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 한글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
천춘화 중국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한글 문예지는 사뭇 중요한 역할을 발휘해 왔다. 특히 조선족 문학의 생성과 발전 과정에서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재중동포라 불리기도 하는 ‘조선족’은 재미교포, 재일교포, 고려인 그리고 기타 지역에 산재해 있는 해외동포들과는 달리, 중국 내에 민족학교를 가지고 있고, 민족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교육·문화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 문학의 형성과 발전은 기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과는 조금 다른 역사·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원은 멀리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이민 문단과 동인지 《북향》
조선인의 중국 동북 이주는 19세기부터 시작하여 식민지 시기 내내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본격적인 이주는 한일병합조약을 전후한 1910년 즈음부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무렵까지 이어졌다. 초기에는 오늘날의 연변(延邊)에 해당하는 간도(間島) 지역으로의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이주가 이루어지다가, 식민지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동북 전 지역으로의 집단 이민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간도는 만주 조선인 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용정(龍井)은 간도의 서울로 거듭났다.
조선족 문학의 전신인 재만 조선인 문학은 용정에서 발원했으며, 이는 용정의 위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용정은 조선인 이민의 첫 동네였다는 점에서 유서 깊은 고장이다. 1877년 평안북도의 이재민들이 오랑캐령을 넘어 간도로 이주했고, 그들이 제일 처음 자리 잡은 지역이 육도구(六道溝)였다. 그 후 1886년, 이 지역에서 여진인들이 사용하던 우물이 발견되면서 조선인 정진이 ‘용두레 우물’의 용(龍) 자와 우물 정(井) 자를 따서 ‘용정(龍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1)이렇게 ‘용정’은 ‘육도구’라는 옛 명칭을 제치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1900년에 이르면 청나라 관방에서도 ‘용정’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상용하기에 이른다.
용정의 또 하나의 부동의 위상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교육 중심지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용정시는 ‘용정촌’과 ‘명동촌’을 중심으로 확장된 행정구역이다. ‘용정촌’이 조선인 이민의 첫 동네였다면, ‘명동촌’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교육 중심지였다. 1899년 종성에서 이주한 김약연 일가를 비롯한 25세대가 터를 잡고 형성한 ‘명동촌’은 그 첫 시작부터 남달랐다. 그들은 교육을 위한 학전(學田)을 공동으로 경작했고, ‘동쪽을 밝힌다’, 즉 ‘조선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에서 동네의 이름을 ‘명동(明東)’이라 지었다. 2)간도 최초의 민족교육 기관이었던 서전서숙(瑞甸書塾)이 명동촌에서 첫 출발을 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 후 서전서숙은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동학교로 발전했고, 용정은 점차 명실상부한 만주 조선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용정은 3·13 반일 시위의 근원지가 되었고, 간도조선공산당 사건의 중심지로 거듭났으며 나아가 이민 문학의 발원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민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라지만 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썩 후인 1930년대에 들어서이다. 일부 산발적인 기록에서 한글 일간지 《간도일보(間島日報)》와 《만몽일보(滿蒙日報)》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오늘날 그 실물을 확인할 길은 없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는 상기의 두 일간지가 합병되어 새롭게 출발한 《만선일보(滿鮮日報)》가 거의 유일하며, 문예지로는 동인지 《북향(北鄕)》이 전해진다.
