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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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튀기

닉 페어웰 (이규석)

1. 림보

“발밑 조심해!”
앞장서던 솔이 반쯤 고개를 돌리며 내게 소리쳤다. 휴대폰 손전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미소 띤 얼굴에는 걱정 반, 기쁨 반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기묘하게도 악동 같아 스카우트 캠프파이어에서 공포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돌과 나무 조각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여기저기에 주방 도구, 책, 장난감이 보였다. 옷가지도 흩어져 있었고 부서진 가구 조각도 있었다.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뭔가 불쾌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호기심에 가득 찼던 설렘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발밑을 신경 쓰느라 듣지 못했다. 술 때문인지, 모험심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에 별로 느끼지 못한 병적인 본능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계속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녀는 “그쪽이 좋아할 거야!”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머리 조심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쳤다. 웃음 섞인 짧은 비명을 터트린 그녀는 투덜대며 이마를 세게 그리고 빨리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 걸음도 망설이지 않고 꿋꿋하게 계속 걸어갔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키가 큰 솔은 머리를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신은 채 완벽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반면에 한 번도 비포장도로를 맨발로 걸어본 경험이 없는 나는 굽이 낮은 신을 신었음에도 그녀를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얼마 안 남았어!”
그 말을 듣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호기심은 두려움으로 바뀌더니 이제 공포로 바뀌었다. 독이 조금씩 온몸으로 퍼져 나가듯 마비되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나는 일 때문에 여기에 왔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2. She Bar

