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6호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과 오사카 이카이노
김환기
일제강점기에 자의·타의적으로 일본으로 들어간 코리안들은 해방 직전(1944년)에 무려 200만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했고, 상업 도시 오사카에 수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 작용한다. 당시 오사카는 중소 영세 기업이 많아 일본어를 몰라도 건강한 육체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지역이라 다른 지역보다 조선인들이 비교적 쉽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1) 제주도민의 4분의 1이 일본(오사카)으로 이주·이동했다는 통계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오사카는 재일 코리안들의 집거지로서 ‘부’의 역사성과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특별한 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1945년 조국의 해방과 함께 코리안들은 약 140만 명만 귀국길에 오르고 약 60만 명은 그대로 일본 땅에 남게 된다.2) 조국이 해방되었음에도 많은 코리안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길에 오르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는 ‘연합국 최고 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가 귀국하는 조선인들에게 지참할 수 있는 짐의 무게(114킬로그램)와 지참금(1,000엔)을 제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GHQ가 코리안들의 귀국길에 짐과 지참금 제한한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 전 재산을 일본에 남겨 놓고 떠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한 코리안들은 정국의 격심한 정치적 혼란에 불안을 느끼고 재차 일본으로 되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해방 정국의 혼란과 맞물린 민족적 비극 ‘제주 4·3 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역사도 있다. 그렇게 해방을 맞았음에도 재일 코리안들은 본의 아니게 식민 지배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현재의 오사카 이쿠노구3)는 이러한 재일 코리안들이 살아남기 위해 역사적, 사회문화적으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특히 오사카의 JR쓰루하시역 주변은 일제강점기 각종 암시장이 유행했고 ‘쓰루하시 국제 상점가’를 형성하며 많은 대륙의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오사카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와 근대화·산업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방직 공장을 비롯해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역할을 했고, 오사카를 관통했던 히라노강과 네코마강을 농업 생산량 확보 차원에서 정비(농지 확보, 도로·수로 건설 등)하면서 많은 조선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곳 오사카에서 재일 코리안들은 살아남으려 일본·일본인·일본 사회를 상대로 지난하게 투쟁했고 생명력 있게 민족적 주체성을 견인해 왔다. 오늘날 오사카의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은 그러한 민족적 ‘부’의 역사성과 굴절된 현대사의 간고함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공간이다.
해방 직후 GHQ와 일본 사회를 상대로 오사카·고베를 중심으로 펼친 재일 코리안 사회의 ‘4·24 교육 투쟁’은 주체적인 민족 교육을 보장받기 위한 간고한 투쟁이었다. 1947년 재일 코리안 사회는 일본 전국에 “초등학교 541개교(56,961명), 중학교 7개교(2,761명), 고등학교 8개교(358명) 교원 1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학교’를 건립”4)해 민족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GHQ는 조선인 학교를 공산당의 온상지로 취급하고 1948년 모든 조선인 학교에 대해 폐교를 명령했고, 그로 인해 재일 코리안 사회는 1948년 GHQ와 일본 사회를 상대로 오사카·고베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4·24 교육 투쟁’을 벌인다. 결과적으로 일부 ‘폐교령 철회’(효고현)와 ‘공립 조선 학교’5)형태의 교육 기관을 확보하지만 GHQ의 강경한 대응은 조선인 학교의 폐교와 ‘재일조선인연맹’의 강제 해산과 재산 몰수 단행으로 이어졌다. 현재 일본 전국에는 조선 학교 총 56개교, 한국 학교 총 4개교가 설립·운영되고 있지만 지금도 민족 교육의 현장에서는 일본 사회의 차별 문화에 맞서 투쟁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재일 코리안의 주류(중심) 사회를 향한 민족적 생존 투쟁은 교육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참정권 문제, 지문 날인, 귀화 문제 등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 운동의 중심지인 오사카와 재일 코리안 사회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그동안 ‘부(負)’의 역사성과 함께 정치사회, 교육 문화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예컨대 해방 직후에 창간된 《민주조선》을 비롯해 1970-1980년대의 《마당》, 《삼천리》, 《청구》, 《민도》 등을 통해 재일 코리안의 쟁점 사안들(참정권,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 민족 교육, 남북통일, 한일 관계, 정체성 등)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를테면 『재일 한국 조선인: 역사와 전망』(강재언 외), 『재일 조선인(在日朝鮮人)』(사토 가쓰미), 『재일 조선인 문제의 기원』(문경수),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도노무라 마사루), 『자이니치의 정신사』(윤건차) 등은 대표적인 연구 성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재일 코리안 문학계는 작품을 통해 그들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소환하고 기억하며 한일 문단으로부터 주목받는다. 대체로 주류(중심) 사회를 상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마이너리티의 주체적 소리를 확보하는 형식이다.
