양 씨를 엎고 급히 뒤따랐다. 이렇게 이들 식구는 토굴에 하룻낮과 하룻밤을 숨어 있었다. 그사이 유선이만은 드문드문 밖으로 나와 돌아가는 형세를 살피며 나름으로 판별했다. 싸움이 점점 더 처절해져 갔다.
더운 여름인데도 산기슭에 파놓은 토굴 안은 선선했지만 겁에 질려 우둘우둘 떨고 있는 이들 일가는 더운지도 추운지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벌써 하루를 굶었는데도 배고픔도 몰랐다. 이들에게 토굴 안은 그래도 안전처였다.
“애비야 너희들은 오늘 밤이라두 걸어서 삼춘(회령봉에 사는 김의송)이 산다는 회령봉으루 피난가거라.”
“그런 말 하디 맙소 어마이는 어찌구 우리들만 피난감둥?”
“난 여그서 듁어두 닐없으니 너들은 떠나거라. 양관평 가면 셋째네를 데리구 겨원(경원, 현재의 새별군)으로 들가라 거긴 괜챙께다.”
“양관평 죡으루 올라가자믄 서쬭 모래밭을 넘어야 하겠는데 거기서두 볼디(세게) 싸움하던데 어떻게 거길 넘어갑디?” 김유선은 식구들을 데리고 토굴 속이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하루 낮과 밤을 토굴 속에서 보냈다.
“니더라가 우리 식구덜 굶머 죽겄다.” 이튿날 아침 양 씨가 손주들을 더 이상 굶기면 안 된다고 피낟밥을 짓는다고 기어이 토굴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자기가 앉아 있으면 토굴에 숨어 있는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지켜줄 것만 같았다.
김유선 가족이 토굴에 숨고 있던 그 시각 집을 잃어버린 헤이무지 사람들은 갈팡질팡 헤맸고 더러는 유선이네처럼 토굴 속에 숨어 들어갔다. 빨리 움직인 민국 시기 촌장 출신 김만복 일가만 유일하게 헤이무지에서 탈출해서 두만강을 건너간 외에 한 사람도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격전장인 장고봉 남쪽 동북쪽 기슭에 바투 자리 잡은 헤이무지 마을은 가옥들이 불타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첫날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지키고 선 장고봉 군사 진지를 빼앗지 못한 일본군은 조선으로부터 숱한 병사들을 출동시켰다. 후속으로 들어와서 마을에 닥친 일본군들이 헤이무지 툰장인 육사길을 앞세우고 집집을 수색하면서 힘센 장정들과 아녀자들을 색출해서 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양태봉네 소학교 마당에 몰아가고 있었다.
김유선네 집은 텅 비고 양금월만 남아서 앉아 있었다. 토굴에서 나오자 바람으로 핍쌀로 밥 한 함지 가득 지어 된장 그릇을 얹어 토굴에 날라 가고 조금 전에 들어왔다.
“유션이와 웅샘이 에미는 벌써 피난 갔씀메?” 총칼을 들고 선 일본 병사 두 명을 뒤에 달고 들어온 육사길이 집 안을 살펴보면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위만주국에서 보갑제를 실시하자 그 기회에 툰장 자리를 꿰찬 양조업자였던 육사길이었다. 헤이무지 사람들은 가짜 툰장이라고 골렸지만 자청해 나선 육사길은 못 들은 체하고 툰장이랍시고 마을길을 오르내렸다. 일본 사람들도 대륙 정책에서 자기네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은 똑똑한 인물로 골랐다. 육사길같이 투전꾼, 야바위꾼 경력도 있고 아편 장사까지 했다는 뒷말이 있는 사람은 후순위로 밀렸지만 양관평 위만 경찰서에서 순사로 있던 동생 육진길이 뒤에서 은근히 힘을 몰아주었다. 황차 일본 사람들도 비상 시기 자기네들에게 충성하면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어서 육사길이 툰장으로 자처하고 나서자 그대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또다시 앞장에 나서야 할 일이 생겼다.