“한국 여자라! 한국 여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쪽은 몰라. 낮에는 완벽한 딸이 되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방탕한 여자가 될 수 있는 밤이 있잖아!” 그녀가 노래하듯 운율을 맞추어 말했다.
정장을 입은 긴 머리의 동양 여자가 옆 테이블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잔을 부딪치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건배사를 했다. 틀림없는 한국 사람이었다.
술집은 씨 바르라는 이름이었고, 사람들로 어느 정도 차 있었다. 사람들은 씨바르가 한국어로 욕이라고, 또 한국인들은 술집에 이상한 이름을 붙이는 버릇이 있다고 말해 줬다. 사람들의 취기가 더 오르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커져갔고, 나는 카운터에서 오리지나우1)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사실 나는 튤립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는 것이 소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미국 잔이 아닌 다른 잔에 맥주를 마시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이, 헤이. 이거 누구야. 타우!”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더니 내 옆의 긴 의자에 앉았다. 나를 넘어트릴 정도로 너무 세게 앉는 바람에 나는 맥주를 조금 흘렸다.
“젠장, 미안해. 조금 취했거든. 어제 여기서 널 찾았어. 괜찮아?”
“아, 당신이었군요?”
나는 그저께 세미나를 끝내고 여기 들렀었다. 동료들은 모두 파울리스타 거리 근처에 묵었지만 나는 봉 헤치로에 머물기로 했다. 그곳은 한국인 동네로 알려진 데다가 요즘 내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사실 누군지 알았더라면 나도 당신을 찾았을 거예요.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셨거든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깨어보니 호텔이었고, 누가 데려다줬는지 기억나지 않았어요. 아침에 컨시어지에게 누가 날 데려왔냐고 물었더니 남자 셋과 키 큰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때 넌 필름이 끊겼었어. 내가 친구들과 인사하고 있었는데 네가 카운터에서 기절하더군. 하지만 다시 깨어나더니 술을 더 마시고 갑자기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췄어!”
그녀는 그 말을 하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정말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요.”
“모두 사실이야. 테이블 위에 올라간 이야기 빼고. 그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니까.”
그녀는 한쪽 눈을 찡끗하더니, 이전에 말할 때보다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당신은 키가 크고 얼굴은…….”
아몬드를 닮은 그녀의 눈을 보고 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혈통을 물어보는 게 조금은 꺼렸지만 북동부 억양으로 이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녀가 인디오 혈통이라고 짐작했다. 나 역시 북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즉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러고는 술이었다.
“멋있었어!” 그녀는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금방 옆 테이블의 한국 남자를 향해 고함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수미,2)걔는 사라져야만 했어. 걔는 한국인 2세들이 결성한 ‘돌았어’ 협회 회원이야. 걔네들은 엄격한 한국식 교육에 반기를 들고 사사건건 반대로 하기로 했지. 그런데 걔들은 수미 부모가 더 문제였다는 건 잘 몰라. 그러니까 걔 아버지. 봐봐, 지금 걔는 브라질 친구들과 어울려 다녀. 근데 알아? 걔가 정말 브라질 사람이란 걸!”
그녀는 다시 웃었다.
“잭슨, 평소 마시던 걸로 가져와!”
웨이터가 금방 녹색 술병을 가져왔다. 그 술을 마신 기억은 났지만 술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고, 무슨 술인지 물어보기도 껄끄러웠다.
“당신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나는 수줍음을 무릅쓰고 말을 건넸다.
“솔란지! 하지만 솔3)이라고 불러도 돼. 내가 어디든 환하게 밝히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안 그래?”
옆 테이블 사람들이 그 말에 맞장구치며 환호했다.
“어디 네가 기억하는지 한번 볼까.”
솔은 휴대폰을 꺼내서 손전등을 켠 다음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술병을 들어 힘차게 흔든 다음 보여주었다.
“회오리를 만들어야 해. 보여?”
실제로 투명한 액체가 병 안에서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그녀가 병을 휴대폰 위에 올려놓자 거품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녹색 병에 빛이 반사되어 아름다운 효과를 냈다.
“파티!” 그녀는 두 팔을 벌리더니 외쳤다. “이건 기억나?”
“아뇨…….” 나는 너무 당황해서 간신히 대답했다.
다행히 내가 그 말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누군가가 솔에게 인사를 건네며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기에 그녀가 내 말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나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잔을 집어 들었다.
“저쪽 한국 남자가 널 만나고 싶어 한다네.” 그녀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뭐라고요?”
“저기 오른쪽 두 번째 테이블에 있는 사람. 안경 쓴, 뚱뚱하고 작은 남자. 하지만 쳐다보지 마. 말하러 왔던 그 사람은 아니거든.” 그녀는 자기 잔에 술을 따르더니 또 마셨다.
“바에 있는 술을 다 마신다 해도 저 사람을 마주 볼 수 없을걸. 못생긴데다가 쓰레기 같은 사람이거든. 마셔!”
솔이 빨간 매니큐어 칠한 긴 손톱으로 내 잔을 툭 건드렸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셨다.
“한 잔 더!”
그녀가 한 잔 더 따라주었고 나는 조금 인상을 쓰며 마셨다.
“이제 됐어. 거의 한국 여자가 다 되었네! 이 한류라는 몹쓸 것이 가져온 게 뭔지 알아? 딸딸이 칠 줄도 모르면서 자기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쓰레기 같은 새끼들. 널 보고 마리아 김치라고 생각하지. 사실은 아름다운 깜둥이 여자인데. 이런. 흑인 여자. 이제 한국 남자들도 흑인 여자를 좋아한다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마리아 김치가 뭐죠?”
“잘 들어봐. 자동차를 좋아하는 여자보고 마리아 가솔린이라고 하잖아? 농담 삼아서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리아 하시라고 해. 그런 의미로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리아 김치인 거지.”
솔이 놀리듯 웃는다.
“저쪽을 한 번 쳐다봐. 마리아 김치와 쓰레기 같은 한국 남자들로 가득하네. 아, 몇몇은 괜찮긴 해.”
“그럼 당신은…….”
나는 그녀가 기분이 나빴을지 몰라 말을 꺼낸 것을 잠시 후회했다.
“나? 난 오래전부터 여기를 다녔어. 사람들이 K-팝을 잘 모를 때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거든.”
그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어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이번에는 슬픈 표정을 지은 솔이 내게 한 잔 더 따라주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어. 예를 들면 K-드라마. 난 K-드라마를 정말 좋아하거든.”
“나도 ‘도라마’를 좋아해요.”
“드라마. 도라마는 일본어야.”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는 공통점을 찾았다.
“지난번에 내게 그런 얘기 했었어. 그래……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치자. 난 「수업(더 글로리)」을 좋아해.”
“아, 그 복수 드라마, 맞죠?”
“바로 그거. 넌?”
“난 「시그널」을 좋아해요.”
“정말이야? 이런, 고전을 좋아하는구나. 시간 여행. 아니, 그냥 여행. 세대 간의 만남. 오, 마이 갓.” 그녀는 뭔가 중요한 게 떠올랐다는 듯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네가 얘기해 준 걸 계속 생각해 봤거든. 지금 나랑 갈 곳이 있어. 사실 오늘은 갈 생각이 없었지만 너와 함께라면 가야겠어.”
“어디로요?”
“그런 곳이 있어. 지금 가야 해.”
솔이 일어나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가야 해!”
그녀는 생기를 얻더니 평소처럼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유가 뭐죠? 왜?”
“자, 움직여. 왜냐하면 네가 신분증을 보여준 게 기억났거든.”
“내가 신분증을 보여줬다고요?” 내 신분증과 그녀가 나를 데려가려는 장소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잭슨, 한 병 더 줘. 아니, 두 병. 아니, 세 병!”
그녀가 팔을 끌어당기며 거의 나를 끌고 가듯이 가고 있는 동안 나는 신분증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 내 이름 때문일 거야. 하지만 내 이름이 나를 데리고 가려는 장소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미스터리 한국 드라마보다 더 미스터리했다. 하지만 나는 따르기로 했다. 솔은 왼손으로 술이 든 종이 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끌고 갔다. 내가 인생에서 약간의 흥분거리를 찾고 있었다면 그때가 바로 기회였을 거다.

3. 그라우초 막스

“이건 너무 심한데요. 도대체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죠.” 나는 어리둥절한 채 말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순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우리디케를 따라 지옥으로 가는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곧바로 떠올랐다. 다만 뒤돌아볼 수 없는 사람은 나였지만.
“당신, 레즈비언이죠?”
혼란에 빠진 내가 짜낸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솔은 걸음을 멈추더니 뒤로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난 양성애자야.” 그녀가 웃었다 “그쪽은 예쁘긴 한데 내 타입은 아냐.”
그녀는 큰 소리로 웃으며 땅에서 올라오는 빛줄기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장기(臟器)를 파는 그런 거 아니죠, 그렇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으며 계속 걸어갔다.
“계단을 조…….”
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솔은 빛줄기 사이로 사라졌다.