▲ 1929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오간 여객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 [ⓒ 제주의소리]
재일 코리안 문학과 오사카의 관계는 단순한 지역적 개념을 넘어 민족의 굴절된 역사와 사회문화적 쟁점과 깊게 맞물린다. 우선 재일 코리안 작가들만 보아도 김석범을 비롯해 김시종, 양석일, 종추월, 김창생, 김길호, 원수일, 현월, 정장 등 오사카 출신이 적지 않다. 이들 재일 코리안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주류(중심) 사회와의 갈등·대립, 남북의 화해·통일,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대립, 참정권, 민족 교육, 민족적 정체성 등 다양한 현대사적 쟁점들을 주제화한다. 실제로 오사카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국 한반도의 근현대사적 변곡점과 함께 웃고 울기를 반복했던 공간이다. 특히 오사카는 제주도와의 관계가 특별한데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의 ‘기미가요마루’(제주도-오사카를 왕복했던 배)와 해방 직후의 민족적 비극 ‘제주 4·3 사건’의 영향이 크다(오사카로 제주도민의 밀항).
재일 코리안 문학은 그러한 조국의 굴절된 현대사적 쟁점들을 다양한 소리와 색으로 소환하고 주제화했다. 창작을 하는 작가란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역사의 수많은 하위 주체들에게 강요된 침묵과 억압당한 생채기들을 활성화하는 존재”6)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재일 코리안 작가들은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살려 끊임없이 ‘부’의 역사성, 민족의식, 타자의식, 자기(민족) 정체성을 고뇌했던 것이다.
김석범은 디아스포라의 상상력으로 ‘부’의 역사성을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주제화한다. “시대적으로는 1948년 전후 해방 정국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삼고 공간적으로는 제주도-목포-광주-대전-서울-부산의 육로와 해로, 일본의 홋카이도-도쿄-교토-오사카-고베를잇는 한반도 바깥의 육로와 해로를 아우르는”7) 해방 정국의 혼란상을 소환한다. 김석범은 『까마귀의 죽음』을 근간으로 대하소설 『화산도』을 통해 전면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서사화했는데 현재(99세)도 “기억은 내외부의 억압과 공포에 의해 망각에 갇혀 화석처럼 굳어지지만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8)라는 관점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제주 4·3 사건’의 원죄 격인 외가의 친척 정세용과 친구 유달현이 처형당하는 『화산도』는 작가의 민족정신은 물론 창작 의도를 명확히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김석범의 디아스포라적 상상력은 오사카와 제주도(4·3)의 역사적, 사회문화사적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일찍이 한국 문학계에서 채우지 못했던 문학사적 공백을 메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양석일은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중간 세대 작가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는 오사카에서 김시종과 함께 동인지 『카리온』을 발행하며 시를 발표했고 거주지를 도쿄로 옮긴 이후에는 택시 운전사 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소설 『택시드라이브』, 『광조곡』, 『피와 뼈』, 『밤을 걸고』 등은 작가로서의 문학 정신과 도전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대표작 『피와 뼈』는 역시 제주도가 원고향인 최양일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되어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소설에서 상정되는 일제강점기의 오사카 공장 지대는 그곳이 재일 코리안들에게 얼마나 간고했던 생활 공간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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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이층에 있는 4평 넓이의 방에는 여섯 명의 직공이 살고 있었다. 술에 취해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곯아떨어진 사람도 있고,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치료도 않은 채 그냥 자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목욕탕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은 네모토 노부타카(根本信高)는 온몸에서 퀴퀴한 쉰내를 풍기고 있었다. 솜이 비어져 나온 이불은 피와 땟국과 기름에 절어, 목에 닿는 부분이 검게 번들거리고 있다. 게다가 1년이 넘도록 이불을 걷은 적이 없고 청소도 하지 않은 방은 온갖 잡동사니와 술병과 누더기 같은 속옷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돼지우리보다도 지독한 상태였다. 