《북향》 2호 목차 (출처: 오케이서적 제공)
《북향》은 북향회(北鄕會)의 동인지였고, 간도에서 발행된 최초의 순수 문예지였다. 용정의 젊은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문학지였으며, 그 출발에는 이주복과 안수길이 있었다. 당시 안수길은 일본 유학 중에 부친의 병환으로 간도의 집에 돌아와 있었고, 광명중학교 영어 교사였던 이주복이 그 시기 안수길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그들은 “간도는 한국 사람들의 제2의 고향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학을 이룩해 보자” 3)
라는 뜻에서 ‘북향회’라는 동인회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안수길이 직장 문제로 용정을 떠나고, 이주복이 가족을 용정으로 불러들여 하숙을 그만두게 되면서 북향회의 발족은 예정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용정을 떠나 있는 사이인 1933년경 이주복의 주선으로 북향회가 용정에서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그 구성원은 주로 용정의 중학교들에 재직 중인 젊은 교사들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멤버 중에는 모윤숙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주복이 학생들을 데리고 프린트물 형식으로 발행하다가 후에 본격적인 동인지로 출발하게 되는데 제1호가 발행된 것이 1935년 10월이었다. 북향회는 용정에서 동인지를 준비하는 한편 문예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만주 조선인 문학 건설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북향회 멤버에는 이주복을 비롯하여 김국진, 박영준, 강경애, 안수길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유실된 《북향》 제1호 목차에 따르면 안수길이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해서 실었고, 이학인의 단편소설 「인간동지」, 박영준의 수필 「해란강」, 강경애의 시 「이역의 봄」이 함께 게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북향》은 논설, 논문, 단편소설, 수필, 시, 번역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향》은 1935년 10월부터 1936년 8월까지 겨우 4호를 발행하고는 폐간되었다. 훗날 《북향》의 영인본이 용정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총서로 발간된 《일송정》 제2기-제4기에 순차적으로 공개되었다.
북향회는 자발적으로 결성된 순수 문학 단체였고, ‘북향’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국땅에 민족문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문예지 《북향》은 만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문예지라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북향》의 발간은 만주 조선인 문단의 존재를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다. 《북향》 폐간 후 재만 조선인 문단은 신경(현재의 長春)의 《만선일보》 학예면으로 이동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갔다. 《북향》은 비록 짧게 존재했지만 그 문학사적 의의와 문학적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송정》 제4기 부록에 《북향》 4호 영인본 수록
(출처: 오케이서적 제공)
2. 조선족 문학의 탄생과 《연변문예》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 의해 애써 건설되었던 문단은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은 급작스럽게 도래했고, 그것은 한반도에 있어서나 만주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였다. 해방과 함께 만주국은 사라졌고, ‘재만 조선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했고, 문인들 역시 예외는 없었다. 재만 조선인 문학의 대표 작가로 언급되었던 염상섭, 박영준, 현경준, 김조규 등을 비롯한 대부분 작가들이 각자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의 귀환했고, 안수길과 같은 일부 작가들은 북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월남을 감행했다. 일부 사람들만이 중국 동북에 남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들이 훗날 중국 조선족이 되었고, 조선족 문학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종전과 함께 한반도와 중국은 모두 해방을 맞이했지만 두 나라는 각자 다시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중국은 국공 내전을 겪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이끌어냈다. 중국에 남았던 조선인들은 ‘중국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나라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 덕분이었는데, 중국공산당은 각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발전시키고, 풍습과 종교 신앙을 유지, 발전,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줌과 동시에 각 소수민족의 문화와 교육 사업을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하에 설립된 것이 연변조선족자치구였고 해방 후 조선족 문학은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 지역에서 재건되었다.