*

내가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는데 중간쯤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리와, 실내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들렸다. 마지막 몇 계단을 앞두고 솔이 계단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헤이, 여러분! 오늘 특별한 손님을 모셔 왔어!”
솔의 외침에 조금 놀라고 당황한 나는 마지막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반대편 구석에서 누군가 일어서더니 외쳤다.
“와! 그럼 우리 오늘 「앉아 이야기해 줄 테니」 프로그램4)을 보는 건가!”
넥타이에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를 보자마자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내 피부색 때문인지 아니면 아프로헤어 머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내가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캡과 버뮤다 팬츠를 입은 다른 남자가 재빨리 일어나더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상입니다. 하지만 코레이아5)로 더 많이 알려져 있어요. 환영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타우아니라고 해요. 입실론과 테 아가6)..”
늘 그렇게 이름을 말해 왔지만 오늘은 정말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매우 친절하고 잘 웃는 인상의 코레이아, 상이 볼 키스를 한 다음 마시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어색해서 거절했더니 그는 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의 뛰어가듯 술병이 진열된 카운터 뒤로 가서 음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음료를 한 번 마셔봐요. 생딸기가 들어간 소주. 그냥 맛이 첨가된 그 거지 같은 소주 말고요. 정말 더 좋거든요. 마라쿠자7)로도 만들 거예요. 물론 가향 소주에는 그런 건 들어가지도 않죠.”
조금 전에 받은 충격과 ‘이상한’ 리셉션을 겪은 나는 차분하게 그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느 집의 거실처럼 보였다. 가구들이 어떤 먼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더 정확하게는 K-도라마, 아니 K-드라마의 촬영 장소 같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거실, 아니 사무실 같았다.
“여기가 어디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겠죠.” 상은 여전히 음료를 준비하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람이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왼쪽 구석에는 상이 음료를 준비하는 카운터가 있고, 가운데에는 유리 상판이 놓인 나무 테이블이, 그 주위로 소파가 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유리문이 달린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남자 둘과 여자 둘로, 솔과 나를 포함하면 모두 여섯 명이다. 아니다. 일곱 명이다. 등진 채 혼자 앉아서 내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그는 꼼짝 않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을 거다.
상이 음료를 들고 와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건네주었다.
“받아요! 소주쿠자, 아니 마라소주. 마라소주8)라는 표현이 더 좋겠네요. 놀랄 만하니까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결국에는 받아들고 한 모금 살짝 마셨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놀라웠다.
“좀 더 마셔요…….”
상이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 마음에 들어서 한 모금 크게 마셨다. 그다음 차분하게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신들, 당신들은 혼혈이군요!”
어느 정도는 술에 취한 탓에, 또 진심으로 놀랐기 때문에 평소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다.
“드디어 이 방에 똑똑한 사람이 나타났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던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 사람만 빼고…….” 그 남자는 사실 완전히 동양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알아챘네!” 그 남자가 말했다.
모두가 웃기 시작했고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아, 닉 말이군요. 그래요. 그는 100퍼센트 한국인이에요.”
“그런데 왜…….”
그 장소, 그 상황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한 말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건 닉이 브라질 사람보다 더 브라질 사람답기 때문이야.” 솔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닉이 일어나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나는 추리하기 시작했다. 솔은 인디오 원주민계가 아니다.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 신분증…… 한편으로는 술 때문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가 빙빙 돌고 있는 내 앞에 닉이 멈춰 섰다.
“솔이 또다시 술을 너무 마신 게 맞아. 우리는 인종차별 하는 그런 한인협회들과는 달라. 다만 당신이 정말 못된 사람이라면 내가 직접 여기서 당신을 쫓아 버릴 거야.”
솔은 얼굴을 찡그리며 내 귀에 속삭였다. “닉은 유명한 작가야.” 닉은 그 말을 듣더니 말했다.
“브라질에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브라질에서 별 볼 일 없는 배드민턴 챔피언이 되는 것과 같아.”
나를 웃기려고 말한 것 같은데 왠지 나를 못된 사람 취급한 것 같아서 얼굴을 찡그리며 마주 보았다. 솔은 다시 속삭였다. “그가 쓴 책이 교육부 추천 도서로 선정되어 전국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어.” 나는 다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닉? 닉 페어웰? 나 당신 알아요.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당신 책을 읽었어요. 하지만 이름이……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해결책은 술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기에 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지금 보체 게임9) 챔피언이 된 기분이네. 만나서 반가워요, 타우아니.”
“내가 이 사람 인터뷰를 몇 개 봤는데 인터뷰에서는 항상 친절했어요.” 솔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지만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 술 때문인 것 같았다.
“뭐, 여기 혼혈들은 지적이고 재치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내가 좀 고집이 세고 까칠해도 될 것 같네.”
다들 웃긴 했지만 솔직히 나뿐만 아니라 닉의 그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쾌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아니 당신이 여기 있죠?” 나는 더이상 솔과 얘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닉과 얘기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나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주는 클럽에는 가입하지 않아!”10) 그 말을 한 사람은 닉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크게 웃었다. 닉 또한 내게 뺨 키스를 하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가버렸다.
“타우는 이유가 있어서 여기 있는 거야!” 솔이 닉을 향해 소리쳤다.
닉은 그 말을 무시하고 아까 그 의자에 앉아 계속 벽만 바라봤다. 그사이 상이 다가와 내 팔짱을 끼더니 모두가 앉아 있는 소파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어색하게 암체어에 앉았고, 솔은 내 옆에서 팔을 암체어 위에 기대고 서 있었다. 상은 솔에게서 소주병들을 받아 조금 전에 음료를 만들었던 카운터 뒤 냉장고에 넣었다.
나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를 마주보게 되었다. 그 또한 암체어에 앉아 있었고, 내 오른쪽으로 두 명의 여자가, 왼쪽에는 빈 소파가 있었다. 상은 빈 소파에 앉는 대신 두 여성에게 비키라고 말하더니 그 둘 사이에 앉았다. 내가 앉은 암체어는 한가운데 놓여 있어서 불편했다. 마치 내가 사람들 관심의 중심, 무언가의 보스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솔을 바라보았는데 내 생각에 솔이 그런 점을 알고 비어 있던 소파에 앉은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닉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는 우리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줘. 바로 자아라는 것. 우리 같은 인생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은 아주 쉽게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변하거든. 그는 우리를 다듬어 주는 끌이지.”