“난시판에 앉으배 없다구 피난이라두 가서 목쉼이라두 겅뎌야디 싯상(세상)이 하두 어디러워셔 워디 편히 살것수?” 심장을 떨어도 양금월은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뎌련 젖멕이 애기 업구 잔밥 셋 끌구 피난가다니 무세(아주) 대단하우. 뭐드라 큰 닐은 아이구 남정네들은 싸움 마당 가서 담가들구 안깐덜(아낙)은 일본군들의 밥을 해야 한대서리 두루두루 찾아온겝디.” 육사길은 그래도 앞잡이로 일본군들을 달고 집집이 찾아다니는 일이 꺼림 칙한지 뒤길을 열어두고 있었다. 툰장이라서 꼭 이런 일을 억지로 한다는 식 변명이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곱게 보지 않는 눈치만은 알고 있었다.
“듁고 상한 닐본 군대 업어 나른다니 그건 듁으러 나가라는 말 같은데 우리가 무슨 지은 좨라도 있는가베.” 아녀자들이 밥 한다는 건 그렇다고 치고 장정들이 피가 튀는 전쟁 마당 가서 죽은 병사, 피를 흘리는 병사를 업고 나른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소련군들의 총과 대포는 눈이 없어 사람 안 가린다.
“난시판에 대들다니 큰 닐 틸 소리.”
“촌구섹에 쳐백힌 늙으니라구 몰아세우디 마우. 피난갔다면 간 게지 왜 이리 캐구 드오?” 오래전부터 육사길을 야바위꾼으로 허술하게 보고 있던 양금월이라 나오는 말이 곱지 않았다.
“뭐 알았씀메 그램 물러가디므.” 집안에서 물러나오는 체하던 육사길은 마당에 나오자 두리번거리다가 집 뒤뜨락으로 가서 토굴 입구 문을 발견하고 일본 병사들에게 슬그머니 가리켜 보였다. 경흥에서 투전놀이하다가 손가락도 잘리고 그 후에도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서 콧구멍으로 고추물을 들이키고 3년 동안 그 미열로 기침을 깇어댔지만, 역빠른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붙어야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극성을 떨었다.
육사길의 밀고로 움막에서 강제로 잡힌 유선이와 그의 아내 복순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등에 막둥이 딸을 업은 채로 애 셋을 양금월에게 맡기고 외삼촌 양태봉네 집(학교 자리) 마당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서 김유선은 헤이무지 남정네들과 함께 죽은 일본 병사들을 업어 나르는 부역에 동원되었고 복순이는 젖먹이 아이를 들쳐업고 아낙네들과 함께 밥 짓기에 동원되었다. 죽은 병사들을 업고 나르는 장정 무리는 육사길이 책임졌고 일본군들의 밥을 해주는 아낙네들은 육사길의 아내 옥분이가 책임졌다. 건달 출신인 육사길을 따라 경흥에서 건너온 여자라 매일 얼굴에 연지곤지 처바르고 다녔고 골이 아프다고 이마에 벌건 부황 자국을 붙이고 살고 있었다.
“뉵툰쟝은 사램두 아니우.” 유선이가 사길이를 흘겼다. 끌려온 후에야 육사길의 밀고로 자기와 아내가 끌려온 줄 알았다.
“뉴선(유선)아 내가 안 가르쳐두 닐본 사램덜은 찾쟈낼끼다. 그때면 워떤 모진 닐이 터딜디도 모르디 목쉼 겅져줄 걸루 알라. 이럴 때면 온순하게 나오는 게 죠을 게다. 괜히 손바닥으로 눈 가리는 딧했다가 빵-하므 모가지가 겅뎡거려. 이 사램덜이 무슨 딧인들 못했니.”