천장의 네 귀퉁이와 벽장 속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고, 겨울인데도 바퀴벌레가 기어다녔다. 기둥과 벽의 갈라진 틈새에는 직공들의 피를 빨아먹고 통통하게 살이 살찐 빈대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고, 이들도 신나게 뛰어다니며 흥겨운 광란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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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일의 『피와 뼈』에서 펼쳐지는 오사카 어묵 공장의 직공들이 묵는 숙소의 생활환경은 역하기 짝이 없다. “피와 땟국과 기름에 절어”버린 이불이며 바퀴벌레와 빈대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흥겨운 광란의 잔치를 벌이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청운의 꿈을 안고 제주도에서 ‘기미가요마루’를 타고 오사카로 온 주인공 김준평은 그곳에서 ‘신체’를 무기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육중한 ‘신체’는 그가 ‘적국’에서 살아남는데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고 그 ‘신체성’은 광기와 폭력, 도박과 여자, 고리대금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재화된다. 특히 야쿠자로 등장하는 장남 다케시(武)와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벌이는 부자간의 우중 혈투는 당시 오사카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루했는지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김준평의 강렬했던 ‘신체성’도 세월과 함께 녹아내고 끝내는 ‘피와 뼈’로 표상되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북조선’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식민 지배국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재일 코리안의 절박한 심경을 특유의 엔터테인먼트로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양석일 문학은 한일 양쪽의 문단에서 평가받고 있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원수일은 김석범과 양석일처럼 민족의 굴절된 현대사적 쟁점을 부각하기보다 재일 코리안들이 지금 현재 집단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 이쿠노의 생활 공간 구석구석에 시선을 집중한다. 작가 스스로 “내가 자아에 눈뜬 유년기의 의식에는 조선 시장, 운하, 제사, 정치, 싸움, 이별, 통곡, 웃음이라는 이카이노의 풍경이 복잡하게 얽혀 침전되어 있다”10)고 했을 만큼 오사카 이카이노는 원수일 문학의 원풍경을 녹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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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먹은 감을 재단하는 둔탁한 금속음, 담갈색으로 바랜 담벽에 붙어있는 ‘조국귀환’이라 흰 삐라, 햅번샌들의 상부와 바닥을 압착하는 공기압축기 소리, 고동색 전신주에 감겨있는 ‘주민증 필수’라고 명기된 부동산 광고, 정수리를 찌를 듯이 볼링기가 쏟아내는 하이톤의 금속음, 구멍가게 처마 끝에 달린 흰색 줄넘기, 노란 고무, 빨간 종이풍선, 나사 박는 기계가 껍질을 벗겨내는 듯한 소리, 기름과 먼지로 범벅이 된 회색 골목길에 가득 내놓은 전통문양의 알록달록한 이불, 플라스틱 방출성형기의 완만한 소리, 움막 같은 어두운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폐품들의 짓무른 듯한 피부색의 상자, 햅번샌들의 ‘깔창’을 가공하는 연속음, 감색의 포렴을 늘어뜨린 술집 앞에 어지럽게 놓인 깨진 변의 파편이 빛에 반사되어 발하는 은색의 반짝임, 공장에서 공장으로 돌아다니는 오토바이의 배기음, 갈색으로 칠한 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설치된 간이 빨랫줄에 걸려있는 흰 속옷, 검은 슬립, 꽃무늬 팬티, 플라스틱 덩어리를 분쇄하는 분쇄기의 건조한 금속음, 안달증이 폭발한 성난 목소리, 절멸하는 노란색 신호등, 흰구름이 길게 늘어진 창공을 향해 솟아있는 고무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11)
”
원수일의 소설 「재생」은 이카이노에 정착해 살아가는 코리안들의 다이내믹한 실생활 공간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영춘은 나그네처럼 방황하며 오사카 이카이노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각종 시끄러운 소리와 색에 ‘감각의 마비’를 경험한다. 태생적으로 ‘재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활공간의 각종 “시끄러운 소리와 색에 마비된 감각”까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체화된 실생활의 ‘마비된 감각’을 운명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재일 위치, 그 삶의 실존적 지위를 원수일 문학은 인간사 희로애락으로 얽어낸다.