해방 후 조선족 문단은 주로 두 부류의 문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하나는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선전대 출신의 간부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사 출신의 문인들이었다. 4)최채, 정길운 등과 같은 인물들이 첫 번째 부류의 혁명가 문인들이었고, 두 번째 부류가 김창걸과 같이 식민지 시기 《만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교사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성과 당성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었던 당대의 배경에서 문단의 건설은 자연스럽게 혁명가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변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문학예술 단체가 연변문예연구회(延邊文藝硏究會)였다. 이 단체는 1950년 1월 15일 최채, 현남극, 김동구, 이홍규, 임효언 등의 발기하에 연길에서 결성되었고, 산하에 문학, 연극, 미술, 음악, 무용 등 5개 분과를 두었다. 이 단체는 문학과 예술을 사회주의 문예로 개조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단체였던지라 연변 지역 문예 사업을 지도하고 새 시대의 민족문학을 건설하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1951년 4월 23일에는 더 많은 조선족 문화인들을 결집하기 위한 연변문학예술계련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6월에는 기관지 《연변문예》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연변문예》는 새 중국 설립 이후 연변에서 최초로 발행된 문예지였고, 이 문예지의 발행을 통해 비로소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함과 동시에 문학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연변문예》의 핵심은 문학을 통한 반혁명 진압과 애국주의 사상의 선전이었다. 이는 사실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라 불렸던 한국전쟁의 발발과 무관하지 않다. 《연변문예》는 연변 각지에 있는 “창작 간부”(직업 문인)와 일반 문예인(지식 청년층),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당정(黨政) 정책을 군중 속에 널리 관철시켰고, 그 과정에 전형을 창조하고 우수한 문예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데에 주력했다. 5)중국 조선족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재중 조선인에서 중국 조선족으로의 과도기였고, 동시에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연변문예》를 통해 이러한 조선족들의 내면과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그리고 반혁명투쟁에 임하는 자세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변문예》는 1951년 11월까지 6호를 발간하고는 정간되었다가 1954년 1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의 기관지로 재창간된다.6)
1954년 창간된 《연변문예》는 기존의 《연변문예》의 복간은 아니었다. 1954년 창간된 《연변문예》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즉 연변문련의 기관지로 출발하게 되는데 1953년 7월에 결성된 이 단체는 1956년 8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연변문예》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기관지로 재탄생한다.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는 중국의 소수민족지구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조직된 중국작가협회의 직속 분회였다. 7)
전기의 《연변문예》가 반혁명투쟁, 애국주의 사상의 선도를 우선시했던 것과는 달리 재창간된 《연변문예》는 “국가 과도시기의 총로선과 총임무의 요구에 근거하고 인민군중 주로는 로농군중의 요구에 근거하여 규정지으며 관철시켜야 할 것” 8)이라는 중국공산당의 기본 방향을 수용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문학 창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국 문학의 기본 방향을 전제한 조건하에서 《연변문예》가 해야 할 일은 중앙의 문예지에 발표된 당정(黨政) 관련 논설과 우수한 작품들을 적극 번역 소개하고 연변 지역의 젊은 작가들을 발견하여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 문학이 적극적으로 중국 문학으로 편입되어 가는 한 과정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취지 속에서 조선족 문학은 사회주의 문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적극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연변문예》는 1956년 말까지 총 35호를 발간했고, 1957년 1월 1일부터 《아리랑》으로 개제되었으며, 1959년부터는 다시 《연변문학》으로 개제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고 문화대혁명이 가열화되면서 연변은 물론 전 중국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 특수 시기의 통폐합 종합지 《연변》
중국 역사에서 1956-1977년의 20년은 특별한 시기이다. 대약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문학사에서는 흔히 ‘정치공명 시기’라 부른다. 1945년부터 시작되는 이 시기 문학의 중요한 특징은 마오쩌둥의 연안문예좌담회 연설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문학의 건설이다. 이 시기는 마오쩌둥의 문예사상과 당의 문예 정책에 따라 문학이 정치와 보조를 맞추어 발전했던 특별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문학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문학이 정치 선전 도구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문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문예지의 창간사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아리랑》의 창간사는 문화대혁명 발발 전의 문학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
《아리랑》은 창작상 가장 좋은 방법의 일종인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원칙에 입각하여 연변 및 국내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전국 각 형제민족인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줄기찬 노력적 생활모습을 반영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더 큰 위훈에로 불러일으킨다.
《아리랑》은 문학의 신생력량을 양성하며 창작대오를 부단히 확대하는 일을 자기의 중심과업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대담히 신생력량을 발견 배육한다.