솔이 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다시 내 쪽을 향해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마. 나도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 알아듣거든.” 나는 이해는 했지만 조용히 있기로 했다.
‘튀기 클럽(Thigui Club)’, 혼혈인들의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모두가 환호했고 상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튀기’는 한국어로 혼혈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제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말이죠. 우리는 브라질 사람이니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누가 누구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거죠? 우리에겐 그저 재미있는 단어랍니다.” 상이 웃었다.
“그럼 이제 누가 이야기를 제일 먼저 시작할까?” 와이셔츠 남자가 말했다.
“공격적인 것에 대해 말을 했으니, 가장 공격적인 얘기 어때? 그러니까 폭력 말이야.” 와이셔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옆에서 웃고 있던 안경 쓴 여자가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억양이 이상했다. 그녀는 혀를 질질 끌며 말할 뿐 아니라 모음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그럼 나지, 내 차례야.”
상은 샤비스11)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니 당신이?!?!” 그 친절한 남자가 공격적이라고 믿기 어려웠기 때문에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모두 웃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때리고 다녔거든.” 내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전에 무례한 건 당신들이잖아. 자기소개를 해봐.” 상 또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비토리아예요.” 모든 사람 중 가장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 안경 쓴 여자 옆의 키 큰 여자가 말했다.
“내 이름은 윌리엄이야.” 마침내 나는 와이셔츠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윌리엄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모두가 ‘25!’라고 화답하며 웃었다.
“그는 25퍼센트 혼혈이야. 할아버지만 한국인.” 솔이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을 뒤집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건 그가 우리보다 더 한국인처럼 보인다는 거지. 비토리아는 직계 혼혈인데 말이야.” 안경 쓴 여성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키가 작고 귀여워 아니메12) 캐릭터처럼 생겼다. 이런, 아니메는 일본 건데. 나는 그런 내 생각을 자책했다. 내가 무례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걸…….
“나는 잉이야.” 아니메 캐릭터처럼 생긴 여자가 말했다. 다시…….
“그녀는 청각 장애가 있어. 말할 때는 그녀를 바라보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해. 하지만 때때로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 닉이 뒤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저 사람 취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25가 말했다. 아, 그게 전염되는 건가.
“상, 잉. 다들 한국 이름을 갖고 있나요?”
모두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지만 나는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이름을 가진 사람은 상이 유일해. 처음에는 나도 ‘잉’이 한국 이름인 줄 알았거든. 하지만 잉그리드라는 이름이야.” 25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한동안 한국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엄마가 아빠한테 부탁했는데, 아빠가 한국 차 상자를 보더니 차 브랜드를 내 한국 이름으로 지어주고 싶다고 그랬대요. 정말 웃기죠. 엄마가 해준 얘기예요.”
나는 어느 정도는 그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마치 그로기 상태나 마취된 사람처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웃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좋고, 또 재미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있으니 이상하게도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요. 나는 한국인을 때리고 다녔죠. 교회에 다녔을 때부터 그랬어요.”
“여기 이곳이 교회였어. 이 동네에 한국 교회가 40개 넘는다는 게 믿어져? 동네 면적이 3제곱킬로미터 정도 되는 걸 감안하면 아마 세계 기록일 거야.” 25가 설명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25는 변호사거든. 그는 「광장은 우리 것」13)에 나오는 귀머거리 할머니 같아요. 설명을 아주 잘하고 싶어 하죠.”
모두가 상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 이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인 그는 별명으로 코레이아, 한국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좀 더 웃었다.
“교회 아이들은 나를 잡종이라고 불렀어. 쓰레기라고.” 그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걔네들을 때리고 다녔…….” 나는 그런 그의 공격성을 이해했다.
“그때까지는 아니었어요!” 상이 웃었다 “그 이후였죠. 레바논 사람들을 사귀게 됐어요. 그들은 나를 받아 주었고 나는 그들의 갱단에 합류하게 되었죠. 레바논 깡패(kkangpae).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난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어요. 그냥 때리고 또 때렸어요. 지금까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요.”
“사람들은 나를 짬뽕(Tchampong)이라고 불렀는데…….” 25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말했다.
“그건 중국 요리야. 해산물을 많이 넣은 라멘 스타일의 요리.”
나는 솔의 설명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경멸하는 표현처럼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상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다. 목소리가 잠기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지난 후 그는 머리를 들고는 거의 단번에 잔을 비웠다.
“엄마는 브라질 사람이에요. 일본식 가라오케에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 당시에는 한국식 노래방이 없었거든요.”
“상은 형이야. 오빠지. 내 생각에 그는 가장 나이 많은 혼혈인 것 같아.” 25가 또다시 설명했다.
“아냐! 솔의 이모가 나이가 더 많아요.” 비토리아가 항의했다. “솔, 나중에 당신 이야기도 해줘요. 당신 할머니, 당신 사촌도. 소중한 사람들이잖아요.”
솔은 병을 뒤집어 왼손으로 흔들며 나중에 이야기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 당신들은 편견을 많이 겪었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엄마가 날 쇼핑센터에 데려가곤 했는데.” 상이 한 모금 더 마셨다. “거기 있던 브라질 사람들이 ‘와, 당신네 주인집 아들은 정말 잘생겼네요’라고 종종 말하곤 했어요.”
“세상에…….” 나는 입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지 마요! 엄마는 좋아했으니까!” 모두가 웃었다 “엄마에게는 그런 말이 아주 듣기 좋았죠.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넌 저 한국인들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 될 거야.’ 엄마는 집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줬고, 심지어 김치도 담갔어요. 나는 정말 한국인으로 자랐지요.”
“패러독스! 전부 역설이야!” 닉이 소리쳤다.
“엄마는 내 동생과 나를 그렇게 키웠어요. 하지만 이후는 전형적인 멕시코 드라마였어요. 엄마가 아빠에게 다른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아빠가 이미 한국 여자와 결혼한 거였어요. 일부다처주의자! 범죄자였죠.”