종추월은 재일 코리안 사회에 남아 있는 유교적인 가부장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 소설 「이카이노 태평 안경」은 “오빠를 부여잡고 등 뒤에서 울던 어머니처럼, 순자 또한 남편의 등 뒤에서 슬픔”12)을 안고 울며 살아가는 여성을 그리고 있고, 「불꽃」은 남편의 사업 실패와 반복되는 가정폭력을 피해 가출한다는 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종추월의 소설에서는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 여자들, 주변 대부분의 여자들을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재일의 원시적, 원초적인 카르마에 통곡하는 통곡했던 여자들”13)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김창생의 소설은 이러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관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 「도새기」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와 제사 문제를 둘러싸고 형제자매 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어머니의 제삿날 장남인 큰오빠가 동생들을 향해 “내가 부모를 산소로 모신다. 제주도에 산소를 만들 것”14)이라고 선언한다. 동생들이 부모의 산소를 제주도에 모시면 찾아뵙기가 어렵다며 반대했지만 장남인 원하는 동생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본인의 생각대로 부모의 유골을 제주도로 모셨고 산소 비용으로 천만 엔까지 챙긴다.15)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여성보다 남성은 우선이고 “맏이는 부모 맞잡이”라는 논리가 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듯했다. 하지만 두 여동생은 큰오빠의 일방적인 행동에 동의하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응수한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오빠지만 장남이란 이유로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며 소리친다.
그 밖에도 오사카 출신인 현월은 『그늘의 집』을 통해 오사카 JR쓰루하시역 주변의 거미줄처럼 얽힌 전통시장 골목을 배경으로 집단촌의 모순/부조리를 주제화한다. 현월의 「무대배우의 고독」, 「젖가슴」, 「나쁜 소문」 등도 거대자본의 강력한 힘과 폭력에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 마이너리티의 소외 의식을 주제화한다. 김길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뉴커머 작가로서 작품을 한국어로 발표한다. 그의 소설 「몬니죠」, 「나가시마 아리랑」, 「들러리」, 「이쿠노 아리랑」 등은 오사카 이쿠노를 중심으로 “동포 사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일상적인 신변사를 소재로 하여 형상화”16)한 작품들이다. 특히 오사카 이쿠노를 배경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와 일본·일본인·일본 사회가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고 상호 협력하며 공생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재일 코리안 문학은 오사카 이카이노를 배경으로 다양한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의 ‘부’의 역사성과 민족의식, 사회문화와 실생활 측면에서 부각되는 문제적 지점들을 호소력 있게 주제화한다. 디아스포라적 상상력을 발휘해 경계의식과 트랜스네이션을 천착하고 글로벌 시대의 글로컬과 혼종의 가치를 읽고 실천하는 힘을 보여준다.
오사카 이쿠노구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의 역사민속, 정치경제, 사회 교육, 문화예술의 세계와 가치를 유지·계승하며 끊임없이 변용을 거듭한다.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설립된 ‘오사카 코리안타운 역사자료관’, ‘오사카 코리안연구 플랫폼’ ‘코리아NGO센터’ 등은 그러한 민족의 역사성과 정신사를 기억하고 기록물로 남기면서 선순환적 변용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주류(중심) 사회를 상대화하는 마이너리티의 시공간을 통해 글로벌 시대의 경계, 월경, 혼종의 가치관·세계관, 거기에서 현재화되는 ‘자이니치’, ‘조선적인 것’, ‘민족적 정체성’, ‘글로컬·글로컬리즘’, ‘한류 문화’, ‘다민족·다문화’ 사회의 핵심적 가치·이미지를 주목한다.