“찝찌레한 소리 티지마우.” 마음씨가 좋은 유선이라도 이쯤 되면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임마 너두 튠쟝 해봐라. 내보담 더 볼디(모질게) 할끼다.”
“군숙한 쇼리 마우. 그 튠쟈이 뉘가 시켜 한 게라우? 지가 죠아서 자처하구 나오군선.” 외삼촌 밑에서 ‘신천초학’을 배워 문맹을 면해도 농사꾼 팔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구음 습관으로 ‘뉴션(유선)’으로 개명되어도 마을 사람들에게 툰장감이라고 이름 올린것린 것만큼 조직력이 있다. 여태껏 “기생오라비 조막손”이라 욕을 먹는 육사길과 종래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날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투 마당에 동원된 김유선의 베 옷에 벌건 피가 얼룩지고 피비린내가 풍겨 복순이가 매일 저녁 빨아주었다. 격렬했던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끝나는가 싶었지만 8월 초순에 들어서면서 양관평과 가까운 사초봉(沙草峰) 쪽에서 헤이무지 사람들이 철차라고 불렀던 ‘PG-42형 탱크’들이 출격했고 하늘에서 날틀이라 불렀던 전투기가 뜨면서 싸움이 점점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내일엔 양관평 쬭으루 넘어오란다.” 육사길의 분부에 따라 이튿날부터 헤이무지 양관평 쪽으로 나가 사초봉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 사체들과 부상병들을 업어 나르기 시작했다. 강제로 동원된 헤이무지 장정들과 양관평에서 징집된 장정들은 누구도 사체를 업길 꺼렸고 부상병들 속에서도 몸체가 작은 병사만 골랐지만 일본군들의 총칼에 위압되어 죽은 병사라도 억지로 업고 뛰어야 했다. 양관평에서 살던 셋째 김유익도 끌려 나왔다. 두 형제는 서로 바라보고 인사도 못했다. 유탄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비행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곁에서 터져도 이들의 목숨은 도박판에 던져지는 주사위 같은 가벼운 존재가 되어 언제 죽을지도 몰랐다. 헤이무지 장정들은 일본군들 몇백 명 죽어 나갔을 것이라고 가만히 수군거렸다.
“뉴션아 여기 팔 상한 병사 있다.” 육사길이 저만치에 서서 소리 질렀다. 급히 다가가 보니 체중이 우람한 병사는 폭탄 파편에 왼팔이 떨어져나가 피를 콸콸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혼자 힘으로 자신이 없었지만 혼신을 다해 업고 급히 내려왔다. 유선의 등에 업힌 병사는 도중에 정신이 들었던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쳐서 절로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내렸다. 땅바닥에 떨어진 병사는 아― 아― 소리 지르면서 자해하려는 듯 수류탄을 더듬거렸다…….
꽝― 아래쪽에서 무서운 폭탄 소리가 터지면서 저만치에서 부상병을 업고 내려가던 셋째 김유익이 비명을 지르면서 종이조각처럼 멀리 날아가 버리는 참상이 눈이 안겨 왔다. 유익아― 부름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상황이 참혹했다.
한편 전쟁 와중에 강 건너 일본군 치중대는 탄약과 먹거리를 끊임없이 공급해 왔다. 전쟁은 양초가 선행한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었다. 헤이무지 집집에서 걷어온 항아리에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 빠진 고사리를 불렸고 아낙네들은 손가락처럼 불어난 고사리채를 끊임없이 볶아야 했다.
“웬 고사리가 니리 만타우?”
“가만봉게 닐본 장관들은 여자탐에 미텨가는 쫄병들이 닐칠가 봐 걱뎡돼서 고사리를 많이 멕힌다우.” 박천봉의 처 만옥이가 복순에게 귓속말로 가만히 속살거렸다.
“듣다 첫 쇼리네.” 고사리가 병사들의 정염을 눚잔힌다니……? 노천에 임시로 만든 화식(火食)간에서 일하던 아낙네들은 그때 처음으로 일본군들의 밥상 사연을 알았다. 일본군들은 병사들의 식사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고 둔감해져 전투력이 하강된다면서 정량제를 실시했다.
