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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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1부

이상엽

고구려 디아스포라들의 다국적 공간, 중국 집안:
제1부 혼란스러운 4세기 동북아의 인구 이동

한국 고대사에서 엘도라도는 어디일까? 사실 몇 시간만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경주가 있다. 800년 신라의 고도이니 당연히 신기한 공간일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당시 유물·유적이 꽤 많이 존재한다. 경주 외에도 공주와 부여가 있고, 가깝게는 서울 송파구에도 한성 백제 유적이 존재한다. 하지만 쉽게 가볼 수 없고, 교과서에서 작은 사진으로만 보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고구려의 400년 수도였던 집안이다. 현재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현(급시)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가보고 싶던 고구려의 구도를 찾은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중국의 윈난성에서 작업하던 도중 인터넷을 통해 제2의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가는 대신 동북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지금 돌아봐도 카메라를 들고 집안의 길을 떠돌아다닌 일은 잘한 판단이었다.
급속히 발전한 중국의 도시들을 비교해 보건대 집안은 아직도 촌에 가깝다. 그 풍경이란 것이 우리네 1970년대 지방 도시 같은 모습이다. 그에 비해 고구려가 멸망시킨 부여의 수도 길림성 장춘시는 거대한 도시가 됐다. 역시 인간 승패의 역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집안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곳이 고대 성곽 도시였다는 것을 국내성이 보여 준다. 국내성의 축조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원왕 12년인 서기 342년의 일이다. 석축 성벽 안쪽의 토축부에서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토기가 출토되었고, 성 내부의 최하층에서는 4세기 초에 해당하는 간지(干支)가 있는 권운문와당과 동진대 청자가 출토되었다. 꼭 성곽이 존재해야만 국가가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고, 당시 거대한 외침에 의해 대형 성곽이 필요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다. 첫 수도는 주몽 신화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졸본성이다. 현재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는지는 여러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는 사람들은 2대 유리왕 때로 보기도 하며, 계루부의 실질적인 첫 왕인 5대 태조왕 때 사건으로 보는 이도 있다. 더 늦게는 10대 산상왕 때 환도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인용해 그야말로 국내성 최초의 고구려 왕으로 보기도 한다. 국내성 안에 장지명을 갖고 있기에 설득력 있는 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태조왕 설이 마음에 든다. 이곳 집안이 여러 문헌적 증거로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계루부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디아스포라였던 부여계 주몽이 내려오기 전 이미 압록강 주변에는 예맥계의 고구려족이 흩어져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주몽과 대결한 비류국의 송양이 그 예일 것이다. 따라서 계루부를 이룬 태조왕이 주몽을 초대 왕으로 추존하면서 실질적인 고구려를 반석에 올린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정말 그의 왕호가 창업 군주답지 않는가?
그렇다면 집안 국내성은 얼마나 번창했을까? 우리는 고구려가 늘 거대한 제국이었다고 교육을 받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국가의 탄생과 멸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에 의해 나라가 망할 당시 고구려 인구는 약 300만 명 내외로 본다. 상당히 큰 인구를 지닌 나라였다. 하지만 1-3세기까지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인구는 15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 그중 1만 명은 왕족과 귀족, 전사들로 직접 생산하지 않고 먹고사는 자들이란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토지가 척박해 자체 생산으로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 자주 전쟁을 일으켰다. 고대의 전쟁이란 영토를 넓힌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주목적은 재물과 인구의 확보였다. 태조왕은 동쪽으로 옥저를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으로 진출했다. 고구려의 성장은 주변 중국 세력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에 3세기 중엽 동천왕 때 중국의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피신하는 일까지 겪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4세기 초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중국의 혼란을 틈타 다시 대외 팽창을 꾀한다. 미천왕 때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하였으며, 중국의 군현 세력인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다.


1. 중국 요녕성 환인현 혼강에서 바라본 오녀산성. 자연적인 암반 위에 산성을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주몽이 거주한 졸본성으로 비정된다.


2. 소를 이용해 쟁기질하는 농부들. 매우 비옥한 흑토에서 양질의 옥수수가 생산된다. 하지만 고구려 때는 지금보다 농업생산력이 턱없이 낮았다.


3. 환인에서 만난 조선족 여인. 잡화점을 운영하는 그녀는 꽤 능숙하게 우리말을 구사했다. 더 들어보니 한국에서 5년간 일했단다.


4. 집안시 국내성의 일부다. 도심에 파묻혀 있다. 그나마 고구려 유적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사정이 나아진 편이라고 한다.

참고논문

이동훈,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18.

공석구, 「4세기 고구려 땅에 살았던 중국계 이주민」,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6.

여호규, 「4세기 고구려의 낙랑 대방 경영과 중국계 망명인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학회, 2008.

정동민, 「4세기 초중반 모용부 전연과 고구려의 유이민 수용-한인 수용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소, 2017.

정호섭, 「고구려사에 있어서의 이주와 디아스포라」, 《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2017.

장창은, 「4세기대 고구려의 국제관계와 이주민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22.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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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르포라이터. 《황해문화》, 《백조》 등에 기고한다.