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현장
8호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소개
김명준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의 원고 청탁을 받고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왜?’였다. 이 글이 실릴 곳이 ‘디아스포라 현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세계 곳곳의 한글, 한인문학협회의 소개가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키워드와는 인연이 없을 듯한 시민 단체의 활동가에게는 의외였다. 그럼에도 기고를 결심한 이유는 《너머》가 문학과 함께 ‘이산’도 주요 키워드로 하고 있는 점이 작용했을까?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하는 현장에 관련 시민 단체를 소개하는 작업 또한 이산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넓은 시야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우리 단체의 정식 명칭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이하 몽당연필)이다. 2012년에 서울시에 비영리 민간 단체로 등록해 현재 12년째 꾸준히 활동 중이다. 회원 약 3,000명, 상근 활동가 4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체 정관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 사업의 목표는 ‘한국 사회에 조선학교를 올바로 알리기’이다. 이를 위해 영화, 문학, 공연 예술 등을 소개하고 그 창작자를 초청해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간접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각종 교류 활동도 전개한다. 조선학교에 가해진 기나긴 차별을 끊기 위해서 일본의 시민 단체들과 연대하여 사업할 뿐만 아니라 차별의 결과로 생산된 재정난 극복에 조금이나마 회원의 성금으로 지원도 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쪽 도호쿠 지방에서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여파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고 이때 유출된 방사능은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몽당연필은 지진이 터지고 불과 며칠이 안 된 3월 20일에 결성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지진 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이었다. 바다에서 몰아치는 흙탕물 쓰나미에 떠내려가는 집과 자동차, 사람들의 비명을 실시간 뉴스로 접하며 ‘거기에도 조선 사람이 살고 있고 조선학교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긴급한 연락을 나누었다. 매스컴에서는 조선학교의 피해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국제 네트워크’ 발족과 그 첫 대회를 열었다. 20일에는 덕수궁에서 광화문을 거쳐 일본대사관까지 차별 철폐를 외치는 거리 행진을 열었다. 유럽, 미국, 일본, 호주 등에서 모인 시민 활동가들이 조선학교 차별 철폐를 위해 모였다
‘모이자, 모여서 뭐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다. 급히 모인 사람들이 약 20여 명이었다. 배우 권해효, 가수 안치환, 시민 활동가이자 가수인 이지상, 영화감독인 필자, 음악평론가, 공연기획자, 민중가수, 어린이도서관 활동가, 회사원, 대학생 등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은 지진 피해를 당한 도호쿠, 후쿠시마의 조선학교 피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긴급 지원금을 모금하기로 했다. 어떻게? 우선 자선 콘서트를 열어 기부금을 모금하자고 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콘서트에 적당했다. 당시에도 지금도 몽당연필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권해효 씨가 회의에서 꺼낸 말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
이 활동을 한두 달로 끝내지 맙시다. 적어도 1년은 이어 갑시다. 어쩌면 지금이 조선학교를 한국 사회에 알리는데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기부금도 모으고 조선학교도 알리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그렇게 한 달에 1회, 총 12회의 작은 기부콘서트를 시작했다. 우리의 움직임을 눈여겨본 시민 단체들이 움직여 대구, 진주, 고양, 광주, 인천, 제주에서도 큰 콘서트를 열었다. 총 60여 팀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참가했고 2만여 명의 관객이 함께했다. 1년 6개월의 활동을 통해 2억 7천만 원의 성금이 모여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 네 곳에 전달되었다. 1년의 시간을 약속하고 저지른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고 기쁘게 해산할 참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일까.
몽당연필 결성 후 1년간 토크콘서트 12회, 지역 중·대규모 콘서트를 6회 열어 모금 운동을 진행했다. 사진은 제주에서 열린 소풍 콘서트이다.
1년 6개월 동안 총 18회의 크고 작은 콘서트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콘서트는 일본에서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도쿄에서 열린 소풍 콘서트(우리는 지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소풍 콘서트라고 명명했다. 소풍 콘서트는 지금도 연 1회 일본에서 개최한다)는 1,000여 명의 관객이 함께했다. 100명 정도는 자리가 없어 눈물을 삼키고 돌아가야 했다. 콘서트는 성공적이었다. 한국에서의 공연 때에는 영상으로만 보던 조선학교 학생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춤췄다. 관객은 재일동포와 일본인으로 가득 찼다. 한국 스텝, 출연진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항거불능의 재난 속에서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야 했던 동포들에게 한국에서 1년 동안 벌어진 조선학교 응원 콘서트는 지친 일상을 견디는 힘이었다고 한다. 그리움의 대상을 직접 만난 서로가 느낀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콘서트를 왜 도쿄에서만 합니까? 오사카에서도 해야 합니다. 일본 전국에서 해야 합니다.”
동포들의 요구였고, 우리 내부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왔다.
“그동안 조선학교를 알고 교류하던 사람들이 몽당연필을 통해서 하나로 조직되었으니 이대로 해산하지 말고 계속 활동을 이어 갑시다.”