▲ 오사카 코리안타운에 위치한 ‘공생의 비’
오사카 코리안타운에 세워진 김시종의 「헌시(獻詩)」가 각인된 ‘공생의 비’는 그러한 주류(중심) 사회와 비주류(주변) 사회의 경계를 넘어 공생할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을 명징하게 담고 있다. 김시종은 ‘공생의 비’에서 “고집 센 자이니치의 계승 덕분에/불고기도 김치도 일본 전체가 좋아하는/풍부한 음식”이 되었고 “무뚝뚝한 조센징/그 속에서 가게를 열고/함께 버티며 삶을 도우며/ 마침내 코리아타운의 일본인이 된/사랑스러운 ‘이웃사촌’들” 그리고 역시 “흐름은 넓은 바다에 도달하는 것,” “작은 흐름도 합류하면 본류가 되는 것,” 그렇게 “곧 문화를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의 길이 크게 열릴 것”이라고 노래했다.
재일 코리안 사회를 비롯해 일본·일본인·일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마이너리티 주체성, 주류(중심)을 향해 던지는 안티 테제·시대정신, 그것은 오늘날 한층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이행 중인 한국과 일본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 고정자·손미경, 「한국문화 발신지로서의 오사카 이쿠노 코리안타운」, 《글로벌문화콘텐츠》 5, 2010, 95쪽.
2) 문경수의 『재일 조선인 문제의 기원』에 의하면 재일 조선인의 인구는 1911년 2,527년, 1920년 30,189명, 1930년 298,091명, 1940년 1,190,444명, 1944년 1,936,843명, 해방 직후 1945년 980,635명, 1946년 647,006명, 1947년 598,507명, 1948년 601,772명으로 변화를 보여준다(『在日朝鮮人問題の起源』, クレイン, 2007, 65쪽 참조).
3)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남북으로 흐르는 히라노강의 동서 0.8킬로, 남북으로 1.9킬로 지역을 가리킨다. ‘아카이노’라는 지명 자체는 1973년 ‘주소 표시 변경’에 따라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정자·손미경, 앞의 글, 94쪽 참조).
4) 같은 글, 95쪽.
5) 1949년 당시 ‘공립조선인학교’는 도쿄와 오사카에 설치되었고 이들 학교는 일본의 교육제를 따르며 민족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고 오사카의 ‘공립 일본 학교’는 방과 후에 ‘민족 학급’을 보장하는 안이 모색된다.
6) 김환기, 「평화를 위한 진혼곡」, 김석범, 김환기·김학동 옮김, 『화산도 12』, 보고사, 2015, 371쪽.
7) 김환기, 「김석범‧『화산도』‧〈제주4‧3〉」, 《일본학》 41, 2015, 1-18쪽.
8) 趙秀一, 『金石範の文學-死者と生子の声を紡ぐ』, 岩波書店, 2022, pp. 234-235 참조.
9) 양석일, 김석희 옮김, 『피와 뼈 1』, 자유포럼, 1998, 20쪽.
10) 원수일, 김정혜·박정이 옮김, 『이카이노 이야기』, 새미, 2006, 243쪽.
11) 같은 책, 201쪽.
12) 宗秋月, 「猪飼野のんき眼鏡」, 《民濤》 1, 1987, p. 218.
13) 宗秋月, 「華火」, 《民濤》 10, 1990, p. 68.
14) 김창생, 「도새기」, 《제주작가》 15, 2005, 107쪽.
15) 같은 글, 121쪽.
16) 강재언, 「재일동포사회와 호흡을 같이하는 작가」, 김길호, 『이쿠노 아리랑』, 제주문화, 2006, 6쪽.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과대학장과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다이쇼 대학 대학원 석·박사를 졸업했다. 대표 저서로는 『시가 나오야』,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 『브라질 코리언 문학 선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암야행로』, 『일본 메이지 문학사』, 『화산도』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