“그 한국인들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 사람들 같아. 그들은 이곳에 와서 인디오 여자들과 관계를 했지.” 25 혼자 웃었고 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쯤 엄마가 나를 임신한 걸 알게 됐어요. 엄마가 일하던 가게에서 그 사실을 알았는데 바로 큰 난리가 일어났지요. 아빠가 엄마를 때렸거든요.” 상은 웃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아, 얘기 안 한 게 있네요. 내가 때리고 다녔던 한국인들이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들입니다.”
“역설적이야…….” 25는 말과 감정을 삼키듯 술을 마시며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한국인 친구들이 ‘이제 넌 한국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먹을 것과, 심지어 돈까지 주면서 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도와줬어요.”
침묵이 허공에 감돌았다. 감정이 격해진 내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눈물을 감추려고 했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당신 부모님도 그렇게 만났나요?”
“아! 잉 이야기도 재미있지. 잉, 말해 봐.” 솔이 재촉했다.
“그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지. 아빠가 신문에 광고를 냈거든”.
“뭐라고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래. 아빠가 신문에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어. 그리고 우리 엄마가 그걸 읽었지. 그것도 미나스 지방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어. 잘 모르겠지만, 요즘의 틴더14) 비슷한 거야, 안 그래?”
“우리가 궁금한 건 그녀의 아버지가 광고에 뭐라고 썼을까예요.” 상이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모두가 웃음을 멈출 때쯤 닉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거야. 아무도 믿지 않을 거거든. 다들 거짓말이라고 할 거야.”
“난 상파울루에서 8년 동안 살다가 엄마 가족이 살고 있는 벨루오리존치로 이사했어. 재미있는 건 엄마가 제과점으로 성공한 반면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한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거야.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엄마야.” 잉은 수줍게 웃었다.
“마초적인 한국 남자들에겐 치명적인 타격이네요. 내 생각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 이유가 그거 같아요.” 비토리아가 다소 유감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건 사실이에요.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폭력을 휘둘렀어요. 엄마와 나한테 화풀이를 하곤 했어요.”
“이제 폭력이 등장하겠군.” 눈에 띄게 술에 취한 25가 말했다 “얘기해 봐!”
모두가 약간 인상을 쓰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25는 더 이상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입시학원을 다니고 있었어요. 더 이상 집에 있는 게 싫어서 밖에서 자기 시작했죠.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를 깨웠어요. 난 그날 집에 와서 자고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나한테 집이 없냐고 소리치더니 때리기 시작했죠. 핏줄이 터질 정도로 너무나 세게 때려서 난 몇 달 동안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다녀야 했어요.”
“섹스와 폭력. 이것이 한국 혼혈들의 삶의 요약이라고.” 25가 말했다.
“25가 벌써 취했네.” 솔이 웃었다.
그날 가장 이상했던 건 정말 그 누구도 이런 슬픈 이야기에 분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화해했다는 듯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마치 다들 이해했다는 듯 말이다.
“솔,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재미있는 이야기잖아요. 할머니와 사촌 얘기 말이에요.”
솔은 일어나서 냉장고로 가더니 술 두 병과 잔 여러 개를 들고 돌아왔다. 솔은 몸을 흔들거리며 모두에게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술잔을 비운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모와 어머니는 최초의 혼혈 한국인이었어. 이모는 1969년에 태어나셨어. 할머니는 1963년 최초의 한국인 이민선을 타고 왔는데, 브라질인과 결혼했어. 아마 최초의 인종 간 결혼이었을걸.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우리 할머니를 상상해 봐. 할머니가 얘기해 주길, 다들 자신을 욕했지만 결혼식 날에는 모두가 축하해 줬다고 하셨어. 그리고 이모는 브라질 사람과 결혼했고 엄마는 한국인과 결혼했지. 그러니까 난 아마 75퍼센트 정도 혼혈일 거야? 공교롭게도 사촌언니가 브라질에서 열린 미스 코리아 대회에 나간 적이 있어. 한국에서 열리는 미스 코리아 본선의 예선 같은 거지. 사촌언니가 혼혈이라 심사위원들은 자격을 가지고 3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어. 결국에는 받아들였지만. 언니는 3위에 올랐어. 우승을 기대한 건 너무 무리였겠지? 여하튼 하나의 승리였어. 내 생각에 그녀가 없었다면 몇 년 전 미스 월드였던 혼혈 미스 코리아는 없었을 거야.”
솔의 얘기가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래, 혼혈은 아름다워.” 25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넌 예외야!” 닉이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웃었다. 수많은 사연이 그렇게 쏟아지는 가운데 거기에 내가 왜 있는 지 그 이유를 잊어버렸다. 더 이상 그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타우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볼 시간이야.”
이런 젠장. 바로 지금이라니. 여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타우, 얘기해. 네 신분증을 보여줘.” 솔이 너무나 단호하게 말했기에 나는 백에서 신분증을 꺼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잉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제 이름은 ‘타우아니 리(Lee) 아라우조 다 시우바’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신분증을 받아보았다. 제일 먼저 신분증을 받은 잉이 안경을 내리고 내 이름을 읽었다. 그런 다음 비토리아에게 건네주었고 비토리아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상에게 건네주었다. 상은 손가락으로 신분증을 가리킨 다음 25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 ‘리’는 중국인일 수도 있어.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한국인의 특징이 하나도 없잖아.” 상이 조롱하듯이 말했다.
사실 나는 흑인이다. 게다가 눈도 커다랗다. 바로 그때 닉이 일어섰다. 그는 우리 뒤로 걸어가서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냈다. 모두가 서로 바라봤고 몇몇은 닉을 바라봤다.
“쉬, 저 사람이 이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할 거야.” 솔이 말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요? 그 사람이 따분할 이유가 없는데요.”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아냐, 가끔 그는 감정적으로 변하거든. 잘 모르겠지만 닉도 이민자야. 자신만의 아픔이 있어.”
잠시 나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재빨리 사라졌다. 그는 매우 까칠한 사람이었다.
클럽의 유일한 한국인인 그가 오리지나우 캔을 집어 들더니 솔 옆에 앉았다. 그는 내 신분증을 집어 들고 한번 쳐다본 다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솔에게 건네주었다.
“난 맥주만 마셔, 그 망할 놈의 소주는 몸에도 안 좋고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십상이야.”
나는 박수 치며 크게 웃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건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야.” 25가 앙갚음하듯 말했다.
“당신은 원래 잘 까먹는 사람이야.”
모두가 웃었다.
“어디 출신이에요?” 가장 궁금증에 차 있던 비토리아가 내게 물었다.
“저는 비토리아 다 콩키스타, ‘정복의 승리’ 출신이에요.”
“그건 역설적이네!” 솔이 손뼉을 치며 바로 말했다.
“불필요한 말의 중복이야.” 닉은 캔 맥주를 마시며 반박했다 “가장 역설인 건 당신들 중 아무도 한국어를 할 수 없다는 거야.”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혼혈이라는 게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걸 갖는 게 아닌가요?” 나는 입을 열 때마다 내게 모욕감을 주는 것처럼 들리는 닉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는 정말 불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다들 크게 웃었다.
