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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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3부

이상엽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제3부 고구려 다민족 천하관의 발명

주몽이 압록강 변으로 도래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사람이라 불린 예맥계 부족들은 계통상으로 단순했을 것이다. 이들의 묘제인 적석총만 봐도 아직은 다른 민족들과 혼융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기원 전후로 부여에서 주몽 일파가 남하하면서 고구려 사회는 이민족과 동거하게 됐다. 게다가 주몽 일파는 부여 의식이 뚜렷했으니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섯 부족을 기반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더 많은 민족이 참여했다. 자발적인 참여도 있었고 강제적인 통합도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미천왕 시기가 그렇다. 현도군과 낙랑·대방 등지에서 많은 인구가 고구려 사회로 들어왔다. 이들은 중원의 한족뿐 아니라 한·예족, 말갈족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주로 국내성 외곽이나 새롭게 조성된 평양성(지금의 평양이 아닌 압록강 근처로 추정)에 안치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낙랑과 대방은 중원과의 직교류로 동북과 한반도 주변국보다 선진적인 문물을 향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의 유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점들을 그대로 흡수해 내적·외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런 예로 미천왕 당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 일족을 들 수 있다. 모용외가 죽고 아들 모용황이 왕위를 이어받자 친동생 모용인이 333년 반란을 일궜다. 이 반란은 3년간 지속됐지만 결국 모용황에 의해 진압되어 모용인은 사형을 당한다. 그 와중에 모용인의 부하였던 동수는 336년 고구려로 도망간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된 동수의 묘가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됐다. 흔히 안악 3호분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동수의 묘다. 피장자인 동수는 전연과의 전쟁에 자주 참전했고 말년에는 낙랑과 대방의 고지에 부임해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다만 동수는 저승에서만큼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중국 왕조의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후한-서진 시대를 기준으로 삼아 출신지를 표기하고 관작을 자칭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입각해 이상적인 사후 세계를 꿈꾸었다. 즉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디아스포라는 원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유대인의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디아스포라 개념이 근래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주민 공동체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전유되고 있다. 고구려사와 관련해 디아스포라를 적용한다면 고구려를 떠나 타국의 어딘가에서 살아간 사람들 내지는 그들의 후손들의 존재 양상과 타국으로부터 고구려로 유입되어 고구려 땅 어딘가에서 살아갔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 집단의 존재 양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로 이주한 이주민들의 동기나 존재 형태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문화 심리적인 면에서 중화 민족이라는 의식이 내재한 상태로 있었고, 문화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안정적인 대우를 받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구려의 이주민 정책도 일종의 자치적이고 반(反)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디아스포라는 잘 형성된 측면이 있다. 특히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세력이 형성되었던 흔적들은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이들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그것은 고구려도 중국처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물론 크기 면에서는 중원을 상대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동북 지방과 한반도, 더 나아가 왜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다민족 공동체의 천하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미천왕 사후 수 대가 흘러 광개토왕 대에 실현된다. 지금은 초라해 보이는 이곳 집안에서 그런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1. 집안의 수많은 왕릉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장군총. 학자에 따라 이 능을 장수왕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국내성의 마지막 임금 광개토왕의 능묘라 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2. 장군총에서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다. 이 비문에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이 드러나 있다.


3. 집으로 돌아가는 농촌 마을 사람들. 어쩌면 이들의 선조 중에는 고구려 시대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유전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집안 시내에 서 있는 <고구려민속풍정> 기념탑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후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중국 경내에 있었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고구려가 중국 경계 밖의 외국이었다.

참고논문

이동훈,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18.

공석구, 「4세기 고구려 땅에 살았던 중국계 이주민」,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6.

여호규, 「4세기 고구려의 낙랑 대방 경영과 중국계 망명인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학회, 2008.

정동민, 「4세기 초중반 모용부 전연과 고구려의 유이민 수용-한인 수용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소, 2017.

정호섭, 「고구려사에 있어서의 이주와 디아스포라」, 《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2017.

장창은, 「4세기대 고구려의 국제관계와 이주민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22.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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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르포라이터. 《황해문화》, 《백조》 등에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