《아리랑》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집행하기 위하여 제재와 체제범위를 확대하면서 각종 류파, 각종 형식, 각종 풍격의 예술 작품들을 대담히 선택, 게재하며 간행물의 독특한 풍격과 특색을 수립하기 위해 경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아리랑》은 적극적으로 고전작품을 정리, 소개하며 민간문예를 발굴, 정리, 소개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한족을 비롯한 국내 각 형제민족의 문학성취 및 세계문학의 정화들을 소개함으로써 연변문학으로 하여금 민족문학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 발양하며 민족풍격이 농후한 우수한 사회주의문학으로 되게 하며 조국의 사회주의 문학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이바지 한다.9)
”
창간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건설 시기 문학의 최우선 전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습득 준수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의 실현을 위한 “창작 대오”의 발굴·양성과 상호간 문학의 소개 및 교류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은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문예 방침이다. 여기서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란 문학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소재의 다양성, 양식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각종 유파, 형식, 풍격 등을 포함한 문예 비평의 적극성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예 방침의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다양성을 강조했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비평 논쟁이 결국 특정 이익과 사상·이념에 저촉되면서 많은 문학인들을 반동분자로 몰아가는 후폭풍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당의 문예 방침에 따라 적극적으로 창작과 비판/비평에 뛰어들었던 작가들 대부분이 반우파투쟁에서 반동분자로 비판받았고 정치적으로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날로 가열화되었던 사상비판과 계급투쟁 과정에서 문학은 더 이상 본연의 문학일 수 없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각종 잡지와 문예지에 대한 통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 탄생한 것이 종합지 《연변》이었다.
《연변》은 순수 문예지는 아니다. 《연변》은 정치잡지였던 《학습》, 《지부생활》, 《연변청년》과 문예잡지 《아리랑》의 후신인 《연변문학》이 통폐합되어 1961년 5월에 새롭게 출발한 정치문예 종합지10)로서 당시 발행부수만도 1만 2천여 부에 달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같은 해 9월 65호를 끝으로 정간되었지만 정치 이론과 사상 교양을 위주로 하면서도 문학예술을 부차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창간호 목차를 살펴보면 ‘정책 강좌’, ‘당의 건설에 관한 강화’, ‘공작 작풍과 공작 방법’, ‘노래하자 공산당’ 등 난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이중 ‘노래하자 공산당’란이 문예란이다. 대부분이 시(詩)였고 간혹 단편소설과 평론 한두 편이 게재되기도 했다. 크게 문학과 비문학이라는 두 파트로 구성되고 있었고, 이러한 잡지의 구성 취지는 정간까지 이어졌다. ‘노래하자 공산당’이라는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문학은 당을 위한 문학이었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문학이어야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창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연변》 잡지는 중공연변주위 선전부에서 주최한다. 그의 임무는 모택동사상의 붉은기를 높이 추켜들고 맑스-레닌주의 기본리론을 선전하며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며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중의 선진 경험을 총결, 보급하며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의 혁명투쟁생활을 반영하며 여러 민족인민에게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기본지식을 줌과 동시에 당의 민족정책과 민족리론을 주는 것이다. 즉 그는 당의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군중을 교양하며 각항 공작을 추동하며 계급투쟁을 진행하는 유력한 무기이다.12)
”
《연변》은 중국공산당연변주위원회 선전부에서 간행되었던 기관지였던 만큼 오로지 마오쩌둥 사상을 선전하고 당의 방침과 정책을 선전하며 혁명투쟁 생활을 일반에 홍보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 잡지에서 문학의 역할은 오로지 사상, 정책의 선전 도구 역할뿐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문화대혁명의 본격화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가열화되면서 거의 모든 잡지들이 정간되었기 때문이다.
4. 문예지의 전성시대와 조선족 문학의 본거지 《연변문학》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되면서 중국 동북에서는 한글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예술연구》, 《아리랑》, 《도라지》, 《시내물》, 《개간지》, 《봄노래》, 《북두성》, 《은하수》, 《송화강》, 《장백산》, 《연변문학》 등을 비롯한 다수의 잡지들이 새롭게 창간되거나 복간되었다.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잡지 《장백산》은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에서 1957년 4월에 창간한 부정기 문예지였고, 제5호부터 연변문련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1959년부터는 음악, 무용, 희곡, 미술, 사진 등 다섯 개 예술 단체에서 공동으로 발간했는데 이를 계기로 《장백산》은 《연변문학》과 역할을 분담해 《연변문학》은 주로 문학작품을, 《장백산》은 주로 음악, 미술, 무용 관련 예술작품과 희곡, 비평을 게재했다. 《장백산》 역시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정간되었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도 10년이 지난 1987년 8월에야 《예술세계》라는 제명으로 복간되었다.13)《도라지》 역시 현재 발행되고 있는 문예지이다. 1977년 길림에서 창간되었고, 창간 당시의 제호는 《대중문예》였다. 1979년부터 계간으로 변경되었고, 1984년부터는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다. 1985년 8월에는 동북삼성 30여 명 청년 작가들이 참석한 도라지문필회를 소집하기도 했다.14)
한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변녀성》의 창간도 주목을 요한다. 《연변녀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기관지로서 1983년 11월에 창간된 여성지이다. 조선족 여성들에게 애국주의, 공산주의, 민족단결 등에 관한 교육을 진행하고, 여성과 어린이들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으며, 연애, 혼인, 가정 문제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데 목적을 둔 사상성, 지식성, 예술성, 오락성을 두루 갖춘 여성 종합지였다. 1980년대 현재 매호 발행부수가 4만 부에 달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두터웠던 잡지였으며 특히 잡지 구성 중 일부 지면을 문학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한 특징이었다.15)《연변녀성》은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글 대중지이다.