“또한 두 세계의 가장 나쁜 것도.” 상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마실 걸 더 만들어 올게요. 맞아요, 마라소주는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이니까요.”
상은 카운터 뒤로 돌아간 다음 마라쿠자를 자르기 전에 말했다.
“타우, 재미있겠네요. 당신이 만약 이씨 성을 가진 한국인과 결혼하면 타우아니 리 리라고 불리겠네요.”
나는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닉의 입이나 25의 입에서 그 같은 말이 나오면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이 말하니…… 귀여웠다.
얼마 후 신분증이 내 손에 돌아왔고 나는 조금 어색해하며 그걸 챙겼다.
“당신 삶에 대해 조금 얘기해 줘요.” 비토리아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정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이름은 증조할머니 이름에서 따온 것 같아요. 내가 말했듯이 그녀는 좀 다른 여성이었어요.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어요. 자녀 여덟 명을 두셨고 자녀마다 아버지가 달랐으니까요.”
“브라질!” 25가 내 말을 중단시켰다.
그는 점점 더 닉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하기를 원한 적이 없었어요. 여하간 우리 엄마도 그 이름을 가졌지요. 할머니도 마찬가지고요.”
“할머니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왜 당신 출신이 어땠는지 알고 싶지 않았죠?” 이번에는 잉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난 내 인생이 너무 걱정되었거든요. 내 문제들에. 다른 건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요. 조금 후회가 돼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거든요.”
“하지만 당신이 증조할머니를 알 기회가 있었나요? 그때 당신은 너무 어렸을 텐데?”
“증조할머니가 열여섯 살에 할머니를 낳았고, 엄마도 날 열세 살에 낳았거든요.”
“브라질!” 25가 다시 큰 소리로 외치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비난의 시선을 자아냈다.
“짧은 이야기 하나가 있어.” 닉이 맥주를 끝내며 말했다. “한국 문학의 고전이라고 하더군. 한국에서 열 살쯤 됐을 때 읽었어. 어떤 한국 여자가 미국 남자의 아이를 가졌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파란 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본 아기 엄마가 아기를 뒤집어 질식시켜서 죽였지. 끔찍해. 난 그 이야기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국인들도 그런 걸 극복했으면 좋겠어.”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중에 가장 긴 침묵이 흘렀고,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다 비토리아가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브라질 쪽 할머니가 가끔 ‘너한테서 한국 사람 냄새가 나니까 가서 목욕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침묵이 직전보다 더 길어졌다. 불편한 감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쯤 25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당신은 한국인일 수 없을 것 같은데.” 25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한국 피를 가진다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다. 하지만 엉뚱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왜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꿈이다. 그리고 꿈꾸는 데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자.” 25가 계속 말을 이어가자 조금 전 상이 마라쿠자를 자르는 데 사용했던 칼을 집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은 몇 살이지?”
“24살.” 나는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문제네. 당신이 좀 더 어린 줄 알았는데.” 그 새끼가 말을 계속했다. 25가 확실히 닉을 이겼다. “다들 계산을 해봐. 당신 나이에다 당신을 가졌을 때의 어머니와 할머니 나이를 더해 봐. 그러니까 스물네 살에 열여섯 살과 열세 살을 더하면 쉰두 살이잖아. 증조할머니가 열세 살 때 할머니를 낳았다고 가정하면 1957년이 되겠네. 그런데 한국인 이민은 1963년에 시작되었어. 전혀 맞지가 않아.”
“내 생각에 닉과 25는 술을 마시면 성격이 바뀌는 것 같아요.” 상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말했다.
“자, 25. 우리가 지금 교회에 있다고 했으니 교회 이야기를 들려줘.” 잉이 화제를 바꾸려 했다.
나는 이 사람들과 무언가 공통점을 확실히 갖고 싶었다. 25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미끼를 물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얘기야. 나는 카자스 바이아15)에서 판매원 일을 했어. 아, 그전에 나를 알아보고 물건을 많이 사준 한국 사람 이야기도 있어.”
“아니, 그 이야기 말고!” 모두가 각양각색의 목소리로 같은 의미의 비슷한 말을 했다.
“좋아…… 어느 날 목사님이 우리에게 한마디 던지더군. 한 달에 50헤알을 벌면 지금 직장을 계속 다니겠냐고 물었어. 당시 난 돈을 잘, 아주 잘 벌고 있었어. 하지만 문제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그 직장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다음 날 사표를 낸 후 당당히 목사님께 얘기하러 갔지. 목사님은 내 말을 듣더니 나를 교회에서 쫓아내 버리더군. 내가 내는 십일조가 교회에서 가장 큰 액수였거든.”
모두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50헤알을 말했던 게 그 목사님이 아니었나요?” 어처구니없어서 나는 물었다.
모두들 전보다 더 크게 웃었다. 상은 거의 바닥에 구를 뻔했다. 비토리아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웃음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닉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한번 생각해 볼까.”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다. 상도 놀란 것 같더니 즉시 그에게 술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네가 한국인일 수 있겠어.” 닉은 한 모금 크게 마시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상은 급히 모두에게 술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해는 1956년이었어.”
모두가 집중해서 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내 눈은 전보다 더 커졌다.
“1956년에 50명의 북한 전쟁 포로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어. 그들은 인도에 수감되어 있었지. 2년 후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자신들을 받아 주기를 희망했어. 대부분은 멕시코로 가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거절당했어. 인도를 제외하고 수감자들을 받아들인 나라는 단 두 나라뿐이었거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지금이 바로 ‘브라질!’ 하고 외칠 때잖아.” 닉이 25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계산은 잘못된 거야. 증조할머니가 몇 살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한국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중요한 거야. 실제로 먼저 와 있었거든! 1963년 남한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미리 와 있던 북한 사람들이 환영받았을까 아닐까, 한 번 상상해 봐. 한편으로는 환영받았어. 남한 사람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거든. 게다가 피가 물보다 더 진했으니까. 하지만 전후였던데다가 이민선 안에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도 있었어. 한국인들이 지금도 애국심이 강한데 그 당시에는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 봐.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을 ‘빨갱이’, 공산주의자라고 불렀어. 아, 여기에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있어.” 닉이 남아 있던 술을 다 마셨다.
“좋네!” 나는 그가 술맛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 이야기를 말하는 건지 몰랐다. “이곳에서 이뤄진 첫 결혼은 남한 여자와 북한 전쟁 포로 남자 사이의 결혼이었어.” 닉은 말을 잠시 멈추고 양손 검지를 들어 올리더니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브라질!” 모두가 동시에 외쳤다.
“그러니까 많은 북한 전쟁 포로들이 남한 사람들과 합류했지만 일부는 떠나갔어. 그들은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지. 그래서 북한 전쟁 포로인 당신 증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만났고, 당신이 한국인일 수도 있는 거지.”