점심 무렵에는 산돼지도 올라왔다. 전쟁터에서 억지로 돼지잡이를 했지만 상관들은 병사들이 설사를 한다고 우려해서 돼지비계는 먹지 못하게 했다. 내장 지방과 비계 쪽은 일체 배제했다. 사초봉으로 나갔던 육사길은 이날에는 마을에 남아 있는 늙은이들을 동원해서 돼지를 잡게 했다. 곁을 지키고 섰던 육사길은 일본 사람들은 돼지머리와 내장은 먹지 않는다면서 자기가 가져갔고 허연 비계는 밥하는 아낙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바닥만 한 비계 한 조각을 가져온 복순이는 저녁에 비계를 졸였다가 거기에 풋채소를 볶아 전쟁이 벌어진 후 어쩌다 온 집 식구들이 포식하게 했다.
보리가 바야흐로 누름을 시작하던 시기 헤이무지에 눌러앉아 있던 일본군들이 물러가면서 전쟁이 끝났다.
“여기서 니제 못 샬겠슈.” 헤이무지 사람들은 더러는 두만강을 넘어갔고 더러는 내지로 떠나갔다. 헤이무지에 남은 호가 불과 네댓 호밖에 없었다.
그래도 헤이무지에서 가장 큰 변화는 김유식과 육사길이었다. 육사길은 못 살겠다고 헤이무지를 떠나가면서 버리는 밭을 헐값으로 모조리 사들이면서 어깨에 힘주고 말끝마다 ‘종간나’ 욕설을 하는 지주가 되어 있었고 김유식은 하루아침에 육사길의 머슴이 되어 육사길 말이라면 그저 허리만 굽신거리는 ‘마당쇠’로 되어버렸다.
유선이는 여름이면 두말없이 육사길이네 옥수수 김을 도맡아 매주고 가을 탈곡을 해주었다. 육사길이 아무리 큰소리치는 지주라고 해도 헤이무지 땅이 몇 조각이 된다고 저렇게도 굽신거려야 하는가 황차 유선이는 자기의 땅이 있는 자작농이라 육사길의 소작농도 아니다.
“져 뉴션이가 아무래뚜 뉵사길에게 무슨 쪽쟈루라도 잽힌 게 틀림없어.” 양관평 쪽으로 가서 일본군 병사를 업어 나른 후 하루 사이로 생긴 변화였지만 누구도 이들 간의 사연을 몰랐다. 더욱이 그동안 동네에서 육사길이 유선의 아내 복순이를 욕심내서 찾아왔다가 양금월의 호미 날에 얻어맞고 도망쳤다고 소문났는데도 모르는 체하고 있는 것이 더 요상했다. 아무리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이런 소문이 나면 굼닐거릴 듯도 하건만 죽은 듯 왜 절절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김유선은 툰장 할 사람 소리 들을 만큼 똑똑했고 육사길 앞에서 할 말 못하는 사람 아니다.
“내 한 몸태기 불태워서라두 자 죠막손을 쥑여뿌리련만 니거 원통해서 어찌 세상 살아가뉴.” 양금월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자기를 욕심내서 슬며시 찾아온 육사길에 강한 반항 한 번 못하는 며느리를 쏘아보면서 이를 갈았다.
“어마이 살아가느라므 세상 바꿜 때가 있을 거니 그때까지만 듁어 지내 봅디비.” 격분한 유선이는 자식들이 엿듣을까 봐 큰소리도 못 냈다.