한편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지면을 제공했던 전문지 《문학예술연구》를 들 수 있다. 이는 1980년 1월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창간한 격월간 잡지였고, 잡지를 창간한 연변문학예술연구소는 조선족 문학의 조직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라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평론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인 글들을 상재했던 《문학예술연구》는 문예평론가들과 문학인들에게 교류의 장을 마련해 주었고,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데 있어서 문예지와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던 중요한 학술지였다.
이 외에도 1981년 12월 연변인민출판사 소년아동문예편집실에서 창간한 아동문학 잡지 《시내물》(1986년 9월 《별나라》로 개제)16)과 1980년 10월 북경에서 창간된 무크지 《아리랑》, 그리고 1981년 심양에서 창간된 《갈매기》17)등을 비롯한 다수의 문예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많은 문예지 중에서도 단연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최장수 문예지 《연변문학》이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연변문학》의 전신은 《연변문예》이다. 1951년 6월과 1954년 1월 두 번에 걸쳐 같은 제호로 창간되었고 후에 《아리랑》, 《연변문학》, 《연변》, 《천지》, 다시 《연변문학》으로 제호를 바꾸어가면서 정간과 복간을 반복하는 과정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18)1980년대 중반 한때에는 발행부수가 3만 부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호당 겨우 1,200부를 찍어내고 있다. 2024년 8월 《연변문학》은 통권 제761호를 상재했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문학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변화는 다양성의 측면이다. 이 시기 문학은 극단적인 정치주의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이 주류를 이루긴 했지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사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창작 양식을 실험했다. 특히 시문학 분야에서는 이미지즘, 주지주의, 상징주의 등의 수법이 적극 도입되었다.19)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데올로기적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조선족 문학은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을 기록한 상흔문학(傷痕文學)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성문학, 개혁문학 등으로 한때 풍성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와 함께 집단주의가 해체되고 기존의 가치 체계가 전복되는 과정에서 문학 역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전문 문예지들이 하나둘 폐간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겠다. 《북두성》, 《갈매기》가 폐간되었고, 《은하수》, 《송화강》 등의 잡지들은 상업 종합지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문학은 전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공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에 무주류, 무방향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문학은 오히려 다원화와 개성화의 특징을 크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세속적인 삶을 즐겨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두고 문학사에서는 “세속인문주의가 과거의 정치이상주의를 대체”20)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족 문학이 이러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 창작과 교류의 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잡지들이 창간과 폐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낸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등을 비롯한 문예지들 덕분이었다.
《연변문학》이 70여 년의 세월 속에서 폐간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지원 덕분이다.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기관지라는 성격으로 하여 《연변문학》은 꾸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기관지로서의 역할도 병행해야 했다. 정부 기관지로서 정책적인, 사상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대변해야 했고 당과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해야 했지만 한글 문예지가 희소한 상황에서 《연변문학》은 조선족 문학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면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작가들이 《연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실질적으로 많은 문학인들에게 문학 교류의 장이 되었다.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없었더라면 조선족 문학은 유지,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연변문학》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5. 오늘날 재중 한글 문예지와 조선족 문학
오늘날 조선족 문단에 있어서 《연변문학》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현재 동북에서 발행되고 있는 순문예지로는 《연변문학》을 비롯하여 《장백산》, 《도라지》 등이 있다. 《연변문학》이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의 잡지들은 지역 대표 잡지로서의 위상이 강하다. 《도라지》는 장춘을 근거지로 발행되고 있으며, 《장백산》은 장춘시 민족사무위원회의 기관지적 성격이 강하다.