“진짜로 당신이 한국인일 수도 있겠네. 지금은 윗대 중 누군가 한국인이라면 혼혈 정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법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당신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최근에 이 법이 통과되었거든. 비록 한국인은 항상 양면을 생각하지만 말이야. 한국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야. 역시 예견되었던 일이지만. 한국에서 살기는 매우 힘들어. 여기처럼 자유도 없어. 경쟁도 심하고…… 게다가 요즘 한국 남자들은 여자 같아. 여기처럼 남자다운 남자가 없어. 그래서 내가 거기에서 성공했던 거야.” 모두가 아직도 충격에 빠져 있을 때 25가 갑자기 말을 했다.
“25, 입 좀 다물어!”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큰 소리의 문장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웃으려 했다.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너무나 큰 소리로 계속 우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비토리아가 나를 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내 몸도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아차렸을까? 나는 그냥 흐느꼈다. 갑자기 내 삶 전체가, 내 이야기 전체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꼈다. 역설이었다. 나 역시 역설이었다. 난 그냥 울었다.
“그럼 타우가 공식적으로 한국인이란 말인가요?”
상이 매우 흥분해서 말했을 때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한국인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울고 있는 걸까? 나는 조금 더 흐느꼈고 방 안에는 놀람과 당혹감이 뒤섞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쨌든 내일이면 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할걸.”
나는 화가 나서 솔을 쳐다봤다.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거다. 결코 잊지 않을 거다.
“타우, 신경 쓰지 마요. 결국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우린 신경 쓰지 않아요. 한국인이든 아니든. 우린 우리니까. 그거 알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란 걸.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거죠.”
상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계속 이어갔다.
“사실 우리는 이 클럽을 울보 클럽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비토리아, 잉, 나, 우리는 엄청나게 많이 울었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규칙이 하나 있죠. 딱 하나. 그렇게 감정적으로 격한 순간이 오면, 좋은 의미에서 우리는 진짜로 슬픈 이야기를 들려줘서 상쇄하곤 해요. 실제로도 우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했지만요. 하지만 우린 우리 자신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지금도 우린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우리의 슬픔은 위로가 돼요. 내 생각에 우리 모두 머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는 웃었다. “나도, 잉도, 25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을 텐데도 계속 이야기를 했네요. 이제 비토리아, 당신 차례예요.”
그때 비토리아도 울고 있었다. 비토리아는 자기 눈물과 내 눈물을 닦아준 뒤 심호흡을 했다. 모두가 비토리아를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이죠. 모든 역설에는 이름이 있어요. 난 인생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관한 거예요.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있는 것 그게 아니에요. 살아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거든요.”
갑자기 감동이 분노로 바뀌었다. 비토리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 엄마는 날 임신하고 있었어요. 6개월이었죠. 의사들은 내가 죽는 건 시간 문제라고 했어요. 매우 위험한 임신이기 때문에 낙태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죠. 하지만 엄마는 낙태를 하지 않았고.” 이 말을 마치자 비토리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정이 격해졌다.
“말을 줄이자면 결국 나는 태어났고, 그래서 이름을 가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 넘게 지냈어요. 문제가 너무 많아서 다 얘기할 수가 없네요.” 그때 닉이 개입했다.
“이 사람은 귀머거리고, 저 사람은 벙어리야.” 그는 잉, 그다음에는 비토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가 웃었고 나 또한 웃었다. 나는 그제야 이 사람들의 유머 감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4년 만에 아버지가 내 생일에 전화하셨어요. 난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겨우 ‘아빠’라고 말했어요.” 모두가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가 큰 뒤에야 아버지와 말을 다시 하게 되었어요. 정말 많이 큰 다음에. 그게 아마 불과 5년 전이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한국 음식에서 시작됐어요. 내 남자친구는 브라질 사람인데, 늘 나를 한국 식당에 데려가고 싶어 했어요. 나는 언제나 ‘안 가, 싫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가고 싶어졌고 그 다음에는 사랑에 빠졌어요! 지금은 매주 가고 있어요. 어느 날 난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어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고 있던 25만 빼고. 그는 거의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한테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네가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가져줘서 기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는 얘기를, 많은 얘기를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엄마와 나와 떨어져 지낸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그때 슬펐겠네요.”
“전혀! 난 행복했어요. 실제로는 아빠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행복했어요!”
모두 웃었다.
“그는 엄마를 때렸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힘든 임신이었다고 얘기는 하죠. 날 말하는 거겠지요? 하지만 용서했어요. 사실 아빠는 내 인생에서 전혀 필요하지 않으니까. 지금 내가 뭘 하는지 아세요?”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내게 사진을 보여줬다.
“도자기를 만들어요.”
나는 사진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대답했다.
“카랑카16) 같네요.”
“네, 또한 장승이기도 해요. 한국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나무 조각상이죠. 악귀를 쫓는 거랍니다. 브라질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나 봐요.”
많은 사람들이 잔을 들더니 비토리아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 조용히 술을 마셨다.
“당시 난 거의 죽을 뻔했죠. 의사가 엄마가 임신을 지속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소견을 내렸거든요.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아기는 사산될 거고 당신도 죽을 겁니다’라고 말이죠.”
그러자 누군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또 누군가는 눈을 내리깔았다. 25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닉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이 모든 것은 사랑에 관한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히스테릭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너무나 커 방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웃고 있었다. 닉은 자신이 말한 걸 모두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겨 얼굴을 찡그리며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크게 웃었다.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고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이상하고도 행복한 날이었다.