“니제 두고 봐라 내 제 죠막손 불태워 쥑여뿌리디 않나.” 양금월이 통탄해서 가슴을 치며 펄펄 뛸 때까지 정말로 육사길네 집에 불을 지를 줄 상상도 못했다. 어느 날 밤 “불이야” 육사길이 소리 질러서 헤이무지에 남아 있던 몇 집이 동원해서 불을 인차 잡아주었지만 유선이와 복순이는 이튿날 아침에 늙은 어머니가 양관평 경찰서로 연행될 줄 상상도 못했다. 육사길에게 육진길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연줄을 탔는지 경흥에서 여기로 건너와서 양관평 위만경찰서 순사로 근무했는데 육사길은 순사 동생을 바람막이 언덕으로 믿고 큰소리치며 살아갔다. 전쟁이 끝난 후 헤이무지 사람들이 버리는 밭을 헐값으로 사라고 충동한 것도 동생이었고 그중 절반 땅은 육진길의 이름으로 올라 있었다.
“뉵튠쟈이 우리 어마이를 살려주우.”
“니 늙은 에미 그랠 듈 알구 내 언녕부터 딥 지키는 사램 불러왓으니 화르 면했디. 그채이믄 우리 딥 다 태웠을끼구 나두 듁었을 게다.”
“뉵튠쟈이 내 군쇼리 없이 그양 밭닐 다 해줄 텨이 우리 어마이만 거기서 꺼내쥬.” 유선이가 숱한 응낙을 해주며 빌붙어서야 육사길은 못 이기는 체 동생에게 양금월을 풀어주라고 했다. 엿새 동안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양금월은 그해에 사망했다. 생전에 큰아들의 죽음을 보고 다리를 잃은 셋째 아들의 참상을 본 양금월은 죽어서 눈도 감지 못했다.
그렇게 5년 철이 흘렀다. 이 동안 유선이는 자기 일가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닐본 아덜이 니제 영 망할 께다.” 양인수는 작은 헤이무지 마을 훈장 출신이었지만 돌아가는 시국을 알고 있었다.
“소련군(러시아)덜이 쳐들어온다우.”
“닐본 아덜이 망하무 뉵사길두 망하것지.”
“장고봉뎐란 후 어떻게 살았는디 생각만 해두 가숨이 떨리우.”
“쟈섹덜 보구 조금만 참기오.” 부부간은 밤이 되면 이불 밑에서 가만히 속살거리곤 했다.
그해 8월 초 돌피가 이삭을 패면서 바야흐로 거멓게 색을 쓰는 무렵 북쪽 켠에서 쿵쿵 대포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양관평 순사들이 뿔뿔이 달아났다. 헤이무지에 훈춘이 해방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쳇 세상이 바뀐다는 게 말이 쉽지 일본 사람들 얼마나 드센데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나…… 육사길은 자기를 속이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었다.
“올해두 옥쒸 탈곡까지 됴와듈 거디.” 육사길이 술을 담근다고 심은 옥수수 밭머리에 나와서 어슬렁거렸다. 세월이 뒤숭숭하다 보니 집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밭에 나왔다. 요새 밤을 자고 나면 요상한 소문만 들려 온다.
“무시게(무슨 소리라오).” 당장에서 유선의 얼굴 기색이 변했다.
“이 개새끼야 너뚜 소식 처들어 알겠디.” 유선이가 불시에 꽥 소리 질렀다.
“야가? 불시루 왜 니래?” 육사길이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미틴 개가 댕긴다구 쇼문나더니 너뚜 미텻나?” 문득 포악하게 변해 버린 유선이가 겁났다.
“그래 미텻다 이 개새끼야. 닐본 아덜이 망하는 판에 내가 그 양관평 순사 새끼덜으 무세바 할 것 같으야.” 그동안 당하면서 속이 곪을 대로 곪은 유선이는 당장에서 눈에 달이 돋았다. 찾아가서 결판내려던 참에 잘 만났다.
“이 새끼야 쥑여버린다.” 격노한 갈범이 되어 호미를 추켜든 유선이는 몸을 돌려 달아나는 육사길의 뒤통수를 겨누고 힘껏 찍어댔다. 빗나간 호미 날에 어깨를 찍힌 육사길이 아이쿠― 신음 소리를 지르면서 그냥 달아났다. 이 시각 김유선은 포악한 살인수로 변해 버렸다.