결국 2012년 10월, 서울시에 비영리 민간 단체 등록을 마치고 정식으로 시민 단체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 단체 등록 후 연 1회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위한 콘서트와 학교 방문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2014년 히로시마 소풍 콘서트 마지막 장면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어떤 성과가 있었을까 생각하면 조금은 비관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조선학교를 한국 사회에 올바르게 알린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했는가?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형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존재를 안다 해도 결국은 북이냐 남이냐, 어느 편이냐를 묻는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일제강점기 슬픈 역사가 잉태한 우리의 아픈 손가락이다. 아이들이 견디고 있는 차별이 결국 우리가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헐뜯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의 선택은 무슨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인간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10여 년을 그들과 만나면서 확인한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지기란 허황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10년은 너무 짧고 시민 단체가 가진 한계도 있다.
이런 현실 인식뿐이었다면 이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작은 행사지만 조선학교,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이 만날 때 그 사이에서 양쪽의 눈과 몸짓을 바라보며 끝없이 확인했던 것이 있다. 명확히 어떤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우선 첫 만남에 서로가 느끼는 것은 ‘놀라움’이다. 존재조차도 몰랐던 우리는 재일조선인이 성취한 놀라운 민족 문화 역량에 놀란다. 학교 곳곳에 붙여진 우리 말과 글, 비록 어색할지라도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성이 담긴 선생님과 아이들의 우리말, 풍물, 조선 무용 등등. 거기에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성취하지 못한 교육적 성과도 빠질 수 없다. 우리의 외면과 무지 속에서 80여 년 가까이 재일조선인이 지켜 온 문화의 깊이, 교육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반면 재일조선인은 이제서야 눈앞에 나타나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손잡아 주는 우리에게 놀란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온 사람들은 지난 80여 년간 낯설기만 했는데 이들은 다르다고 한다. 위로받았다고 한다. 지나간 고생이 그저 퍽퍽한 현실을 견디는 것뿐이라 믿었는데 오히려 찬사를 받을 일이라고 말하는 고향 사람들, 어쩌면 이것이 그토록 바라던 통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다.
2014년에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를 회원들과 방문했다. 사진은 당시 초급 1학년 학생과 몽당연필 회원의 모습이다.
서로가 느끼는 놀라움이 잦아질 때면 어느덧 친구가 되어 있고 다시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이 맺어진다. 뉴스에서 재일동포 소식이 올라오면 시선이 가고, 혐한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면 학생들 걱정부터 앞선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급히 모였던 사람들이 그랬다. 일본에 동포 친구가 있고 그 걱정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런 인연을 느리지만 꾸준히 만드는 것. 그래서 그곳에 사는, 이제는 우리의 아이가 되고 친구가 되고 삼촌, 누나가 된 그들이 힘들 때 기꺼이 마음과 실천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만드는 것. 느리지만 다시 떨어지지 않는 인연을 꾸준히 이어 가는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많다. 남북을 가르는 시선은 시민들에게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에, 우리의 법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조선학교에 갈 때 우리 법은 엉뚱하게 ‘남북교류협력법’(정식 명칭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다)을 들어 사전 신고를 해야 한다고 한다. 조선학교 학생과 부모, 선생님들이 ‘북한 주민’이라는 것이다. 제30조에 “북한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국외단체의 구성원은 북한의 주민으로 본다”고 적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생략하지만 우리의 만남에 결정적이고 커다란 장애일 수밖에 없다. 분단은 아직도 우리를 생활 곳곳에서 지배하고 있다. 이 법을 바꾸고 어떤 제재와 방해 없이 자유로이 만나 정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다.
2016년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 학생들과 교류 후 이별하는 몽당연필 회원과 학생. 2016년에는 삼엄한 남북 관계 때문에 조선학교 방문을 포기하고 공원에서 교류 모임을 진행해야 했다.
글의 마무리로 몇 작품을 언급하고 싶다. 아직 우리에게는 미지의 존재인 ‘조선학교’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최근 발행된 작품들이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이 쓰고 그린 『꽃송이』(시대너머, 2019)
『꽃송이』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문집 ‘꽃송이’를 한국에서 재편집하여 소개한 글 모음이다. 재일동포 4, 5세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박기석의 『보쿠라노 하타 ‘우리들의 깃발’』(도서출판 품, 2017)
『보쿠라노 하타 ‘우리들의 깃발’』은 해방 직후에 전국에 걸쳐 만들어진 조선학교가 일본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을 때 ‘일본 공립 조선인학교’ 시절을 다녔던 청춘들의 고뇌를 당시 학교를 다닌 박기석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한다.
카지이 노보루의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2023)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은 우리 단체가 발행했는데 위 『보쿠라노하타 ‘우리들의 깃발’』의 시대에 일본인으로서 조선학교 학생을 지도했던 카지이 노보루의 수기이다. 모두 조선학교를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1971년 출생. 1999년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졸업. 영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07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를 연출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대표 권해효)의 설립에 관여, 계속해서 사무총장을 역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