한글 문예지는 개혁개방의 시작과 함께 한때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한중수교를 시점으로 한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든다. 적지 않은 문예지들이 경제난으로 폐간되었고, 극히 일부 잡지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힘겹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힘겨운 것은 기고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이는 조선족 사회의 상황과 직결되는 문제로서 인구 유실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중심지인 연변에서 조선족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 미만이 된 지도 이미 20년이 넘었다. 개혁개방과 한중수교를 거치는 과정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었다. 여기에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이 수십만을 넘어서면서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한 연구기관(다문화 사회와 신학 연구소)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4년 4월 기준 현재 한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중국인 인구는 63만을 넘어섰으며 이는 현재 중국 연변에 남아 있는 조선족 인구와 거의 비슷한 수치라고 한다. 2023년 중국측 통계에 따르면 연변 지역 조선족 인구는 70.58만 명이며, 이는 연변 전체 인구의 35.8퍼센트에 불과했다.
인구의 유실과 함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언어 환경의 변화이다. 주지하는바 중국의 조선족은 민족학교를 가지고 있고 민족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훌륭한 언어 문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족 문학이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조선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조선어로 창작할 수 있는 절대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이러한 언어 환경이 위협을 받고 있다. 민족학교의 공식 언어가 중국어로 치환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조선말을 공식 언어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모든 과목을 중국어로 교수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으로의 조선족들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이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할 것이며, 한글 창작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중국의 장춘에 거주하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족 작가 금희가 스스로를 칭하여 “조선어로 창작하는 중국 내 마지막 세대”라고 했던 것은 중국의 이러한 실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조선족 문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문학의 한 부분이자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족 문학이 또다시 새로운 전환기에 당면해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중국(연길)문학아카데미 회원 작품이 실린 신문, 잡지와 작품집 (© 시인 석화)
각주
1) 전광하 편저, 『세월속의 룡정』, 중국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00, 9쪽.
2) 서대숙, 『김약연: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역사공간, 2017, 28-29쪽.
3) 안수길, 「龍井·新京時代」, 강진호 엮음, 『한국문단 이면사』, 깊은샘, 1999, 256쪽.
4) 이광일, 『해방 후 조선족 소설문학 연구』, 경인문화사, 2003, 61-63쪽.
5) 정영진, 「중국 조선족 문예규범의 수립과 《연변문예》」, 《겨례어문학》 59, 겨레어문학회, 2017, 288쪽.
6) 차배근·오태호, 『중국조선민족언론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217쪽.
7) 같은 책, 388쪽.
8) 배극, 「《연변문예》 창간에 제하여」, 《연변문예》 창간호, 1954, 2쪽.
9) 「친애하는 독자 여러 동무들에게」, 《아리랑》 1957년 1월호, 1쪽.
10) 차배근·오태호, 앞의 책, 386쪽.
11) 최상철, 『중국조선족 언론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6, 308쪽.
12) 「《연변》 잡지 창간사」, 《연변》 창간호, 1961.5, 1쪽.
13) 같은 책, 313쪽.
14) 같은 책, 312쪽.
15) 차배근·오태호, 앞의 책, 636쪽.
16) 최상철, 앞의 책, 313-314쪽.
17) 이화·오상순, 「요녕 조선족문학이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통시적 고찰」, 《한중인문학연구》 55, 한중인문학회, 2017.
18) 김성수, 「연변 문예지의 역사와 ‘코리아 문학’ 재구성」, 《국제한인문학연구》 29, 국제한인문학회, 2021.
19) 오상순 주필, 『중국조선족문학사』, 민족출판사, 2007, 253쪽.
20) 같은 책, 3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