날이 어두워 오자 양관평에서 육진길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만히 형을 찾아 헤이무지로 들어왔다.
“헨님 쇼식 못들었수? 여기 눌러 닛다간 우리들두 토벌 맞을 게 뻔하니 빨리 튀기우.”
“헨님 못 들었슈. 훈춘을 빠딘 쏘련 아덜이 대팔령을 넘어 국자가(연길) 쬭으로 밀고 들간다고 했수.”
“왜? 더 안 죠은 쇠식이라도 있나?”
“튄댜 한들 어딜 튀겠니?” 육사길이 어깨 상처로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숱한 피를 흘리고 기절 직전이다.
“지금 38선이 뚫렸다구 북만 쪽에서 도망쳐 온 순사덜과 돈 많은 넘들이 다 튀겨서 남죠션(한국)으로 달아난다오. 일본인 순사덜은 며칠 전에 벌써 강 건너 다 달아났수. 개네덜은 니제 동해 나가서 거기서 닐본으루 달아날 텐데 우리에겐 남죠션밖에 다른 질이 더 없소.” 육진길이 조급한 표정을 보였다. 일본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던 육진길 같은 위만 순사 출신들은 돌아가는 세상인심에 민감했다.
“기러길래 오늘 뉴선이란 애가 미틴게군.” 육사길은 된장을 바른 어깨가 너무 아파서 상을 찡그렸다.
“먼 말이우? 어깨는 왜 그러우?”
“니느 몰라도 된다. 근데 넌 순사딜해서 튀여간다 하더라두 나야 튠쟝한 거밖에 무신 좨가 더 닛어 달아나야겠니. 더구나 우리 경텰(경철, 아들 이름) 겨흥(경흥, 현재 은덕군) 어마이 딥 가 있어 개를 데리고 나가려문 다시 겨흥에 들어가야겠는데.”
“뭐 경텰이두 니제 씽씽 날아다니는 청여이래서 어깨 상한 헨님이 걱뎡이우. 어뎡거릴 새가 없으이 재우재우 나가기우.” 육진길이 재촉했다. 육사길은 이렇게 동생에게 업히고 그 뒤에 간단한 일습들을 챙겨 보따리에 싼 옥분이가 따라나섰다. 이들 셋은 먼저 경흥에 나갔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원산에 나갔다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빠지기로 길을 잡고 밤사이에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갔다.
다행히도 장고봉 전투 후 밭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헤이무지는 타버린 마을을 방치하고 장고봉 앞기슭 아래 늪 앞쪽으로 부락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유선 일가와 그의 처가, 양인수가 제일 선참으로 집을 옮겼다.
헤이무지에도 토지 개혁 사업단이 들어오면서 한간 청산이 시작되었다.
“난 댐이 약하구 가불가불한 사램이라 술 맨들구 건너편에서 도박 놀고 계집질한 죄밖에 없으니 한간이 아뉴.”
“개새끼 한간이 벨게야? 헤이무지서 네 만티 양관편 닐본 경찰서루 펄럭대던 사램 더 있더냐? 내가 상한 닐본 병사 업구 내려오다가 그 화약(수류탄)이 터져 병사가 죽을 걸 니가 고이로 쥑였다구 양관평 닐본 경찰서에 알려 댭아가겠다고 날 쑤셔(협박, 공갈)대서 내가 그동안 해마다 니네 옥쒸 밭짐 매구 가을해 줘뚜 니가 돈 닢 한 푼이라두 줬니?”