각주

1) 브라질의 맥주 브랜드이다.

2) 포르투갈어로 ‘수미(sumi)’는 ‘사라진다’는 뜻이다.

3) 포르투갈어로 ‘솔’은 ‘태양’을 의미한다.

4) 브라질의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이다.

5) 포르투갈어로 ‘한국’이란 뜻이다.

6) Y와 Th(Thauany)

7) 패션프루트.

8) 포르투갈어로 ‘마라(mara)’는 ‘놀람(maravilha)’의 줄임말로, ‘놀라운(maravilhoso)’이라는 뜻이다.

9) 브라질에서 나이 든 사람만이 하는 게임.

10) 미국의 코미디언 그라우초 막스가 한 말이다.

11) 브라질에서 매우 인기 있는 멕시코 코미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다.

12) 일본 애니메이션.

13) 브라질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

14) 틴더는 소셜 디스커버리 어플리케이션이다.

15) 브라질에서 인기 있는 가구 및 가전제품 소매 체인.

16) 브라질 북동부 지방에서, 배 앞쪽에 놓는 찡그린 표정을 한 나무 조각(상)이다.

번역정보

번역 : 김용재 (포 → 한)

필자 약력
닉 페어웰(이규석) 프로필 사진.JPG

작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일곱 권의 책을 발표했으며 첫 번째 소설 『GO』는 브라질 교육부에 의해 추천 도서로 선정되었으며, 브라질 전역의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독자들이 소설 제목을 따라 문신을 하기 시작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23년에는 주상파울루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제작한 한국인 이민 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인 「브라질 이민 일기」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