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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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2부

이상엽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제2부 미천왕의 영토 확장과 유민 발생

지금의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의 어원은 진(秦, Chin)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명실상부하게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중국이라는 역사적 공동체의 대표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민족은 한족이다. 진나라를 대체한 통일 제국인 한나라에서 기원했다. 어쩌면 진나라는 공간적인 통일을 이루고 한나라는 민족적 통일을 이뤘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8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오호십육국의 140년 시대를 맞이한다. 즉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이라는 다섯 이민족이 열여섯 개의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혼융되어 지금의 한족을 구성하고 있다. 한족이 한족일 수 없는 이유다.
  하여튼, 4세기 초 중원은 오호십육국으로 혼란한 때 고구려에는 미천왕이 등장한다. 당시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씨와 우문씨, 단씨가 나라 하나씩을 창업했다. 그리고 인도유럽어계의 갈족이 조나라를 건국했다. 고구려는 서쪽으로 이들과 접하고 있다. 결국 여러 선비족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모용외가 302년 극성에서 같은 선비족 일파인 우문씨를 격파하면서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307년에는 자신을 선비대선우라 칭하면서 선비족의 통일을 시도했다. 이처럼 모용씨는 요서 지방을 중심으로 주변의 부족을 제압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미천왕은 이런 혼란한 상황을 틈타 302년, 직접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공격해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현도군은 현재 요녕성 무순시로 비정되고 있다. 그리고 311년에는 서안평을 점령해, 요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310년대에 이르러 전연의 모용외 세력이 급성장하자, 미천왕은 본격적인 요동 진출에 앞서 남쪽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략한다. 낙랑과 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요동군의 장통이었다. 고구려의 서안평 점령으로 교통로가 차단되고 잦은 공격에 시달리게 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전연의 모용외에게 귀부했다. 이에 미천왕은 313년 기다렸다는 듯이 낙랑군을 멸망시켰고,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점령했다. 낙랑태수 왕준은 1천 호를 끌고 장통을 연결고리로 전연에 귀부한다. 이로써 한반도에 남아 있던 한 군현인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이 요동의 전연과 연결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비록 장통과 왕준이 전연에 투항하기는 했지만, 그 근거지를 고구려가 점령했기 때문에 배후의 위협은 제거된 셈이었다.
  전연에 새로 이치된 전 낙랑태수 왕준과 평주자사 최비는 모용외에게 민심이 집중되는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비는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왕준이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고구려와 우문씨‧단씨에게 함께 모용씨를 치자고 제안한다. 이에 세 세력이 연합해 모용씨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한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다가,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을 보내 위로했다. 그러자 우문씨와 모용씨의 관계를 의심한 고구려와 단씨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간다. 혼자 남은 우문씨는 모용외의 공격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최비는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인 최도를 모용외의 승전 축하 사절로 보냈으나, 최도는 모용외가 두려워 삼촌 최비가 꾸민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모용외는 최도를 돌려보냈지만, 곧 장통을 보내 최도가 도망한 고구려의 하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패했고, 장통은 하성에 머물고 있던 최도와 무리 천여 명을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최비는 기마병 수십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내성으로 도망쳤다.

1. 고구려에는 평지에 국내성이 있었다면 산에는 환도성이 있었다. 전시 상황에는 도성을 옮겨 환도성으로 대피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철옹성은 아니어서, 동천왕 때는 위나라의 관구검에 의해, 고국원왕 때는 전연의 모용황에게 함락당했다.


2. 고구려 유적들은 지나치리만큼 경계가 삼엄하다. 이곳은 북한과 경계 지역인 데다 남한 사람들이 와서 고구려 고토를 외치기 때문이다.


3. 집안의 농촌은 한족과 조선족, 만족들이 섞여 사는 복합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4. 식당에서 밥을 먹다 알게 된 조선족 최 씨는 “중국 최씨는 모두 조선족이다”라고 한다. 그도 선조가 경상도에서 살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참고논문

이동훈,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18.

공석구, 「4세기 고구려 땅에 살았던 중국계 이주민」,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6.

여호규, 「4세기 고구려의 낙랑 대방 경영과 중국계 망명인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학회, 2008.

정동민, 「4세기 초중반 모용부 전연과 고구려의 유이민 수용-한인 수용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소, 2017.

정호섭, 「고구려사에 있어서의 이주와 디아스포라」, 《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2017.

장창은, 「4세기대 고구려의 국제관계와 이주민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22.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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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르포라이터. 《황해문화》, 《백조》 등에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