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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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백목련 자목련

엄정자

  하얀 목련이 피는 계절이었다.
  나고야 중국영사관의 문을 나서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목련꽃처럼 흐르고 있다. “빨리 가요”하며 돌아보니 남편이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한참 응시하더니 국기를 향해서 90도 경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순간 담담하던 내 마음이 울컥하며 목이 메어 왔다.
  방금 중국 여권을 파기하고 중국 국적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몇십 년을 중국 국민으로 살아왔는데 국적을 포기하는 데 단 5분도 안 걸렸다. 어딘가 허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가내하(無可奈何)함에 마음이 허전하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남편의 심정이 고대로 마음에 전해진다. 우리가 나서 자란 나라, 나랏돈으로 대학 공부 시켜 주고, 교사로 엔지니어로 키워 준 나라, 우리의 청춘이 울고 웃으며 마음껏 뛰놀던 나라, 부모 같은 그 나라를 이제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재작년에 딸애가 일본인 청년하고 결혼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 보니 주위 환경도 그러했고 어쩌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도 일본인이었다. 예로부터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딸애 뜻을 따랐는데, 한 가족이 한집에서 살면서 서로 국적이 다르다는 것은 많은 면에서 불편했고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보험, 세금, 연금…… 이런 수속이 다 문제가 되었지만 그보다도 가족이 갈라져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살면서 많은 정신적 아픔을 겪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조선인이었지만 태어난 곳은 달랐다. 아버지는 조선에서 태어나 20세기 초에 할아버지를 따라서 간도에 왔었는데 야학을 세워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항일유격대에 들어가서 항일 운동을 했다.
  1931년 겨울, 왕청유격대는 적들의 추격을 당해서 허리 치는 눈길을 헤치며 라자구를 거쳐 훈춘에 들어갔고 거기에서도 추격이 이어져 퇴각하다 보니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게 되었다. 한 달 동안의 휴정을 거쳐 다른 대원들은 다시 돌아갔지만 아버지와 다른 두 명은 병으로 남아서 치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고 러시아 고려인(高麗人)인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렇게 아들딸을 낳고 20여 년을 살다가 부모님은 또다시 국경을 넘어야 했다.
  아직 생존해 계시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드리기 위해 장남인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왔고 그렇게 연길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작가협회, 신문사, 예술대학교 등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글도 쓰시면서 새로운 삶에 안착했지만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오빠와 큰언니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자식들을 멀리 보내야 하는 것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그러고 얼마 안 되어 국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으니, 어머니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부모 형제 다 두고 아버지 하나만 바라보고 중국으로 왔는데 이제는 자식들하고도 헤어져 살아야 하다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는지 어린 그때는 아직 다 몰랐지만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그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가슴에서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딸애가 일본 나고야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던 날 나는 과호흡(過呼吸)으로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기까지 했다. 매일 옆에 두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딸애가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난다는 사실이 공항으로 리무진 버스가 떠나는 순간 실감되며 정신적 쇼크로 발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겪은 아픔이 뒤늦게야 고스란히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그래도 2년만 견디면 되었지만, 그것도 중간에 딸애가 왔다 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생이별을 한 데다가 그마저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도 없는 몇십 년간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했으니 어찌 세상을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딸아-” 하늘에 불러 보아도 “아들아-” 땅에 불러 보아도 창천은 묵묵부답이었고 대지에는 빈 메아리만 울려 갔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워낙 과묵하신 아버지는 그 원망을 묵묵히 다 들어주고는 하셨으나 당신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아버지는 또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두 분 다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 얼굴 몇 번 못 보셨으니 그 한이 하늘에 닿아 서리가 되었고 내 가슴의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어머니를 보면서 가족은 좋든 싫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삶의 철칙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 일본 회사에 전직한 남편을 따라서 일본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 자란 나라의 국적까지 잃게 되었다. 키워 준 은혜에 대한 고마움과 떠나는 미안함에 마음의 실타래가 얼기설기 엉킨다. 자식 넷이 4개국에서 살아야 했던 부모 세대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었지만 너무나 큰 이별이어서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가를 훔치는 남편의 팔짱을 끼며 묵묵히 영사관을 뒤에 두고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미풍에 향기가 코 가에 스친다. 바라보니 길가 담장 너머에 자주색 목련꽃이 연분홍 벚꽃나무와 어울려 우아하게 피어 있었다.
  목련은 하얀색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길가에서 백목련꽃이 눈에 띄어도 당연한 것으로 심상히 보았지만 자주색 목련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렇게 만나면 눈길을 주게 된다. 이 세상 최초의 꽃 중의 하나로 벌과 나비가 없는 먼 고대로부터 살아남았다는 목련, 그래서 유달리 향기가 진한 목련은 우리 민족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옷을 좋아하는 백의민족인 우리처럼 하얗게 하늘을 향해서 피는 모습도, 오랜 세월 자신의 향기 하나로 생명을 유지해 오고 번식해 온 그 고귀함이 어찌 우리 민족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꽃, 그래서 꽃말도 ‘고귀함’이라 하니 고매함과 결백함이 하늘을 찌른다.
  어쩌다 보니 자주색을 가져 자목련이라 하지만 자목련도 목련이니 먼 옛날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들도 백목련과 하나의 뿌리에서 자랐을 것이다. 지금은 자주색을 가지게 되었지만 누가 자목련을 목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나는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선 민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근 30년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줄곧 ‘조선족’이었고 우리말 우리글을 쓰는 재일본 조선족 작가였다. 일본에서 글을 썼지만 내 글에는 국경이 없었다. 앞으로도 나는 우리말을 가르칠 것이고 우리글로 작품을 써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내 글을 보낼 것이다. 아무리 다른 옷을 입어도 내 몸과 정신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자주색 꽃이 피어도 ‘목련’이란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우리’ 속의‘나’, ‘작가 엄정자’로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하늘에는 하얀 목련이 흐르고 땅에는 자주색 목련이 봄바람에 하느작거린다.
  봄이다. 남편의 팔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내 몸에서 목련의 향기가 난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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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교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사, 길림신문사 기자를 역임했다.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이다.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이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 대상, 제40회 『연변문학』 문학상 평론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 2014)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