이때에야 사건 진상이 밝혀졌다. 육사길이 김유선을 협박한 도화선은 일본군들이 사용했던 ‘태군97형(太军自雷弹)’ 수류탄이다. 이 수류탄은 핀에 고리가 달렸고 전투 시에 고리를 뺀 후 단단한 물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가해서 던지면 그냥 폭발하게 돼 있었는데 김유선이 업고 내려왔던 그 부상병이 자결한다면서 수류탄 핀을 빼고 자기의 철갑모에 부딪쳐서 던진 게 문제였다. 발버둥 쳐서 떨어진 병사 옆에 앉아 헐헐 가쁜 숨을 쉬던 유선이가 멋도 모르고 부상병이 그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게 막은 후 수류탄이 그 부상병 몸에서 폭발했다.
“이늠아 니가 듁였디 닐본 병사 듁인 좨 얼매나 큰디 니두 알재?” 육사길이 어거지를 썼고 양관평 경찰에 알리겠다고 공갈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큰형이 총에 맞아 죽고 그 후로 어머니도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는 걸 보면서 경찰에 끌려가면 인생이 끝장나고 그러느라면 아내와 아들딸 셋도 무사치 못하다고 잔뜩 얼겁을 먹은 유선이는 육사길 앞에서 벌벌 떨어댔다…….
“이노마 그동안 네가 날 가만히 찾아와서 우리 나그네를 감옥 가게 하겠다고 딱딱꺼리메 날 히야카시 햇디. 그래서 우리 시어마이니 딥에 불 딜럿디.”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드러내면서 격앙한 복순이가 불시에 육사길에게 와락 달려들면서 육사길의 얼굴을 강파롭게 할퀴어댔다. 당장에서 손톱자국이 벌겋게 줄쳐 갔다.
“개새끼 오늘 내가 널 쟙아 듁여야겠다.” 유선이가 뛰쳐나와서 육사길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찼다. 5년 동안 억울하게 살아온 게 너무도 원통했다.
“그 뎐란에 우리덜을 억디루 시켜 듁은 닐본 아덜을 메여 나르게 해서 헤이무지 사램더르 얼매나 듁게 했니. 강 건너 튀겼다구 소문내 놓구 왜 여길 또 바라왔니?”
그해 야음을 타서 동생 등에 업혀 남조선(한국)으로 간다면서 두만강 건너갔던 육사길은 이튿날 새벽에 아들을 데리고 경흥읍을 빠져나오다가 육사길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쫓겼다. 세상이 바뀐 강 건너와 대륙에서 육사길 일가가 숨어 있을 데가 없었다.
육사길에게 있어 장고봉 전투 시에 마을 사람들을 밀고하고 일본병을 도와 담가대를 조직하고 부상병과 시체를 메여 나른 게 큰 죄장으로 남았다.
이 시기 육사길은 자기도 ‘독립군’에 공로가 있다고 했다. 그 증거로 ‘독립군’을 팔아먹은 김유식의 정보를 제공해서 ‘한간’을 처단했다고 했다. 그때에야 김유선은 큰형이 죽은 비밀을 알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 후 어느 날 밤 육사길 일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달아나 버렸다. 누구도 이들이 어디로 도망쳐 갔는지 몰랐다.
1909년생인 김유선은 헤이무지가 다시 촌으로 바뀌던 1983년에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네 자식들은 언녕 헤이무지를 떠나 지금은 어디에서 살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
누리를 다 가질 듯 격앙해서 헤이무지에서 세대를 이어 살아왔던 선대들의 족흔들이 비에 씻겨 사라지듯 흔적 없다.
끝
2024년 1월 5일
자택에서
1) 안주인이 식구들의 저녁 준비로 일 밭에서 먼저 집에 들어와서 절구에 보리쌀을 뽛는 저녁 시간대.
2) 월청군 난쟁이를 반긴다는 속담.
3)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함경도의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에 덮쳐든 특대 한재를 이르는 말.
1962년 8월 출생. 중국작가협회 제9기 위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전임주석(회장). 선후로 장편소설 『간도전설』, 『광복의 후예들』을 비롯하여 평전, 소설집, 민속문화 기행 등 11개 작품 출간.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